[291] 디 임팩트 12권 16화
딘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잠시 대화가 끊긴 상태로 걷던 도현은 옆에 지나가는 마차를 응시하다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영주님, 남부 대륙에 가서 영지를 회복한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됐습니까?”
어제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긴 했지만, 주로 도현이 브링틱에서 겪은 이야기들이었다. 딘의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도현은 궁금했지만 영주 딘의 자존심과 관련되어 있는 것 같아서 물어보기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궁금함을 참을 수는 없었다.
“아까부터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이던데, 그 질문이었군.”
딘은 허공을 착잡한 시선으로 올려다봤다.
“실제로 그러려고 했지. 그런데 막상 내가 전에 다스리던 영지에 도착하고 보니 짜증이 나더군.”
“무슨 이유로요?”
“내가 영주로 있던 시절보다 영지민들이 행복해 보였어. 영지전에서 날 밀어낸 그자가 죽은 이후로 그 아들 녀석이 영주직을 이어받았는데, 아주 인물이었던 모양이야. 영지를 아주 잘 통치하고 있더군.”
“영주님도 그만한 통치력은 있잖습니까?”
“있다 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영지전에 패해 떠돌아다닌 지 벌써 십수 년이네. 나를 지지했던 영지민들은 이미 나를 잊은 지 오래고, 지금은 평화를 유지하고 있는 그 녀석을 지지하고 있었네.”
딘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지금 군사를 모아 영주의 성을 공격해도 그들은 나를 더 이상 반기지 않을 거라는 말이지. 이제 그곳은 내 땅이 아니야. 그의 땅이지.”
“그러셨군요. 그럼 예전 영지는 완전히 포기하신 겁니까?”
“그놈이 영지를 개떡으로 만들지 않는 한은 내가 나설 일은 없을 거네.”
선언하듯 딘이 말했다.
“힘내십시오, 영주님. 비록 영지는 없지만 그래도 제겐 여전히 영주님입니다.”
도현은 영지민의 행복을 위해 전쟁을 피한 딘의 결단력에 존경의 마음이 들었다. 자신이라면 대대로 내려온 영지를 쉽게 포기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맙네. 대신, 새로운 영지를 구해 보려고 하네.”
“네? 새로운 영지요?”
“세상은 넓고 넓어. 돌아다니다 보면 영지민들이 몰아내고 싶은 영주들이 있겠지. 그놈을 쫓아내고 그곳에 우리 가문의 깃발을 꽂겠네. 꼭 예전 땅에서 영주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하하!”
유쾌하게 웃던 딘이 손을 들어 상점을 가리켰다.
“저곳으로 가세.”
고급 의복을 파는 상점 한 곳을 정한 딘이 그쪽으로 걸어갔다.
“이 땅을 구입하고 싶다고요?”
관청의 관리가 확인하듯 물었다.
고대 도시와 관련된 업무를 보는 관리는 인기 없는 고대 도시의 귀퉁이 땅을 사려는 사람들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네. 조건이 어떻게 되나?”
브링틱 성에서 여관을 잡아 머리도 다듬고 세련된 옷으로 갈아입은 영주 딘은 우아한 동작으로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그의 곁에는 모자를 깊게 눌러쓴 도현이 호위로 분장해 서 있었다.
관리는 귀티가 흐르는 딘과 없는 듯 있는 듯 서 있는 도현을 번갈아 보다가 책상 서랍에서 서류를 꺼냈다.
잠시 서류를 확인한 그는 딘에게 말했다.
“금화 2만 7천 개입니다.”
“원래 그리 비싼 것인가?”
“본래는 금화 3만 개였습니다. 최근에 원로님들의 지시로 가격이 일부 내려간 것이지요.”
“흠, 그렇군.”
딘은 보석 반지를 낀 손가락으로 콧수염을 훑었다. 보석 반지는 도현이 베일 가문에서 받은 보석함에 들어 있던 물건 중 하나였다. 딘이 잠시만 차자며 도현에게 졸라 손가락에 낀 것이다.
“좋네. 그 가격으로 땅을 매입하겠네. 어떻게 하면 되나?”
“죄송하지만 땅은 돈만 있다 해서 사실 수 없습니다.”
“어째서?”
“원로님들의 뜻입니다. 여기 신청서를 작성하십시오. 원로님들이 이 신청서를 보시고 결정을 내리실 겁니다. 때에 따라선 원로님들과 면담을 하셔야 될 수도 있습니다. 알고 계십시오.”
“번거롭군.”
딘은 관리가 내미는 신청서를 그 자리에서 작성해 되돌려줬다.
“남부 대륙에서 영주셨다고요?”
