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 디 임팩트 13권 21화
어두운 얼굴로 애원하는 최준영을 잠시 바라보던 도현이 꿀단지를 한쪽으로 치우며 답했다.
“가서 그분을 모시고 와. 넌 그만 집으로 돌아가고.”
“네. 감사합니다, 관장님.”
원상의 부모님이 보낸 사람을 도현이 일단 만나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는지, 최준영은 깊게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원상의 부모가 보낸 중년인은 키가 크고 검은 정장을 입은 호리호리한 몸매의 사람이었다. 조선족 통역사를 대동해서 온 그는 지하 도장 내부를 가볍게 훑어보다가 도장 한가운데 서 있는 도현과 시선이 마주쳤다.
“안녕하십니까, 최준영 씨의 이야기를 듣고 중국에서 온 원상문이라고 합니다.”
“먼 곳에서 오셨군요. 백도현이라고 합니다.”
도현은 눈빛이 면도날처럼 예리한 원상문의 시선을 가볍게 마주 보며 답했다.
조선족 통역사가 미처 통역을 해 주기도 전에 도현이 중국어로 응수하자 원상문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잠시 도현을 바라봤다.
“중국어를 하실 수 있군요.”
“대화가 가능할 정도는요.”
도현의 대답에 원상문은 조선족 통역사를 돌아봤다.
“밖에서 기다리시오.”
말이 통하는데 굳이 중간에 사람 한 명을 끼워서 대화를 나눌 필요는 없었다.
통역사가 나가자 도현이 원상문을 관장실로 안내했다.
“이쪽으로 오시죠.”
“감사합니다.”
원상문은 앞서 걸어가는 도현의 뒷모습을 위아래로 살폈다. 보폭이 일정하고 어깨의 수평이 칼처럼 맞아서 좌우 어느 한 군데 치우치지 않았다.
‘젊은 나이에 수련을 제법 했군.’
원상문은 낡은 건물의 지하 도장에서 검도장을 운영하는 도현이 무예에 열중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유추해 냈다.
원상문은 도현이 권하는 의자에 엉덩이를 걸쳤다.
도현이 찻잔에 차를 담는 동안 원상문은 관장실을 빠르게 둘러봤다.
거치대 위의 진검과 벽에 걸린 산수화, 어딘지 도현과 닮아 보이는 중년인의 사진 액자가 관장실에서 그나마 가장 눈에 띄는 물건들이었다.
‘소박하군.’
특별한 게 느껴지지 않는 관장실 분위기에 흥미를 접은 그는 막 도현이 내미는 찻잔을 받았다.
“준영이에겐 간략하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의도로 오셨는지도 알겠고요.”
의자에 앉은 도현이 원상문을 보며 말했다.
“그럼 대화가 쉽겠군요. 제 조카인 원상이 최준영 씨와 똑같은 증상으로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중국에 한번 방문해 주셔서 조카를 치료해 주십시오. 사례로 한화로 10억을 드리죠.”
말을 빙빙 돌려 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지 원상문은 요구 사항과 대가를 곧장 거론했다.
“10억요?”
도현은 생각지도 않은 거액 제시에 내심 놀랐다. 그는 대가를 바라며 머리를 굴리고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 먼저 돈 얘기를 꺼낸 것이다.
‘돈이 많은 집안인가?’
도현은 원상문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도장을 가로질러 그에게 다가올 때부터 손을 대면 베어 버릴 것 같은 예리한 눈빛을 분출하던 사람이었다.
도현이 가타부타 대답이 없자 차를 한 모금한 원상문은 은근히 조바심이 났다.
“돈이 적습니까?”
“아니요, 적은 돈은 아니죠. 솔직히 큰돈입니다.”
“그러면 원상을 치료해 주는 겁니까?”
“전 보시다시피 검도장을 운영하는 사람입니다. 아픈 사람을 치료하러 다니는 사람도 아니고요. 어쩌다 보니 우연히 준영이를 돕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원상을 치료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없습니다.”
도현의 얘기에 원상문의 표정이 딱딱하게 변했다.
“그래도 한 번 치료했는데, 두 번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소?”
“우연이란 게 그래서 무섭습니다. 결과를 예측할 수가 없으니까요.”
도현은 타투가 원상에게도 통할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원상문은 도현의 말에 속으로 실망했다.
확실히 치료할 능력이 있으면 대가로 받을 돈이 탐나서라도 적극적으로 나섰을 것이다. 오히려 돈을 더 요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빼는 것을 보니 최준영을 치료한 건 의도치 않은 우연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원상문은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았다. 차가 매우 쓰게 느껴졌다.
