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 디 임팩트 13권 6화
홍영의 말속엔 도현에 대한 강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그 미래를 제발 이계에서 버리지 말아요.”
물기가 고인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는 홍영의 시선엔 많은 감정과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렇지만 도현은 오직 한 가지만을 읽었다.
순수한 사랑.
모든 건 그것에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다른 감정을 모두 포괄하고도 남았다.
차가 도장 근처에 도착할 때까지 깊은 생각을 하며 앉아 있던 도현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홍영 씨, 내가 탑주에게 당해 죽어 가던 마지막 순간에 떠올린 사람이 바로 당신이에요.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너무 아파서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죠.”
잠시 말을 끊고 운전하는 홍영의 옆모습을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던 도현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홍영 씨가 싫다면 이계에는 더 이상 가지 않을게요.”
도현의 놀라운 말에 홍영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내게 이계는 강해지는 장소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곳은 내게 또 하나의 삶처럼 다가왔어요. 그렇지만 홍영 씨 말이 맞아요. 내게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면, 난 당신이 있는 이곳을 선택하겠어요. 망설일 필요도 없이.”
도현의 말에 감동받은 홍영은 뜨거운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눈물을 아무 때나 보이는 그녀가 아니었지만 억제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눈물이 아니었다.
그녀는 도장을 코앞에 두고 결국 근처 도로가에 잠시 차를 세웠다. 눈물이 앞을 가려서 운전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내 말이 그렇게 감동적이었나요?”
“분위기 좀 깨지 말아요. 한참 좋았는데.”
퉁명스러운 말 뒤에 도현을 살짝 흘겨본 그녀는 휴지로 눈물을 훔쳐 냈다.
“정말 이계에 안 갈 거예요?”
“네. 홍영 씨가 원한다면요.”
“그곳에 더 강해질 수 있는 기회가 있잖아요.”
“시간은 걸리겠지만 이곳에서 갈고닦아서 태선군을 상대해 볼게요.”
“진심이군요.”
“당신을 이렇게 힘들고 불안하게 만들면서까지 이계에 가고 싶지는 않아요.”
홍영은 도현이 얼마나 큰 결단을 내렸는지 알고 있었다. 도현이 이계에서 맺은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를 매우 중시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또 하나의 삶이라는 건, 그런 차원의 의미였다.
단순히 이계에서 죽든 살든 끝나는 존재들이 아닌, 도현과 마치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웃과 같은 그런 존재들.
이계를 가지 않겠다는 말은, 그런 사람들과의 고리를 영원히 끊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웃고는 있지만 이계에서 맺은 그들과의 약속이나 신의를 저버려야만 하는 도현의 속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한동안 가만히 도현과 시선을 주고받던 홍영은 고개를 기울여 도현과 짧은 키스를 나눴다.
“그러지 말아요. 내가 당신에게 원하는 건 이계에서 죽지 말라는 거지, 그곳을 아예 가지 말라는 건 아니었어요.”
“홍영 씨.”
“얼음탑주라고 했죠? 당신을 폭주하게 만든 사람. 힘을 키워서 혼내 줘요. 호검술 도장의 관장이 얼마나 끈질기고 강한 사람인지 보여 주라고요.”
홍영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사라져 있었다. 대신 여장부의 기개와 매서운 눈빛만이 어려 있었다. 도현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이계에서는 절대 죽지 마요. 이건 명령이에요.”
화장기 없는 청순한 얼굴의 홍영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도현은 얼떨결에 손가락을 걸었다.
홍영이 힘들어하는 것 같아 정말 고심 끝에 어렵게 내린 결정이었는데 그녀가 오히려 이계에 가서 얼음탑주를 혼내 주라고 하니 도현은 심적으로 든든해졌다.
“고마워요, 홍영 씨.”
“저녁은 집에서 먹어요. 된장찌개 맛있게 끓여 줄게요.”
도현에게 싱긋 웃어 보인 그녀는 기어를 바꿔 차를 출발 시키려다가 움찔했다. 도현이 그녀의 몸을 끌어당겨 깊은 키스를 했기 때문이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사람들 쳐다보는데.”
차를 잠시 댄 도로가는 행인들이 많은 지점이었다.
“홍영 씨도 조금 전에 키스했잖아요. 그래서 이번엔 내가 한 거고.”
도현은 더듬거리며 답했다.
“그건 그냥 가볍게 한 거죠. 이렇게 오래 하면 어떻게 해요?”
얼굴이 붉어진 그녀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자신에게 쏠리는 것 같아 서둘러 차를 출발하려 했다.
