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 임팩트-309화 (309/575)

[309] 디 임팩트 13권 9화

“속 터지는 소리 하고 있네. 박 피디는 어디 있어?”

이 피디가 조연출을 찾았다.

“병원에요. 갑자기 코피 솟으면서 어지럽다고 해서요. 과로인가 봐요.”

뿔테 안경을 쓴 최 작가가 말했다.

“아유, 정말. 패잔병들이 따로 없네.”

“피디님, 손이 왜 그래요?”

김유진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이 피디의 손이 퉁퉁 부어 있었다.

“계단으로 내려오다가 미끄러졌어.”

“조심하시지.”

“자, 다들 정신 차리고 날 봐. 오늘은 모두 일찍 퇴근들 해. 푹 자고, 내일부터 편집 다시 들어간다.”

“네? 편집은 왜요?”

“3주짜리로 늘려야 해. 시간이 부족해 쳐 냈던 부분하고 전편에 좋았던 부분들 스페셜 영상으로 묶어서 한 주분 더 만들자고.”

이 피디는 작가들이 출연자들에게 연락하는 모습을 담담히 지켜보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담배를 챙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피디님.”

김유진이 부르는 소리에 복도를 걷던 이 피디가 돌아섰다.

“왜?”

“피디님 국장실에 갔을 때 백도현 관장이 연락했어요.”

“백 관장이?”

“네. 방송국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왔다가 전화했다고요. 시간 되면 점심 같이 먹자면서.”

“수련 끝내고 왔나 보네. 지금 기다린대?”

“네, 어떡하실 거예요?”

“뭘 어떡해, 만나야지. 너도 옷 입고 따라와. 밖에서 같이 먹자.”

이 피디와 김 작가는 회사 근처에 있는 작은 공원으로 걸어갔다. 모자를 쓰고 편안한, 캐주얼한 복장을 한 도현이 공원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백 관장님!”

김 작가가 외치는 소리에 도현이 책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머리가 전보다 더 많이 벗겨진 이호선 피디와 얼굴 살이 많이 빠진 김유진 작가가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얼굴들을 보니 마음고생이 심했나 보네.’

호태식을 포함해 세 명밖에 안 되는 소중한 관원들이었다. 그들이 스스로 그만두기 전까지는 관장으로서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게 도현의 책임이기도 했다.

“오랜만입니다, 이 피디님, 김 작가님.”

“안녕하십니까, 백 관장님.”

“반가워요, 관장님.”

가까이 다가와서 인사를 나누던 김유진의 시선이 도현의 머리로 향했다. 모자를 착용했지만 흰 붕대가 보였다.

“다치셨어요? 머리에 붕대가.”

“큰 상처는 아닙니다. 그보다 바쁜 두 분을 이렇게 불러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회사 일 때문에 정신이 없다고 하던데요.”

“별말씀을요. 자, 가시죠. 저쪽으로 가면 믿고 먹을 만한 식당이 몇 군데 있습니다. 오늘은 제가 점심을 사죠.”

이 피디가 웃으며 말했다.

“제가 사려고 했는데요.”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요. 여기까지 오셨는데 당연히 제가 사야죠. 가시죠.”

“가요, 관장님.”

김유진이 도현의 소매를 당기며 이 피디의 뒤를 따라갔다.

프로그램 폐지 소식에 우울해 있던 김유진은 도현을 보자 왠지 마음이 안정되었다. 그건 이호선도 마찬가지였다.

‘일부러 날 찾아온 게 분명해. 뜬금없이 방송국 근처에 무슨 볼일이 있었겠어? 그만큼 내가 관원으로서 듬직하다는 것이지. 보고 싶기도 하고.’

둘은 도현과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수다를 떨었고, 도현은 묵묵히 웃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그랬군요. 섭섭하시겠습니다.”

“어쩔 수 없지요. 시청률이 그렇게 안 나오니 저도 할 말이 없더라고요, 하하하.”

“어제 봤습니다. 이 피디님과 김 작가님이 만든 프로그램요.”

“아, 그러셨어요?”

이 피디와 김 작가는 도현의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다. 물을 한 모금한 도현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소박하지만 잔잔한 감동과 따뜻함이 있더군요. 참 잘 만드셨습니다. 재밌었어요.”

“정말 그렇게 보셨습니까?”

“네, 제가 거짓말을 할 것 같습니까?”

“아, 아닙니다. 관장님처럼 TV에 관심이 없어 보이는 분이 좋았다고 하니까 마음이 뭐랄까, 표현할 길이 없네요.”

