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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임팩트-315화 (315/575)

[315] 디 임팩트 13권 15화

“말하긴 해야 하는데…… 여전히 마음이 뒤숭숭합니다. 단순히 생각하면 별거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들과의 신뢰에 금이 갈 것 같아 두렵기도 하고. 이런 약한 멘탈이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도장 사람들과 정이 깊게 들었나 봅니다, 그들의 시선을 신경 쓰게 되는 걸 보면. 갈게요.”

호태식은 방문을 닫고 사라졌다.

잠시 후, 닫혔던 방문이 드르륵 열리며 도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호태식이 나간 지 불과 10초도 안 되는 시간 차였다.

“왜 놀라십니까?”

도현이 안으로 들어서며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자신을 여기서 보자고 한 당사자가 정작 자신을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은 게 이상했다.

“아, 아닙니다, 아무것도.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네에.”

“이쪽으로 앉으시죠.”

서지철은 자리에 앉는 도현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방금 전에 나간 호태식과 혹시 마주치진 않았는지 걱정이 된 것이다.

‘태식이를 괜히 말린 건가? 도우려고 한 말이었는데.’

호태식이 말하기 전에 둘의 사이를 백 관장이 스스로 눈치채면 오히려 그게 더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다.

도현의 표정만으로는 호태식을 봤는지 안 봤는지 알 수 없었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자리에 앉은 도현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부드러운 미소였지만 서지철은 일전에 일식집에서 도현이 선보인 젓가락 신공을 떠올렸다.

당시 도현은 나무젓가락으로 사기 주전자에 구멍을 내는 건 물론, 집어 던져 문에 박히게까지 했다.

그때 싸늘했던 도현의 눈빛은 초원의 왕이자 맹수들의 왕인 사자의 눈빛과도 흡사해서 등골이 오싹했었다.

물론 그 이후로 다시는 도현의 그런 차가운 눈빛을 보지 못했지만, 서지철은 도현의 부드러운 겉모습에 숨겨진 그런 단면을 잊지 않고 있었다.

“관장님, 실례하지만 잠시 전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그러십시오.”

도현은 방을 나가는 서지철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의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다.

도현의 시선이 서지철의 소지품으로 보이는 노트북으로 향했다.

노트북은 상 한쪽 위에 놓여 있었는데, 조금 전까지 뭘 하고 있었는지 노트북 모니터가 위로 떠 있었다.

노트북에서 시선을 뗀 도현은 작은 방 안을 둘러보다가 왼편 벽면에 걸려 있는 족자 형식으로 된 수묵화를 발견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그림 앞에 섰다.

묵의 농도를 잘 조절해 여백의 미를 잘 살려 그린 그림은 강 위를 한가롭게 떠가는 나룻배 한 척과 강 뒤에 보이는 산 하나가 절묘하게 배치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시상이 떠오르게 만들었다.

화가를 알 수 없는 그림이었지만 도현은 그림에 흠뻑 빠져들어 수묵화 속에 있는 나룻배를 타고 강을 따라 흘러가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걸까, 이 배는…….’

도현은 노를 젓지 않고 나룻배에 누워 투명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햇빛도 희고, 바람도 희었다. 마음이 차분해지고 평화로운 느낌에 세상 근심이 다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사방이 차츰 어두워져 먹빛으로 물들더니 이내 강에 비를 쏟기 시작했다.

금세 불어난 강물의 영향으로 나룻배가 요동치며 빠르게 떠내려갔다.

한량처럼 나룻배에 누워 고즈넉함을 즐기던 도현은 별수 없이 일어나 하나뿐인 노를 잡고 배가 뒤집히지 않게 격랑 속에서 중심을 잡으려 애를 썼다.

하지만 거센 강물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배가 반파되어 그는 강물 속에 빠져 버렸다.

“백 관장님, 백 관장님.”

그림 속에서 낭패를 당한 도현은 멍하니 서 있다가 등 뒤에서 부르는 서지철의 목소리에 현실로 차츰 돌아왔다.

“그림이 마음에 드시나 보죠? 아까부터 계속 보고 계시던데요.”

“제가 오래 이 그림을 보고 있었습니까?”

그림 속에서 깨어난 도현이 살짝 놀라며 물었다.

“1시간 정도 됐습니다.”

“그렇게나 오래요?”

