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 임팩트-304화 (304/575)

[304] 디 임팩트 13권 4화

도현은 정신을 잃기 전 칼라치의 얼굴을 봤다. 위에서 내려다보던 그가 뭐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그것을 듣기 전에 그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사실 그는 칼라치의 얼굴을 본 순간, 죽음을 피할 길이 없다고 판단 내렸다.

얼음탑주에 칼라치까지.

둘 모두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하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죽지 않았어. 내가 정신을 잃은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머리에 감긴 천에서 손을 뗀 도현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눅눅한 냄새가 나는 황색 빛깔의 거친 겉옷이 입혀져 있었다.

고개를 든 그는 단전의 내공을 움직여 보려다 급히 멈췄다. 단전은 물론 기가 흐르는 모든 곳이 불타오르듯 화끈거렸다.

‘이 상태에서 내공을 사용했다가는 큰일 나겠어.’

폭주의 후유증이었다.

과거에도 한 차례 폭주를 경험한 도현은 폭주 후에는 몸 상태가 엉망이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특히 내공은 한동안 사용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지금이 그때보다 훨씬 몸 상태가 안 좋다.’

회복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도현은 벽을 손으로 짚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곳이 어딘지 궁금했다.

‘계속 소리가 난다.’

동굴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맞으며 10여 미터 정도 움직인 도현은 동굴의 모퉁이를 돌았다.

시원한 소리와 함께 환한 빛이 동굴 안쪽으로 스며드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쏴아아아아.

시원한 소리의 정체는 물이었다.

‘폭포.’

도현은 마차 한 대가 다닐 만큼 넓은 이곳이 폭포 뒤에 존재하는 동굴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동굴 벽에 의지해 한 발 한 발 걷던 도현은 폭포수와 동굴 사이에 생긴 약간의 틈을 이용해 폭포를 통과하지 않고도 동굴을 벗어날 수 있었다.

폭포 밖으로 나온 도현은 옆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걸으며 폭포 일대를 살폈다.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수 앞에 제법 넓은 물웅덩이가 생성되어 있었고, 그 주변으로 온통 나무들이 우거져서 원시림을 보는 듯했다.

도현은 약간 경사진 곳에 앉아 폭포수가 흐르는 물웅덩이를 내려다봤다. 뚱뚱한 중년인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목욕을 하고 있었다.

“시원합니까?”

도현이 중년인에게 물었다.

“어! 자네 깨어났군!”

헬구스는 반가운 얼굴로 물 밖으로 나왔다. 위아래 할 것 없이 옷을 훌훌 벗은 채 목욕을 하고 있던 터라 도현은 의도치 않게 그의 벌거벗은 몸을 봐야만 했다.

“오랜만입니다, 헬구스.”

“그러게 말일세. 반갑네.”

헬구스는 껄껄 웃다가 도현의 시선이 아래로 향하자 헛기침을 하며 옷을 주섬주섬 걸쳐 입기 시작했다.

“벌써 움직여도 되나? 얼음탑주에게 죽기 직전이었다면서?”

“움직일 정도는 됩니다. 그런데 얼음탑주 이야기는 누구에게 들었습니까?”

“칼라치가 얘기해 주더군.”

“그렇군요.”

도현은 칼라치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것이 놀라웠다. 상황을 보니 죽이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치료까지 해 준 것이다.

‘그는 무슨 생각으로 날 살려 둔 걸까? 발굴지에서는 그렇게 날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

고대 왕궁 발굴지에서 격렬하게 싸웠던 당시를 떠올리던 도현은 생각에 잠긴 시선으로 떨어지는 폭포를 응시했다.

옷을 다 입고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몇 차례 턴 헬구스는 도현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날씨 좋지 않나? 브링틱이 다른 건 몰라도 추위에 얼어 죽을 일은 없어. 1년 내내 이렇다 할 추위가 찾아오지 않으니 말일세.”

“다크캐슬은 추웠죠.”

“그럼, 그곳의 겨울은 지독하니까. 물 마실 텐가?”

헬구스는 수통을 건넸다. 수통을 기울여 물을 마시던 도현은 크게 기침을 몇 번 했다.

“물이 아니군요.”

독한 술이었다.

“속았지?”

헬구스는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여긴 어딥니까?”

“고대 도시에서 제법 떨어진 산속. 산이 깊어서 웬만해서는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이야.”

“칼라치는요?”

도현은 독한 술을 몇 모금 더 마신 후 물었다.

“저기 건너편으로 조금 가다 보면 작은 집이 있어. 칼라치는 그곳에서 이디언과 함께 살고 있네. 그렇고 그런 사이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뭡니까?”