도현의 평가에 감동한 이 피디와 김 작가는 나오려는 눈물을 억지로 감추려 노력했다.

시청률은 보잘것없지만, 엄격한 모습을 보이던 도현의 호평에 그들의 자존심이 세워지는 것 같았다.

“조만간 시간이 다시 나서 저녁 수련에 참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잘됐네요.”

“고맙습니다, 관장님. 오늘은 힘든 하루가 될 것 같았는데, 관장님이 오셔서 그 기분이 많이 풀렸습니다.”

“저도요.”

이 피디와 김 작가의 밝아진 표정에 도현은 오늘 이들을 만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검을 다루는 사람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손을 소중히 다뤄야 합니다. 벽을 치신 것 같은데, 화를 다스리는 것도 검객의 기본 마음가짐입니다.”

도현은 이 피디의 멍든 주먹을 지적했다.

“아까는 계단에서 넘어졌다면서요? 아니었어요?”

김유진이 쳐다보자 이 피디는 어색한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넘어지기도 했고, 화가 나서 벽을 주먹으로 몇 대 치기도 했어.”

“불쌍해라. 힘내요, 이 피디님.”

김유진이 옆에 앉은 이호선의 어깨를 토닥였다.

“자, 그만 일어날까요?”

도현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태식은 침을 꿀꺽 삼키며 목검 손잡이를 힘주어 잡았다. 도현이 보는 앞에서 그동안 갈고닦은 호검술 1초식부터 3초식까지 연속해서 펼쳐야만 한다.

“관장님이 승급을 인정하면 태식 씨는 다음 4초식으로 넘어가는 거고요. 아니면 1초식부터 3초식까지 다시 반복해서 수련해야 합니다.”

조금 전 용주가 한 말을 떠올린 호태식은 긴장한 눈빛으로 하체의 중심을 잡아 주는 보법을 밟으며 검을 절도 있게 휘둘렀다.

목검이지만 제법 힘찬 바람 소리와 함께 날카로움이 그의 주위를 감쌌다.

자세를 낮췄다가 상체를 앞으로 밀며 횡으로 긋던 목검을 방향을 바꿔 좌우로 한 번씩 그은 그는, 앞차기를 한 다음 풍차처럼 몸을 회전하며 검으로 크게 주변을 휩쓸었다.

그의 이마에서 땀 한 방울이 도장 마룻바닥으로 떨어졌다.

‘승급해서 꼭 호검술 4초식을 익혀야지!’

호태식은 평소보다 더욱 검에 집중해 호검술을 펼쳐 갔다.

도장에서 교육받을 때도 열심이었지만, 그는 집에서도 꾸준히 정신을 수양하며 검을 수련했다.

자신 있었지만 도현이 정좌한 자세로 바라보고 있자, 괜히 마음이 떨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해결사로 활약할 때 맨손으로 전문 칼잡이 여섯 명을 상대할 때보다도 더 긴장됐다. 사실 등에서부터 허리까지 내려온 긴 상처는 그때 입은 부상의 흉터였다.

‘얼굴 보기 힘든 백 관장이 언제 또 훌쩍 수련한다고 떠날지 몰라. 지금 기회가 왔을 때 승급해야 돼.’

호태식은 절도 있는 자세로 호검술 1초식부터 3초식까지 풀어낸 다음, 곧장 쉬지 않고 같은 초식을 반복해서 펼쳤다.

그런데 검세가 달라졌다. 앞선 호검술이 절도가 있는 반면 연결 동작이 딱딱했다면, 지금은 물 흐르듯 초식과 초식 사이가 매끄러워 한결 보기가 좋았다.

물론, 도현과 용주의 눈엔 초식의 연결이 매끄러워졌다고는 하지만 검이 일정한 힘을 유지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게 보였다.

그래도 몇 개월 만에 저 정도 성과하면 칭찬받을 만했다.

“이얏!”

마지막 큰 기합 소리와 함께 검술을 마친 호태식은 목검을 거두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수고하셨습니다. 목이 마를 것 같은데, 물 좀 마시고 오세요.”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승급 시험을 마친 호태식의 얼굴엔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고, 입술은 아주 건조해 보였다.

정수기로 걸어가는 호태식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도현이 용주에게 고개를 돌렸다.

“날 기다릴 필요 없이 네가 해도 됐잖아.”

“야, 그래도 관장인 네가 한마디 딱 해 주면서 승급 심사를 보는 게 좋지. 관장의 권위도 살고. 관원들도 이런 절차를 거쳐야 자신들이 배우는 게 정말 값진 거구나 느낀다고.”