그때 조수석 창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그는 다름 아닌 서지철이었다.
서지철은 근처에 위치한 유료 주차장에 차를 대고 도장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가는 길에 차 안에서 키스를 나누고 있는 도현과 홍영을 목격한 것이다.
“오랜만입니다, 백 관장님.”
차창을 내리는 도현을 향해 서지철이 정중하게 인사했다. 3개월간 도현과 계약을 맺고 도장 주변을 감시하는 역할을 해 오고 있던 그는 도현을 단순한 의뢰인 이상으로 대우하고 있었다.
취영산에서 본 도현의 놀라운 검술 솜씨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딸에게 주라며 영국에서 사 온 뮤직 박스 선물을 준 도현에게 인간적인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해결사 직업을 갖게 된 이후로 누군가에게 마음을 터놓고 지낸 적이 거의 없는 서지철이 백도현에게만큼은 진심이 섞인 미소를 보였다.
“아주 보기 좋던데요.”
“보셨습니까?”
도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수련은 잘 마치셨습니까?”
“예.”
“다치셨나 보군요.”
서지철의 시선이 붕대에 감긴 도현의 머리로 향했다.
“조금요.”
“혹시 누가 습격을 했습니까?”
서지철의 목소리가 은밀하게 이어졌다.
“그동안 도장 주변에는 수상한 자들이 보이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오해하는 서지철에게 도현이 웃으며 말했다.
“수련을 하다 실수로 다친 겁니다.”
“아, 그러시군요.”
고개를 끄덕인 그는 선글라스를 고쳐 쓰며 말했다.
“그럼 또 뵙겠습니다.”
서지철은 운전석에 앉아 있는 홍영에게 눈인사를 건넨 뒤, 차에서 떨어져 행인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잠시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던 도현은 홍영에게 물었다.
“내가 없는 동안 용주와 서 팀장이 다투거나 그런 일은 없었죠?”
“그럼요. 용주 씨가 함부로 그럴 사람은 아니잖아요. 장난기는 많아도요.”
“먼저 들어가요. 마트에서 장 볼 게 있어요.”
도장 건물 앞 길가에 차를 세운 홍영이 말했다. 도현은 차에서 내리다가 운전석에 앉아 있는 홍영에게 물었다.
“같이 갈까요?”
“아니에요. 혼자 가도 돼요.”
미소를 보인 그녀가 멀어지자 도현은 몸을 돌려 우뚝 서 있는 5층짜리 도장 건물을 바라봤다.
‘변함없구나.’
아버지가 도장 간판을 걸던 2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건물의 외양은 달라진 게 거의 없었다.
이계에서 얻은 금화로 이 건물을 구입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쯤 이 건물은 새로운 주인의 품에 들어가 재건축을 위해 해체 단계에서 있을 것이다.
이계는 그에게 시련과 죽음의 위기를 던져 주기도 했지만 이렇게 그가 꼭 필요한 것을 보충해 주는 창구 역할도 했다.
‘빈손으로 돌아온 적이 없었는데, 이번엔 금화 한 개 없이 돌아왔네.’
반돌로에게 받은 금화 6만 개 가치의 보석들은 땅을 사는 데 반 가까이 들어갔고, 일부는 용병들과 인부들, 일꾼용 몬스터를 고용해 발굴지 기반을 다지는 데 소비됐다.
그래도 남은 보석들이 상당해서 도현은 그것들 중 일부를 금화로 교환해 상자에 담아 신전 지역 발굴지 숙소에 보관 중이었다.
대략 금화 3천 개 정도였다. 얼음탑과 베일 가문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그는 케일 경을 만나고 온 후, 숙소에서 금화 상자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어쩔 수 없지. 다음에 가지고 와야지.’
그는 반돌로에게 고대 왕궁의 권리를 포기하는 대신 금화 12만 개 가치의 보상금을 받기로 했다. 그런데 아직 반밖에 받지 못했다.
하지만 얼음탑의 습격으로 반돌로와 케일 경이 죽고 고대 왕궁이 있는 베일 가문의 발굴지까지 빼앗긴 이상, 남은 보상금을 달라고 주장하기 애매한 상태가 돼 버렸다.
도현은 맑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계의 하늘과 비슷한데, 주변은 하나도 닮지 않았다.
옷차림도 달랐고, 말과 마차 대신 차량들이 도로 위를 달렸다. 사람을 해할 만한 무기를 대놓고 허리에 차고 다니는 사람 또한 찾아볼 수 없는 곳.
육체적인 힘보다는 보이지 않는 사회시스템이 사람들 간의 관계를 조율한다.
