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 디 임팩트 13권 16화
그날 계산대에 서 있던 그를 도현도 기억하긴 마찬가지였다. 다만 직원인지 사장인지는 알 수 없어서 도현은 확인하기 위해 물었다.
“네, 제가 사장인데요.”
일식집 주인은 용건이 있어 찾아온 것 같은 도현을 보며 대답했다.
“사장님, 바쁘시지 않으면 잠시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저하고요? 무슨 일로?”
“난초방에 있는 그림에 대해 여쭤 볼 게 있어서요.”
작은 일식집은 몇 개의 다다미방 형태의 방이 존재했는데, 각각 매화방, 난초방, 국화방, 대나무방으로 불렸다. 사군자를 생각해 지은 방의 이름이었다.
“난초방의 그림이라면 그 수묵화를 말하는 겁니까?”
“네, 사장님.”
일식집 주인은 장식품처럼 걸어 놓은 족자 그림 때문에 찾아왔다는 도현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선을 손질해야 해서 한 5분 정도밖에 시간이 없어요. 이쪽으로.”
“고맙습니다, 사장님.”
주인은 도현을 데리고 족자 그림이 걸려 있는 난초방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장사한 지 6년 가까이 되가는데, 이 그림 때문에 날 찾아온 사람은 처음이에요.”
주인은 그림 앞에 서서 말하며 도현을 힐끔 쳐다봤다. 도현이 깊은 시선으로 그림을 응시하고 있었다.
“물어볼 게 있으면 물어보세요.”
도현은 영업을 하기 위해 바빠 보이는 그에게 바로 그림에 관해 물어보기 시작했다.
“이 그림은 누가 그린 겁니까?”
수묵화엔 그림을 그린 사람의 낙관이 없어서 화가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제법 오래되어 보이는 빛바랜 화폭에서 세월의 깊이가 느껴졌기에 도현은 그림을 그린 사람이 적어도 이삼백 년 전 사람일 것 같다고 추측을 하는 게 전부였다.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보시다시피 낙관도 없고, 이 물건을 내게 팔았던 골동품 가게 주인도 아는 게 없었으니까요.”
“네에…….”
도현은 수묵화로 그려진 산수화로 시선을 돌렸다. 남들은 이 그림을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겠지만, 그는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어느덧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이 한 폭의 족자 그림은 낙관조차 찍을 수 없었던 가난하고 이름 없는 화가나 선비의 솜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도현은 이 그림 속에 담긴 화가의 높은 정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 정신이 시공간을 초월해 그를 그림 속으로 끌어 들인 것일지도 모른다.
‘보고 있으면 좋다. 편안해진다.’
도현은 서지철과 만난 이후로 지난 며칠간 이 그림이 종종 생각났다.
태선군과 얼음탑주라는 일종의 벽을 두고 대치해 있는 그의 마음속엔 검술을 성장시켜야 한다는 압박감이 늘 존재해 왔다. 그런데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작년 겨울 취영산의 언 폭포를 보며 마음을 내려놓고 여유를 가졌던 그때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깨달음 뒤에 이어지는 건 한결 같은 마음이 아닌, 또 다른 번민과 고뇌였다. 그것을 다시 극복했을 때만이 더 높은 경지에 이르는 깨달음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런 단계가 계속 반복된다.
그것이 무인의 길이자 검객의 길이다.
그림에서 시선을 뗀 도현은 일식집 주인을 돌아봤다.
“사장님, 이 그림을 사고 싶은데요.”
“이걸요?”
주인은 뜻밖의 말을 듣자 눈을 크게 뜨고 그림을 자세히 살펴봤다.
6년 전 가게를 열 때, 방 안을 꾸미기 위해 골동품을 취급하는 인사동 가게에 들러 몇 가지 물건을 구입했다. 이 족자 그림은 그것들 중 하나였다.
오래된 거지만 낙관도 없고 유명한 화가의 작품으로 추정되지도 않아서 50만 원을 주고 사 왔다. 사 오면서도 돈이 좀 아까웠는데, 방에 걸어 놓으니 제법 운치는 있어 지난 6년간 난초방의 품격을 유지하게 만들어 준 물건이다.
일식집 주인은 가타부타 말없이 그림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도현은 나름 그림의 가격을 생각했다.
‘고가의 물건은 아닐 거야.’
비싼 물건이었다면 손님들이 오가는 이런 방 안에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걸어 두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험, 그래 얼마에 사시려고요?”
오랫동안 뜸을 들인 일식집 주인이 도현을 쳐다보며 물었다.
“얼마면 파시겠습니까?”
