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 디 임팩트 13권 3화
카샨은 그 말에 몸이 굳어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탑주님.”
“이런 미련한 녀석, 저자의 말을 믿는 것이냐! 난 상관 말고 가서 저놈들을 잡아 없애라! 폭주한 그 용병 녀석의 몸이 회복되면 두고두고 후환이 될 것이야!”
발을 구르며 노한 얼굴로 외치는 탑주의 모습에 카샨은 굳어진 얼굴로 얼음 늑대를 타고 저들의 뒤를 쫓았다.
‘없다.’
한동안 숲을 수색한 카샨은 멀리 강 너머 산을 바라봤다. 이미 그들은 숲을 벗어나 북쪽의 산맥 안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혼자서 저 넓은 지역을 수색해 그들을 찾아내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가자!”
얼음 늑대를 되돌려 탑주가 있는 곳으로 돌아온 그는 바닥에 마법진을 그려 마나를 회복하고 있는 탑주 앞에 섰다.
“어찌 됐느냐?”
“강 건너 북쪽 산맥으로 들어간 것 같습니다.”
“놓쳤단 말이냐!”
“……네. 죄송합니다.”
“음.”
묵직한 신음을 흘린 얼음탑주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카샨도 탑주의 눈치를 보느라 한쪽에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드비오는 왜 같이 오지 않았느냐?”
한참 만에 입을 뗀 탑주가 물었다.
“부상당한 샤비엔다를 돌보고 있습니다.”
“차기 탑주 후보 중 둘은 죽고 한 명은 중상을 입었으니, 멀쩡한 건 너와 드비오뿐이구나. 어쩌다 얼음탑이 이리도 약해졌단 말인가?”
마법진에서 걸어 나온 탑주는 숲 사이로 보이는 달을 올려다봤다.
“복잡하게 됐다. 그 용병 녀석이 힘을 회복해 나타나면 내가 아닌 너희들 중에 그 누가 막을 수 있겠느냐?”
카샨의 얼굴이 붉어졌다.
“너는 돌아가는 대로 너희 가문의 병사들과 전투 몬스터를 동원해 북쪽 산들을 수색해라. 그 용병 녀석은 폭주한 후유증으로 인해 한동안 몸을 제대로 쓰지 못할 것이다. 녀석이 회복되기 전에 찾아내 목숨을 취해야 한다. 알겠느냐?”
“…….”
“왜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냐?”
달을 올려다보던 탑주가 고개를 돌려 카샨을 봤다.
“한 가문의 차남이 그 정도 힘도 없단 말이냐?”
“아닙니다. 힘을 써 보겠습니다.”
카샨이 표정을 관리하며 대답했다.
신발
어제까지만 해도 베일 가문의 깃발이 펄럭이던 방벽에 그것 대신 플레온 가문의 깃발과 얼음탑을 상징하는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땅의 주인이 바뀐 것이다.
중무장한 플레온 가문의 병사들이 늘어선 사이로 살아남은 베일 가문의 병사들과 용병들이 부상당한 모습으로 초라하게 걸어 나오고 있었다.
2천여 명 가까웠던 병력 중 살아남은 인원은 채 백여 명도 되지 않았다. 전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처참한 상황이었다.
처음엔 얼음탑 마법사들이 들이닥쳤고, 후엔 플레온 가문의 병력이 싸움이 벌어진 곳을 정리했다.
그 과정에서 베일 가문의 병력은 무장이 해제된 채 죽음을 기다렸지만, 플레온 가문의 지휘관 로스는 자비를 베풀어 그들을 풀어 줬다.
하지만 풀려났다 해서 기뻐하는 베일 가문의 병사들은 많지 않았다.
“우리는 반드시 돌아온다!”
팔에 붕대를 감고 있던 베일 가문의 병사가 용감하게 외치다가 정문 앞에 줄지어 서 있는 플레온 가문의 병사들에게 몰매를 맞았다.
“목숨을 건졌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실컷 얻어터진 병사는 플레온 가문 병사들의 야유를 받으며 정문에서 멀어져 갔다.
주요 지휘관을 모두 잃은 베일 가문의 병사들은 오늘 안에 고대 도시를 떠나라는 경고를 받았기 때문에 좋든 싫든 움직여야만 했다.
“잠시 얘기 좀 해요.”
모자를 깊게 눌러쓴 로나가 정문에서 몰매를 맞았던 베일 가문의 병사에게 접근했다.
“어젯밤 싸움에 관해 듣고 싶어요.”
