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0] 디 임팩트 13권 20화
도현은 실망하지 않았다.
호신강기가 뚝딱 만들어지는 조잡한 의자도 아니고, 그가 익히고 깨달은 검술과 내공의 모든 것이 응집된 신기술이었다. 차분히 시간을 가지고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도현은 양손을 바닥에 대고 몸을 세웠다. 물구나무서기를 한 그는 한 손을 바닥에서 떼서 등 뒤로 가져갔다.
놀라운 균형 감각을 유지하며 한 손으로만 물구나무서기를 한 도현은 그 상태에서 팔굽혀펴기를 했다.
열 번, 스무 번, 쉰 번, 백 번을 빠르게 돌파한 도현은 팔을 바꿔 이번엔 왼손만으로 물구나무서기를 한 채 팔굽혀펴기를 반복했다.
일반인들이 직접 보고도 믿지 못할 만큼 강인한 체력과 균형 감각이었다.
도현은 내공과 별개로 자신의 육체를 소중히 했고, 단련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순수한 육체의 힘은 내공을 사용할 수 없을 경우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였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육체를 길러 내고 유지하는 건 꼭 필요하다. 얼음탑주의 마법에 당해 추적당했을 때, 그가 체력 단련을 게을리했다면 숲까지 도주하지도 못하고 중간에 사로잡히거나 죽었을지도 모른다.
얼음탑주를 상대로 폭주하는 단계까지 간 것도 그의 육체가 그때까지 버텨 줬기 때문이다.
땀을 흘리며 물구나무서기 상태로 한 손 팔굽혀펴기를 하던 도현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움직임을 멈추고 출입구 쪽을 응시했다.
몸을 바로 한 그는 도복 소매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내며 밖으로 나가 봤다.
“안녕하세요, 관장님. 최준영입니다!”
도현의 도움으로 제정신을 차린 최준영이 밝은 얼굴로 꾸벅 인사를 했다.
“몸은 괜찮습니까?”
도현이 찻잔을 건네며 묻자 최준영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네, 관장님께서 도움을 주셔서 좋아지고 있습니다.”
요사스러운 기운에 한 달 정도 극심한 심신의 고통을 당해 삐쩍 말랐던 최준영의 몸에 다시 살이 붙고 있었다.
“다행이군요.”
도현은 활기가 도는 최준영의 얼굴을 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늦게 찾아와 죄송합니다. 진작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요, 제정신이 아닐 때 제가 벌인 일들이 드문드문 떠올라서 혼자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집에만 있는 건 아니죠?”
“네? 아, 네. 산책도 하고 가볍게 운동도 하면서 마음을 새롭게 하고 있습니다.”
한 달간 끔찍한 경험을 한 최준영은 아직도 자신이 왜 그렇게 변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눈앞에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는 젊은 검도관장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정신병원에서 평생을 지내야 했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랬다면 부모님의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을 것이다.
부모님 생각을 하자 눈시울이 뜨거워진 최준영은 억지로 눈물을 참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도현에게 마음에서 우러나는 감사 인사를 다시 했다.
“관장님, 정말 고맙습니다. 관장님은 저뿐만 아니라 우리 부모님도 구해 주신 거나 다름없습니다. 평생 은인으로 알고 살겠습니다.”
허리를 숙이고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크게 인사하는 그에게 도현은 담담히 말했다.
“그만하고, 앉으세요.”
“관장님,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막 부르셔도 됩니다. 이놈 저놈 하고요. 저 이제 스물세 살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네? 하하하!”
도현은 최준영의 발랄한 말에 웃음을 참지 못하고 가볍게 웃고 말았다. 한동안 최준영을 바라보던 도현은 차를 한 모금 한 후 말했다.
“그게 편하면 말을 놓지.”
도현은 원래 함부로 하대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여기서 계속 존댓말을 하는 것은 서로 간에 어색해질 상황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나를 알아보는 것 같던데, 내 기억은 확실히 남아 있었나 보지?”
조금 전 문 앞에서 자신을 바로 알아본 최준영의 행동을 떠올리며 도현이 조용히 물었다.
“다는 아니지만 약간은요. 두 가지 장면이 기억납니다.”
“어떤 게?”
도현은 타투를 이용해 치료한 과정을 최준영이 혹시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제가 아끼던 야구방망이를 부러트린 것하고요, 다른 한 장면은 창문 앞에서 햇빛을 등지고 서 있던 관장님의 모습이었습니다. 눈이 부셨습니다.”
