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 디 임팩트 12권 19화
“그럴 리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탑주님.”
“아니야, 그러지 않고는 감히 내 앞에서 이런 말을 늘어놓지 않았겠지.”
탑주는 가까이 앉아 있는 샤비엔다를 시작으로 남은 네 명의 얼굴을 쭉 둘러봤다.
제자인 카샨은 그의 날카로운 시선을 회피했다.
“좋아, 궁금증을 풀어 주지. 그렇지 않아도 자네들에게 설명을 해 주려고 했으니까.”
“죄송합니다, 탑주님. 내일 베일 가문을 치는데 그 목적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불쾌하셨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샤비엔다가 말끝을 흐렸다.
“괜찮네. 내가 말하고 싶지 않았다면 자네들이 이리 몰려와도 아무 소용이 없었을 테니까. 오히려 이 중에 한두 명은 내 손에 죽어 나갔겠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탑주의 회색 눈동자를 누구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다들 잘 들어라. 고대 왕궁을 차지하려는 건 마법의 결계를 푸는 열쇠가 그곳에 있다는 기록 때문이다.”
긴장감이 맴도는 회의 탁자 주변으로 탑주의 음성이 낮게 퍼져 갔다.
“거인의 섬에 관한 기록이 사실인 걸 보면, 열쇠가 그곳에 있다는 기록도 진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우리는 고대 왕궁을 차지해 열쇠를 찾는다.”
“탑주님, 열쇠는 어떤 형태입니까?”
드비오가 용감하게 물었다. 모두들 궁금한 시선으로 탑주를 응시했다. 잠시 말이 없던 탑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따라 놓았던 술잔을 들고 돌아왔다.
술을 한 모금한 그가 천천히 답했다.
“열쇠는 지팡이다. 거인을 부활시키고 마법의 결계를 만든 고대의 대마법사 론이 사용하던 지팡이. 고대인들은 ‘론의 지팡이’라고 불렀지.”
지팡이가 열쇠라는 말에 모두의 눈빛이 반짝였다.
“이제 그만 물러가도록 해.”
탑주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긴장해 있던 다섯 명도 일제히 일어났다.
그때 밖으로 나가려던 베져스가 머뭇거리며 몸을 돌렸다.
“저어, 탑주님, 내일 말입니다. 굳이 탑주님께서 친히 싸움에 개입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희들이 가도 충분할 텐데요.”
“그의 말이 맞습니다. 탑주님은 나중에 천천히 오셔도 될 것 같습니다.”
베져스의 말에 후투가 동조하고 나섰다.
“베일 가문에서 고용한 용병이 아주 강하다고 하던데.”
탑주도 들은 얘기가 있었다.
“강해도 제깟 놈이 뭘 어쩌겠습니까? 저희들에게 맡겨 주십시오. 안 그렇소, 샤비엔다?”
베져스와 후투가 동의를 구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자 샤비엔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탑주님, 내일 일은 저희들에게 맡겨 주시지요.”
얼음탑주는 차기 탑주 후보들을 둘러봤다. 각자 성취를 이룬 뛰어난 마법사들이었다. 자신의 제자를 포함한 이 다섯 명이면 고대 도시에서 이름을 날린다는 젊은 용병 하나쯤은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았다.
생각은 길지 않았다.
“자네들에게 맡기지.”
도현과 일행은 신전 지역의 발굴을 길게 보지 않았다. 락제프의 도움으로 신전이 있는 위치를 거의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길어야 두 달이야. 그 안에 모든 게 끝이 날 거다.”
방벽이 세워지는 곳을 지나며 짐브리오가 말했다. 용병들과 일행이 머물 숙소는 완성됐고, 오늘부터는 방벽 세우기였다.
당장 발굴을 시작하면 좋겠지만 모든 일은 순서가 있는 법이다. 방벽은 외부의 적을 막는 효과도 있었지만, 내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감추는 효과도 있었다. 외부의 시선을 차단하는 가림막으로라도 방벽은 필요했다.
“며칠 뒤에는 발굴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을 거야.”
“잘됐군요.”
도현은 방벽을 세우는 데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 일꾼용 몬스터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짐브리오, 케일 경을 만나고 와야겠습니다.”
“그래, 가 봐. 남은 돈을 받기 전까지는 그쪽 일에 관심을 기울여 주는 척이라도 해야겠지.”
짐브리오는 반돌로로부터 받아야 할 잔금을 떠올리며 손짓을 했다.