“사실 이걸 내가 50만 원을 주고 샀는데, 지금은 정이 많이 들어서 별로 팔고 싶지 않아요. 손님들 중에 이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요.”
“3백만 원 드리죠.”
도현의 제시에 일식집 주인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3백만 원요?”
집보다 도장에 머무는 시간이 많은 도현은 3백만 원을 주고 구입한 산수화를 관장실 벽에 걸었다.
원래 그 자리에는 선배 무인이자 사진작가인 한석호의 ‘돌과 독수리’ 사진이 걸려 있었다. 스톤이 찍힌 사진 속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한석호에게 거금을 주고 구입했던 그 사진은 5층 도장으로 옮겨 놓을 생각이었다.
“2천만 원짜리 사진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그림이 어떤지 감상 좀 해 볼까?”
도현이 일식집에서 그림을 사 왔다는 말에 5층에서 뛰어 내려온 용주는 그림 앞에 서 있는 홍영과 도현 사이에 얼굴을 끼워 넣었다.
한동안 그림을 감상하던 용주는 도복 허리띠에 양손을 걸치며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며칠 전 도현은 서지철을 만나고 와서 그에게 두 가지 놀라운 얘기를 해 주었다.
하나는 서지철이 김탁훈 동영상을 촬영한 사람이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일식집 족자 그림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그 속에 빨려 들어갔다는 것이다.
‘얼마나 훌륭한 그림이기에 도현이 그림 속 세계에 머물다 온 것처럼 착각을 일으켰을까?’ 하고 내심 기대했던 용주는 도현이 그림을 사 왔다는 말에 한걸음에 지하 도장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기대와는 거리가 있는 그림이었다.
수묵으로 그려진 산수화는 심심할 정도로 허하고 단조로웠다. 오래된 그림이라 고풍스러운 멋은 느껴지지만 내용 면으로는 활달한 용주의 시선을 잡아끌지 못했다.
“흠, 내가 수양이 부족해서인가? 잘 그린 것 같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을 확 빼앗길 만한 구석은 보이지 않는데?”
용주의 솔직한 말에 홍영이 웃으며 가세했다.
“나도 그래요. 아무래도 나와 용주 씨는 마음의 눈이 도현 씨보다는 덜 열린 것 같아요.”
홍영은 손을 뻗어 족자 그림에 손을 대다가 도현을 돌아봤다.
“그래도 느낌은 좋아요,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도현이 도달한 무예의 수준만큼 그의 정신세계도 수준이 높아졌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도현은 자신과 용주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자연의 풍광에 심취하면 시구가 절로 떠오르는 것처럼, 도현에겐 이 그림이 그런 훌륭한 매개체일 수도 있는 것이다.
편안한 얼굴로 그림을 감상하던 도현은 거치대에 있던 수련용 진검을 들고 관장실 밖으로 나갔다.
느릿느릿 호검술을 펼치던 도현은 긴 호흡과 함께 단전의 기운을 천천히 끌어 올렸다.
혈관을 따라 흐르는 피처럼 단전의 기운이 전신으로 서서히 퍼져 갔다.
아직 내상이 완벽히 낫지 않아 기가 흐르는 통로가 요동치며 통증이 전달됐지만, 며칠 전과 비교하면 상당한 수준으로 나은 상태였다.
‘많이 좋아진 것 같아. 머지않아 예전의 몸으로 완전히 돌아올 것 같다.’
도현은 부드럽게 몸을 회전시키며 손에 든 검을 날렸다.
그림을 보고 관장실 밖으로 나오던 용주의 코앞에 검이 허공에 둥둥 뜬 채 정지했다. 도현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내공을 움직여 비검술을 발휘한 것이다.
“뭐, 뭐야 이거.”
용주는 자신이 움직이는 대로 검 끝이 따라 움직이자 진땀을 흘리며 도장 실내를 한 바퀴 빙 돌아 검을 떨쳐 내려 했다.
하지만 검은 용주의 등 뒤에서 계속 따라왔다.
“야! 이거 안 치울래! 너, 비검술 펼친 거지! 내공 사용 못한다면서!”
“내공 회복하면 제일 먼저 비검술을 보고 싶다고 했잖아.”
“장난하냐!”
도장 실내를 뛰어다니며 검을 피하던 용주는 관장실에서 놀라운 비검술을 지켜보던 홍영에게 외쳤다.
“홍영 씨! 검이 필요해요!”
“알았어요.”
홍영은 관장실에 있는 수련용 진검을 검집째 집어 던졌다.
채에앵.
용주는 청아한 금속성을 내며 뽑힌 검을 들고 반격에 나섰다.