모자로 가렸지만 그 안에 엿보이는 로나의 뛰어난 미모를 완전히 가릴 수는 없었다. 평소였다면 로나의 미모에 매료됐겠지만, 간밤에 지휘관과 동료들을 잃은 그는 그녀의 외모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신은 누군데 그걸 묻는 거요?”
퉁명스러운 병사의 대답에 로나가 술병을 꺼내며 말했다.
“난 당신의 적이 아니에요.”
말에서 내린 로나는 숲으로 몸을 낮추고 들어갔다. 한참을 들어간 그녀는 새소리를 내는 호각을 꺼내 불었다. 길고 짧게 여러 번 불며 숲 깊숙이 들어가던 그녀는 왼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자 재빨리 나무 뒤로 몸을 감췄다.
“다 보인다. 나와.”
수풀 속에서 짐브리오와 딘이 나타났다.
“도현은 찾았어요?”
로나가 나무 뒤에서 나오며 물었다.
“아직. 저쪽 강가에서 싸운 흔적은 있는데 찾지 못했어.”
“혹시 잘못된 게 아닐까요?”
로나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말했다.
“죽었다면 시체라도 남아 있겠지. 너무 걱정 마, 도현은 쉽게 죽을 녀석이 아니니까. 안 그렇소, 영주?”
짐브리오는 딘을 돌아봤다.
“물론이네. 아마 얼음탑주를 따돌리기 위해 멀리까지 간 것 같아. 그래서 이 숲엔 보이지 않는 거겠지. 무사할 거야.”
“그랬으면 정말 좋겠어요.”
로나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믿게나. 난 허튼소리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딘의 말에도 불구하고 표정이 밝아지지 않은 로나는 머리에 쓰고 있던 모자를 등 뒤로 넘기며 근처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베일 가문의 싸움 소식을 전해 듣고 그들이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싸움이 정리되고 플레온 가문이 방벽 위에 있던 베일 가문의 깃발을 끌어 내리고 있을 때였다.
싸움이 벌어진 시각에 도현이 베일 가문의 진영을 방문했기 때문에 그의 생사가 걱정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은 정보를 모으다 도현이 얼음 늑대를 탄 노인을 피해 서쪽으로 이동한 사실을 알아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도현을 쫓는 노인이 누군지 몰랐다. 그러나 그들의 이동 경로를 추적하다가 노인의 외모를 파악하게 됐고, 그 이야기를 들은 딘은 그 노인이 얼음탑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했다.
홀로 연합 세력을 와해시킬 정도의 검술 실력을 갖춘 도현이 몸을 피할 만큼 강한 상대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그 후 짐브리오와 딘은 서쪽의 숲을 조사하며 다녔고, 로나는 베일 가문의 방벽 주변을 맴돌며 정보를 모았다.
어베인과 리타는 신전 발굴지에 대기 중이었다. 혹, 도현이 그쪽에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플레온 가문이 베일 가문의 병사들을 풀어 줬어요. 그중 몇 사람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특별한 정보는 없었어요. 그저 마법사들의 습격이 끔찍할 정도로 충격적이었다는 말밖에 하지 않더군요.”
“얼음탑 녀석들은 하여간 도움이 안 돼. 에이, 망할 새끼들.”
짐브리오가 허리에 찬 술병을 꺼내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얼음탑주에게 쫓겼어요. 그러니 도현이 무사하더라도 크게 다쳤을 수도 있어요. 찾는 걸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로나, 네가 말하지 않아도 그쯤은 나도 안다.”
술병을 딘에게 건넨 짐브리오는 바위에 걸터앉아 있는 로나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러니까 넌 아무 걱정 말고 대장에게 그만 돌아가 있어. 우리들은 강 건너 북쪽 산으로 들어갈 테니까. 광대한 지역이지만 도현이 그곳에 있다면 반드시 찾아내겠다.”
로나는 강인한 눈빛으로 말하는 짐브리오에게 미소를 보였다.
“너무 오래 찾지는 말아요. 도현이 그 전에 우리를 찾아올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고요.”
로나는 바위에서 일어나 영주 딘에게도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부탁드려요, 영주님.”
“부탁은. 도현은 나의 친구일세. 자네만큼 나도 걱정이 돼. 여기 짐브리오도 마찬가지고.”
“알고 있어요.”
로나는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짐브리오의 두툼한 손에 올려놨다.
“뭐냐 이게?”
“술과 음식요. 며칠은 먹을 수 있을 거예요.”