신청서를 확인하던 관리가 약간 놀라며 물었다.
“험, 그러네.”
“영지 이름은요?”
“그것도 써야 하나?”
“절차입니다, 구입자의 신분을 확인하는.”
“캐버린 영지네.”
“고대 도시에 들어오는 목적은요?”
“발굴.”
“병력은 있습니까?”
관리의 물음에 딘은 뒤에 서 있는 도현을 힐끔 쳐다봤다.
“호위 몇 정도 있고. 나머지는 용병들을 고용해야겠지.”
그 뒤로도 관리는 몇 개의 질문을 더 던진 후 신청서 작성을 마무리했다.
“신청 접수비 금화 1백 개입니다.”
“그런 것도 있나?”
“예, 신청서가 통과되지 못해 땅을 구입하시지 못해도 금화 1백 개는 돌려받으실 수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마음이 바뀌셨다면 신청서는 찢어 버리겠습니다.”
“됐네. 그까짓 금화 1백 개 정도야.”
딘이 큰소리를 치며 도현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도현이 금화 1백 개 상당의 보석을 꺼내 책상에 올려놨다.
“결정은 언제 내려지는가?”
“원로님들의 일정에 따라 결정이 되기 때문에 단정 지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대략 5일 내외로 보시면 됩니다.”
“알겠네. 그럼 그때 다시 오도록 하지.”
딘은 자리에서 일어나 도현을 봤다.
“가자.”
“예.”
도현은 가볍게 대답을 한 후 영주 딘의 뒤를 듬직한 모습으로 뒤따라 나갔다.
그들이 나가자 관리는 신청서를 다시 한 번 훑어봤다.
“별일이군, 이 땅을 사려고 하다니.”
“관리 표정을 보니 땅을 사는 데는 별문제가 없을 것 같군. 기다리면 될 것이네.”
관청을 나선 딘이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영주님.”
“자, 땅도 신청했겠다. 이젠 시간이 남으니 오랜만에 도박장이나 가 볼까?”
“도박장에요?”
“왜? 무슨 문제 있나?”
딘이 천연덕스럽게 도현을 쳐다봤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영주님은 도박에는 소질이 없으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다크캐슬의 도박장에서 딘의 물주 역할을 했던 도현은 당시 상당한 금화를 손해 봤었다.
“내게 도박장은 돈을 목적으로 하는 장소가 아니라네. 소소하게 잔재미를 느끼며 시간을 때우는 곳이지. 자네도 검술에만 너무 몰두하지 말고 즐기며 살게. 즐거움이 없는 삶은 지옥이야.”
“도박장이 아니라 해도 즐거움을 찾을 곳이 많지 않습니까?”
“어디서 말인가?”
“가령, 영주님과 검술 대련을 하면서 말입니다.”
“뭐야?”
딘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됐네, 이 사람아. 누구 좋으라고. 좋은 옷 입고 땀 흘릴 일 있나? 잔말 말고 따라오게. 자네 아버지 복수도 중요하고 씨드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인생은 그때그때의 즐거움이야.”
딘은 도현을 데리고 브링틱 성의 도박장을 찾아 나섰다.
어둑어둑해지는 저녁 공기를 마시며 걷던 딘이 문득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말이네, 거인의 섬을 얼음탑도 노린다고 했었지?”
“예.”
“쉽게 볼 일이 아니야. 실력이 뛰어난 마법사들이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얼음탑을 통해 꾸준히 배출됐으니까 말일세.”
“그들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건 되도록 피하려고 하는데, 잘될지 모르겠습니다.”
거인의 섬 일에 집중해도 씨드를 차지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판에 강한 적이 발톱을 보이고 있다는 건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자칫하면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짐브리오는 위험하지만 아예 그들의 전력을 낮춰 놓으면 어떠냐는 제안도 했다.
거인의 섬을 다녀간 얼음탑 마법사들이 브링틱 어딘가에 모여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들을 찾아내 암살을 하자는 것이다.
가만히 있는 그들을 자극하는 꼴이 될 수도 있어서 도현은 조심스러운 입장이었지만, 극한의 상황으로 치달으면 도현도 생각해 볼 수밖에 없는 카드긴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뜻대로만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인생이 피곤한 것이지.”
탄식하듯 말을 한 딘은 북적이는 인파를 뚫으며 잠시 얘기를 중단했다가 사람이 적어지자 다시 말문을 열었다.
“얼음탑주가 왔으면 정말 상황이 심각해져.”
스므차 성주를 만났을 때도 굽힘이 없던 그가 얼음탑주를 언급할 땐 약간의 긴장감이 엿보였다. 그 점이 도현에겐 놀라웠다.
“얼음탑주에 대해 아시는 게 있습니까?”
