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 디 임팩트 12권 21화
도현의 몸이 순간적으로 사라진다 싶더니 어느새 지팡이를 가지고 뭔가를 하려던 베져스의 옆에 나타났다.
번쩍이는 검광이 베져스의 몸을 좌우로 훑고 지나갔다. 비명과 피 대신 모래 같은 얼음 알갱이들이 땅바닥으로 쏟아졌다.
굳은 표정으로 도현이 뒤를 돌아봤다. 실제 베져스는 부상당한 후투 옆에 서 있었다.
“진짜 싸움은 지금부터다, 이놈!”
도현은 베져스와 후투가 만든 얼음의 여신과 눈이 마주쳤다. 리타가 소환한 어둠의 전사 비골과 비슷한 크기의 그녀는 한 손엔 후투의 얼음 창을, 다른 한 손에 베져스의 얼음 원반을 방패처럼 들고 있었다.
투명한 얼음 눈으로 도현을 내려다보던 얼음의 여신은 도현의 심장을 향해 얼음 창을 번개처럼 찔렀다.
마법사들
샤비엔다는 몰려오는 적들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베져스와 후투가 마법으로 만든 얼음의 여신을 이용해 도현을 상대하려 하고 있었다.
‘한심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두 사람이 용병 하나를 두고 쩔쩔매고 있다니.’
그녀는 부상을 입은 후투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다가 시선을 다시 전면으로 향했다.
천여 명이 넘는 적들이 밀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허공에 들어 올렸던 지팡이를 땅에 힘껏 꽂았다.
눈부신 빛이 그녀의 지팡이 머리에서 뿜어져 나오더니 밤하늘로 올라갔다.
“얼음탑에 대항하는 자들은 오직 죽음뿐이다!”
밤하늘에 얼음 운석이 나타나 지상으로 낙하했다.
“모두 넓게 퍼져라!”
검을 빼 들고 달려오던 케일 경이 목이 터져라 크게 외쳤다.
콰아아앙! 쿠쿠쿠쿵쿵.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흔들렸다. 얼음 운석이 땅과 충돌해 폭발하자 주변에 있던 수십여 명의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샤비엔다의 지팡이에서 빛이 나와 밤하늘을 때릴 때마다 그곳에서 생성된 얼음 운석이 베일 가문 병사들의 머리 위로 쏜살처럼 낙하했다.
흩어지긴 했지만 병사들의 밀집도가 워낙 높아서 그 피해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분노한 케일 경이 이를 갈며 샤비엔다를 향해 달려갈 때, 그보다 앞서 세 명의 용병단장들이 살기를 띠며 그녀를 향해 돌진해 갔다.
“케일 경, 저년은 우리에게 맡겨 두시오!”
“죽어라, 마녀야!”
용병단장들의 눈에는 샤비엔다가 마법사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살육을 즐기는 마녀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세 명의 용병단장들은 마나를 주입한 무기로 샤비엔다를 합공하려 했다.
“흥, 가소로운 것들!”
얼음 운석으로 수백 명을 쓰러트린 그녀는 땅에 꽂아 둔 지팡이를 꺼내 좌우로 한번 휘저었다.
그녀 발밑에서 튀어나온 수십 개의 얼음 사슬이 용병단장들의 앞을 가로막으며 그들을 공격했다.
“이까짓 얼음 사슬은 너나 처먹어라!”
용병으로 잔뼈가 굵은 늙은 용병단장들은 얼음 사슬을 부숴 버리며 한 발 한 발 전진해 갔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케일 경이 오른쪽으로 달려갔다. 노마법사 한 명이 병사들을 쓰러트리고 있었다. 조금 전 샤비엔다와 나란히 서 있었던 모습을 고려해 볼 때, 얼음탑 수뇌부가 분명했다.
“늙은 마법사야! 지옥으로 보내 주지!”
투구를 착용한 케일 경이 공간을 빠르게 단축해 위맹한 일격을 날렸다.
드비오는 얼음 화살 몇 개로 가까이 오는 병사들을 죽이다가 옆에서 느껴지는 강한 기운에 놀라 황급히 지면을 박차고 옆으로 이동했다.
땅을 가르며 흙먼지를 일으킨 케일 경의 검이 허공에서 잔상을 만들며 드비오를 계속 쫓아갔다.
드비오는 거리를 두려 했지만 케일 경은 마법사에게 거리를 줘서는 안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자가 정말!’
케일 경을 상대하던 드비오의 흰 눈썹이 위로 슬그머니 올라갔다.
그는 사실 이번 싸움에 별 흥미가 없었다. 이겨 봤자 샤비엔다의 위상만 높여 주는 꼴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싸움은 은연중 탑주가 그녀에게 일임한 성격의 일이었다. 만약에 오늘 싸움이 순조롭게 끝난다면 탑주는 그녀를 더욱 신뢰할 테고 그녀를 탑주로 지지하는 베져스와 후투는 기분 좋은 밤을 보낼 것이다.
