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 디 임팩트 13권 2화
얼굴에 흐르는 피를 소매로 닦아 내던 탑주가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고 싶지만 녀석이 너무 빠릅니다.”
카샨이 어두운 얼굴로 답했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 속도라면 숲을 벗어나기 전에 용병과 싸워야 할 판이다.
“얼음 늑대를 한 마리 더 만들어라. 내가 타고 가겠다.”
“예?”
“녀석의 힘은 오래가지 않는다. 내가 녀석을 유인할 테니, 넌 멀리서 뒤를 쫓아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녀석의 힘이 오래가지 않는다니요?”
“녀석은 혼돈의 마나를 익힌 검사다. 폭주를 한 것이야.”
“혼돈의 마나라면…….”
카샨은 고서에서 읽은, 그것과 관련된 기록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강한 녀석이 폭주까지 해 그 힘이 나를 능가하게 됐다. 하지만 그건 일시적인 것, 뜨겁게 타오른 불은 곧 꺼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녀석의 목숨은 우리 것이 되겠지. 내 말 이해했느냐.”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말하는 탑주의 입안은 이가 여러 개 부러져 있어서 보기 흉했다.
저도 모르게 탑주의 입안을 살피던 카샨은 탑주의 날카로운 시선에 슬며시 다른 곳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탑주님보다는 제가 녀석을 유인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놈은 네가 아닌 나를 쫓아올 것이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군요.”
번쩍이는 빛과 함께 얼음 늑대가 한 마리 더 생기자 카샨은 몸을 던져 그 위에 올라탔다. 몸이 불편해 보이는 탑주보다는 그가 몸을 던져 새 얼음 늑대에 타는 것이 더 수월했기 때문이다.
“조심하십시오, 탑주님.”
“혹, 내가 잘못되더라도 너는 저놈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폭주의 끝이 머지않았어.”
상황이 상황인지라 탑주는 목숨을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혼자 죽을 수 없었다.
나란히 달리는 얼음 늑대 위에서 카샨과 대화를 주고받던 탑주는 뒤를 쫓아오는 도현을 매섭게 노려봤다.
‘네놈의 하찮은 목숨과 내 목숨을 바꿔야 하는 이 순간이 억울하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한다면 받아들이겠다. 이놈!’
잠시 후 그들은 우람한 나무를 중심으로 좌우로 갈라졌다.
폭주한 도현은 양 갈래로 나뉘어 도망치는 탑주와 카샨을 번갈아 보며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탑주가 탄 얼음 늑대를 쫓아갔다.
‘이 녀석이 어디로 사라졌지?’
얼음 늑대 위에서 약간의 마나를 회복하고 있던 탑주는 미간을 좁혔다.
조금 전까지 뒤에 보이던 도현이 순식간에 종적을 감춰 버렸다.
‘폭주가 풀려 힘이 다한 것인가?’
왔던 길을 되돌아가 볼까 고민하던 순간에 시커먼 물체가 나무 위를 휙휙 날아오는 게 보였다.
‘빌어먹을 녀석! 끝까지 날 놀라게 만드는구나!’
원숭이처럼 나무와 나무 사이를 옮겨 다니는 것은 다름 아닌 도현이었다.
탑주는 얼음 늑대의 머리에 손바닥을 올렸다. 약간 회복된 그의 마나가 주입되자 얼음 늑대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하지만 나무를 타며 접근해 오고 있는 도현의 속도는 그 이상이었다. 얼마 되지 않아 얼음 늑대를 따라잡은 도현이 눈을 희번덕이며 나무 위에서 뛰어내렸다.
커다란 바위 위를 타고 넘던 얼음 늑대의 목 측면에 도현의 발이 벼락처럼 파고들었다.
와자작.
얼음 늑대는 박살이 났고, 그 충격의 여파로 탑주의 몸이 공중으로 적지 않게 떠올랐다.
‘이런!’
땅으로 추락하던 탑주가 손을 내뻗자 바닥에서 얼음 사슬 하나가 튀어나와 떨어지는 그의 몸을 휘감으려 했다.
그러나 도현의 발길질에 얼음 사슬은 박살이 났고, 탑주는 힘없이 땅으로 추락했다.
쿠웅 소리와 함께 탑주의 몸이 바위 옆 평평한 땅에 처박혔다.
온몸의 뼈가 다 부서지는 듯한 충격을 받은 탑주는 잠시 동안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흐릿해졌던 시선이 다시 명료해질 즘, 엎드려 있던 그의 눈에 흙이 묻어 시커멓게 변한 도현의 맨발이 보였다.
달빛이 스며드는 숲은 그렇게 환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도현의 발이 이토록 또렷이 보이는 게 기이했다.
