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 디 임팩트 12권 20화
베져스와 늘 붙어 다니는 후투의 손에서 기다란 얼음 창이 생성됐다.
길이만 해도 4미터 가까운 얼음 창은 그의 손에서 날아가 오른편 방벽 위에서 화살을 쏘아 대는 궁수들을 일거에 휩쓸어 버렸다.
콰아앙!
불꽃 대신 얼음 파편이 사방으로 퍼지며 방벽 위를 달려오던 병사들까지 한 번에 쓸어버렸다.
쩌저저저적.
얼음 창의 파편에 맞은 자들은 몸에 구멍이 나 즉사를 하거나 아니면 냉기에 몸이 굳어 숨을 쉬기 곤란한 고통을 받다 심장이 멈추며 죽어 갔다.
그들이 침입한 방벽 일대가 고요해졌다.
단번에 백여 명 가까운 병사들을 몰살시킨 그들은 불빛이 몰려 있는 베일 가문의 진영 중심부를 향해 천천히 접근했다. 마치 과거 도현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덤비는 자들을 모두 죽이고 있었다.
“막아라!”
비상시를 대비해 늘 대기 중이던 중무장한 수십여 명의 정예 병사들이 훈련받은 대로 무너진 방벽을 지원하기 위해 달려 나갔다.
그들이 성난 파도처럼 밀려오자 샤비엔다가 손을 휘저었다. 그녀 발밑에서 튀어나온 수십 가닥의 얼음 사슬들이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병사들의 몸을 휘감아 버렸다. 그들의 몸이 일제히 하늘로 솟구쳤다.
“꼼짝할 수가 없어!”
“몸에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크아악!”
달빛이 강한 밤하늘에 수십여 명이 둥둥 떠 있는 모습은 괴기스럽기까지 했다.
쩌어엉.
샤비엔다의 막강한 마법에 정예 병사들은 갑옷과 함께 얼음 조각이 되어 공중에서부터 사방으로 흩어졌다.
주변으로 모여들던 수백 명의 병사들은 그 장면을 목격하고는 몸이 굳어졌다. 전장에서 단련된 베일 가문의 병사들이었지만, 저런 충격적인 모습은 처음이었다.
“얼음탑 마법사들이다!”
누군가 크게 외쳤다.
그들이 주춤거리는 사이에 차기 탑주 후보들 뒤에 늘어서 있던 수십 명의 마법사들이 기습적으로 얼음 화살을 날렸다. 피하지 못한 병사들과 용병들이 픽픽 쓰러져 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베일 가문의 병력이 방패로 앞을 막으며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충격에서 벗어난 그들은 전열을 맞추며 지휘관이 올 동안 시간을 벌려 했다.
하지만 얼음 화살에 맞은 방패는 급속도로 차가워져서 오래 들 수가 없었다. 방패가 떨어지면 그 자리에 마법사들이 날린 또 다른 얼음 화살이 날아와 선두의 병력들을 제거해 나갔다.
아군이 불화살을 비롯해 화살 비로 대응을 했지만 샤비엔다가 거대한 얼음 막으로 전체 얼음탑 마법사들을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떠한 화살 공격도 효과가 없었다.
“기름통을 굴리고 불을 붙여라!”
병력들 사이를 뚫고 앞으로 달려 나온 케일 경이 바닥에 떨어진 방패를 발로 걷어차 얼음 화살 몇 개를 막아 내며 급히 외쳤다.
마침 근처에는 야간 발굴을 위해 준비해 둔 수십 개의 기름통이 쌓여 있었다.
병사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앞으로 옮겨진 기름통을 도끼로 구멍을 낸 뒤 힘껏 전방으로 밀어 버렸다.
수십 개의 기름통이 기름을 흘리며 데굴데굴 굴러갈 때 케일 경이 외쳤다.
“불화살 발사!”
수십 발의 불화살이 정확히 기름통에 적중했다.
콰콰쾅! 쿠쿠쿵!
시커먼 연기와 함께 기름통이 폭발했다.
접근하던 얼음탑 마법사들이 주춤했다.
가로로 백여 미터에 가까운 긴 불길이 생겼다. 그 불길 앞에 도현과 반돌로, 케일 경, 세 명의 용병단장들이 섰다. 그들 뒤로는 병력들이 계속 증원되고 있었다.
‘얼음탑.’
도현은 넘실거리는 불길 너머로 보이는 몇몇 얼굴들이 아주 낯이 익었다. 카샨도 있었고, 숲에서 본 노마법사들도 보였다.
‘저들이 왜 이곳을 공격한 거지? 고대 왕궁이 탐이 난 건가? 거인의 섬 일에 치중할 줄 알았는데.’
도현이 저들의 면면을 훑어볼 때, 반돌로가 분노한 표정으로 고함을 질렀다.
“얼음탑 마법사들 같은데 왜 이런 짓을 벌이는 거요! 베일 가문과 당신들은 원한이 없는데!”