“남들은 소문을 들었겠지만 난 그를 직접 가까이서 본 적이 있네.”
“그를요?”
도현이 호기심에 눈을 반짝였다.
“20년은 됐을 거네. 당시 난 부친을 따라 대영주들의 전쟁에 참전을 했었네. 부친은 대영주들의 싸움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지만 작은 영지의 영주란 자리는 외부의 힘에 많이 좌우되거든. 어쩔 수 없이 한쪽을 선택하셨지. 그때만 해도 난 형편없을 정도로 나약한 자였어. 적의 검 앞에 벌벌 떨었지.”
과거를 회상하는 딘의 목소리는 매우 작아서 도현이 집중해야만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밀고 밀리는 팽팽한 전쟁이었네. 그때 지루한 전세를 단번에 바꿀 수 있는 대대적인 기습을 준비했지. 수천 명의 병사들이 수십 척의 배에 나눠 타고 긴 강을 따라 적의 후방으로 이동 중이었네. 그런데 그때 넓은 강이 갑자기 얼어붙기 시작했어.”
“강이 말입니까?”
“그래, 강이. 수십 척의 배는 얼어 버린 강에 갇혀 꼼짝달싹할 수가 없게 되었네. 우리가 당황하고 있을 때 얼음탑주가 나타나 배를 버리고 도망치지 않으면 다 죽을 거라고 경고를 했어. 그는 반대편 대영주를 돕기 위해 나타난 것이었지.”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코웃음 쳤지. 누가 그의 얘기를 귀담아들었겠나? 그때만 해도 그가 얼음탑주인지 아닌지 아는 이도 없었네. 그저 마법사라고만 생각을 했을 뿐이었지. 배에 타고 있던 수천 명의 병사들이 뛰어내려서 얼어붙은 강을 내달려 얼음탑주를 향해 돌진해 갔네. 그때 얼음탑주가 지팡이를 꽂아 세상을 뒤덮는 눈 폭풍을 만들어 냈지. 그것이 한번 휩쓸고 지나가자 강 위에 있던 수천 명의 병사들이 얼어붙어 쓰러졌네. 죽지는 않았지만 창백하게 굳은 얼굴로 몸이 뻣뻣해졌지.”
“영주님께서도.”
“아니, 난 부친과 함께 뒤에 있었네. 그분이 눈치가 빠르시거든. 심상치 않다면서 멋모르고 분위기에 취해 달려가던 나를 낚아채 재빨리 강을 벗어나셨지.”
딘은 도박장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늦추었다.
“얼음탑주가 강을 벗어나며 지팡이를 휘두르자 얼어 있던 강이 원래대로 바람에 출렁이는 강물로 변해 버렸네.”
도현은 강 위에 쓰러져 있던 수천 명의 병사들을 떠올렸다.
“그럼 병사들은…….”
“다 죽었네. 익사를 했지. 그 소름 끼치는 장면을 보고 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네. 마법이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순간 중 하나였거든.”
수십 척의 배가 오갈 정도로 넓고 긴 강을 일시에 얼려 버리려면 얼마나 큰 마법의 힘이 필요할지 도현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카샨이 크샤코 가문의 성에서 보여 준 얼음 폭풍도 상당했는데, 얼음탑주는 차원이 다른 자군.’
도박장을 바라보던 딘이 시선을 돌려 도현을 봤다.
“수천 명이 익사한 강 위의 학살 사건 내막을 사람들은 잘 몰라. 살아남은 사람이 몇 안 되니까 말일세. 얼음탑주는 그런 자일세. 마법도 마법이지만, 심성이 독한 자야. 그런 자가 브링틱에 와서 자네를 상대한다고 가정해 보게. 어깨가 무거워지지 않는가?”
“제가 생각하던 것보다 더 대단한 인물이었군요.”
도현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20년 전에 그랬으니, 지금은 얼마나 더 강해져 있을지 장담할 수 없네. 그가 대륙의 마법사 중 수위에 꼽히는 이유가 다 있는 걸세. 얼음탑주는…… 괴물이야.”
거인의 섬을 다녀온 얼음탑주는 차기 탑주 후보인 베져스와 후투가 공동으로 마련한 집에 머물고 있었다.
정원이 딸린 넓은 저택으로 아름다운 분수대가 정원에 두 개나 있는 곳이었다.
시원한 물줄기가 떨어지는 분수대를 바라보고 있던 카샨은 손가락을 움직여 마법으로 분수대 일부를 부숴 버렸다. 이 집보다 백배는 넓은 궁전 같은 제자의 집을 두고 굳이 이곳에 머무는 탑주의 행동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왜 분수대를 부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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