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 디 임팩트 13권 5화
헬구스는 중화요리 요리사들이 사용하는 것과 비슷하게 생긴 짧은 검신에 폭이 넓은 칼 한 자루를 도현에 손에 쥐여 주고 한 발 물러났다.
“이 산 너머로 쭈욱 가다 보면 고대 도시가 나오니까 참고하게.”
대략의 지리까지 알려 준 헬구스는 벌써 저만치 앞서가는 칼라치를 힐끔 보다가 도현에게 말했다.
“내가 자네 옆에서 도와주고 싶지만, 저들과 함께한 시간도 적지 않아서 헤어지기가 좀 그렇군.”
“이해합니다. 그리고 전 걱정 마십시오.”
“조심하게. 또 보세.”
헬구스는 수통에 물을 가득 담아 도현에게 준 뒤 칼라치를 향해 걸어갔다.
그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뒤에서 지켜보던 도현은 헬구스의 옷으로 추정되는 황색 겉옷을 벗어서 바위에 걸쳐 놨다.
“으음.”
옷을 벗는 동작도 힘이 들 만큼 전신이 아팠지만, 도현은 꾹 참으며 폭포수가 만든 물웅덩이에 들어갔다.
차가운 물에 먼지와 땀 그리고 피로 더럽혀진 몸이 조금씩 깨끗해졌다.
‘폭주가 아니었으면 탑주에게 목숨을 잃었을 거야. 부끄럽다.’
도현은 머리가 잠길 때까지 물속으로 들어갔다.
태선군 이후로 처음 맛보는 아찔한 패배였다. 폭주해서 탑주와 싸우던 광경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내가 폭주할 수 있다는 걸 탑주가 안 이상, 그는 내가 다시 폭주해도 맞상대하려 하지 않겠지. 오히려 폭주하길 원할 수도 있어. 피하다 힘이 빠진 나를 죽이면 되니까.’
물속에서 나온 도현은 헬구스가 주고 간 칼로 얼굴의 수염을 잘라 냈다.
‘폭주가 나를 위기에서 구해 준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 따른 일. 그 천운도 탑주에게는 더 이상 써먹을 수 없게 됐어. 이제는 오로지 내 본신의 힘으로만 그를 상대해야 돼.’
옷을 입고 헬구스가 주고 간 꽉 끼는 신발을 신은 도현은 주위를 한번 길게 둘러보다가 폭포수로 가려진 동굴로 들어갔다.
그 안에서 그는 타투를 이용해 차원 게이트를 열었다.
‘이런 모습으로 돌아가다니.’
몸이 회복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데 이 상태로 산을 내려가다가 얼음탑주와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집으로 돌아가 도장에서 몸을 회복하는 게 순서였다.
붉게 빛나는 타원형의 게이트를 무거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도현은 천천히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약속
늦봄인 5월의 어느 일요일, 지하 도장의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용주와 홍영 그리고 철호는 벽과 천장에 아이보리색 페인트를 칠하고 있었다.
오래된 도장의 전통을 유지하는 것도 좋지만 천장과 벽 일부의 색이 바랜 데다 때까지 타서 보기 좋지 않았다. 그래서 벼르고 벼르다 좋은 날을 골라 도장 식구들이 한데 모여 지하 도장 내벽에 페인트칠을 싹 새로 하는 것이다.
전문가를 불러 일을 맡길 수도 있었지만, 지하 도장을 직접 꾸미는 것도 나름 그들에게는 의미가 있어서 몸에 페인트를 묻혀 가며 즐겁게 칠하고 있었다.
페인트를 듬뿍 묻힌 롤러로 벽면을 칠하던 용주는 천장을 칠하며 뒤에서 다가오던 철호와 등이 부딪혔다.
“철호 형, 안쪽에서부터 하자고 했잖아요.”
“자식이, 그냥 편한 대로 칠하면 되지. 어차피 빈 곳 없이 다 칠할 텐데.”
“싸우지들 말아요.”
붓으로 관장실을 칠하던 홍영이 고개를 내밀고 외쳤다. 둘은 아까부터 티격태격해서 홍영이 그때마다 한 소리씩 해야만 일에 집중했다.
“홍영아, 내가 막노동하면서 일 못한다는 소리는 못 들었거든. 근데 이 녀석이 구박한다. 확 때려 줄까?”
“하수가 고수에게 덤비면 끝이 어떻게 되는지 잘 아실 텐데요.”
용주가 수성 페인트 통에 롤러를 적시며 말했다.
“뭐 고수? 아나 고수다.”
하는 말이 얄미웠는지 장철호가 롤러를 쭉 내밀어 기습적으로 용주의 얼굴을 쳤다.
철퍼덕.
얼굴에 페인트가 묻은 용주가 인상을 잔뜩 썼다.
