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 디 임팩트 14권 2화
원상문이 안으로 들어서며 말을 했다.
“네, 조금 잤습니다.”
“일찍 오려고 했는데, 처리해야 할 일이 적지 않아서 말이오.”
넓은 객실 안을 가볍게 둘러본 원상문은 냉장고에서 맥주 한 병을 꺼내 단숨에 비웠다.
도현은 술을 마시는 그의 얼굴을 살폈다. 밤을 새워서 그런지 눈이 조금 충혈되어 있었고, 턱수염이 거뭇거뭇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형님이 직접 오고 싶어 하셨지만, 알다시피 새벽에 일은 큰 싸움의 시작점에 불과해서 말이오. 자리를 비울 수가 없는 상황이오.”
“이해합니다. 굳이 제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백 관장이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소. 형님은 무뚝뚝해서 감정 표현을 잘하지 않으시지만, 정말 고마워하시고 있소.”
“아까 받은 인사로도 충분합니다.”
원상문은 맞은편 의자에 앉아 담담히 말하고 있는 도현의 얼굴을 깊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얼마 전 한국에 가서 그를 만났을 때만 해도 무기를 든 수십여 명의 사내들을 단신으로 굴복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그저 무예에 열중하는 그런 부류의 젊은 사내로 인식했는데, 오판한 것이다.
“흉기를 든 수십여 명과 홀로 싸운다는 건 제정신 가지고 할 수 없는 일이오. 까닥하다간 눈먼 칼에 몸이 난자당할 수도 있으니까. 더구나 총을 든 자들까지 상대하다니, 아마 백 관장은 그 당시 미쳤던 게 분명하오.”
원상문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농담처럼 말을 꺼냈다.
“저도 살기 위해 힘을 다했을 뿐입니다.”
“나서지 않아도 될 일이었는데, 왜 위험을 무릅쓰고 형님의 가족을 구하려 한 거요?”
잠시 말이 없던 도현이 입을 뗐다.
“이유야 어쨌든 그날 밤은 제가 손님으로 가 있는 자리였습니다. 저녁과 술도 함께 했었고요. 모른 척하기 곤란했습니다. 저들이 먼저 별채를 공격한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됐지요.”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지 알고 있소?”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몰랐습니다. 나중에 별채에서 모 선생에게 들었지요.”
“그랬구려. 우리 집안은 상해에서 상가를 운영하고 사업도 하고 있소. 그렇다고 음지에서 벌어지는 일과 전혀 무관하다곤 할 순 없지만, 백 년이 넘게 이어 온 집안의 내력이 그러니 나와 형님은 그 자리를 지킬 뿐이라오.”
원상문은 대명이라는 조직의 일을 일종의 가업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았다.
도현은 별말 없이 조금 전 마시던 생수병을 기울여 다시 한 모금 했다.
“백 관장.”
원상문은 상체를 앞으로 약간 숙이며 탁자 너머에 앉아 있는 도현을 쏘아보듯 응시했다.
“우리 집안과 가족이 되어 보겠소?”
“가족이라면……?”
“우리 조직에 들어오는 거요.”
도현의 싸움 실력이 탐이 난 그는 도현을 꼭 조직원으로 끌어들이고 싶었다. 그러면서 그는 도현에게 해 줄 수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을 열거하려고 했다.
하지만 도현이 먼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제지했다.
“죄송하지만, 이러지 마십시오. 제가 한 번 도운 걸로 이 일은 이쯤에서 마무리 짓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사람은 천성이라는 게 있소. 백 관장, 백 관장은 싸움에 타고난 기질이 있는 게 분명하오. 그런 건 가만히 놔둘 게 아니라 밖으로 끄집어내 터트려야지만 오래 살 수 있는 거요. 자신의 천성을 검도장에서 무예로 억누르지 마시오.”
원상문은 현장에 쓰러져 있던 수십여 명의 안휘성 조직원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하나같이 중상을 입어 피를 흘리고 있었다. 죽이지만 않았지 도현의 손 속은 아주 무자비하리만치 단호했던 것이다.
많은 사람의 피를 보고도 냉정함을 유지하고 끝끝내 목적한 바를 이룬 도현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당신은 우리와 어울리는 게 맞소.”
“그것보다 더 잘 어울리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이 어디요?”
“내 집입니다. 검도장.”
도현은 빙그레 웃으며 무거워지려는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었다.
“백 관장, 그러지 말고 깊게 생각해 보시오. 우리도 명예가 있고 좋은 일도 많이 하는 사람들이오. 단순한 뒷골목 조직이 아니오.”