낮에 이 피디와 김 작가를 만나고 온 도현은 호태식과 인사를 나누려고 5층에 올라왔다가 용주의 갑작스러운 승급 심사 요구를 받고 응한 것이었다.

호검술 1초식부터 3초식까지는 입문이라고 할 수 있고, 4초식부터는 검술이 좀 더 정교해지면서 힘과 기량이 요구된다. 그 때문에 호검술 1초식부터 3초식까지 제대로 소화해 내지 못하면 다음 초식을 배워도 그 발전이 더디고 의미가 없다.

그게 승급 심사가 필요한 이유였다.

용주가 보기에 이 피디와 김 작가는 나름 열심히 하고는 있지만 최근에 호검술 3초식을 집중적으로 배울 때 결석 기간이 길었고 전체적으로 봐도 승급 심사는 무리였다.

하지만 호태식은 승급 심사를 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합격이지?”

용주의 귀엣말에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수련한 모습이 보여.”

작게 대답한 도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을 마시고 돌아온 호태식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앞으로 걸어간 도현은 얼굴에 한 가닥 미소를 보였다.

“합격입니다. 열심히 하셨네요.”

“감사합니다, 관장님!”

호태식은 기쁜 얼굴로 대답했다.

그는 호검술을 수련하는 게 좋았다. 새로운 초식을 배우고 그것들을 반복 숙달해 자기 것으로 만들 때 묘한 흥분이 느껴지곤 했다.

또, 검을 수련한다는 것은 정신 수양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서 시간이 갈수록 어딘지 자신이 좀 더 높은 곳을 향해 성장한다는 기분도 들었다.

실제로 무당인 큰누나는 그를 향해 손에서 검을 놓지 말고 꾸준히 수련하라고 했다. 그것이 양생의 길이라고 했다.

승급 심사를 통과해 뿌듯해하는 호태식에게 도현이 말했다.

“기념으로 우리 대련 한번 할까요?”

도현은 폭주 후유증으로 인해 몸이 정상이 아니었지만 호심공을 통해 가볍게 검을 휘두를 정도로 회복한 상태였다.

“영광입니다, 관장님.”

그동안 사범인 용주와 가끔씩 대련하기는 했지만 도현과 정식으로 검을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에게는 승급 선물로 이것만 한 것이 없었다.

목검을 들고 서 있는 도현의 자세에서 강한 압박감을 받은 호태식은 입술을 깨물고 허공으로 도약해 검을 내리그었다.

제법 빠른 검이었지만 도현의 검이 먼저였다.

따악.

허벅지를 맞은 호태식이 입을 벌리며 풀썩 주저앉았다.

“아이고, 관장님.”

“방금 제가 사용한 게 호검술 4초식입니다. 몇 번 더 경험 하다 보면 4초식이 어떤 초식인지 몸으로 터득하게 될 겁니다. 앞으로 4초식을 배우는 데 큰 도움이 되겠죠. 하지만 힘드시면 더 이상 안 해도 됩니다.”

“아, 아닙니다, 관장님. 도움이 된다면 계속해야죠. 관장님과 언제 이런 귀한 시간을 가지겠습니까?”

그 후로 목검을 수없이 맞은 호태식은 결국 도장 바닥에 쓰러졌다. 아팠지만 그는 진짜 검이 어떻게 날아오는지 어렴풋이 느낀 것도 같았다.

“승급을 축하합니다.”

도현은 쓰러져 있는 호태식을 일으켜 세워 주고는 따뜻한 손길로 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승급도 하고 도현과 차도 마신 호태식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도장을 나섰다.

“승급을 하니까 세상이 달라 보이네.”

대련하며 목검으로 얻어맞은 그는 몸이 쑤셨지만 견딜 만 했다.

“호검술 4초식을 배운다, 흐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횡단보도를 건넌 그는 편의점을 지나쳐 서지철이 있는 2층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서지철은 창가 쪽에서 도장 주변을 감시하며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호태식은 전화 통화하는 서지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그의 맞은편에 조용히 앉았다.

“지금은 곤란한데. 맡은 일이 있어서. 그래, 미안해. 다음에 도와주지.”

통화를 끝낸 서지철은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호태식을 쳐다봤다.

“왜 실실 쪼개면서 횡단보도를 건넜냐?”

“어두운데 그게 보였어요?”

“내 시력이 좌우 1.5야, 자식아. 컨디션 좋을 때는 2.0이고. 왜 웃었어?”

“형님, 저 승급 심사에서 합격했습니다.”

“태권도냐? 승급 심사가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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