“에이, 이게 뭐예요, 형! 코에 다 들어갔네!”
“그러게 왜 깝죽대, 혼나려고.”
소리 내어 웃던 철호는 용주가 휘두른 롤러를 피해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어쭈, 해보자는 거지?”
“먼저 시작한 게 누군데 그래요?”
“내공 좀 생겼다고 형도 몰라보는 망나니 자식.”
“외공 때문에 몸이 단단해졌다고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바보 형.”
“뭐야? 이 자식이 정말!”
“뭐요 뭐?”
삽시간에 도장 안은 그들이 휘두르는 롤러에서 뿌려져 나온 수성 페인트로 난장판이 되었다.
홍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관장실에서 외쳤다.
“점심으로 탕수육 먹기 싫어요?”
“…….”
싸우던 용주와 철호가 서로 한 발씩 물러났다.
“배고프다. 빨리하자.”
“네, 형.”
다시 일에 집중하는 그들의 모습을 관장실에서 바라보던 홍영은 피식 웃으며 붓에 페인트를 묻혔다.
“도현 씨는 이 색을 마음에 들어 할까?”
아이보리색으로 칠하는 도장 내부와는 달리 관장실은 연한 초록색 톤이었다.
캐비닛이 세워져 있던 자리의 구석진 곳에 정성스레 붓질을 하던 그녀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괜찮아. 별일 없을 거야. 도현 씨는 무사할 거야.”
도현이 이계로 넘어간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기다리는 홍영은 불안한 마음이 슬그머니 들 수밖에 없었다.
“약했을 때도 무사했잖아. 지금은 강해졌으니까, 괜찮을 거야.”
그녀는 도현이 걱정도 되고 보고 싶기도 했다. 한동안 그를 생각하며 멍하니 앉아 있던 그녀는 붓을 다시 움직였다.
“색이 좋은데요?”
뒤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그녀의 몸이 굳어졌다.
‘잘못 들었나?’
홍영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봤다.
도현이 관장실 앞에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도현 씨!”
홍영이 도현의 넓은 품 안에 안기며 목을 꼭 끌어안았다. 폭주의 후유증으로 인해 몸이 정상이 아닌 도현은 그녀의 몸무게를 지탱하는 것조차도 버거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잘 있었어요?”
“네…… 그런데 도현 씨 몸이 왜 이래요?”
도현의 품에서 떨어진 홍영은 뒤늦게 도현의 안색이 평상시와 달리 생기가 없어 보이는 걸 발견했다. 머리도 다쳤는지 피가 묻은 천이 붕대처럼 감겨 있었다.
“누구에게 당하고 온 거냐?”
도현이 나타난 걸 알고 있던 용주와 철호는 홍영을 놀래 주려는 생각에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그제야 반가움 반 걱정 반의 표정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된 거야?”
철호가 재차 묻자 도현은 난감한 얼굴로 앞에 서 있는 홍영을 봤다. 가뜩이나 이계를 오가는 그를 걱정하고 있던 그녀인데, 그곳에서 마법사에게 죽을 뻔했다고 말하는 게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그게 말이죠, 철호 형…….”
도현은 말끝을 흐리며 페인트칠이 덜 된 도장 안을 둘러봤다.
“일단 여기 일 먼저 마무리 짓고 나서 얘기하죠.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요.”
도현은 탈의실로 들어가 도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뭐 하려고?”
몸이 정상이 아닌 듯 보이는 도현을 다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정작 도현은 괜찮은지 밝은 얼굴로 답했다.
“페인트칠하는 거 같이 하려고요.”
“미쳤냐? 얼른 병원 먼저 가 봐.”
철호가 눈을 부라렸다.
“괜찮아요, 형.”
“도현 씨, 오빠 말 들어요.”
홍영에 이어 용주도 걱정을 담아 말했다.
“너 없어도 되니까 무리하지 마라.”
도현이 부상을 입은 상태로 돌아온 건 이번이 처음이어서 용주는 다른 때와 달리 농담 한마디 하지 않았다.
“용주야, 내가 꼭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도현은 바닥에 눕혀진 예비용 롤러 하나를 손에 들더니 수성 페인트 통에 푹 담갔다.
“여기 페인트칠한 지 한 10년 됐나? 그때 아버지하고 같이 했는데.”
롤러로 벽을 칠하며 한동안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던 도현은 문득 상념에서 깨어나 주변을 돌아봤다.
“정말 괜찮으니까 어서 여기 일 끝내자고요. 그리고 밥 먹죠. 배고픈데.”
“자식이 고집하고는.”
안색이 창백하고 머리에 천을 휘감은 도현이 걱정되기는 했지만 페인트칠하는 도현의 얼굴에 생기가 점차 돌아오는 것 같아, 사람들은 안심하며 제각기 흩어져 페인트칠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야, 그래도 도현이 돌아오니까 좋다. 안 그러냐?”
