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2] 디 임팩트 14권 7화
도현 그 자신만 하더라도 주먹에 내공을 응집해 휘두르면 두꺼운 돌을 어느 정도까지는 시원하게 깨부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정교한 손 모양을 유지할 자신은 없었다. 돌을 단순히 깨는 것과 손 모양처럼 일정한 모형을 유지한 채 돌을 파괴하는 건 또 다른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혹시 이 사람이 앞의 사람들을 다 죽인 건가?’
앞선 유골 여덟 구는 모두 두개골이 부서져 있거나 가슴의 뼈들이 조각조각 나 있었다.
두 번 손을 쓰지 않은 치명적인 살수였고, 돌에 이 정도 깊이로 손자국을 남길 고수라면 그 여덟 명의 몸에 그런 상처를 남기는 건 손쉬운 일일 것이다.
두 동강 난 검들도 어쩌면 이 고수의 작품일 수도 있다.
도현은 고개를 돌려 석실 중앙의 유골과 제일 안쪽에 있는 유골을 번갈아 봤다. 저들이 이 흔적들과 어떤 관계인지 빨리 확인하고 싶었다.
도현은 먼저 가까운, 석실 중앙에 있는 유골을 확인해 봤다.
“역시 두개골이 부서져 있어. 하지만 검은 멀쩡해.”
앞서 발견한 유골들은 모두 검을 사용하다 죽은 사람들이었고, 그들의 검은 모두 부러져 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만은 형태를 유지한 검을 들고 죽어 있었다. 그만큼 강해서 상대방도 이 사람만큼은 호락호락하게 상대하지 못한 것 같았다.
“칼자국을 남긴 검객이 이 사람인가?”
도현은 잠시 유골을 내려다보다가 몸을 돌려 석실 제일 깊은 곳으로 걸어갔다.
바닥에 반듯하게 누워 있는 유골 주변엔 아무런 병장기도 보이지 않았고, 빛바랜 찢어진 옷자락과 둘둘 말린 양피지 같은 것만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놓여 있었다.
‘글?’
길게 찢어진 옷자락엔 피로 쓴 듯한 한자들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산속에 처박혀 있던 이자를 죽임으로써 나의 길고 길었던 임무는 끝이 났다. 가문의 유일한 후손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복수행을 했으니, 그날 불타 원혼이 되어 구천을 떠도는 부모와 나의 아내, 자식을 볼 면목이 섰다. 내 옆에 있어야 할 가족이 없는 삶이란 떠도는 구름처럼 덧없고, 고통스러웠었다. 죽음이 그리웠지만, 그 죽음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무공을 익히고 또 익혀 복수를 완성했다. 이제, 오랜 부상으로 인해 이곳이 나의 무덤이 되겠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죽음은 늘 나의 곁에서 맴도는 존재였으니까. 보고 싶다. 나의 딸아.
죽음을 앞두고 담담한 어투로 적은 글이었다.
‘아! 이 사람이 동굴과 석실에서 검객들을 죽인 고수였어.’
글을 다 읽은 도현이 옷자락에서 시선을 떼는 순간,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옷자락 일부가 바싹 마른 겨울 낙엽처럼 부서지듯 찢어지며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글이 기록된 빛바랜 옷자락이 다시 끼워 맞출 수 없는 퍼즐처럼 조각나 버린 것이다.
도현은 글을 남긴 사람을 다시 한 번 내려다봤다. 골격으로 보아 살아생전 체구는 왜소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어렵지 않게 검객들을 모두 죽였다.
‘그럴 만도 해.’
석벽에 남긴 손자국을 보면 이 사람은 놀랄 만한 고수였을 것이다.
‘회전문까지 찾아내서 끝까지 쫓아와 복수를 마무리한 거야.’
중앙에 죽어 있는 검객은 아마도 밖에서 죽은 자들의 수장 일 것이다.
그는 석실에 휘몰아치는 폭풍처럼 종횡으로 많은 칼자국을 남긴 고수였지만, 그조차도 왜소한 이 사람을 감당하지 못해 결국엔 황천으로 가 버린 것이다.
한동안 글을 남긴 왜소한 체구의 고수를 내려다보던 도현은 허리를 굽혀 둘둘 말린 양피지를 집어 들었다.
‘이건 뭘까?’
양피지는 글이 적힌 옷자락과 함께 왜소한 고수의 손 언저리에 있었던 것이다.
도현은 둘둘 말린 작은 양피지를 바닥에 펼쳐 보았다.
손바닥만 한 폭의 양피지가 1미터 정도 길이로 길게 펼쳐졌다. 손전등을 이용해 내용을 확인하던 도현의 눈이 반짝였다.
“이건…….”