해가 옆으로 많이 기울어진 상태였지만 5월의 햇살은 눈이 부셨다.
하늘에서 시선을 뗀 도현은 페인트가 칠해진 지하 도장에 들어가 도복으로 갈아입고 5층으로 올라갔다.
지하 도장 문은 활짝 열어 놨다. 페인트 냄새가 완전히 빠지려면 하루 이틀은 필요할 것 같았다.
5층 도장에 도착한 도현은 철호와 용주가 진검 대련을 하는 장면을 말없이 지켜봤다.
채채챙. 챙챙.
진검 대련에 임하고 있는 그들의 얼굴은 일절 가벼움이 없었다. 한순간에 상대방의 목숨을 취할 수 있는 진검이었기 때문에 신중한 얼굴이었다.
호검술에 정통한 그들은 상대방이 펼치는 검술을 꿰뚫어 보고 있어서 승부는 예측하기 어려웠다.
허리를 베어 오는 용주의 검을 옆으로 쳐 낸 철호가 몸을 회전하며 검을 사선으로 그었다. 호랑이가 앞발로 상대의 목을 내려치듯, 그 위세가 아주 강했다.
검광이 용주의 상체를 휩쓸려 할 때 용주의 검이 어느새 철호의 목을 관통하려 했다.
흠칫한 철호가 사선으로 긋던 검을 회수하며 급히 뒤로 물러났다.
쾌검으로 분위기를 반전시킨 용주가 그를 쫓아가며 연거푸 찌르기를 일곱 번이나 펼쳤다.
차차차창창. 창창.
철호는 도장 안을 넓게 활용했다. 뒤로 물러나며 용주의 쾌검을 놓치지 않고 막아 낸 그는 쫓아오는 용주의 검을 피하다가 벽을 디딤돌 삼아 뒤로 몸을 한껏 젖혔다.
용주의 검이 활처럼 꺾인 철호의 등 아래로 스치듯 빠져나갔다.
몸을 회전시키며 밑으로 떨어지던 철호의 팔꿈치가 용주의 어깨를 가격했다.
검술은 임기응변도 중요한 법. 철호는 적절한 타이밍에 용주가 예상하지 못한 신체를 이용해 공격한 것이다.
용주는 어깨의 고통을 참으며 발등으로 철호의 복부를 힘차게 걷어찼다. 철호가 팔꿈치 공격을 하느라 약간의 틈을 보인 걸 그 또한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인상을 쓰며 물러나는 건 철호가 아닌 발로 걷어찬 용주였다. 철호의 복부에서 반탄력이 생겨나 용주의 발에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이얏!”
철호가 고리눈을 뜨고는 패도적인 기세로 달려들었다.
채에엥!
긴 여운이 느껴지는 금속성이 도장 안을 가득 메웠다.
두 자루 검이 교차된 상태에서 용주와 철호는 서로의 눈을 노려보며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기예잡술서상의 외공은 피부를 단단하게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근력도 강하게 해 준다. 검정 도복을 뚫고 나올 정도로 부풀어 오른 철호의 근육들이 꿈틀대며 엄청난 힘으로 용주의 검을 서서히 밀어냈다.
주르르륵.
검을 들고 버티고 있던 용주의 맨발이 철호의 힘에 뒤로 조금씩 밀려났다.
‘철호 형의 근력이 요즘 들어 무지막지하게 증가하고 있어. 외공이 경지에 이른 건가?’
철호는 서른여섯 개의 혈도 중 다섯 곳의 혈도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그것 때문인지 몰라도 얼마 전부터 힘이 상승해서 무거운 역기도 쉽게 들며 껄껄댔다.
‘안 되겠어.’
용주는 내공을 끌어 올려 대항했다. 밀려나던 용주의 몸이 땅에 뿌리를 내린 거목처럼 딱 고정됐다.
‘전진!’
용주가 내공을 더욱 끌어올리자 승기를 잡은 듯 보였던 철호의 몸이 검과 함께 밀려나기 시작했다.
찌이이이익.
버티다 뒤로 밀리는 철호의 맨발바닥이 마룻바닥과 강한 마찰을 일으키며 소음을 만들어 냈다.
수세에 처한 철호는 묵직한 기합을 내지르며 천지를 삼킬 듯한 눈빛을 토해 냈다. 용주의 내공이 만들어 내는 힘에 밀리던 철호의 몸이 태산처럼 무거워지더니 더 이상 뒤로 밀리지 않았다.
팽팽한 힘겨루기가 한동안 지속됐다.
“힘들다. 그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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