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 디 임팩트 13권 8화
“조금 있다 가야 돼서 그래.”
“다른 이유는 없었던 거야? 내게 전화한 이유가?”
“다른 볼일이 오빠하고 뭐가 있겠어?”
“뭐?”
철호의 눈빛이 흔들렸다.
“나 오빠 알아. 나 아직 좋아하잖아. 돈을 구해 오면 내가 생각해 볼게. 우리 사이 다시 이어지는 거. 우리 전엔 좋았잖아.”
윤희가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있는 철호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3천만 원이 필요해. 해 줄 수 있지? 그렇지?”
“윤희야.”
“보육원에서도 그렇고 사회에서도 그렇고, 오빤 나를 위해 뭐든지 열심히 했어. 이번에도 그럴 거야. 내 말 맞지?”
찻집에 들어오며 기분 좋게 두근거렸던 가슴이 어느새 싸늘히 식어 버렸다. 돌덩이처럼 감각이 없어진 심장이 뛰는지 안 뛰는지 철호는 판단할 수가 없었다.
“윤희야, 네 앞에 있는 장철호가 겨우 3천만 원짜리로밖에 보이지 않는 거니? 그 돈을 구해 오면 다시 사귀겠다고?”
“오, 오빠?”
“차라리 오늘 만나지 말 걸 그랬다. 그랬다면 적어도 보육원에서 보조개 깊은 얼굴로 해맑게 웃던 네 모습이 영원히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았을 텐데.”
철호는 씁쓸한 얼굴로 윤희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돈은 없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네 스스로 해결해.”
냉정히 말한 철호가 테이블 사이를 빠져나가려 할 때 윤희가 날 선 어조로 말했다.
“한 팔밖에 사용 못하는 사람을 누가 믿고 의지하고 싶겠어!”
앙칼진 그녀의 말에 철호의 짙은 눈썹이 여러 번 꿈틀댔다.
“믿고 의지해? 그런 감상적인 말 하지 마. 격투 선수로 끝난 내게서 더 이상 돈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았겠지. 그래서 넌 그런 감상적인 핑계를 대고 떠난 거야. 내게 시간조차 주지 않고! 그리고 장애가 있다고 해서 인생을 못 사는 건 아니야. 말 함부로 하지 마.”
철호는 어깨 부상이 치유돼서 오른팔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말하지 않았다. 그런 모습을 그녀에게 보여 주는 건 아무 의미도 없을 것 같았다.
“잘 살아, 연락하지 말고.”
“정말 이럴 거야! 나 오빠 동생 윤희야! 보육원에서 업어 주던 윤희!”
찻집에 몇 안 되는 사람들이 쳐다봤지만 윤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윤희는 네가 아니야.”
“좋아, 다시 안 보겠다면 마음대로 해. 그래도 3천만 원은 구해 줘. 마지막 이별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찻집을 나가려는 철호의 앞을 가로막으며 윤희가 말했다.
“비켜.”
“가게 하다가 빚졌어. 내가 잘못돼도 좋아?”
“비키라고 했지!”
철호의 고함 소리에 놀란 윤희가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사나운 눈길로 윤희를 노려보던 철호는 찻값을 계산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찻집을 나섰다.
홍영은 주방에서 혼자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병원에서 오는 길에 저녁으로 된장찌개를 해 주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마트에서 온갖 음식 재료를 사 와 잔칫집 분위기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잡채도 하고, 여러 종류의 나물도 무치고, 전도 붙이고, 김치찌개와 된장찌개를 동시에 준비하는 그녀는 손이 네 개라도 부족해 보일 지경이었다.
“도와줄까요?”
보다 못한 도현이 주방에 있는 그녀 뒤에서 어슬렁거리다가 슬며시 물었다.
“괜찮으니까, 용주 씨하고 TV 보고 있어요.”
주방에서 쫓겨난 도현은 거실 소파에 반쯤 드러누워 TV를 보며 깔깔대는 용주 옆에 앉았다.
“뭐가 그리 재밌냐?”
“리얼리티 생존 게임인데 상대방이 지어 놓은 움막집에 들어가서 과일 훔쳐 오다가 딱 걸렸거든. 뒈지게 얻어터지고 있어.”
도현이 보니 출연자들이 코피가 나도록 싸우고 있었다. 실제 상황이라는 자극적인 문구로, 방송 프로그램은 연출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었다.
‘방송에서 저래도 되나?’
지상파가 아닌 케이블 방송의 19금 프로그램이었지만, 폭력성이 도드라진 모습이었다.