“결과는 하늘에 맡기고 조카를 한번 봐주시오. 오가는 경비는 우리가 전부 다 지불할 테니까. 그러다 하늘이 도와 관장께서 원상을 치료하면, 그땐 처음 말한 대로 10억을 드리겠소.”
도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벽에 걸린 달력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다음 주에는 홍영의 사촌 결혼식도 있고 료쿄의 탐사 캠프를 방문하기 위해서라도 중국에 있어야 할 상황이었다.
‘한번 가 볼까?’
솔직히 아픈 조카를 위해 중국에서 여기까지 시간을 아끼며 날아온 사람에게 냉정히 안 된다고 말하기도 인간적으로 미안한 일이었다.
운이 좋아 타투가 이번에도 통한다면, 10억이라는 큰돈도 벌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집안이기에 선뜻 10억을 준다고 제안하는 걸까?’
아픈 사람을 위해 돈을 쓰고 싶어도 재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원상은 중국 어느 지역에 사는 겁니까?”
“상해에 살고 있소.”
“상해요?”
도현은 잘됐다 싶었다. 홍영의 사촌 결혼식이 열리는 곳도 상해였으니 멀리 움직일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알겠습니다. 조카분을 한번 만나 보죠.”
도현의 승낙에 원상문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빈손으로 가는 것보다는 나았다.
“내일이라도 나와 같이 가는 건 어떠시오?”
“사정은 이해하지만 저도 여기서 할 일이 있습니다. 다음 주에 중국에 가서 연락을 드리죠.”
도현은 구체적인 일정은 제시하지 않았다.
“그럼 기다리겠소. 이건 올 때 경비로 사용하시오.”
원상문은 자신의 명함과 미리 준비한 비행기 티켓값에 해당하는 약간의 현금을 찻잔 옆에 내려놓고는 도장을 바람처럼 나갔다.
“행동에 머뭇거림이 없는 사람이군.”
도현이 보기에 원상문은 무술을 오랫동안 연성한 사람 같았다. 그렇다고 내공을 사용할 줄 아는 그런 고수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평범한 사람들과는 확실히 구별되는 사람이었다.
도현은 원상문이 놓고 간 명함을 집어 들었다.
대명 원상문
황금색 테두리 명함에는 회사 이름인지, 아니면 호인지 알 수 없는 앞 글자 대명과 함께 이름과 전화번호만 적혀 있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적힌 게 없었다.
모석청
며칠 후 도현은 홍영과 상해에 도착했다.
비가 오는 날씨 속에 도현은 홍영과 함께 그녀의 어머니가 사는 집으로 향했다.
집을 앞에 두고 도현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홍영 씨, 지금 집에 이모님들이 와 계시다고 했죠?”
“네.”
이틀 뒤, 홍영의 사촌 여동생 결혼식이 호텔 연회장에서 벌어진다. 중국이 넓다 보니 멀리 사는 친척들은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미리 출발했다. 그러곤 결혼식 있기 하루나 이틀 전에 도착해 호텔에 묵거나 했다.
그런데 홍영의 이모들은 혼자 사는 홍영의 어머니를 위해 결혼식이 끝나는 동안 그 집에 머물기로 한 상태다. 물론 이모부나 가족들은 호텔에 있었지만.
“어머님께 인사만 드리고 바로 나와야겠어요.”
몇 달 전 도현은 홍영의 이모들에게 둘러싸여 온갖 질문 공세에 답하느라 진땀을 흘린 적이 있었다.
홍영의 어머니는 말씀이 별로 없었지만, 다른 세 명의 이모들은 마이크를 잡고 MC를 해도 좋을 정도로 입담이 좋고 말이 많았다. 수다스러운 이모들과 긴 시간을 보내는 건 참을성 많은 도현이라 해도 버거운 일이었던 것이다.
“우리 이모들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홍영이 우산을 한 바퀴 돌리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녀도 이모들의 성격을 알고 있었다.
“도현 씨가 마음에 들어서 그러는 거잖아요. 이해 못 해요?”
“감사하죠. 좋게 봐주시는데요. 그런 게 아니라, 오늘 준영이 친구 원상을 만나 보려고요.”
“오늘요?”
홍영이 눈을 살짝 흘겼다.
“내일 만날 거라면서요. 왜 갑자기 계획이 바뀌었어요?”
“아픈 사람을 도우려면 하루라도 빠른 게 좋겠죠.”