“함께 잠을 자는 사이란 뜻이지. 감히 왕국의 피를 이은 내 앞에서 볼썽사나운 짓을 하다가 들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그래서 내가 그 꼴 보기 싫어서 폭포 동굴에 살고 있던 것이고.”

왕국의 서자로 태어나 다크캐슬에서 구역장 노릇을 했던 헬구스는 거만한 표정으로 턱을 좌우로 흔들었다.

“몹쓸 것들.”

“칼라치와는 어떻게 해서 같이 다니게 된 겁니까?”

“응? 아, 그건 말이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다크캐슬을 떠나는 상선에 몰래 탔는데, 그곳에 윌벤슨 일행이 타고 있었거든. 칼라치와 이디언도 있었고.”

헬구스는 얼마 남지 않은 술을 비우며 말을 이었다.

“대륙에 도착해서 칼라치와 윌벤슨이 갈라졌어. 난 별달리 갈 곳이 없어서 칼라치와 동행하게 됐지. 이디언이야 칼라치를 마음에 두고 있어서 함께했던 것이고. 그리고 여기까지 흘러들어 왔지.”

헬구스는 말을 마치고는 경사진 땅에 몸을 눕히고 푸른 하늘을 올려다봤다.

“고맙네.”

“뭐가 말입니까?”

“그날 자네가 보낸 사람들이 지하 감옥에서 날 구해 줬잖은가.”

스므차 성주의 지하 감옥에 갇혀 있던 헬구스는 그 당시 미치광이 간수 빌에게 매일같이 고문을 당했다.

“당신도 날 위해 도움을 줬으니까요.”

“그거야 솔직히 자네가 날 위협해서 도와줬던 것이라고. 내 마음에서 우러나온 건 아니었어.”

헬구스의 말에 도현이 피식 웃었다.

“내가 잘못 봤군요. 그냥 모른 척할 걸 그랬습니다.”

“이미 늦었지.”

헬구스는 불룩 솟은 배를 한가롭게 두드렸다.

“고대 도시에 소문이 파다하더군, 베일 가문에 고용된 용병이 연합 세력을 와해시켰다고. 그게 자네지?”

도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크캐슬에서는 폭주의 해결 방법을 못 찾았겠지? 그래서 새롭게 발견된 이곳으로 온 거야. 그것 때문에 베일 가문을 도운 건가? 그곳에 발견된 고대 왕궁에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그것도 이유 중 하나죠.”

도현은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딜 가려고?”

“칼라치를 만나야겠습니다.”

칼라치와 이디언은 낮부터 불같은 사랑을 나눴다. 중년의 나이인 그들은 사랑이란 낯선 감정에 빠져든 후 밤과 낮이 따로 없을 만큼 서로의 존재를 탐했다. 젊음을 외롭게 보낸 그들에게 뒤늦게 찾아온 사랑의 감정은 그만큼 뜨겁고 소중했다.

“난 당신을 이해할 수 없어요.”

칼라치의 품 안에 안긴 이디언이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

“당신의 눈을 멀게 하고 목숨을 위협한 사람이에요. 발굴지에서 그와 싸우다 다친 상처 때문에 또 얼마나 힘들어했어요.”

“이디언, 그 이야기는 그만합시다.”

적발 거한 칼라치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어떻게 안 할 수가 있겠어요. 이 눈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픈데.”

그녀는 칼라치의 왼쪽 눈에 손을 가져갔다. 안대가 벗겨진 칼라치의 왼쪽 눈은 검에 찔린 상처가 보기 흉하게 남아 있었다.

“그를 죽여서 얼음탑주에게 데리고 가요.”

“이디언.”

“내 말을 좀 들어 봐요. 얼음탑주는 만만히 볼 사람이 아니에요. 이곳도 찾아낼 게 분명해요. 그와 척을 지지 말고 손을 잡아요. 그자 때문에 당신이 얼음탑주와 싸울 이유는 없잖아요.”

“내가 행동하는 건 누구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 아니오. 오직 내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지.”

자존심이 상했는지 칼라치의 안색이 약간 붉어졌다.

“당신이 나약하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실력은 언제든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때까지 몸을 낮출 필요는 있어요. 우린 고대 도시에서 씨드를 찾고 있잖아요. 얼음탑주가 고대 왕궁을 차지하기 위해 베일 가문을 공격했다는 건 굉장히 중요한 문제예요.”

이디언은 기다란 손가락으로 털이 수북이 나 있는 칼라치의 가슴을 훑어 내렸다.

“그곳에 씨드가 있거나 관련된 단서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아진 거라고요.”

“음…….”