전체적인 게 아닌 일부의 장면을 기억하는 게 전부인 것 같았다.
“그런데 절 어떻게 치료해 주신 거죠?”
“때려서 치료해 줬지.”
“예? 때려서요?”
“기억 안 나면 굳이 생각할 필요 없어. 좋은 기억도 아니고.”
도현이 웃으며 말하자 최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듣기론 중국에 다녀온 뒤로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던데, 중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도현은 타투에 흡수된 요사스러운 기운이 어떻게 최준영의 몸속에 들어가게 됐는지 궁금했다.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그냥 여행을 다녀온 것뿐이거든요.”
최준영은 올 초에 제대를 하고 아르바이트한 돈을 모아 중국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지에서 중국인 친구도 사귀고 좋았는데, 귀국한 후부터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다.
‘타투를 통해 기운이 흡수된 걸 보면 정신적인 병은 아니었어. 외부의 어떤 기운이 준영이의 몸속에 들어왔던 것이지.’
본인이 의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런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도현은 최준영이 아는 게 없어 보이자 더 이상 그와 관련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관장님, 꿀 좋아하십니까?”
“꿀?”
“할아버지가 시골에서 한봉을 키우시거든요.”
최준영은 등에 메고 온 가방에서 토종꿀이 든 작은 유리 단지를 꺼냈다.
“제가 나았다는 소식을 듣고 어제 할아버지께서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오셨거든요. 이걸 관장님께 전해 드리라고 하셔서요.”
도현은 테이블 위에 놓인 꿀단지를 내려다봤다.
“할아버지께서 주신 거라고?”
“예. 작은 거지만 성의로 받아 주십시오. 맛보시면 아주 놀라실 겁니다. 정말 맛있거든요.”
최준영의 부모가 찾아와 사례금을 주려고 했지만 도현은 받지 않았다. 무당인 호영순처럼 그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호태식의 얼굴을 봐서 나선 일에 돈까지 챙긴다는 것은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준 꿀단지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이건 그들의 정성이 담긴 성의였기 때문이다.
“할아버님께 감사히 잘 먹겠다고 말씀드려.”
“꼭 말씀 전하겠습니다.”
“어디, 한번 맛을 볼까?”
그 자리에서 단지 뚜껑을 개봉한 도현은 티스푼으로 꿀을 한가득 떠서 입안에 넣었다.
달달한 맛이 순식간에 입안 가득 퍼졌다.
“음, 맛이 좋은데?”
진한 꿀 향에 취한 듯 도현이 그 자리에서 몇 번 더 떠먹으며 미소를 지었다.
“너도 좀 먹을래?”
“아닙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종종 먹어서요.”
도현이 꿀을 좋아하는 것 같아 최준영은 마음이 흐뭇했다.
“우리 아버지도 꿀을 참 좋아하셨다. 식빵에 잼 대신 꿀을 발라 드실 정도였으니까.”
“아, 그래요? 잘됐네요. 자랑이 아니라 맛을 보셔서 아시겠지만 할아버지 꿀은 파는 것과는 차이가 많이 나거든요. 관장님 아버님도 맛을 보시면 분명 좋아하실 겁니다.”
“그래, 좋아하셨을 텐데, 많이 아쉽다. 좋은 걸 못 드시니.”
도현은 벽에 걸린 아버지의 사진을 깊은 시선으로 올려다봤다.
최준영은 자신의 뒤통수를 때렸다. ‘꿀을 참 좋아하셨다.’라는 말에서 백 관장의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걸 짐작했어야 했는데 이제야 눈치를 챘다.
“죄송해요, 관장님. 제가 눈치 없이 쓸데없는 말을 했습니다.”
“신경 쓰지 마. 못할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뭘. 아무튼 이 꿀은 잘 먹을게.”
최준영은 자신과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도현이 나이와는 상관없는 무게감으로 바라보자 약간 움츠러드는 기분이 들었다.
‘영순 아줌마 말처럼 정말 하늘의 기운을 타고난 귀인인가?’
엄마 친구인 호영순은 그에게 도현을 만나러 가서 절대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고 경고를 했다.
‘어쩌지, 내가 멋대로 입을 놀린 것 같은데.’