‘죽음이 가까운 것인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마법으로 죽이며 살아온 그는 마음이 차갑고 모진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자신의 죽음까지도 무심하게 바라볼 용기는 없었다. 도현과 함께 죽기로 작정했던 마음이 부러진 팔에서 느껴지는 아찔한 고통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생에 대한 욕구가 다시 격렬하게 샘솟았다.
“카, 카샨! 어디 있느냐, 카샨!”
부러진 왼쪽 팔을 덜렁거리며 일어선 그는 있는 힘껏 고함을 내질렀다.
숲은 고요했고, 그의 목소리는 금세 어둠 속으로 묻혔다.
“카샨! 어서 나와 날 도와라!”
다가오는 도현을 피해 뒤로 물러나며 목이 터져라 외쳤지만, 주위엔 아무도 없는 듯 적막감만이 맴돌았다.
“계획이 바뀌었다! 카샨!”
카샨을 애타게 찾던 그는 더 이상 뒤로 물러날 곳이 없었다. 커다란 바위가 그의 등에 걸린 것이다.
어둠 속에서 흰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던 도현이 주먹을 날렸다. 탑주가 피하기에는 그 속도가 너무 빨랐지만 그는 기적적으로 도현의 주먹을 피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주저앉는 바람에 우연히 벌어진 일이었다.
콰앙.
탑주의 머리카락을 스치며 뒤로 날아간 도현의 주먹에 바위가 박살 나며 돌가루가 튀었다. 주저앉은 탑주의 머리 위로 돌가루가 안개처럼 휘날리며 떨어져 내렸다.
얼굴이 굳어진 탑주가 다시 외쳤다.
“카샨!”
그는 지금이라도 제자인 카샨이 이곳에 도착했기를 바라며 외쳤지만 숲은 그와 폭주한 용병, 단둘만의 공간인 것처럼 아주 조용했다.
파괴와 피에 굶주린 도현은 더 이상 시간을 끌기 싫었는지 주저앉아 있는 탑주의 머리를 향해 재차 주먹을 날렸다.
탑주는 턱을 꼿꼿하게 세운 상태로 최후를 맞이하려 했다. 살 수 없다면 얼음탑주답게 끝을 맺고 싶었다.
그러나 강한 압력을 동반한 도현의 주먹은 그의 콧잔등 앞에서 정확히 멈춰 섰다.
탑주는 아무리 기다려도 도현의 주먹이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자 슬그머니 고개를 옆으로 빼서 앞을 자세히 살펴봤다.
도현이 주먹을 내뻗은 자세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네놈의 힘이 다됐나 보구나.”
단번에 도현의 몸 상태를 꿰뚫어 본 탑주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러진 왼팔이 아팠지만 그 통증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기뻤다.
그는 내뻗은 도현의 팔을 허리 옆으로 붙여 주며 작게 말했다.
“안타깝구나. 네가 지배하던 시간이 끝났으니 말이다.”
폭주가 풀린 도현은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는 깊은 무기력감 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눈이 자꾸만 감기려 했다.
“내 목소리가 들리느냐? 눈빛이 맑아진 걸 보니, 넌 지금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고 있겠지?”
탑주는 힘없이 서 있는 도현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여 줬다.
“오랜만에 너로 인해 두려움을 느꼈다. 그 점은 고맙게 생각하마. 하지만 몹시 불쾌했어.”
“…….”
도현은 아득해지는 의식을 붙잡으려 애를 썼지만 폭주 뒤에 밀려오는 후유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폭주가 끝나면 어린아이 손에도 목숨을 잃을 만큼 힘의 공백기가 찾아온다. 전신에 힘이 빠지고, 곧 정신까지 잃게 된다.
완전한 무방비 상태.
그것이 폭주 뒤에 오는 암흑의 시간이었다.
그 때문에 폭주로 마음껏 힘을 분출해도 뒤따르는 위협은 더욱 커질 수 있다고, 딘이 강조했다. 그것이 현실이 됐다.
‘탑주를 죽였어야 했는데…….’
단 1초의 시간만 더 주어졌다면 얼음탑주를 죽이고 이 숲에서 쓰러졌을 것이다.
못내 그 점이 아쉬웠다.
‘홍영…… 아버지…….’
떠오르는 사람들의 이름을 속으로 나직이 되뇌던 도현은 자꾸 감기는 눈꺼풀을 위로 밀어내며 얼음탑주를 지그시 노려봤다. 혀를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전신에 무기력감이 팽배했기 때문에 그가 보일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의 모습이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이 무엇인 줄 아느냐? 상대방에게 더 큰 두려움을 주는 것이다.”
탑주는 허리를 굽혀 도현이 박살 낸 바위 조각을 집어 들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는 왜소하고 체력도 부족했지. 그래서 가끔은 이런 것도 사용하곤 했어. 물론, 마법을 배운 이후론 이런 유치한 짓을 하지 않았지만 말이야. 그런데 오늘 그 유치한 짓을 다시 해 보고 싶군.”