“이러니 이 피디가 밀리지. 내가 봐도 백두TV 방송은 밋밋하다고. 요즘은 자극적이지 않으면 안 돼요. 경쟁 프로그램에 밀린다고.”
“이 시간에 이 피디 프로그램이 해?”
“어, 야, 보지 마. 되게 재미없어. 나도 웬만하면 참고 보려고 했는데, 못 보겠더라. 야, 틀지 말라니까!”
용주가 말렸지만 도현은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렸다.
다양한 애완동물들과 그 주인들이 나와 스토리를 만들어 가는 프로그램이었다. 자극적이진 않지만 나름 동물과 사람이 교감하는 감동적인 장면들이 있어서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지루하다. 돌리자.”
한 5분을 같이 보던 용주가 소파에서 몸을 뒤척였다.
“난 괜찮은데.”
사실 도현은 이계에서 수많은 폭력적인 상황을 경험해서 인지 몰라도 오히려 잔잔한 프로그램이 더 마음에 들었다.
도현은 용주의 성화에 못 이겨 리모컨을 돌려줬다. 용주는 다시 19금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용주야, 철호 형 정장 입고 누굴 만나러 간 거야?”
“응? 철호 형? 모르지 나야. 너도 봤잖아, 아까 나도 어디 가느냐고 물어본 거.”
“표정이 무척 설레 보이던데. 그동안 들은 얘기 없어?”
“없었어. 나도 여자 만나려고 하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긴 하는데…… 나중에 물어보자고.”
멋진 정장 차림으로 보기 괜찮으냐고 몇 번이나 확인하던 철호의 설레던 눈빛을 떠올리던 도현은 소파에서 일어나 거실에서 몸을 부드럽게 움직였다.
좁은 공간이었지만 호심공의 호흡법을 유지하며 몸을 움직이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다.
몸이 아픈 것을 보듬어 주고 기가 흐르는 곳이 정상이 되도록 내상을 치료한다. 자체 치유력을 가지고 있는 호심공의 효능이었다.
“저 사람 완전히 독하네. 아까 그렇게 얻어터지고 또 훔치러 가네. 이번엔 성공하려나?”
TV에 정신이 팔린 용주는 긴장감 가득한 얼굴로 말하다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젠장, 다음 주로 넘어갔네.”
불평을 토해 내며 TV를 끈 용주는 거실에서 호심공을 수련하는 도현을 잠시 응시하다가 화장실로 향했다.
“많이 쏟아 내고 많이 먹어야지.”
용주의 큰 목소리에 주방에 있던 홍영은 피식 웃다가 고개를 돌렸다. 초인종 소리가 들린 것이다.
“내가 나가 볼게요.”
호심공을 펼치던 도현이 현관문을 열었다. 철호가 팔에 정장 상의를 걸치고 와이셔츠 단추를 푼 상태로 그를 보며 웃고 있었다.
“아니, 형, 누구 만난다면서요?”
“만났다.”
“그런데 벌써 와요? 저녁 식사도 하고…… 그럴 줄 알았는데요.”
“그렇게 됐다.”
희미한 미소를 보인 철호는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손에는 술병이 든 봉지가 들려 있었다.
“너 술 마셔도 되지?”
“네, 괜찮아요.”
“잘됐다. 즐겁게 마시자, 우리. 너도 돌아왔고, 저기 홍영이가 음식도 많이 해 놨고. 용주는 어딨어?”
철호가 거실을 둘러봤다.
“화장실요.”
“그래, 모두 모였네. 정말 기분 좋은 날이다. 술 마시자, 우리!”
도현은 물끄러미 철호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어디 가냐?”
“술이 그걸로 되겠어요? 더 사 올게요.”
희연
“동시간대 시청률 꼴찌네. 좋겠어, 이 피디는. 4주 연속 꼴찌 타이틀을 얻어서. 트로피라도 만들어 줄까?”
최 국장의 말에 이호선 피디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도 게시판 반응은 나쁘지 않습니다. 따뜻한 이야기라고요.”
“나는 차갑고 냉혹하더라도 불꽃처럼 뜨거운 시청률을 원한다. 광고 안 팔리면 네가 책임질 거야!”
최 국장이 목소리를 높이며 손바닥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지상파 시청률은 바라지도 않아. 주말 프로그램에 총력전을 펼치는 그들이니까. 하지만 다른 케이블 채널, 종편과는 비교해서 어느 정도 차이가 나야지. 시청률이 0.8프로가 뭐야, 0.8프로가! 너 죽을래!”
“살고 싶습니다.”
“너 지금 나랑 말장난하냐! 이걸 그냥 확!”
