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 임팩트-307화 (307/575)

[307] 디 임팩트 13권 7화

철호의 말에 용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거두고 물러났다. 둘 다 얼굴이 땀범벅이었다.

“병원은 잘 다녀왔어?”

철호는 도복 소매로 땀을 닦으며, 다가오는 도현을 응시했다.

“네.”

“아까는 눈치 없이 왜 있는 대로 말한 거냐? 홍영이가 얼마나 놀랐겠어. 위험했던 일들은 우리끼리만 얘기하고 말지.”

철호가 도현을 나무랐다. 그러자 용주가 나섰다.

“그거야 형이 자꾸 물어봐서 그렇게 된 거죠. 도현이라고 홍영 씨 걱정을 안 했겠어요?”

“아, 그랬나?”

철호는 진검을 칼집에 넣으며 헛기침을 했다.

“홍영 씨는?”

“장 볼 게 있다고 마트에 갔어. 조금 있다 올 거야.”

“홍영 씨가 병원 가는 길에 아무 말 안 했냐? 표정이 싸늘하던데.”

눈치 빠른 용주가 물었다.

“조심하라고 그러지 뭐.”

도현은 차 안에서 주고받은 이야기를 다 하기도 뭐해서 짧게 대꾸했다. 하지만 용주와 철호는 병원을 다녀오는 동안 홍영과 도현 사이에 적지 않은 대화가 오갔을 것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철호는 사범실에서 물을 마시고 돌아와 도현에게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너 이계에 다시 갈 거냐?”

“당장은 아니지만 준비가 되면요.”

“형은 말이다. 네가…….”

뭔가 말을 할 듯 입을 몇 번 오물거리던 철호가 두툼한 입술을 다시 굳게 닫았다. 그러더니 도현의 어깨를 힘 있게 토닥였다.

“아니다. 네가 알아서 잘하겠지. 형은 널 믿는다.”

도현이 위험을 무릅쓰고 이계에 가지 않으면 했지만 철호는 동생의 상황 판단력을 믿기로 했다. 누가 뭐래도 도현은 호검술을 계승한 2대 관장이자 역경을 딛고 이계에서 견뎌 온 강자였다.

그런데 말 몇 마디로 그의 행동을 구속할 수는 없었다.

“샤워 좀 하고 옷 좀 갈아입어야겠다. 저녁때 누굴 만나기로 해서 말이야.”

돌아서는 철호에게 도현이 말했다.

“형, 오른쪽 어깨는 이제 거의 나은 거죠?”

“어, 그렇지. 이게 다 네가 전수해 준 호심공 덕분이다.”

“아니에요, 형. 몇 달을 포기하지 않고 매달린 형의 의지 때문이죠.”

철호는 탈의실 앞에서 피식 웃으며 오른팔을 들어 손가락을 길게 내뻗었다. 어깨는 더 이상 아프지 않았고 손가락 끝까지 힘이 느껴졌다.

“도현아, 몸 나으면 이계에서 터득했다는 비검술 좀 보여 줘. 보고 싶다.”

“그럴게요, 형.”

도현은 철호가 들어간 탈의실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용주가 옥상으로 가자는 눈짓을 했다. 그의 손에는 언제 챙겼는지 담배와 라이터가 들려 있었다.

옥상으로 올라간 용주는 그의 전용 좌석처럼 된 철제 의자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너 없는 동안 가끔 올라와서 이렇게 담배 폈다.”

“잘했다.”

“내공이 생겨도 담배는 억지로 못 끊겠어. 그래서 그냥 즐겁게 피우려고.”

용주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담배 연기를 도현에게 ‘후우’ 하고 뿜어내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뭔가 번쩍인다 싶더니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담배가 사라진 것이다.

“어, 내 담배?”

용주는 옆에 서 있는 도현을 봤다. 도현의 손에 그의 담배가 들려 있었다.

“너 폭주 후유증으로 당분간 내공을 사용하면 안 된다면서?”

“내공 사용 안 했어.”

“그런데도 이렇게 빨라? 손에 모터 달았냐?”

“용주야, 주성하에겐 연락 없었어?”

도현이 담배를 돌려주며 물었다.

“없던데. 특별한 일이 없나 봐.”

주성하와 료쿄는 도현에게 목숨을 보장받으면서 태선군을 상대하는 데 협력하겠다고 약조를 했다. 그뿐만 아니라 담기량의 은거지를 찾으면 함께 공유하겠다고 맹세했다.

“도현아, 담기량의 은거지 말이야. 일전에도 말했지만 찾고서 입 싹 닦으면 누가 아느냔 말이지. 몸 나으면 중국에 슬쩍 한번 다녀와라. 그 사람들 긴장 좀 타게. 그래야 불안해서라도 너 속일 생각을 하지 않지.”