도현은 말을 하다 서지철 뒤에 있는 상을 봤다. 언제 왔는지 회를 비롯한 갖가지 음식이 보기 좋게 차려져 있었다. 종업원들이 가져다 놓을 동안 도현은 전혀 눈치도 못 챈 것이다.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용히 기다렸는데, 너무 오랫동안 그림을 보고 계셔서요. 별수 없이 제가 관장님을 불렀습니다. 괜찮으시죠?”

“그럼요. 실례했습니다. 저녁 먹자고 부르신 분 앞에서 제가 그림에 넋을 놓고 있었군요.”

도현은 사과를 하며 상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차려 놓은 음식이 아니라 벽면의 수묵화로 향했다.

‘기이한 경험을 했어. 정말 그림 속의 세상에 내가 들어가 있었던 것 같았어. 강에 빠졌을 때는 물의 차가운 감촉이 느껴질 만큼 생생했고.’

도현의 시선이 수묵화로 가 있자 서지철은 헛기침을 해서 그의 관심을 끌었다.

“차려 놓은 지 오래됐는데, 좀 드시죠.”

“아, 네. 미안합니다.”

도현은 그림에서 시선을 떼고 회 몇 점을 집어 먹었다.

“맛있네요.”

미소를 보인 도현은 서지철의 잔에 술을 따라 주고 자신의 잔에도 서지철이 따라 주는 술을 받았다.

“관장님, 일전에 주신, 제 딸아이 선물 말입니다. 뮤직 박스요.”

한동안 묵묵히 술과 음식을 먹던 서지철이 말문을 열었다.

“딸이 아주 좋아합니다. 자기 전에 몇 번이나 듣고 잘 정도로요.”

“그래요? 잘됐네요.”

“그런데 제가 관장님이 선물했다는 이야기는 안 했습니다. 얼떨결에 제가 사 온 것처럼 말해 버려서요.”

“하하하, 뭐 그게 큰일입니까, 따님이 좋아했다면 된 거죠.”

도현은 이혼한 그가 딸과 만나기 어려운 형편이라는 걸 지난번에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웃으며 말하는 모습을 보니 이혼한 부인과의 관계가 좋아진 건 아닌가 싶었다.

“아내가 재혼하기 전에 딸에게 의미 있는 선물을 한 것 같아서 기분이 아주 좋습니다.”

술잔을 들어 입에 가져가던 도현의 팔이 잠시 동안 멈췄다. 이혼한 부인과 사이가 좋아진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재혼하시는군요. 제가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괜찮습니다, 관장님.”

서지철은 젓가락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라에게는 좋은 아빠가 필요할 때니까요. 아마 아내도 그 점 때문에 재혼을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네에.”

둘은 한동안 별말 없이 술을 마시고 음식으로 배를 채웠다.

서지철은 아내와 딸 생각을, 도현은 그림 생각을 각각 하고 있었다.

그러다 서지철이 커다란 회 접시 한 개를 옆으로 밀어낸 후, 그 자리에 노트북을 올려놨다.

“관장님, 제가 오늘 보자고 한 이유는 이것 때문입니다.”

‘뭐지?’

도현은 시커먼 화면이 바뀌며 사람이 등장하는 동영상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건 그 동영상인데?’

도현은 노트북 속 동영상을 보다가 얼굴이 화끈거렸다. 김탁훈의 동영상이었는데 모자이크가 전혀 안 되어 있어서 김탁훈의 중요한 부위뿐만 아니라 여자의 나신도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관장님, 이 동영상 보신 적 있죠?”

“네. 김탁훈을 해외로 쫓아낸 동영상이 아닙니까? 그런데 모자이크가 안 되어 있군요. 이건 어디서 구한 겁니까?”

“이건 원본입니다.”

“원본? 원본을 어디서……. 혹시?”

“네, 제가 찍은 겁니다.”

“서 팀장님이요?”

도현이 놀라 마시려던 술을 상 위에 내려놨다.

“이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린 사람이 서 팀장님이었던 겁니까?”

“그렇습니다. 이곳은 양평 별장인데, 김탁훈은 이곳에서 대마초를 피우고 여자와 광란의 밤을 보내곤 했죠. 믿을 만한 친구 한 명과 같이 들어가서 영상을 찍었습니다.”

서지철은 놀란 시선으로 동영상을 보고 있는 도현에게 목소리를 낮춰 계속 말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동영상을 찍은 후, 김탁훈을 욕조로 끌고 가 젖은 수건으로 살려 달라고 빌 만큼 두들겨 팼습니다. 맞는 고통이 뭔지 제대로 보여 줬죠. 아마 이틀은 피똥을 쌌을 겁니다.”

말을 마친 서지철은 도현의 표정을 살폈다.