베일 가문의 땅은 도현의 땅과 많이 떨어진 곳이었다. 도현이 도착했을 때는 해가 많이 기울고 있었다.
“누구냐!”
병사들의 제지에 도현은 두건으로 가리고 있던 얼굴을 보여 줬다.
도현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던 베일 가문의 병사들은 육중한 정문을 열어 그가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뱃길이 열렸으니 베일 가문의 병력이 더 들어오겠지.’
주변을 둘러보며 안으로 들어간 도현은 케일 경이 발굴장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상당히 깊이 들어갔군.’
그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깊이 3미터 정도였는데, 지금은 얼추 10미터는 되는 것 같았다.
축구장 서너 개 면적을 동시에 파며 발생한 흙과 돌을 지상으로 옮기는 경사로에는 일꾼용 몬스터가 끄는 수레뿐만 아니라 말과 황소도 투입돼서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지하 발굴 현장을 둘러보고 있던 반돌로와 케일 경은 부관이 지상을 가리키자 고개를 돌려 위를 올려다봤다.
도현이 팔짱을 끼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반돌로와 케일 경은 함께 지상으로 올라와 도현 앞에 섰다.
“안녕하셨습니까. 별일 없으시죠.”
“어디에 있다가 지금에야 오는 건가? 좀 자주 들르게나.”
케일 경은 열흘이 넘어 나타난 도현에게 한 소리 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일은 없지만 자네가 보고 싶어서 말이야, 하하하.”
케일 경은 기분 좋게 웃으며 반돌로를 돌아봤다.
“모처럼 같이 술이나 한잔하시는 게 어떻소?”
스스럼없는 케일 경과 달리 반돌로는 도현과 술자리를 거의 하지 않았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케일 경의 제안에도 한동안 말없이 도현의 얼굴만을 쳐다보던 반돌로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자네 시간이 되나? 우리에게 받아 간 돈을 쓰기 바쁠 것 같은데.”
“술 마실 시간은 있을 것 같군요.”
“그럼 같이 술 한잔하세.”
반돌로는 그 말을 하고는 앞서서 걸어갔다.
“저 사람 마음이 좀 풀린 것 같군. 도현, 그거 아는가?”
“뭘 말입니까?”
케일 경과 나란히 걸어가던 도현이 물었다.
“반돌로에게는 시집을 안 간 딸이 한 명 있어. 아주 아름답지. 반돌로는 그 딸의 남편감으로 자넬 생각하고 있네.”
“예?”
놀란 도현이 걸음을 멈추며 입을 딱 벌렸다. 그의 시선에 저만치 앞서가는 반돌로의 등이 보였다.
“설마요. 그는 절 싫어하고 있는데요.”
“깊이 파고들면 또 그렇지가 않아. 결혼 안 한 젊은 사람 중에 자네 같은 실력자가 대륙에 얼마나 있겠나? 자넬 사위로 두면 반돌로의 위세는 하늘 높이 치솟을걸.”
도현은 이계에서의 결혼은 꿈도 꾸지 않고 있었다. 지구에 있는 홍영이 알면 거품을 물 것이다.
당장 로나만 하더라도 홍영이 은근히 신경 쓰는 것 같아서 말 꺼내기가 두려웠는데 결혼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반돌로가 결혼 이야기를 꺼내면 자넨 어쩔 텐가?”
케일 경이 웃으며 물었다.
“안 된다고 해야죠.”
“반돌로도 명문가의 사람이야. 생각은 해 볼 만하지.”
“전 결혼할 사람이 있습니다.”
“오, 그래? 그래도 상관없지. 아내가 꼭 한 명일 필요는 없으니까.”
“술자리를 가지자고 한 이유가 혹시 이 일과 관련이 있습니까?”
도현이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케일 경을 바라봤다.
“그건 아닐세. 별 뜻 없는 자리야.”
“거듭 말씀드리지만 전 반돌로 경의 따님과는 어떻게 해 볼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단정 짓지 말고 여지를 남겨 두게. 그녀의 미모에 자네의 마음이 흔들릴 수도 있으니까.”
“그녀를 볼 기회나 있겠습니까?”
“뱃길이 열렸네. 연락하면 금방이라도 올걸, 하하하!”
케일 경은 무엇이 즐거운지 도현의 붉어진 얼굴을 보며 껄껄댔다.
사각 탁자에 둘러앉은 도현과 케일 경, 반돌로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장소는 반돌로의 방 안이었다. 도현은 매번 지휘소에서 반돌로를 만났기 때문에 그의 방은 생소했다.