철호가 큰 소리로 말하자 용주가 웃으며 대꾸했다.
“당연한 소리를 왜 해요? 하하하.”
관장실에서 붓질을 마무리하던 홍영의 얼굴에도 기분 좋은 미소가 어렸다.
‘초록색을 선택하기 잘했어.’
일요일에도 치료가 가능한 병원 응급실에서 홍영과 함께 나온 도현은 차에 올라탔다. 그는 병원에서 머리를 치료받고 붕대도 새로 했다.
이계에서 칼라치가 그의 찢어진 머리 부위를 봉합하기는 했지만, 현대 의학을 배운 대형 병원의 의사 입장에서는 매끄럽지 못한, 무식한 봉합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떤 사람이 이렇게 성의 없이 듬성듬성 봉합을 했는지 낮은 목소리로 탓을 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재봉합이 반드시 필요한 수준은 아니어서 의사는 소독과 항생제 치료를 한 후, 붕대를 새로 감아 주는 선에서 끝을 냈다.
“도현 씨, 옆에 앉아요. 내가 운전할게요.”
“괜찮아요, 홍영 씨. 갈 때는 내가 운전할 수 있어요.”
“얼른요.”
운전석 문을 열고 무언의 시위를 하는 그녀의 행동에 도현은 별수 없이 운전석에서 내려 조수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도장에서 병원에 올 때도 그녀가 운전했다.
말없이 차를 운전하던 홍영은 힐끔 도현을 쳐다봤다. 도현은 그녀의 시선에 침을 한번 삼켰다.
‘눈치 보이네.’
점심 먹으며 도현은 이계에서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속이지 않고 대략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씨드가 있다는 거인의 섬 이야기와 얼음탑 마법사들 이야기는 중국집 요리를 주문해서 먹고 있던 용주와 철호, 홍영의 입맛을 싹 가시게 할 만큼 긴장감 넘쳤다.
폭주를 하고 간신히 살아 돌아온 도현의 얘기가 끝났을 때, 홍영은 눈물을 억지로 감추며 애써 담담한 척을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다 살아왔는데, 그녀의 마음이 편할 리 없다. 하지만 그녀는 병원에 들러 도장으로 돌아가는 이 순간까지 별다른 감정 표현을 하지 않았다.
‘홍영 씨가 정말 화가 많이 났어.’
도현은 운전대를 잡은 홍영이 말없이 운전하는 모습에 부담감이 점점 커져만 갔다.
다른 때였다면 이계에서 일을 화제 삼아 이런저런 질문을 하거나, 관원들 이야기라도 꺼냈을 것이다. 그런 것 없이 운전에만 집중하는 그녀의 행동은 도현을 갈수록 못 견디게 만들고 있었다.
“저기 홍영 씨.”
“네.”
홍영이 사거리에서 신호에 잡혀 차 속도를 늦추며 대꾸했다.
“어머님은 별일 없으시죠?”
“네. 어제도 통화했어요.”
“어머님 뵈러 상해에 갈까요?”
“폭주로 몸이 힘들 텐데 무리하지 말아요. 차분히 정양하면서 몸을 추슬러요.”
다소 찬바람이 부는 그녀의 대답에 도현은 머쓱해졌다.
“상해에는 도현 씨 몸이 회복되면 가요. 급하지 않으니까.”
“그래요, 그럼.”
신호가 바뀌자 홍영은 차를 출발시켰다. 대화가 끊긴 상태에서 앞만 보던 도현은 헛기침을 하며 말문을 열었다.
“이계에서 아무리 봐도 홍영 씨보다 아름다운 사람은 없더라고요.”
“거짓말.”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에요. 혼자 술을 마시면서 홍영 씨 생각을 한두 번 한 게 아니에요.”
“그렇게 내 생각을 많이 했으면 적당히 해야죠. 거인의 섬도 그렇고, 그 얼음탑주라는 마법사도 그래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말을 하다 자기도 모르게 흥분한 홍영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도현 씨의 모든 건 여기에 있어요. 당신을 생각하는 홍영도 여기에 있고, 소중한 친구인 용주 씨와 철호 오빠도 여기에 있어요. 당신의 가족이 여기에 있단 말이에요! 당신이 잘못되면 우린 어쩌란 말이에요.”
말을 하는 홍영의 눈가에는 눈물이 옅게 고여 있었다.
“홍영 씨.”
“그러니까 제발, 이계에서 조심하란 말이에요. 이번에 정말 죽을 뻔했잖아요.”
고여 있던 눈물이 홍영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고, 그 모습이 매우 애잔해 보여 도현의 가슴도 불로 지진 듯 아파 왔다.
“도현 씨가 없으면 나도 없어요. 우리의 미래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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