“어떠십니까, 통쾌하십니까? 원래는 그놈을 갖가지 고문 도구로 고문하려고 했는데, 관장님 취향이 아닌 것 같아서 말입니다.”

도현은 서지철이 갑자기 찾아와 왜 김탁훈을 그냥 내버려 두고 있냐고 물었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 뭔가 이상하다 했는데, 이날 서지철이 일을 벌인 것이다.

“통쾌하긴 한데, 왜 이런 일을 벌인 겁니까? 서 팀장님과 김탁훈은 아무런 원한이 없지 않습니까?”

도현이 노트북 모니터를 덮으며 물었다.

통쾌하다는 도현의 대답에 만족스런운 표정을 지은 서지철은 그때서야 눈빛을 풀며 술잔을 기울였다.

“후우, 혹시나 통쾌해하지 않으면 어쩌나 내심 불안했습니다.”

술잔을 내려놓은 그는 도현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건 관장님이 주신 선물에 대한 제 성의 표시입니다.”

“선물이라면…….”

“뮤직 박스.”

“겨우 그것 때문에 날 위해 이런 일을 벌였다는 겁니까?”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는 서지철을 쳐다봤다. 이유치고는 너무나 단순했다.

“프로 해결사로 10년 넘게 일해 오고 있지만, 마음으로 날 감동시킨 의뢰인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오직 백 관장님뿐이었죠. 딸에게 주라고 뮤직 박스를 받았을 때, 그 전율은 달리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감동이었죠.”

눈을 척 감은 서지철은 고승처럼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전, 돈을 받고 험한 일을 하는 프로 해결사입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는 돈을 바라보고 움직이는 사람이죠. 나쁜 놈이지만 감정에 충실할 때가 있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돈을 받지 않은 일을 난생처음으로 했습니다. 백 관장님 눈에 거슬릴 게 분명한 김탁훈을 혼내 주는 걸로요.”

도현은 긴 설명을 끝낸 서지철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가볍게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현했다. 이유야 어찌 됐건 자신이 나설 일을 대신 깔끔하게 처리해 준 사람이었다.

동영상을 촬영해 김탁훈을 혼내 준 건 자신도 생각지 못한 방법이었고, 홍영도 내색하진 않았지만 김탁훈의 추락에 은근히 기뻐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매타작까지 했다고 하니, 더할 나위 없었다. 목숨을 취할 뜻이 없었다면 적절하고도 시원한 결과였다.

“고맙습니다, 서 팀장님.”

“별말씀을요. 제 딸이 매일 즐겁게 뮤직 박스를 가지고 놀 걸 생각하니 오히려 제가 더 고맙죠. 전 한 번도 그런 식의 선물은 해 본 적이 없거든요.”

“술 한 잔 더 하시죠.”

도현이 술 주전자를 들었다. 하지만 서지철은 손바닥으로 술잔의 입구를 막았다.

“더 마시면 오늘 밤, 도장 감시 임무에 지장이 생길 것 같습니다.”

“오늘 밤은 제가 지키죠. 됐습니까?”

“흠, 이러면 안 되는데. 의뢰인이 요구하시니까 할 수 없지요.”

서지철은 즐거운 표정을 감추고는 마지못해 받는 듯 도현의 술을 받았다.

“같이 일했다는 분은 믿을 만합니까?”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믿을 만한 친구라서 뒤탈이 없을 테니까요.”

한동안 술을 더 마신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분 좋은 얼굴로 먼저 나가는 서지철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도현은 몸을 돌려 벽면의 그림을 쳐다봤다.

“아니, 백 관장님, 오늘 식사는 제가 사려고 했는데 벌써 계산을 하셨습니까?”

계산대를 다녀온 서지철이 아직 방 안에 남아서 그림을 보고 있는 도현에게 말했다.

그림에서 시선을 뗀 도현이 담담히 웃으며 답했다.

“이 정도도 사지 않으면 제가 너무 미안해져서요. 그만 가시죠.”

호영순

서지철과 일식집에서 저녁을 함께 한 도현은 며칠 후, 홀로 그 일식집을 찾아갔다. 오전 이른 시각이라 청소를 하며 영업을 준비 중이었다.

청소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밖에 서 있는 도현을 일식집 주인이 발견하고는 웃으며 다가왔다.

“아직 영업 전인데요.”

50대 남자 주인은 손님으로 며칠 전에 온 도현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름 기억력이 좋은 사람 같았다.

“안녕하세요. 여기 사장님 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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