“보면 모르겠나? 이 땅이 필요해서지.”
베져스가 말했다.
“뭐라?”
“떠나라! 그럼 목숨은 건질 것이다!”
베져스가 음산한 눈빛을 발산하며 외쳤다.
“네놈들이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반돌로가 눈을 부릅뜨며 검을 뽑았다. 얼음탑 마법사들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들인지 그도 알고는 있지만, 물러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게 있었다.
지금이 그랬다.
여기서 목숨이 아까워 도망간다면 베일 가문의 명예는 곤두박질치고 영지에 있는 그의 식솔들은 대공에 의해 한 명도 남김없이 목숨을 잃을 것이다. 병사들도 마찬가지 신세였다.
“잠시 시간을 주마! 자비를 베푸는 마지막 순간이니 후회할 선택은 하지 마라!”
베져스의 차가운 목소리가 불길 너머에서 들려왔다.
얼음탑 마법사들을 노려보던 반돌로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케일 경, 저 마법사들 중에 아는 자들이 있습니까?”
“음, 다른 자들은 모르겠고 저기 백발의 여마법사가 누군지는 알고 있소. 샤비엔다란 마법사인데, 얼음탑을 위해선 물불을 가리지 않는 여자요. 마법도 뛰어나서 상대하기 정말 어려운 존재지. 하아, 저 악마 같은 여자가 여길 찾아오다니.”
“도현이 상대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까?”
“글쎄…….”
케일 경은 말끝을 흐리며 옆에 서 있는 도현을 힐끔 쳐다봤다.
“그건 싸워 봐야겠지.”
사기를 떨어트리고 싶지 않았지만, 케일 경은 도현의 승리를 확실히 점칠 수 없었다.
“도현, 지는 싸움도 해야 한다는 걸 아나?”
반돌로가 검을 힘주어 잡으며 말했다.
“지는 싸움이라. 전 이기기 위해 싸웁니다. 그런 목표도, 의지도 없다면 왜 싸우겠습니까?”
도현의 강렬한 눈빛은 불길보다 더 뜨겁게 타올랐다. 그는 이미 마음속으로 결전을 준비 중이었다. 반돌로와 케일 경이 이곳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얼음탑은 언제고 부딪칠 상대.’
도현은 허리에 검을 부드럽게 뽑아 손에 쥐었다. 그의 기세에 불길이 ‘훅’ 하고 밀려났다.
“하지만 두 분께 감히 말씀드리자면, 일단 뒤로 물러나 후일을 도모하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그러시지 않겠죠?”
“당연한 말.”
케일 경이 허리에 걸어 둔 투구를 머리에 썼다. 투구 사이로 보이는 그의 눈빛이 파랗게 빛났다.
“우리는 여기서 물러날 수 없어.”
“그렇다면 전 제 역할을 다하겠습니다.”
도현이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불길 너머에 보이는 샤비엔다와 베져스, 후투, 드비오, 카샨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도현의 시선을 접한 그들은 모두들 공통된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저놈이 소문의 그 용병이구나!’
왠지 모를 섬뜩함을 전하는 도현의 눈빛은 그 뒤로도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싸움이 벌어지면 널 잡으러 가겠다.’라고 경고를 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베져스, 저놈은 우리 둘이 잡으시다.”
후투의 말에 베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오.”
카샨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코웃음을 쳤다.
‘내가 생각하는 그가 맞는다면 너희들이 그를 이기긴 쉽지 않을 거다.’
카샨은 도현이 외모는 다르지만 풍기는 느낌을 보고는 성에 침입해 죄수들을 탈옥시켜 도주한 그 검사라고 생각했다.
‘죄수들을 보호하며 도망가는 그를 내가 온갖 노력을 해도 잡지 못했다. 너희들은 저자가 얼마나 강한지 직접 겪어 봐야 해.’
카샨은 자신을 위하는 척하면서도 브링틱인이라고 은근히 무시하는 베져스와 후투가 이 기회에 아예 재기 불능의 부상이라도 입었으면 했다.
그의 시선이 옆에 있는 드비오와 은밀히 엉켰다. 드비오 역시 이번 싸움에서 베져스와 후투가 잘못되길 바라는 눈치였다.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끄덕일 때, 샤비엔다가 말했다.
“이쯤 기다려 줬으면 충분한 것 같군. 공격합시다.”
그녀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다 됐다! 죽고 싶다면 모두 죽여 주지!”
샤비엔다가 지팡이로 바닥을 내려찍자 수십 개의 얼음 사슬이 나타나 허공에서 합쳐지더니 거대한 얼음 기둥이 되었다.
그것이 빠르게 날아가 불길 위에 떨어졌다.
치이이이이.
불길이 순식간에 잡혔다.
그 순간, 베일 가문의 진영에서 번쩍이는 검 한 자루가 날아와 샤비엔다의 목을 노렸다.
깜짝 놀란 샤비엔다가 손을 휘저었다.