탑주 없이 베일 가문의 땅을 차지하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던 베져스와 후투, 샤비엔다를 곤경에 빠트리려면 오늘 밤 싸움이 승리로 끝나더라도 시원스러운 승리가 돼서는 안 된다. 그래서 드비오는 카샨과 암묵적으로 오늘의 싸움에 최대한 관여를 안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케일 경의 검술이 워낙 뛰어나서 본실력을 발휘하지 않고는 대응하기 어려웠다.
‘빌어먹을, 저것들을 위해 내가 힘을 써야 하다니.’
드비오는 얼음벽을 만들어 케일 경의 검을 막아 낸 뒤 재빨리 거리를 두고 지팡이를 휘둘렀다.
차가운 기운이 다가오자 케일 경은 옆으로 몸을 굴려 피한 뒤 다시 저돌적으로 돌진해 왔다.
“목을 내놔라!”
“꺼져라!”
드비오가 손을 휘젓자 케일 경의 몸이 큰 충격을 받으며 뒤로 밀려 나갔다.
그러나 좀비처럼 벌떡 일어난 케일 경은 몸 안에 퍼지는 한기를 견뎌 내며 드비오를 향해 다시 돌진했다.
반돌로의 부관은 전방을 살폈다.
직속상관인 반돌로는 은빛 머리칼의 중년 마법사와 싸우고 있었지만 힘겨워 보였다.
그 옆의 케일 경은 늙은 마법사를 상대로 팽팽하게 싸우고 있었다. 벌써 여러 번 마법에 적중된 것 같은데 불사신처럼 일어나 집요하게 상대하는 모습이 그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역시 베일 가문의 선봉장 케일 경이었다.
이어 그의 시선은 왼편으로 향했다. 제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도현이 여신 형상의 얼음과 싸우고 있었다.
그는 끝으로 샤비엔다와 싸우고 있는 세 명의 용병단장들을 지켜봤다.
얼음 사슬을 상대로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지만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용병 세계에서 이름을 떨치던 그들이 아니었다면 무서운 여마법사를 저렇게 오래 잡아 둘 수 없었을 것이다.
“준비됐나?”
“예!”
앞을 가려 주는 병사들 속에 뭉쳐 있던 수십여 명의 창병들이 창을 움켜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목표는 용병단장들과 싸우는 여마법사다. 가진 재주를 다 동원해라.”
“예!”
반돌로의 부관은 싸움이 벌어지기 직전 반돌로로부터 은밀히 지시를 받았다. 샤비엔다와 용병단장들이 싸우게 되면 기회를 봐서 기습을 가하라는 것이었다.
어깨가 돌처럼 단단한 반돌로의 부관이 창을 들며 엎드려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앞을 보고 신호를 하자 앞을 가려 주던 병사들이 파도처럼 갈라졌다.
“가자!”
싸움이 벌어지는 전방을 향해 수십여 명의 창병들이 소리 없이 접근했다.
잠시 뒤 그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투창 준비!”
부관이 신호를 보내자 호흡을 가다듬은 투창 전문가인 병사들이 몸을 한껏 뒤로 젖혔다. 전신의 모든 근육의 힘이 어깨에 쏠렸다. 주위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투창!”
부관의 지시에 맞춰 창병들이 몸을 앞으로 숙이며 창을 일제히 집어 던졌다.
쉬쉬쉬식.
화살과는 비교도 안 되는 파괴력을 가진 수십여 개의 창이 밤하늘 높이 올라갔다가 파공성을 내며 지상으로 소나기처럼 떨어졌다. 그 목표는 얼음 사슬로 용병단장들을 막고 있는 샤비엔다였다. 그녀의 신경이 용병단장들에게 쏠린 사이 창으로 기습 공격을 한 것이다.
샤비엔다는 위를 올려다봤다. 믿을 수 없게도 수많은 창들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그녀의 바로 머리 위에 있었다. 피하기에는 너무도 가까운 거리였다.
“네놈들이!”
안색이 바뀐 그녀는 다급히 손바닥을 펴 하늘을 가리켰다. 포물선을 그리며 소나기처럼 떨어지던 수십 개의 무거운 창이 순식간에 얼어서 폭발을 일으켰다.
쪼개진 창의 잔해들이 그녀 주위로 수북이 쌓여 갔다. 그러나 그중 한 개는 반으로 쪼개지면서도 그 힘을 잃지 않고 그녀의 손바닥을 관통해 어깨에 박혔다.