뜻밖에도 양피지는 무예가 담긴 비급서였다.
“대력금강수.”
양피지에 쓰인 무예의 이름을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도현은 앉은자리에서 양피지의 내용에 빠져들어 갔다.
대력금강수는 손을 이용한 무예로, 성취도에 따라 바위도 두부처럼 부술 수 있는 절기였다. 이를 위해 대력금강수만의 특별한 내공 운용법이 양피지에 인체도와 함께 기록되어 있었다.
“이런 방법이 있었어…….”
인체에 있는 무수한 혈관처럼 기가 흐르는 길도 수없이 많고 다양해서 이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각각의 무공들이 개성을 띠게 된다.
대력금강수가 추구하는 것은 손에 기를 씌워 강철처럼 단단히 만드는 것으로, 도현이 평소에 사용하지 않았던 기의 통로를 이용했다.
도현이 비급을 보며 거듭 감탄한 이유는 대력금강수가 손에 기를 막처럼 둘러 손을 보호하며 외부에 심대한 타격을 줬기 때문이다. 손에 강기를 씌우는 대력금강수의 내공 운용법을 손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전신으로 확장한다면, 그가 고민하고 있던 호신강기와 흡사한 효과가 날 수도 있는 것이다.
‘잘하면 이걸 참고해서 호신강기의 초석을 다질 수도 있겠어.’
도현의 얼굴에 기쁨이 떠올랐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대력금강수를 펼쳐 봐야겠지?’
한참을 양피지에 빠져 있던 도현은 정신을 차리고는 그 자리에서 가부좌를 했다.
아마도 왜소한 체구의 고수는 이 대력금강수를 익혀 복수를 한 것 같았다.
도현은 스스로 깨달은 내공 운용법으로 단전의 기운을 오른손으로 이끌었다.
‘이제 여기서부터는 대력금강수의 내공 운용법으로…….’
정신을 집중한 도현은 단전에서 나온 기를 평소 사용하지 않았던 기의 통로로 이동시켰다. 한 곳에서 여럿 곳으로 나뉜 기는 점점 속도를 내다가 팔뚝을 지나 손목 어름에서 피부를 뚫고 위로 솟구쳤다.
그 순간 도현은 대력금강수의 내공 운용법에 더욱 집중하며 공기 중으로 사라지려는 자신의 기를 가닥가닥 붙잡아 손 주위로 끌어당겼다.
이제 막 대력금강수를 접한 초보자였지만 도현은 검에 대한 높은 깨달음을 통해 전반적인 무학의 이치를 차곡차곡 쌓아 가는 단계였다. 그렇기 때문에 대력금강수의 기초적인 수련이라 할 수 있는 손에 기를 두르는 것에 선뜻 도전해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대력금강수는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의 고수가 익히는 상승 절기로 내공과 깨달음이 일정한 경지에 있지 않다면 익히기가 불가능한 무예이기도 했다.
아지랑이 같은 기운들이 처음엔 반항을 하다가 시간이 감에 따라 서서히 도현의 오른손 주변으로 낮게 깔리기 시작했다.
“된다.”
입가에 미소를 지은 도현은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봤다. 은은한 청색 빛이 어른거리는 기의 막이 오른손을 얕게 감싸고 있었다.
도현은 앉은자리에서 여러 번 연습을 한 다음 다시 양피지에 시선을 돌렸다.
그가 지금 사용한 건 대력금강수의 기초적인 내공 운용법이었고 더 깊은 내용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대력금강수에 몰입한 도현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모석청은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검을 놓고 선잠을 자고 있었다. 으스스한 석실에서 홀로 잠을 자는 게 불안해서다. 그러다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곧 경기를 일으키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허억!”
어느새 그의 손은 검 손잡이에 가 있었다.
석실 안을 빠르게 훑은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검을 다시 내려놨다.
“악몽을 꿨네. 빌어먹을.”
어제 오후에 도현과 함께 묻어 준 뼈다귀들이 꿈속에 나타나 부러진 검을 휘두르며 공격했던 것이다.
식은땀을 흘리던 그는 가방에서 술을 꺼내 한 모금 했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아침이 다 됐다. 그런데도 아직 도현이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이 인간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그는 어젯밤부터 도현을 찾아다녔다. 혹시 어제 낮에 본 뱀에 물려 어디서 사경을 헤매는 건 아닌지 근처 산속을 뒤져 보기도 했고, 낭떠러지 절벽 근처에서 고함을 질러 보기도 했다.
그러나 도현은 어디에도 없었고, 그는 결국 석실로 되돌아온 것이다.
석실에서 기다리다 보면 어디선가 나타나겠지 싶었는데, 아침이 되도록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천하에 버르장머리 없는 놈! 인사는 하고 가야 할 거 아냐!”