닿기만 하면 얼어붙는 얼음 안개가 자욱하게 퍼졌다. 검이 안개에 닿으면 즉시 얼어붙어 땅으로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도현이 날린 비검은 움직이는 검이었다. 달빛을 받아 뿌옇게 반짝이는 얼음 안개를 회피해 허공으로 급상승하더니 방향을 바꿔 베져스의 턱수염을 잘라 버렸다.
가슴이 서늘해진 베져스가 놀라고 있을 때, 뒤에서 비명이 계속 들려왔다.
베져스의 수염을 자른 도현의 비검이 일반 마법사들 무리에 난입해 마치 사람이 검을 휘두르는 것처럼 그들을 베어 버린 것이다.
조금 전, 베일 가문의 병력들을 신나게 죽이던 마법사들이 공포에 질려 죽어 갔다.
열 명 이상을 베어 버린 도현의 검은 밤하늘을 날아서 그의 손안으로 돌아갔다.
“여기서 누가 죽고 누가 사는지 끝까지 가 보자!”
내공이 실린 도현의 웅혼한 고함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도현이 양손에 검을 들고 달려가자 반돌로와 케일 경, 용변단장들도 일제히 앞으로 돌진했다.
“와아아아!”
그들의 뒤를 천여 명이 넘는 병력들이 필사의 각오로 따랐다.
도현을 중심으로 한 그 기세가 자못 대단해서 얼음탑 마법사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샤비엔다, 저 미친 녀석은 우리에게 맡겨 두고 싹 쓸어버리시오! 가세, 후투!”
수염이 잘린 베져스는 모멸감에 몸을 떨다가 박쥐처럼 몸을 날렸다. 그의 목표는 맨 앞에서 달려오는 도현이었다.
“조각조각 내 죽여 주마, 이놈!”
그가 지팡이를 흔들자 허공에 수없이 많은 밤송이 모양의 얼음 덩어리가 생성돼 도현에게 쏟아져 내렸다.
피피피핑핑.
탁구공만 한 그것들은 도현이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하늘에서 일직선으로 계속 떨어져 내렸다. 맞으면 전신이 얼어 버릴 만큼 강한 마법이 서린 공격이었다.
쩌적. 쩌저저적.
도현이 피한 자리에 떨어진 얼음덩어리들이 주변 땅을 서리가 내린 것처럼 하얗게 얼리며 섬뜩한 소리를 냈다.
가볍고 빠른 몸놀림으로 하늘의 얼음덩어리들을 모조리 피해 버린 도현은 눈앞에 바로 보일 정도로 가까워진 베져스를 노려봤다.
그가 막 검을 휘두르려는 찰나, 옆에서 얼음 창이 날아왔다. 후투가 날린 것이다.
몸을 앞으로 굴려 얼음 창을 간발의 차로 피한 도현이 일어서며 검을 횡으로 가볍게 그었다.
동작은 가벼웠지만 베져스는 세상이 둘로 나뉘는 기이한 경험을 하며 몸이 절로 굳어졌다.
피해야 하는데 숨이 탁 막히며 꼼짝할 수가 없었다. 평생 겪어 보지 못한 악몽 같은 순간이었다.
‘검을 피할 수가 없다!’
도현이 별거 아닌 듯 횡으로 그은 검 속엔 그가 20여 년간 닦아 온 검의 오의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뿐 아니라 어마어마한 내공의 힘도 숨겨져 있었다.
도현은 처음부터 강수를 둔 것이다.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야. 내가 시간을 끌수록 아군이 죽어 간다.’
작정을 한 도현은 상대가 준비를 하기 전에 처음부터 결정타를 날린 셈이었다.
베져스는 강력한 마법들을 많이 알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마법으로 몸이 굳어진 것도 아닌데 다가오는 검을 보며 움직일 수 없는 이 현상을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끝이다!’
마음속으로 비명을 지르는데, 후투의 지팡이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콰아앙!
큰 폭음과 함께 후투가 피투성이로 변해 뒤로 튕겨져 나갔다. 그가 들고 있던 지팡이는 박살이 나서 땅에 구르고 있었다.
베져스 또한 폭발의 여파로 뒤로 밀려났다. 하지만 후투만큼 몸이 다치지는 않았다.
“아쉽군, 한 명은 끝낼 상황이었는데.”
도현은 피투성이로 변했지만 빠르게 일어나 싸울 준비를 하는 후투를 보며 눈빛이 깊어졌다. 목표로 한 베져스는 아예 큰 부상도 입지 않았다.
“죽여 버리겠다!”
형제처럼 다니는 후투가 부상을 입자 베져스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동시에 조금 전 도현의 공격에 무력하게 서 있었던 자신의 나약한 모습이 떠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주변의 동료들이 이쪽을 보며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일그러진 얼굴로 베져스가 괴성을 지르며 지팡이를 땅에 꽂으려 했다.
“당신 편하게 놔두지는 않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