빙그레 미소를 지은 그녀는 몸을 돌려 숲 저편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멀어지는 그녀를 보며 짐브리오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올 때부터 멀리 보내려고 미리 준비를 해 왔네.”
“준비성이 좋은 여자야. 그만 가세.”
돌아선 딘의 얼굴은 납덩이처럼 무겁게 변했다. 짐브리오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로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조금 전까지 밝은 표정으로 도현이 무사할 거라고 말했지만 그들은 자신할 수 없었다.
“강가에 있는 격렬한 싸움 흔적을 보면, 도현은 그곳에서 폭주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네. 궁지에 몰려 감정이 폭발했다는 뜻이지.”
“폭주한 도현에게 얼음탑주가 죽었을 것 같소?”
“그가 죽었다면 조금 전에 온 로나가 뭔가 말을 했겠지. 플레온 가문과 얼음탑이 그냥 있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런데 조용하다는 건 얼음탑주가 무사하다는 뜻이야. 더불어 도현이 살아 있다면 그는 여전히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어 있다는 뜻이지.”
“얼음탑주의 목표는 고대 왕궁이 있는 베일 가문의 땅 같은데, 도현을 끝까지 추적하려 하겠소? 도현은 알려진 바대로 그저 용병일 뿐인데.”
짐브리오가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내기할까?”
강가에 도착한 딘이 물었다.
“됐소. 별걸 가지고 다 내기를 하자는군. 어서 갑시다.”
짐브리오가 강에 뛰어들자, 뒤에서 지켜보던 딘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본신의 힘이 강해질수록 폭주의 위력은 걷잡을 수 없이 증가한다. 하지만 그 후유증도 비례하는 법이지. 도현의 몸이 걱정되는군.”
지난 십수 년간 몇 차례 폭주를 경험한 딘은 폭주의 후유증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아, 뭐 하시오! 빨리 넘어오지 않고!”
짐브리오의 재촉에 딘은 강으로 뛰어들었다.
도현은 어렸을 때 높은 곳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꿈을 종종 꾸곤 했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때도 있었고, 하늘을 날다 새의 공격을 받아 추락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입으로 길게 소리를 지르며 꿈에서 깨어나곤 했다.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꿈이란 걸 자각한 도현은 그 자체를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가끔은 그것 때문에 아버지에게 꾸중을 듣기도 했다.
고등학생이 된 후 그런 꿈을 더 이상 꾸지 않게 됐지만 가끔은 그립기도 했다.
검을 수련하며 점차 어른이 되어 가던 그는 인내와 평정심에 더욱 집중하게 됐고, 웬만한 상황에서는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렇기 때문에 꿈속이 아니면 마음껏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날것 그대로의 감정을 표출할 곳이 없었다. 꿈속의 비명은 그에겐 유일한 일탈 행위였던 것이다.
‘떨어진다.’
위태로운 절벽 길을 걷던 도현은 갑자기 사라진 길 위에서 그대로 아래로 추락했다.
거의 10년 만에 꾸는 꿈속에서 도현은 마음껏 소리를 내질렀다. 검을 수련하며 가슴 저 밑바닥까지 가뒀던 온갖 감정의 찌꺼기들이 그 소리와 함께 그의 목구멍을 통해서 분출됐다.
“으아아아악!”
마른 입술로 비명을 크게 지르며 깨어난 도현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큰 호흡을 하던 도현은 서서히 숨을 고르며 자신을 진정시켜 갔다.
‘여긴 어디지?’
짐승의 가죽이 깔린 바닥에 누워 있던 도현은 상체를 일으켜 세우려다가 신음을 흘리며 도로 몸을 뉘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살과 뼈 사이에 칼날을 집어넣어 헤집고 있는 것처럼 그 통증이 말할 수 없었다.
‘죽은 건 아니군.’
도현은 고통 속에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극심한 고통은 그가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동굴 같은데…….’
누운 상태로 주변을 살피던 도현은 벽에 걸린 기름 램프를 잠시 바라보다가 몸에 힘을 주며 일어났다.
고통이 계속 그의 몸을 괴롭혔지만 도현은 땀을 흘리며 이겨 냈다.
동굴 한쪽 벽에 기대 호흡을 가다듬던 그는 머리에 손을 댔다. 여러 겹 감긴 천이 만져졌다.
짙은 약 향이 감긴 천 사이로 흘러나오는 걸 보면, 누군가 다친 그의 머리를 치료해 준 것 같았다.
‘누가 날 구해 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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