도현은 기예잡술서에 숨겨진 지도 한 장을 통해 고수의 흔적을 찾아내는 게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료쿄가 날 다시 보면 반가워할까?’

탐사를 하던 료쿄는 도현의 방문을 달가워하지 않았었다. 검술에 자부심이 높은 그녀로서는 젊은 검객인 도현에게 패한 게 자존심에 흠집이 날 만큼 충격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도현은 검을 깊게 수련한 사람으로서 그녀의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차갑고 고집스러운 일면이 웃는 낯으로 말하는 주성하보다 더 신뢰가 갔다.

“무슨 생각 해?”

용주가 깊이 흡입한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물었다.

“응? 아냐, 아무것도. 관원들은 어때?”

“요즘 이 피디와 김 작가가 바쁜가 봐. 회사 일에 치여서 저녁때 시간을 좀처럼 내기 힘들어해. 지난주에는 한 번도 못 왔고, 그 전 주에는 두 번인가밖에 못 왔어. 듣기론 이 피디가 맡은 봄 개편 프로그램이 시청률이 워낙 안 나와서 비상인가 봐.”

“그래…… 호태식 씨는?”

“꾸준히 나오고 있어. 그 사람마저 안 나왔으면 나 정말 심심할 뻔했다.”

머리를 긁적인 용주는 가져다 놓은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었다.

“사범으로 도장에 매일 묶여 있는 게 힘들지? 관원도 없고.”

“아니야, 인마. 힘들긴. 없으면 없는 대로 그냥 가는 거지. 이 피디나 김 작가가 아예 안 나온다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무엇보다 난 도장에 묶여 있다고 생각 안 해. 매일 검을 들고 수련할 때마다 몸속에 아드레날린이 폭발적으로 솟구친다고. 호심공을 통해 내공도 쑥쑥 늘고 있고. 그런 즐거움이 세상에 또 어디 있냐?”

담배를 비벼 끈 용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옥상 난간으로 걸어갔다.

바람이 불어와 용주의 도복 자락을 살랑 흔들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번에 네가 빈손으로 돌아왔다는 거야. 네가 가지고 오는 금화에 늘 가슴이 설레었는데.”

“…….”

“수중에 돈이 생겼으면 게이트를 팍 열고 넘어올 것이지, 왜 시간을 끌어.”

용주는 금화 상자를 숙소에 남겨 두고 왔다는 도현의 말을 흘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잘하자. 그리고 얼음탑주 녀석은 반드시 혼내 주고. 넌 할 수 있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인 용주에게 도현의 주먹이 날아갔다.

“아, 왜 때려, 자식아! 다 널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아아!”

도현의 주먹질을 피하며 용주는 옥상을 뛰어 내려갔다.

“그 돈 꼭 가지고 와라! 알았지!”

옥상에서 사라졌지만 용주의 목소리는 여전히 옥상에 맴돌았다.

용주가 담배를 피우며 앉아 있던 의자에 도현이 천천히 앉았다. 낮에 페인트칠을 억지로 하느라 팔이 떨어질 것처럼 아팠다. 그렇지만 마음은 너무도 편안했다.

그를 걱정하는 홍영과 철호 그리고 금화 얘기를 꺼냈지만 핵심은 이계에 갔으면 반드시 돌아오라는 용주의 숨은 말뜻.

도현은 두 눈을 감고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좋다.’

‘답답하군.’

철호는 오랜만에 입어 보는 정장이 어색했다. 그렇지만 헤어진 그녀와 1년 만에 다시 만나는 자리라서 그 불편함을 감수하기로 했다.

‘낮에 도장 페인트칠도 하고, 도현이도 이계에서 돌아오고, 모든 게 잘되고 있어.’

철호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박세중과의 경기에서 지고 어깨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망가졌을 때, 그녀는 홀연히 떠났다. 오직 그녀 하나만을 보고 호검술 도장을 떠나 격투 선수로 살아온 철호로서는 상심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미웠지만 그럴수록 그녀와 함께했던 많은 시간들이 떠올라 괴로움으로 점철된 밤이 계속 이어졌다.

고시원에서 술에 찌든 채 살게 된 원인들 중 망가진 어깨로 인해 격투 선수로 재기할 수 없다는 아픔보다는 그녀의 부재가 더 큰 비중을 차지했다. 같은 보육원 출신인 그녀는 그만큼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런 그녀에게서 떠난 지 1년 만에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기사님, 여기서 세워 주세요.”

택시에서 내린 철호는 가로수길을 천천히 걸었다. 약속된 장소인 찻집이 점점 가까워졌다.

‘무슨 일로 만나자는 걸까? 나와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건 아닐까? 그녀 목소리는 따뜻했는데…….’