“케일 경에게 듣기론 결혼을 안 했다고?”
술자리의 어색함이 사라질 때쯤, 반돌로가 넌지시 말했다.
술잔을 입에 가져가던 도현은 멈칫했다.
그의 눈은 옆자리에 앉은 케일 경에게 쏠렸다. 그는 아니라고 했지만 술자리에서 반돌로가 결혼 이야기를 꺼낼 거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결혼을 안 했다면 내 딸을 소개시켜 주고 싶네.”
반돌로는 말을 빙빙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평소 도현을 멀리한 것치고는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제안이었다.
도현은 술잔을 내려놓고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반돌로를 응시했다. 딱 부러지게 결혼할 마음이 없다고 거절하려 했지만 반돌로의 위신을 생각하면 끝까지 그의 이야기를 들어 본 다음 거절하는 게 수순인 것 같았다.
“내 딸은 베일 가문의 영지 내에서도 미모가 뛰어나기로 소문난 아이일세. 머리도 총명하고. 자네에게 부족함이 없다고 자부할 수 있네.”
“제가 사윗감으로 마음에 드십니까?”
“떠돌이 용병에게 내 딸을 주는 건 아깝지만, 그 아이는 입버릇처럼 강한 남자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으니 그 아이에게는 잘된 일이겠지.”
반돌로는 술을 마시면서도 자세가 반듯한 도현을 깊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떠돌이 용병이라고 평가절하를 했지만 실제로는 도현의 검술 솜씨와 그가 연합 세력을 와해시킬 때 보여 줬던 과감함과 결단력은 아주 인상 깊었다.
‘언젠가 큰 인물이 될 거야.’
젊은 나이에 상대가 드물 정도로 강하니 미래가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까이 두고 싶은 욕심이 안 생길 수가 없었다.
다만, 케일 경이 싸고돌아서 그와의 관계가 조금 미심쩍었는데, 가만히 지켜보니 특별한 관계는 아닌 것 같았다.
“자네가 생각이 있다면 내 딸을 이쪽으로 불러서 만나게 해 줄 수도 있네. 만나 보겠나?”
도현은 고민하는 척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말씀은 고맙지만 전 결혼할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인가?”
반돌로는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먼 곳에 있지만 한시도 그녈 잊어 본 적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반돌로 경.”
“그래도 내 딸을 만나 보면 마음이 바뀔 텐데…… 후회하지 않겠나?”
미련이 남았는지 반돌로는 도현을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도현은 마음이 가지 않았다.
그가 재차 거절의 말을 하려는 순간, 어디선가 큰 폭음이 들려왔다.
술자리에 모여 있던 도현과 반돌로, 케일 경이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곧이어 밖에서 적의 침입을 알리는 종소리가 급박하게 들려왔다. 방벽 한 곳이 무너졌다는 비상 신호였다.
“설마 뤼호른 녀석들이 또 쳐들어온 건가?”
케일 경이 미간을 좁혔다. 뱃길이 열렸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말이었다.
반돌로와 케일 경은 지체 없이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도현 역시 어찌 된 상황인지 파악하기 위해 그들을 따라 나갔다.
방벽이 얼어 균열이 일어나며 주저앉은 자리에 수십여 명의 얼음탑 마법사들이 들이닥쳤다. 그 선두엔 카샨을 비롯한 샤비엔다, 베져스, 후투, 드비오가 있었다.
“귀찮은 녀석들.”
주변 방벽 위에서 쏟아지는 화살 공격에 짜증이 났는지 베져스가 손짓을 했다. 그러자 허공에 직경 2미터가 넘는 거대한 원반 모양의 얼음 톱날이 생성됐다.
“시간 끌지 말고 덤비는 녀석들은 다 없애 버립시다. 그래야 우리의 무서움을 알고 추후에 덤비지 않지.”
말과 함께 베져스가 원반 모양의 얼음 톱날을 날렸다.
무너지지 않은 방벽의 왼쪽에서 경비를 서던 병사들 수십여 명의 몸이 일순간 얼음 톱날에 잘려 나갔다. 하지만 피가 흘러나오지는 않았다. 순간적으로 상처 부위가 얼어붙은 것이다.
“크아아악!”
“커헉!”
팔다리가 잘리며 냉기로 몸이 마비된 병사들이 방벽 위에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오른쪽은 내가 처리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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