최준영은 도장 밖에서 기다리는 남자를 생각하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는 혼자 온 게 아니었다. 중간에 한 남자를 만나 같이 왔던 것이다.
“최준영.”
“예?”
도현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최준영이 정신을 차리며 앞을 봤다.
“내게 할 말이 있지?”
“그,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놀란 최준영이 더듬거리며 답했다.
“아까 도장에 들어올 때부터 얼굴에 쓰여 있었어. 말해 봐, 하려고 했던 말이 뭐야?”
“그게 말입니다. 실은…….”
잠시 망설이던 최준영은 가방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중국에서 배낭여행을 하다 현지인을 친구로 사귀었습니다. 저와 같은 또래의 청년이었는데, 그도 집을 떠나 여행을 하고 있었죠. 이 친구입니다.”
도현은 사진을 들여다봤다. 두 청년이 작은 트럭 뒤에 올라타서 신이 나 사진을 찍은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여행 중 트럭이라도 얻어 탄 모양이었다.
한 명은 최준영이었고, 다른 한 명은 그가 설명한 중국인 청년인 것 같았다.
“그런데?”
사진에서 시선을 뗀 도현이 최준영을 응시했다.
“이 친구도 저처럼 제정신이 아닙니다.”
그의 말에 도현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자세히 얘기해 봐.”
최준영은 짧은 시간 동안 깊은 우정을 나눈 사진 속 중국인 친구 원상을 보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행 경로가 비슷해서 보름 정도 같이 다녔거든요. 제가 중국어를 그럭저럭해서 의사소통이 돼서 그런지 몰라도 좀 빨리 친해졌습니다. 여행을 공감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요. 아무튼 그렇게 같이 다니다가 전 한국으로 귀국하고 원상이는 집으로 갔죠.”
최준영은 목이 말랐는지 차를 한 모금 한 후 말을 이었다.
“제가 귀국 후에 제정신이 아니었잖아요. 연락도 못 하고 있다가 관장님 치료 덕분에 몸이 나아서 이틀 전에야 겨우 연락을 한번 했습니다. 그런데 친구 대신 그의 여동생이 받아서는 제게 오빠가 아프다고 하더라고요. 들어 보니 저와 같은 증상이었습니다.”
원상의 여동생과 최준영은 여행 도중 전화로 인사를 나눴기 때문에 전혀 모르는 사이는 아니었다.
“원상의 여동생 말에 저는 너무 놀라서 저도 모르게 제 얘기를 하고 말았습니다. 저를 치료해 준 관장님 얘기도요.”
최준영은 도현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래서 지금 밖에 원상의 부모님이 보낸 사람이 와 있습니다. 관장님과 얘기를 하고 싶다고 해서요.”
“그랬군.”
도현은 속으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최준영의 친구 부모가 사람을 보냈다는 말은, 즉 그들의 아들도 치료해 달라는 의미일 것이다.
팔짱을 낀 도현은 사진 속 중국인 청년을 말없이 응시했다. 이 청년 역시 준영이와 같은 증상이라면, 중국에서 이들이 여행 중에 뭔가 함께 일을 겪은 게 분명했다. 비록 준영이는 깨닫지 못했겠지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생각에 잠겨 있는 그에게 최준영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관장님, 여행 중에요, 원상이가 강도로부터 제 목숨을 구해 준 적이 있습니다. 그게 인연이 되어 같이 다니게 된 거고요. 어제 잠을 거의 못 잤습니다. 전 관장님 덕택에 살아났는데, 그 친구는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최준영은 물끄러미 바라보는 도현의 시선에 긴장이 되어 침을 꿀꺽 삼켰다.
“허락도 없이 관장님 얘기를 해서 죄송합니다. 영순 아주머니가 제가 겪은 일을 함부로 떠벌리고 다니지 말라고 하셨지만 상황이 그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지. 이미 벌어진 일이고 네 사정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니까.”
“감사합니다, 관장님. 그럼 밖에서 기다리는 분을 데리고 올까요?”
얼굴이 밝아진 최준영이 서둘러 말했다.
“잠깐만. 그 전에 내가 할 말이 있다. 내가 간다고 해서 네 친구가 낫는다는 보장이 없어. 모든 일을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너는 운이 좋았던 거야.”
도현의 다소 냉정한 말에 최준영은 온몸의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시도라도 해 주시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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