우락부락한 인상의 철호였지만 찻집의 문을 열 때는 가슴이 너무 고동쳐서 숨을 제대로 쉬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곧 그녀를 만나게 된다. 먼저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어깨 부상이 다 나았다고 자랑할까?’

온갖 생각을 하던 철호는 찻집 문을 연 상태로 멍하니 서 있다가 찻집 종업원이 쳐다보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안으로 완전히 들어섰다.

철호는 안을 둘러봤다.

그녀와 헤어지기 전에 자주 들렀던 한적한 가로수길 찻집은 일요일 저녁치고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바로 한눈에 띄었다. 아니, 아마도 사람이 가득했어도 그녀를 바로 찾는 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벽 쪽에 붙어 있는 원목 테이블로 다가간 철호는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윤희야.”

고개를 숙이고 뭔가 생각하는 얼굴로 앉아 있던 윤희는 고개를 들어 철호를 봤다.

철호보다 세 살 적은 그녀는 갈색으로 물든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귀여운 얼굴상의 여자였다.

눈이 조금 크고 보조개가 있어 웃을 때 보기가 좋았다.

잠시 철호를 올려다보던 그녀는 앞을 가리켰다.

“앉아, 오빠.”

의자에 앉은 철호는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생각하며 시간을 끌었다. 결국 먼저 입을 뗀 건 윤희였다.

“정장 입었네?”

“응? 어, 이 옷.”

“정장 답답하다고 싫어했잖아.”

“그냥 입어 봤어. 이상해?”

“아니, 보기 좋아서.”

윤희의 미소에 긴장됐던 철호의 마음이 조금씩 풀어졌다. 종업원에게 차를 주문한 그들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오랜만에 만난 어색함을 해소하려 했다.

“그동안 잘 지냈어?”

“응. 오빠는?”

“나도 그럭저럭.”

“전화번호는 왜 바꾼 거야? 오빠 연락처 알아내려고 고생 좀 했어.”

“그렇게 됐어. 외부와 연락 끊고 혼자 있고 싶어서…….”

“그렇구나.”

종업원이 차를 놓고 가자 그들은 잠시 찻잔에 시선을 두며 대화가 끊긴 시간을 가졌다.

차를 한 모금하며 탁자 너머 철호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던 윤희가 조용히 물었다.

“오빠, 오랜만에 보니까 반갑다.”

“그래?”

철호의 얼굴이 살짝 상기됐다.

“오빤 요즘 뭐 해?”

“일하고 있어.”

“무슨 일?”

“홍 반장님 밑에서 힘쓰는 일.”

“홍 반장? 형사야?”

그녀의 물음에 철호가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인력소개소에 홍 반장님이라고 있어. 내가 일자리 없어 힘들어할 때 챙겨 주신 분. 막노동하고 있거든.”

“막노동? 어깨 다친 사람이 그런 일 할 수 있어?”

“하고자 하면 못할 일이 뭐가 있겠니?”

철호는 힘들었던 시기를 생각하며 찻잔을 들었다.

“열심히 살았구나…….”

“배고프지? 나가서 저녁 먹을까?”

“아니야, 오빠, 나 조금 있다 가야 돼.”

“어, 그래?”

철호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단단하고 두툼한 손가락으로 찻잔을 괜히 들었다 놨다 했다.

“왜 전화한 거야?”

“다른 게 아니라 부탁할 게 있어서.”

“부탁?”

“오빠, 3천만 원만 구해 주면 안 돼? 나중에 꼭 갚을게.”

찻잔을 만지작거리던 철호의 손길이 뚝 멈췄다.

“보육원 출신이라서 일가친척도 없고, 아는 사람이라고는 오빠밖에 없잖아. 부탁이야, 3천만 원만 구해 줘. 급히 쓸데가 있어서 그래.”

부탁이라고 하지만 마치 맡긴 돈을 찾으려고 온 사람처럼 당당하게 말하는 윤희의 태도에 철호의 인상이 서서히 굳어져 갔다.

그녀와 헤어질 때도 그녀는 적지 않은 것을 가지고 갔다. 그가 격투 선수를 하며 사 준 차와 귀금속, 상당한 예금.

그와 가깝게 지낸 사람이 호구 같은 인생이었다며 정신 차리라고 말했을 때도 그는 보육원에서 함께 자란 윤희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하려 했다. 남녀 사이에 누가 이득을 보고 누가 손해를 봤다고 따지는 것은 그의 성격상 맞지도 않았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1년 만에 연락이 와 부푼 마음을 가지고 이곳에 온 철호는 윤희가 돈 때문에 온 것을 알게 되자, 섭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윤희야, 우리 지금 만난 지 몇 분 안 됐다. 그런데 돈 얘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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