최 국장이 옆에 있던 음료수병을 집어 들었다.
“마셔, 이 자식아!”
“예?”
성질이 불같은 최 국장이 음료수병을 집어 던지는 줄 알고 기겁했던 이 피디는 음료수 뚜껑을 열어 내미는 최 국장의 행동에 당황해 눈을 깜빡거렸다.
“손 떨어진다.”
“잘 마시겠습니다, 국장님.”
이 피디는 몸을 돌려 오렌지 주스를 한 번에 마셨다.
“힘들지?”
“예? 아닙니다, 국장님.”
“내 잘못이 크다. 기획안을 봤을 때부터 너무 노멀하다고 생각했는데.”
은단을 꺼내 입에 털어 넣은 그는 잘근잘근 씹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가족들이 주말 저녁에 모여 TV를 함께 보는 시간대라서 혹시나 기대를 했다. 그런데 감동은 지상파가 더 크고, 자극적인 건 경쟁 채널에 밀려 버렸어.”
“연출을 잘못한 제 잘못입니다, 국장님.”
“경쟁 채널이 그 시간대에 19금 프로그램을 기습적으로 배치할 줄은 아무도 몰랐지. 그놈들이 머리를 잘 썼어. 혼자 사는 젊은 세대를 타깃으로 한 거거든.”
최 국장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은단을 입에 넣으며 말문을 열었다.
“우리도 세고 강한 걸로 나가야겠어. 선정적이고 폭력성이 짙은 걸로 말이야.”
“하지만 그것도 반복되면 피로도가 쌓입니다, 국장님.”
“자네가 연출하는 그 시간 때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우리 프로그램들이 위기에 직면해 있어. 자네도 알잖아, 색깔이 약한 프로그램은 이제 주목받지 못해. 지금은 19금 시대라는 거지.”
최 국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앞에 서 있는 이 피디에게 다가갔다.
“주말 저녁 시간대에 재방송 위주로 가던 게 본방으로 가면서 아주 피곤해졌어. 재방할 때보다 시청률이 떨어지면 곤란하잖아.”
“면목 없습니다, 국장님.”
“촬영분이 얼마나 남았나?”
“2주분 남았습니다.”
“스페셜 영상 포함시켜서 3주분으로 늘려 봐.”
“국장님, 스토리를 마무리 지으려면 이번 주 촬영을 진행해야 합니다.”
“내 뜻이 아니야. 위에서 내려온 주문이야.”
이 피디는 빈 주스병을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알겠습니다, 국장님. 후속은 정해졌습니까?”
“19금의 제왕이라고 작년에 너무 세서 보류한 기획안 있지? 그거 김주한 피디에게 맡겨 보려고. 아이템은 다 선정되어 있고, 출연진들만 정해지면 곧바로 촬영에 들어갈 수 있을 거야.”
김주한 피디는 이호선 피디의 입사 동기였다.
“편집이라도 잘해서 남은 3주간 꼴지라도 한번 면해 보라고.”
굳은 얼굴로 국장실을 나온 이 피디는 비상구 계단을 통해 아래층으로 내려가다가 주먹으로 벽을 치며 외쳤다.
“19금이면 다냐! 이개새끼들아!”
목에 핏대가 오를 만큼 고함을 치던 그는 주먹으로 재차 벽을 쳤다.
“30금까지 만들어라, 이 개새끼들아!”
지난 한 달간 시청률 때문에 쌓인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 이 피디는 다시 한 번 주먹질을 하려다가 멈칫했다.
한 번 더 벽을 치면 목검을 휘두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회사 일 때문에 도장을 결석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지만 짬이 날 때마다 틈틈이 호검술을 홀로 수련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씩씩대던 그는 자신이 맡고 있는 프로그램 사무실로 들어갔다. 김유진 작가를 포함한 네 명의 작가들이 우울한 표정으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고생한 만큼 시청률이 안 나오니 맥이 빠진 얼굴들이었다.
“국장님이 뭐래요?”
다크서클이 심해진 김유진 작가가 물었다.
“출연자들에게 연락해, 이번 주 촬영 없다고.”
“그럼 언제?”
“없어. 끝이야.”
“네? 그럼 우리 프로그램이…….”
김유진이 울먹이며 노트북 앞에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다른 작가들도 연쇄 반응을 일으키며 하나둘 눈시울을 붉히고 훌쩍였다.
“방송 물 먹으면서 이런 일 처음 겪어 봐! 왜들 그래?”
“귀여운 동물들을 다시 못 본다고 생각하니까 아쉬워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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