“요놈의 귀신 같은 검, 내가 밟아 주지!”
내공을 끌어 올린 용주가 허공에서 홀로 움직이는 검을 상대로 벼락같은 일 검을 날렸다.
눈부신 검광이 지면에서 허공으로 용솟음쳐 도현의 검을 감싸려 했다. 하지만 도현이 손을 슬쩍 움직이자 검이 용주의 검을 노련하게 회피하더니 곧장 용주의 허벅지를 노리고 사선으로 베어 갔다.
갑작스러운 반격에 놀란 용주는 현란한 보법을 발휘해 간신히 검을 피하고는 수중의 검을 빠르게 열두 번 휘둘렀다. 커다란 호랑이가 앞발로 연이어 후려치는 것 같은 힘 있는 기세였다.
‘좋다.’
내공이 충만하고 변화가 깃든 용주의 검세에 도현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설렁설렁 하루를 보내는 것 같아도 용주는 저녁 교육 시간을 제외하고는 5층 도장에서 호심공과 호검술을 수련하며 뼈를 깎는 수련을 해 오고 있었다. 철호는 그 모습을 보고 고등학교 때 뺀질거리던 용주가 변했다며 칭찬을 하기도 했다.
‘더는 안 되겠어.’
도현은 손을 이리저리 움직여 검을 조종하다가 내공 소모가 커지자 내상을 의식해 검과 이어진 기를 끊어 버렸다.
채앵!
날카로운 금속성이 나며 도현의 검이 도장 한구석에 처박혔다.
“으하하하! 봤냐! 이게 용주 님의 검이다!”
어깨를 들썩이며 웃던 용주는 검을 검집에 넣고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그도 안 것이다. 도현이 중도에 힘을 거둔 걸.
“어때 비검술이?”
바닥에 떨어진 검을 회수한 도현이 용주에게 다가와 물었다.
“기로 검을 움직인다는 게 그런 거구나.”
감탄한 용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이었다.
“직접 보니까 섬뜩하다. 직접 사람이 휘두르는 검처럼 힘도 있고 변화도 심했어. 내공 소모가 장난이 아니겠는걸.”
“맞아. 검에 변화를 심하게 줄수록 그렇고. 일단 유지시키는 것 자체에도 많은 내공이 필요하지.”
도현은 말을 하며 옆에 다가온 홍영을 응시했다. 그녀의 눈은 감탄에 젖어 있었다.
도현이 비검술을 펼치는 장면을 만화로 본 적은 있지만, 실제로 본 모습은 그림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하고 신비로웠다.
“무리한 거 아니에요? 이마에 땀이 나는데.”
홍영은 도현의 얼굴을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아요. 몸 상태 고려해서 내공을 사용한 거니까요.”
“그래도 아직은 조심해요.”
“그럴게요.”
도현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그때 옆에서 턱을 만지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용주가 깨어나 조심스럽게 말했다.
“도현아, 태선군 말이야. 이 정도 실력이면 한번 해볼 만하지 않을까?”
용주의 말에 홍영이 긴장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옥룡산에서 무허와 태선군이 싸우는 것을 봤을 때 검술 실력은 약간 부족해도 도현이 내공에서는 한발 앞서는 것 같다고 했잖아요. 도현아, 맞지?”
도현은 암벽 정상에서 싸우던 무허와 태선군을 떠올리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당시 그는 그렇게 상황을 정리했다.
“그게 네가 지난번 이계에 가기 전이란 말이지. 그런데 이번에 이계에 다녀오면서 내공이 대폭 상승했잖아. 비록 얼음탑주와의 싸움에서는 패했지만 말이야. 그건 마법사니까 그렇다 치고.”
“내공만으로 싸움을 할 수는 없어요. 그것 때문에 도현 씨도 고민을 많이 했잖아요. 검술 수준의 미묘한 차이가 고수 간에는 큰 결과로 나타난다면서요.”
홍영은 신중한 눈빛으로 말했다.
“알죠, 나도. 왜 모르겠어요. 그런데요 홍영 씨, 검술이라는 게 결국은 실전이잖아요. 도현이는 이계에서 피를 흘리며 많은 실전을 경험했어요. 태선군이 그런 경험을 이곳에서 했을 리 없죠. 내가 보기엔 막강한 내공과 비검술을 깨달은 만큼 한층 높아진 검술 실력, 거기에다 실전 감각이 더해진 지금의 도현은 태선군에 뒤진다고 보기 어려워요.”
“우리에겐 단 한 번의 기회밖에 없어요. 도현 씨의 목숨이 걸려 있고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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