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 디 임팩트 12권 17화
노마법사 드비오가 가까이 다가왔다.
“저 모습이 더 보기 좋지 않습니까?”
얼굴이 반쯤 부서진 영웅의 모습이 기괴해 보였다. 눈살을 찌푸린 드비오는 마음과 다른 말을 했다.
“나쁘지 않군. 하지만 베져스와 후투가 이 사실을 알면 난리를 칠 걸세.”
“오래된 분수대가 부서지는 건 흔한 일이지요.”
“그렇긴 하지.”
드비오는 분수대 테두리에 엉덩이를 걸쳤다. 분수대의 물방울이 튀어 올라 그의 옆얼굴을 조금씩 적셨다.
하지만 날씨가 더워 그 물방울의 서늘한 감촉이 나쁘지 않았다.
“그 얘기 들었나? 고대 도시에서 사람이 찾아왔다더군.”
“누가 말입니까?”
“플레온 가문의 브링틱 책임자.”
“플레온이면…… 남부 대륙의 대영주 아닙니까?”
“맞아.”
“그쪽 사람이 무슨 일로?”
“듣기론 탑주께서 그를 불러들이셨다더군.”
카샨의 시선이 그들 뒤편에 서 있는 흰색 외관의 3층 저택으로 향했다. 저 안에서 탑주가 외부인을 만나고 있었다.
거인의 섬을 다녀온 여독을 풀며 쉬고 있던 탑주의 의도가 궁금했다.
“내 생각으론 열쇠를 찾는 일에 그들을 동원할 듯싶은데, 자넨 어떻게 생각하나?”
드비오가 넌지시 물었다.
“우리에게까지 마법의 결계를 여는 열쇠에 관해 자세한 설명이 없으셨는데 그런 중요한 일을 외부인에게 맡기겠습니까?”
“흠, 그렇긴 하지. 하지만 시점이 묘하지 않나.”
카샨은 드비오 옆에 앉아 한참을 생각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드비오 님은 열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고대 왕궁이 유력하겠지. 탑주님의 관심이 그곳에 있다는 걸 우리 모두 느끼고 있지 않나?”
카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쩌면 드비오 님의 말씀이 맞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뭐가 말인가?”
“플레온 가문의 사람이 찾아온 이유는 열쇠 때문인 것 같습니다. 고대 왕궁을 발굴하는 데는 적지 않은 인력이 필요하니까요.”
“설마 했는데, 아쉽군. 그런 일은 자네 집안의 사람을 동원해도 될 일이 아닌가? 자네야말로 탑주님의 제자고 그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존재인데.”
드비오가 혀를 찼다.
“아닙니다.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고대 도시에 가문의 병력이 투입되는 걸 다른 두 가문이 반대할 테니까요. 그들은 철저히 고대 도시의 일에 중립을 지키자고 아버지께 압력을 넣고 있습니다.”
“음, 그렇다면야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겠지. 아마 탑주님께서도 씨드 일은 숨기시려 할 테니,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을 걸세.”
대화를 나누던 그들은 거의 동시에 탑주가 있는 흰색 건물을 응시했다.
“안녕하셨습니까, 탑주님.”
얼굴이 거무스름한 강직한 인상의 중년인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인사를 했다.
그는 플레온 가문의 브링틱 책임자 로스였다.
“어서 오게. 기다리고 있었네.”
고풍스러운 의자에 앉아 있던 탑주는 손에 든 찻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참으로 오랜만이로군. 우리가 만난 게 20년이 넘었나?”
“그 정도 된 것 같습니다.”
플레온 가문이 전쟁을 치르던 20년 전, 로스는 젊고 혈기 왕성한 군인이었다. 검술 실력이 뛰어난 그는 적들이 기습을 위해 북상 중이던 강까지 얼음탑주를 수행해 간 적이 있었다.
전선에 집중된 병력들이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북상하는 적들을 막아 내는 임무는 굉장히 중요했다.
대영주가 때마침 지나가는 얼음탑주에게 허리를 숙이며 부탁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지금의 플레온 가문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20년 전의 전쟁이 승리로 끝난 것은 눈앞에 앉아 있는 얼음탑주의 힘이 결정적이었다.
“시간이 빨라, 그 젊던 자네가 이리 나이가 들었다니 말일세. 나는 아직도 또렷이 기억한다네, 혼자서라도 수천 명이 타고 있는 선단을 공격하려 했던 자네의 용맹함을 말이야.”
“탑주님을 믿고 움직이던 풋내 나는 군인이었을 뿐입니다. 부끄럽습니다.”