그는 어떡하든 도현을 설득하려고 했지만 도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현의 확고한 의사에 쓴 입맛을 다신 원상문은 넓은 객실의 한쪽으로 걸어가 형인 원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작은 목소리로 통화하는 그를 뒤에서 지켜보던 도현은 누군가 문을 두드리자 의자에서 일어나 객실 문으로 다가갔다.
호텔 가운을 입은 모석청이 자다 일어났는지 부스스한 표정으로 문밖에 서 있었다.
“원 회장 쪽 사람은 아직 연락이 없었나? 시간이 꽤 됐는데.”
하품을 하며 말하는 그에게 도현이 객실 안쪽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원 회장의 동생이 와 있습니다.”
“오, 그런가? 돈은 가지고 왔던가?”
눈을 번쩍 뜬 모석청이 작게 속삭였다.
“아직 그런 얘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자넨 단단히 한몫 잡은 거라고. 원 회장 아들도 치료해 줬고, 게다가 그 가족들까지 구해 줬으니 말이야. 많이 받으면 나도 좀 나눠 주게, 흐흐흐.”
염소수염을 기른 모석청은 말을 하다가 도현 어깨 너머로 원상문이 보이자 얼른 입을 다물었다.
“모 선생도 왔군요.”
“안녕하십니까.”
모석청은 도현을 스쳐 지나 객실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모 선생, 백 관장과 아직 얘기가 덜 끝났으니 미안하지만 방에서 기다려 주시오.”
“예?”
“모 선생 방은 잠시 후에 방문하겠소.”
“아, 예. 그러시지요. 그럼.”
모석청은 헛기침을 크게 한번 한 후 객실을 나갔다.
원 회장과 통화를 끝낸 원상문은 냉장고에서 맥주 한 병을 또 꺼내 마시며 의자에 몸을 실었다.
“형님께 전화를 했더니 더 이상 백 관장을 귀찮게 하지 말라고 하시더군요.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면 사과하겠소.”
“아닙니다.”
도현은 담담히 대꾸하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돈으로 모든 게 다 해결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성의는 표해야 한다는 게 형님의 생각이오. 가족을 구해 준 대가로 얼마를 원하시오?”
원상문은 편하게 말하라는 몸짓을 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도현이 답했다.
“조카분을 치료해 준 보답으로, 한화 10억을 준다고 했지요.”
“물론이오.”
“그럼 됐습니다. 그거면 족합니다.”
“하지만 백 관장, 그것과 어제 일은 별개인데…….”
원상문은 입에 댄 맥주병을 고풍스러운 호텔 탁자에 내려놓으며 의외라는 눈빛을 보냈다.
“돈을 보고 한 것도 아니고, 그 일은 제가 스스로 판단해서 움직인 겁니다. 애초에 약속한 돈만 받겠습니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겠소?”
“네.”
도현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사실, 돈 욕심이 없어서 받지 않겠다고 한 게 아니었다. 치료를 해 주고 받게 될 10억은 순수한 치료의 대가지만, 원 회장 가족을 구한 일로 돈을 받게 되면 그들 싸움에 자신이 돈을 받고 개입한 게 돼 버린다. 깔끔하게 선을 그으려면 그 일과 관련해서는 어떤 대가도 받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나름의 판단이 섰다.
“정말 필요 없단 말이오?”
재삼 확인하는 그에게 도현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뭐, 좋소, 그럼.”
어딘지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은 원상문은 남은 맥주를 비웠다.
“10억은 백 관장이 한국에 돌아가면 그때 사람을 보내서 직접 주겠소.”
“그렇게 하시죠.”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원상문은 휴대폰을 귀에 가져갔다.
“준비됐으면 가지고 올라와.”
잠시 후 세 명의 사내들이 여러 벌의 정장과 와이셔츠, 구두, 혁대 등을 가지고 올라왔다.
“백 관장 옷이 엉망이었잖소. 그래서 필요할 것 같아서 몇 벌 준비했지. 눈짐작으로 내가 치수를 말했으니 안 맞을 수도 있소. 입어 보고 적당한 걸로 고르시오.”
비단처럼 부드럽고 매끄러운 감촉의 최고급 원단으로 만들어진 고급스러운 정장을 앞에 둔 도현은 그중 한 가지를 골라 즉석에서 입어 봤다.
구두와 혁대까지 한 도현은 거울 앞에 섰다. 자로 잰 듯이 몸에 딱 맞았다.