“핑계 대지 말아요. 이모들과 긴 시간을 보내기 싫은 거잖아요. 좋아요, 특별히 봐줄게요.”
홍영의 허락에 도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30분 후, 도현은 홍영의 이모들의 포위 공격 속에서 간신히 빠져나왔다. 비가 그친 하늘을 보며 한숨을 돌리는데, 뒤따라 나온 홍영이 도현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고마워요. 다른 사람들이었으면 이모들의 수다를 그렇게 웃으며 일일이 받아 주지 못했을 거예요.”
“큰일도 아닌데요, 뭘.”
“그럼 다시 집으로 갈래요?”
홍영이 청순한 얼굴로 눈웃음을 흘리며 말하는데, 무척 사랑스러웠다. 수없이 본 홍영의 얼굴이었지만 도현은 가슴이 설레었다.
“뽀뽀해 주면요.”
“됐거든요. 가서 준영이 친구나 치료해 줘요.”
“치료가 될지 모르겠어요. 용주는 타투가 있으니 식은 죽 먹기라고 했지만, 확실한 건 아니거든요.”
용주는 원상문이 10억을 제시했다는 말에 뛸 듯이 기뻐했다. 이참에 퇴마사로 전 세계를 순회하는 건 어떠냐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부담 갖지 말아요.”
“나중에 전화할게요.”
도현은 아파트 입구로 들어가는 홍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비가 그쳤지만 물기가 아직 사라지지 않은 거리를 걸으며 도현은 원상문에게 전화를 걸었다.
“공항은 아니고 다른 곳입니다. 네, 주소를 알려 주시면 제가 택시를 타고 가죠. 차를 보내 주시겠다고요?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데……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그럼.”
벤치에 앉아 30~40분 정도 보냈을까, 원상문이 보낸 고급 승용차가 도현이 기다리던 공원 근처에 도착했다.
“타시죠.”
도현은 몸이 탄탄해 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상해 도심지와 거리를 둔 상해 외곽의 대저택에 도착했다.
‘평범한 집안은 아닌 것 같은데.’
차에서 내린 도현은 주변을 둘러봤다.
대저택 주위는 높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정장을 입은 사내들이 여러 명 보였다.
“어서 오시오, 백 관장.”
도현의 연락을 받고 차를 보낸 원상문이 저택에서 걸어 나와 도현 앞에 섰다.
“안녕하셨습니까.”
“한국에서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었소. 자, 안으로 들어갑시다. 지금 퇴마사가 조카를 한창 치료하는 중이오.”
“퇴마사요?”
“그렇소. 이쪽 계통으로는 이름이 조금 난 사람이라는데, 어떨지 모르겠소. 지금까지 거쳐 간 퇴마사만 해도 여러 명이어서 말이오.”
원상의 부모는 의학으로 안 되니 퇴마사를 부른 듯했다.
‘나도 이들에겐 퇴마사로 보이는 걸까?’
도현은 앞서가는 원상문의 뒤를 따라 대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유럽식으로 꾸며진 집 안은 3층 구조로 되어 있었는데, 좌우로 날개처럼 긴 건물이 연결되어 있었다.
원상문은 오른편 복도를 따라 걸으며 도현에게 말했다.
“그 퇴마사가 치료를 못 하면 백 관장께서 나서 줘야 할 것 같소. 그러니 안에서 함께 지켜봅시다.”
“알겠습니다.”
잠시 후 도현은 복도 끝에 위치한 방 안에 들어섰다. 연회장으로 쓰이는 장소인지 실내는 아주 넓고 천장도 높았다.
그 안에서 중년의 퇴마사가 부적에 불을 붙여 허공으로 날리며 큰 소리로 악귀를 쫓아내는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후리라 모하야. 바하다라 마비타! 하늘의 기운은 하늘로, 땅의 기운은 더 깊은 지옥으로! 바라바하!”
하지만 기둥에 묶인 청년은 주위를 돌며 부적을 태우는 퇴마사의 행동에 별 영향을 받지 않는지 성난 표정으로 거친 욕설을 뱉어 내고 있었다.
‘사진 속 그 청년이군.’
도현은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광기를 내비치는 청년을 잠시 바라보다가 원상문의 뒤를 따라갔다.
“형님, 한국에서 그 사람이 왔습니다.”
무거운 얼굴로 아들의 퇴마 의식을 지켜보던 원상의 아버지 원진이 동생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그는 얼굴이 크고 턱이 각진 50대 중반의 남자였다.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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