로스는 마음 깊숙이 얼음탑주를 존경하고 있었다. 그는 믿을 수 없는 마법으로 수천 명의 적들을 일거에 몰살시킨 영웅이었다.
북상하던 적들이 기습을 하려던 곳은 로스의 가족이 대대로 땅을 일구고 살던 곳으로, 얼음탑주가 아니었다면 적들의 검에 가족들이 피를 뿌리고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점 때문에 로스가 탑주를 대하는 마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브링틱 성으로 오라는 얼음탑주의 전언에 두말없이 달려온 이유도 과거의 일이 작용한 것이다.
“가까이 와서 이쪽으로 앉게.”
“예.”
로스는 얼음탑주의 오른편에 있는 의자에 허리를 펴고 앉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딱딱한 모습은 여전하군.”
“그렇습니까?”
강직한 인상의 로스가 어색하게 웃었다. 물끄러미 로스를 바라보던 탑주가 말했다.
“고대 도시 발굴은 잘 이뤄지고 있나?”
“손해는 보지 않고 있습니다. 고대 귀족의 집인지 몰라도 제법 괜찮은 유물들이 나왔습니다. 지금도 발굴 중이고요.”
“자네가 남부 대륙에서 이곳으로 온 이유는 단순히 고대의 유물이나 찾기 위해선 아니겠지?”
탑주가 씨드를 말하는 것임을 눈치챈 로스는 각진 턱을 매만졌다.
“대공께서는 가지 않으면 손해 보는 느낌이라면서 가볍게 다녀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큰 부담 없이 발굴만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베일 가문의 땅에 고대 왕궁이 있다는 소문이 퍼졌을 때는 가슴이 쓰라렸겠지.”
로스는 부인하지 않고 쓴 미소를 지었다.
“이보게 로스.”
“예, 탑주님.”
“곧 고대 왕궁은 내 것이 될 걸세.”
“네에?”
로스가 살짝 놀라며 탑주를 응시했다.
“얼음탑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 고대 왕궁에 많이 있을 것으로 판단을 내렸다네. 그래서 심사숙고해서 이번에 베일 가문의 땅을 우리가 차지하기로 했어.”
로스는 긴장이 됐다. 이런 중요한 말을 자신에게 해 주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고대 도시에 있는 베일 가문 녀석들이야 문제도 아니지만 그 뒤가 문제더군. 로스, 자네가 사람을 데리고 고대 왕궁에 와 줘야겠어.”
“제가 말입니까?”
“싸움은 얼음탑이 할 테니, 자넨 사람들을 지휘해 고대 왕궁을 발굴해 주게. 그 대가로 고대 왕궁에서 나오는 상당 부분을 자네에게 양보하겠네. 씨드도 있다면 그것도 일부분 생각해 주지.”
로스는 손에 땀이 뱄다.
“탑주님, 마음이야 무조건 그 말씀을 따르고 싶지만, 이 일은 대공께 허락을 받아야 될 것 같습니다. 베일 가문과의 관계도 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래야겠지. 하지만 난 대공이 과거의 일을 기억하고 있다면 이런 작은 부탁에 반대하시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네. 내 말이 틀렸나?”
부드럽게 말을 하고 있지만 이야기를 듣는 로스는 부담감이 상당했다.
“대공과 서신을 주고받으려면 상당한 시일이 흐를 거네. 하지만 난 그 전에 발굴을 빠르게 완료시키고 싶네. 용병들을 고용하고 싶어도 악명 높은 얼음탑 마법사들이 들끓는 그 땅에 용병들이 겁이 나서 오겠나?”
“악명이라니요. 누가 감히 그런 말을.”
“나도 듣는 귀가 있어.”
탑주는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분수대에 앉아 있는 제자와 드비오가 보였다. 그들을 잠시 눈여겨보던 탑주는 몸을 돌려 로스를 봤다.
“어떻게 하겠나? 날 도와주겠나?”
수십 개의 돌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웅장한 원로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서른두 개의 계단을 거쳐야만 한다.
밑에서부터 대리석 계단을 오르던 튜샨 가문의 원로 베노아는 중간에 숨이 찬지 계단에 서서 숨을 돌렸다.
그는 품에서 환각 성분이 있는 가루를 코에 넣고는 킁킁댔다. 무거웠던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다시 힘을 내 높은 계단을 오른 그는 원로관 입구를 지키는 수십여 명의 병사들을 지나쳐 원형 탁자가 있는 회의실로 들어갔다.
안에는 크샤코 가문의 원로 올라르와 볼란벤 가문의 원로 히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미안합니다. 일이 좀 있어서 늦었습니다.”
화려한 의자에 몸을 묻은 그는 기다리고 있던 두 원로들에게 가볍게 사과를 했다.