샤비엔다의 몸이 휘청거렸다. 손바닥과 어깨를 꼬치구이처럼 꿰뚫고 들어간 반쪽의 창이 그녀가 휘청거릴 때마다 같이 따라서 움직였다.
“샤비엔다 님!”
주변에 있던 몇몇 일반 마법사들이 놀라 달려왔다.
“뽑아라.”
“예?”
“뽑으라고 하지 않느냐!”
그녀의 고함 소리에 놀란 마법사 중 한 명이 어깨와 손바닥에 동시에 박힌 창대를 힘껏 잡아당겼다.
붉은 핏물이 분수처럼 허공으로 치솟았고, 샤비엔다의 상체는 피로 물들었다.
싸우면서도 샤비엔다를 힐끔거리며 쳐다보던 드비오와 카샨은 그녀의 부상에 놀라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샤비엔다가 저런 큰 부상을 입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죽어라, 마녀야!”
용병단장들이 약해진 얼음 사슬을 뛰어넘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검과 도끼를 휘둘렀다.
전신이 피투성이인 그들의 눈에는 같이 죽자는 일념밖에 보이지 않았다.
살기를 포기한 사람의 힘은 평소보다 몇 배나 더 증가하는 법이다. 그것을 늙은 용병단장들이 몸소 증명해 보이고 있었다.
“같이 죽자, 하하하!”
샤비엔다를 호위하고 있던 몇몇 마법사들이 얼음 화살을 날리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걸 몸으로 맞으며 기세를 늦추지 않았다.
그들이 가만히 피를 흘리고 서 있는 샤비엔다의 코앞에 도착한 순간, 샤비엔다의 몸에서 강렬한 은색 빛이 폭사됐다.
쩡. 쩌쩌정.
그 빛에 노출된 용병단장들의 몸이 순식간에 얼음으로 변해 그녀 좌우로 떨어졌다.
‘파삭’ 하는 소리와 함께 용병단장들의 몸이 여러 조각이 되어 흩어졌다. 허무한 죽음이었다.
“진작 너희들을 죽여 버렸어야 했다!”
발로 얼음조각이 된 용병단장의 머리를 짓밟은 샤비엔다는 무서운 눈길로 전방을 쏘아봤다.
수백 명의 병사들이 그녀 하나만을 노리고 돌진해 오고 있었다.
“오냐, 다 죽여 주지! 한 놈도 남김없이 모조리 다!”
백발이 하늘로 솟구친 샤비엔다가 주문을 외우자 그녀 앞으로 냉기를 가득 품은 강력한 회오리바람이 생성됐다. 그녀가 그 회오리바람에 손을 얹자 번개가 치는 얼음 폭풍으로 변해 갔다.
땅이 들썩이며 주변의 모든 것들이 얼음 폭풍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일전에 도현을 잡기 위해 카샨이 사용했던 얼음 폭풍보다 더욱 위력적인 마법이었다. 순식간에 폭이 30여 미터는 될 정도로 커진 얼음 폭풍은 돌진해 오는 병사들을 향해 세상을 다 집어삼킬 듯한 위용으로 나아갔다.
얼음 폭풍의 범위 안에 들어간 병사들의 몸이 붕 떠올라 폭풍 속으로 빨려 들어가더니 갈가리 찢기며 사라져 버렸다.
도현은 얼음의 여신이 입에서 내뿜는 차가운 한기를 피하며 뒤를 돌아봤다.
샤비엔다가 그도 경험해 본 얼음 폭풍 마법을 시전했다.
얼음 폭풍의 영향으로 멀리 떨어진 그에게까지 세차게 바람이 불었다.
도현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의 공격으로 두 팔이 잘린 얼음의 여신이 투명한 눈빛을 발산하며 달려들고 있었다.
더 이상 상대해 줄 시간이 없었다.
도현은 지체 없이 검을 땅에 강하게 꽂았다. 거대한 황금 검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쏜살같이 얼음의 여신을 향해 날아갔다.
쾅.
얼음의 여신이 반짝이는 얼음 알갱이가 되어 뒤편에 서 있는 베져스와 후투에게 날아갔다.
베져스와 후투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온 힘을 다해 만들어 낸 얼음의 여신은 베져스 혼자서는 만들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마법이었다. 그래서 부상당한 후투의 도움을 받아 얼음의 여신 마법을 발휘한 것인데, 그것을 도현이 짧은 시간에 깨트려 버린 것이다.
강하다 소문이 난 용병이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넌 누구냐! 정말 용병인가?”
“알고 왔지 않나?”
도현은 이들과 대화를 길게 할 시간이 없었다.
번쩍이는 검광이 베져스와 후투의 목을 휘감았다. 목에 가느다란 혈선이 생긴 그들이 뒤로 천천히 넘어갔다.
몸을 피하기에는 도현의 검이 너무 빨랐다.
‘남은 자들도 처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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