숨만 가늘게 쉬고 있는 도현을 보며 표정 없이 말한 탑주는 들고 있던 뾰족한 돌로 도현의 옆머리를 가격했다.
빠각.
붉은 피가 도현의 귀를 타고 후두두둑 흘러내렸다.
“네놈이 날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느냐!”
탑주는 피가 묻은 바위 조각을 재차 휘둘렀다.
빠각.
도현의 머리가 훽 돌아갔다.
휘청거리는 도현을 따라가며 탑주는 붉게 변한 바위 조각을 다시 한 번 힘껏 휘둘렀다.
빠각.
피를 분수처럼 뿜어내던 도현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너 따위 놈에게 치욕스러운 죽음을 당할 뻔했다니! 폭주가 아니었다면 네 녀석은 내 마법에 얼음덩어리로 변했을 것이다!”
“처, 천만에. 넌 마법이 아니었다면…… 내 검에 죽었을 것이다. 마법과 폭주가…… 뭐가 다른가?”
머리에 강한 충격을 받은 도현은 그 고통에 힘입어 말 몇 마디를 간신해 뱉어 낼 수 있었다.
탑주의 눈썹이 하늘 위로 솟구쳤다.
“이빨을 모조리 부숴 주마.”
도현 때문에 멀쩡한 이를 여러 개 잃고 얼굴에 적지 않은 상처가 난 탑주는 피 칠을 한 바위 조각을 그대로 도현의 입에 쑤셔 넣으려 했다.
“적당히 하지.”
낮게 깔리는 굵직한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거대한 강철 방패가 회전하며 탑주를 향해 날아갔다.
깜짝 놀란 얼음탑주는 도현의 몸에서 급히 떨어졌다. 그대로 있다간 강철 방패 날에 몸이 절단될 상황이었다.
쿠웅. 쿵쿵쿵.
회전하는 강철 방패는 숲에 있는 나무 몇 그루를 잘라 버리고는 길게 선회해서 방패를 던진 주인에게 되돌아갔다.
척.
능숙한 솜씨로 방패를 회수한 사내가 천천히 쓰러져 있는 도현을 향해 걸어갔다.
그 기세가 범상치 않아 얼음탑주는 긴장하며 물었다.
“넌 누구냐?”
“칼라치.”
가볍게 대꾸한 적발 거한 칼라치는 거대한 강철 방패에 몸을 기댄 상태로 도현을 내려다봤다. 머리가 피투성이로 변한 도현이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며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꼴좋군. 강한 척하더니.”
칼라치는 거대한 강철 방패를 바닥에 내려놓고 그 위에 도현을 눕혔다. 강철 방패가 워낙 커서 키가 큰 도현이 그 안에 들어가자 마치 침대처럼 보였다.
“네놈이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그놈을 놓고 가라.”
“왜 그래야 하오?”
칼라치가 도현을 눕힌 강철 방패를 한 손으로 들더니 어깨로 받치며 뒤돌아섰다.
“얼음탑의 일이다.”
“나중에 싸우시오. 이자와 난 청산해야 할 빚이 많으니까.”
“감히 내가 누구인 줄 알고!”
“당신 힘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덤빌 생각하지 마시오. 난 얼음탑주라고 해서 겁먹는 성격이 아니니까.”
가늘어진 칼라치의 눈매에서 차가운 빛이 번뜩였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구나.”
칼라치는 대답 없이 도현을 눕힌 강철 방패를 어깨에 메고 움직이려 했다.
그때 카샨이 얼음 늑대를 타고 나타났다.
“탑주님!”
도현을 데리고 가는 칼라치의 행동에 분노하고 있던 탑주는 뒤늦게 나타난 카샨을 보며 얼굴이 밝아졌다. 힘이 회복되지 않아 칼라치를 눈 뜨고 보내 줘야 할 상황이었는데, 제자가 나타난 것이다.
“저놈을 잡아라!”
탑주의 지시에 카샨이 얼음 늑대에서 뛰어내리며 지팡이로 땅을 내리찍었다.
쩌저저저적.
숲의 나무와 땅을 얼리는 차가운 기운이 도현을 데리고 가는 칼라치의 등으로 날아갔다.
“귀찮게 하는군.”
칼라치는 등에 걸치고 있던 또 다른 강철 방패를 꺼내 힘껏 땅에 꽂았다.
엘바의 힘이 깃든 강철 방패는 보라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콰아앙.
한기를 방패로 막아 버린 칼라치는 재차 공격하려는 카샨을 피해 빠르게 숲 속으로 들어가며 몇 마디 말을 남겼다.
“나를 따라오면 내 동료들이 탑주를 죽일 것이다. 그는 지금 힘이 다했겠지? 크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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