“별말씀을. 회의를 시작합시다.”
올라르가 탁자에 준비된 브링틱의 현안이 적힌 종이를 보며 말했다. 그들은 짧은 시간 동안 관청에서 올라온 보고서에 몇 가지 의견을 덧붙여 통과를 시켰다.
마지막으로 남은 건 이틀 전 딘이 신청한 고대 도시 건 이었다.
“누가 그 땅을 산다는 겁니까?”
계단을 오르며 흡입한 환각제에 정신이 몽롱해져 있던 베노아가 올라르를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방금 말하지 않았습니까. 남부 대륙의 영주 출신, 딘이란 자라고요.”
“아, 그래요?”
마치 처음 듣는다는 반응을 보인 베노아는 몸을 좌우로 흔들며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이상하군, 영주 자리에서 쫓겨난 자라면 돈이 별로 없을 텐데 발굴을 하겠다니. 나 같으면 그 돈으로 영지를 되찾을 궁리를 하겠는데.”
“포기했나 보지요.”
손톱을 다듬던 히반이 그러려니 하는 말투로 대꾸했다.
히반은 싸움에 능한 강한 전사였지만 나이가 들면 들수록 외모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버릇이 생겼다. 원로 회의 때마다 손톱을 다듬는 것도 습관이었다.
올라르는 약에 취하고 손톱을 다듬는 두 원로들을 한심스럽다는 눈빛으로 둘러보았다.
“그 땅을 딘이란 자에게 파는 데 이의 없다면 그대로 통과시키겠소.”
“잠시만.”
약에 취해 있는 베노아가 또다시 손을 들었다.
“원로원으로 그를 불러 만나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를요? 왜 그래야 합니까?”
손톱을 다듬던 히반이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그동안 그 땅에 관심을 가진 자들이 없었는데 몰락한 영주가 찾아와 발굴을 하겠다고 하니 호기심이 생겨서 말입니다. 여러분은 궁금하지 않습니까, 어떤 자인지?”
“그냥 통과시킵시다. 작은 일에 우리가 신경 쓸 필요가 있겠습니까? 고대 도시에 많은 세력들이 들어온 이상, 그 작은 땅에 누가 들어오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히반의 말에 베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렇군요. 사실 나도 꼭 만나고 싶은 마음은 없었습니다.”
바람에 부는 갈대처럼 마음이 금세 바뀐 베노아는 회의를 주도하고 있는 올라르에게 손짓을 했다.
“그대로 갑시다.”
“그럼 원로들의 의견을 따라 고대 도시의 땅을 딘에게 파는 걸로 하겠소.”
안건을 모두 처리한 올라르는 밖에서 대기 중이던 관청의 관리를 불러 결정된 내용을 통보하고 시행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관리가 물러나자 회의실에 모여 있던 세 원로들이 자리에서 하나둘 일어났다.
막 회의실을 나가려는 올라르에게 히반이 물었다.
“얼음탑주가 북쪽 미개척 지역을 다녀왔다는 보고가 내게 올라왔습니다. 어딜 다녀왔는지 아십니까?”
“오, 나도 궁금했었는데 원로께서 먼저 물어보시는군요.”
약이 어느 정도 깨서 정신이 맑아졌는지 베노아가 어눌한 말투가 아닌 또렷한 어조로 말을 했다.
회의실을 나가려던 올라르는 몸을 돌려 앞에 서 있는 히반과 베노아를 봤다.
“그걸 왜 내게 묻는 겁니까?”
“그야 당신 아들인 카샨이 얼음탑주의 제자니까요. 가까운 사이니 알 게 아닙니까?”
히반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나도 탑주가 어디를 다녀왔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럴 리가요. 카샨이 말해 주지 않았단 말이오?”
“카샨은 내 아들이지만 동시에 얼음탑 사람입니다. 필요한 말만 하고 얼음탑 내부 일은 내게도 말해 주지 않아요.”
선을 긋는 그의 말에 히반과 베노아가 시선을 교환했다.
명성이 높은 얼음탑주가 수십여 명의 마법사들을 이끌고 북쪽 미개척 지역에 다녀왔다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들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원로관을 나선 올라르는 계단 위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장남인 카심이 그를 찾아와 얼음탑주가 어디를 다녀왔는지 상세히 보고했다. 두 원로들에게는 거짓말을 한 것이다. 차후에 이 사실이 밝혀지면 그를 향한 두 가문의 비난과 적의를 감당해야만 한다.
신뢰가 깨질 수 있는 중요한 일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속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가문을 이끌고 갈 장남 카심과 차남 카샨 때문이었다.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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