칼라치가 도현을 구한 건 우연이 아니었다. 고대 도시에서 벌어진 베일 가문과 얼음탑 사이의 싸움을 그는 처음부터 지켜봤던 것이다.

고대 왕궁의 발굴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뒤로, 칼라치는 며칠에 한 번씩은 몰래 들어가 베일 가문의 발굴장 상황을 둘러보곤 했다.

이틀 전 밤에도 발굴장 상황을 확인하러 갔다가 싸움을 목격하고 나중에는 도현과 얼음탑주의 뒤까지 밟은 것이다.

“그자를 죽이고 얼음탑주와 오해를 풀어요. 지금 당신이 얼음탑과 싸우게 되면 당신에겐 남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꼭 싸워야 한다면 그건 씨드를 두고 싸워야 할 때죠. 당신의 눈을 멀게 한 그자를 위해서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어요.”

“씨드보다 중요한 건, 내가 존재하는 이유요.”

칼라치는 침상에서 일어나 옷을 걸쳤다.

“얼음탑주에게 다친 그자를 내가 죽인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소? 그런다고 이 눈의 상처와 패배감이 사라질 것 같소?”

이디언의 눈빛이 흔들렸다.

“나는 떳떳하게 그를 이기고 싶소. 쥐새끼처럼 얄팍한 수를 쓰고 싶지 않다는 거요. 내가 그를 이기지 못할 것 같소?”

“칼라치.”

“내가 당신을 깊이 생각하지만 내 투쟁심을 꺾진 마시오. 그건 나를 죽이는 길이니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던 칼라치는 집 앞 공터에 서 있는 도현을 발견했다.

칼라치는 말없이 폭포 쪽으로 걸어갔고, 도현은 그 뒤를 불편한 몸을 이끌고 따라갔다.

폭포에 도착한 칼라치는 갈증이 난 듯 몸을 숙여 폭포수를 들이켰다.

“몸을 움직일 만하면 사라질 것이지 왜 내 앞에 나타났나.”

손등으로 입가를 훔친 칼라치가 돌아서며 말했다.

“왜 날 죽이지 않았는지 궁금해서.”

“얼음탑주에게 다 죽어 가던 네놈을 죽여서 내게 무슨 기쁨이 있겠나?”

“그 이유 때문에 날 탑주의 손에서 구해 준 거요?”

칼라치는 도현의 앞에 섰다. 도현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칼라치는 바람에 붉은 머리카락을 날리며 말했다.

“상처 입은 자를 상대로 분풀이하는 칼라치는 다크캐슬에서 이미 사라졌다. 지금 네 앞에 서 있는 칼라치는 건강한 네 육신을 씹어 먹고 승리하고 싶은 사람이다. 그러니까 앞으로 병신같이 다치지 말고 다녀라. 내가 널 찾아내 밟아 주기 전까지는 말이다. 넌 내 손에 죽어야 돼.”

도현은 안대를 낀 칼라치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당신을 상대하기 전까지는 죽지 않지. 구해 줘서 고맙소.”

“고마워할 필요 없다. 베일 가문의 발굴지에서 넌 나를 충분히 죽일 수 있었는데 보내 줬다. 덕분에 이디언을 데리고 무사히 베일 가문의 땅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

“난 당신을 봐준 게 아니었소.”

“내가 바보인 줄 아나!”

하나 남은 눈으로 무섭게 노려보던 칼라치는 도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와 이디언은 오늘 여길 떠날 것이다. 얼음탑주가 널 찾으려 할 테니까 알아서 피하도록 해. 넌 바람 불면 날아갈 만큼 약해져 있으니까. 헬구스!”

칼라치가 나무 뒤편에 숨어 지켜보고 있던 헬구스를 불러냈다.

“험, 왜 불렀나?”

혹시 둘이 싸울까 싶어서 지켜보던 헬구스가 다가왔다.

“신발을 벗어서 이 녀석에게 주시오.”

도현은 맨발이었다.

“뭐라고? 그럼 난 뭘 신고?”

“가는 길에 신발을 만들어 주겠소.”

“어딜 가는데?”

“여길 떠날 거요.”

“흠.”

헬구스는 칼라치와 도현을 번갈아 보다가 신발을 벗어서 도현의 앞에 내려놨다.

“신게.”

“아닙니다.”

“신으래두. 몸도 정상이 아닌 사람이 발이라도 쌩쌩해야지. 조심하게. 되도록 이곳에 오래 머물지 말고, 얼음탑주가 사람을 보낼 게 분명하니까.”

헬구스도 상황을 보는 안목이 높은 사람이었다.

“검이 손에 맞을지 모르겠지만 이것도 사용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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