“원래 우리 집안은 옷에 무척 신경을 쓴다오. 백 년 전부터 겉모양에 상당히 치중을 하는 편이었지.”
그의 말에 옷을 들고 서 있던 세 명의 사내들이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웃지 마.”
원상문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사내들이 즉시 입을 다물었다.
“어떠시오, 백 관장. 옷은 마음에 드시오?”
“네, 편하고 좋습니다.”
“다행이오. 다른 건 몰라도 그 옷은 그냥 받아 주시오. 엉망이 된 백 관장 옷을 대신해서 사 온 거니까.”
도현도 이것까지 마다할 입장은 아니었다.
“고맙습니다.”
“자아, 그러면 나는 그만 가 보겠소. 옆방에 있는 모 선생이 날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말이오.”
부하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려는 그에게 도현이 조용한 어조로 물었다.
“새벽의 싸움은 시작이라고 했는데…… 괜찮습니까?”
“우릴 걱정하는 거요?”
문 앞에서 뒤돌아선 원상문이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시오. 새벽 일 정도로 무너질 우리가 아니니까.”
원상문이 방을 나간 직후, 도현은 홍영의 전화를 받았다. 아직 그녀에게는 간밤의 사건을 설명하지 않았다.
-화조호텔에 있다고요? 원 회장 집에서 잔다고 하지 않았어요?
“일이 좀 있어서요.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해 줄게요.”
-지금은 괜찮은 거죠?
“아무 문제 없어요.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요.”
도현은 황푸 강 위를 떠가는 화물선을 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알았어요. 언제 올 거예요?
객실 창으로 황푸 강을 바라보며 통화하던 도현은 몸을 돌려 객실 현관 방향을 응시했다. 지금 바로 홍영의 집으로 갈수도 있었지만, 모석청과 작별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는 지금 원상문과 만나고 있을 것이다.
“조금 있다가요.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이모들이 도현 씨 보고 싶대요.
“그래요? 그럼, 늦게 가야겠어요.”
-뭐라고요? 1시간 안에 와요! 알았죠?
“조금 있다 봐요.”
웃으며 통화를 마친 도현은 창가에 서서 한동안 황푸 강을 내려다봤다.
폭이 넓고 거대한 황푸 강을 바라보고 있자 자연스레 떠오르는 강이 있었다.
블랙리버.
그곳은 사실 강이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길고 드넓어서 바다라고 해도 무방했다. 실제로 블랙리버는 바다와 연결되어 있었고, 수많은 선박들이 바다와 블랙리버를 오르락내리락했다.
‘얼음탑주와 다시 부딪혔을 때, 그를 극복하지 못하면 이계에서의 활동이 여러모로 힘들어질 거야.’
당장 거인의 섬에 있는 씨드를 두고도 얼음탑주와 다투어야 할 상황이었다.
그의 마법적인 능력을 돌이켜 봤을 때, 거인의 섬에 있는 씨드를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신전에 파묻혀 있는 론의 지팡이를 찾더라도 거인의 섬에서 얼음탑주와 경쟁해야 할 수도 있다.
‘호신강기를 만들 수 있다면 그의 마법으로부터 한결 자유로워질 수가 있을 텐데…….’
그의 얼음 마법에 한번 당하면 전력을 기울여 싸울 수가 없었다. 체내로 스며든 찬 기운을 내공으로 억제하며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한계에 부딪히면 지난번처럼 폭주에 이를 수도 있다. 폭주의 약점을 꿰뚫고 있을 얼음탑주 앞에서 또다시 폭주한다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그것만은 피해야 했다.
도현은 선 상태로 내공을 전신으로 고르게 퍼트렸다. 피부 위로 떠오른 아지랑이 같은 기운들이 도현의 전신에 흐릿하게 어리는가 싶더니 이내 공기 속으로 흩어져 버렸다.
호신강기를 만들기 위해 틈틈이 연습해 오고 있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이것도 방법이 있을 거야, 내가 찾지 못하고 있을 뿐.’
비검술을 수련하며 한 가닥 기로 검을 조종하는 것에는 익숙해져 있었지만, 전신으로 뿜어낸 수많은 기를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는 건 뜻처럼 되지 않았다.
심호흡을 한 도현은 몸을 이완시킨 다음 편안한 자세로 다시 한 번 전신으로 내공을 퍼트렸다.
아직 몸이 완벽히 회복되지 않아 내공을 사용하는 데 신경을 써야만 했다. 심력을 쏟으며 재차 전신으로 진기를 방출하려는데,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보기 좋군. 언제 옷을 사 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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