아침이 오는데도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도현의 욕을 하며 모석청은 술을 한 모금 더 했다.
“이상해…… 원 회장 가족을 구해 주고도 돈 한 푼 받지 않은 인간이 불쌍한 내게 거짓말을 하고 산을 내려갔다고? 그것도 내가 똥을 누러 간 사이에?”
모석청은 반쯤 남은 술병을 흔들며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굳이 그럴 이유도 없고. 그럼 대체 어디 처박혀 있는 거지?”
잠도 설치고 몸도 무거운 모석청은 심란한 얼굴로 고민을 하다가 석실을 울리는 둔중한 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석벽 한쪽이 회전문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자, 자네!”
석벽의 문을 열고 등장한 도현은 모석청에게 걸어갔다.
“죄송합니다, 모 선생님. 오래 기다리셨죠. 시간이 이렇게 많이 흘러간 줄 몰랐습니다.”
“자네, 지금 저곳에서 나온 거 맞지?”
모석청이 반쯤 열린 석벽의 회전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모석청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육중한 무게를 자랑하는 석벽의 회전문으로 다가갔다.
“석벽에 이런 문이 존재하다니.”
모석청은 회전문 뒤로 보이는 어두운 통로를 호기심 짙은 눈빛으로 잠시 바라보다가 양손으로 회전문을 밀어 봤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익!”
관자놀이에 핏대를 올리며 있는 힘껏 돌문을 밀어 봤지만, 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침을 안 먹었더니 힘이 좀 달리는군.”
힘을 쏟느라 땀을 비 오듯 흘린 그는 뒤에서 다가온 도현을 감탄 섞인 눈빛으로 응시했다. 가볍게 열고 나오는 모습에 속이 파인 돌문인가 싶었는데, 웬걸 집채만 한 바위 느낌이었다.
‘이런 걸 아무렇지도 않게 밀고 나오다니, 보면 볼수록 대단한 자야.’
모석청은 도현의 엄청난 힘에 놀라며 회전문 너머로 보이는 어둠 속에 관심을 옮겼다. 석벽 뒤에 저런 공간이 있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
“저 안에 있다 온 건가?”
“네, 같이 들어가시죠.”
도현은 궁금해하는 모석청을 데리고 안쪽에 있는 석실로 향했다.
“혹시 안에 보물이라도 있던가? 매우 비밀스러운 장소 같은데?”
통로를 걷던 모석청이 손전등으로 도현의 위아래를 슬쩍 살피며 물었다.
“보물 창고가 아니라 면벽을 하며 수련하는 장소 같았습니다.”
“아, 그런가?”
모석청은 미심쩍은 눈빛을 보내며 도현을 따라 석실 안으로 들어갔다.
“뭐야, 여기도 죽은 자들이 있네?”
손전등을 비춰 유골을 살펴보던 모석청은 불빛을 옮겨 석실 구석구석을 둘러봤다.
“정말 여기에 아무것도 없었나? 느낌에 돈 될 만한 게 있었을 것 같은데…….”
은밀한 장소엔 그만한 뭔가가 있을 것이라는 게 모석청의 논리였고, 일면 그의 추측이 맞긴 했다. 금은보화 같은 보물은 아니지만 대력금강수가 기록된 양피지 비급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도현은 대력금강수의 존재를 알려 줄 생각이 없었다. 알려 줘도 내공이 없고 무공에 대한 깨달음이 전무하다시피 한 모석청에게는 그림의 떡이었기 때문이다.
굳이 알려 줘서 문제를 만들 이유가 없었다. 바깥 석실에 있는 검법을 전수해 주는 것만으로도 도현의 역할은 충분했다.
대신, 도현은 왜소한 고수가 남긴 옷자락에 적힌 이야기를 해 줘서 이 동굴에서 왜 사람들이 죽어 있는지 모석청의 의구심을 해소해 줬다.
“그렇게 된 거였군. 가문의 복수를 위해…….”
모석청은 석실에 흐르는 지하수에 고개를 숙여 물을 흡입했다.
세수까지 하고 돌아선 그는 유골을 수습해 밖으로 옮기려는 도현을 날카롭게 쳐다봤다.
도현의 말대로 이 석실은 답답하지만 조용히 면벽을 하며 수련할 만한 장소 같았다. 물도 있고, 생식을 할 수 있게 곡식을 담아 놓았던 것 같았던 항아리도 있는 것을 보면.
그러나 한 가지 의문점이 남아 있었다.
“이보게 백 관장, 밤새워 여기 있을 이유가 있었나? 여기서 뭘 한 겐가?”
“옛날 무인들이 어떤 심정으로 이곳에서 면벽 수련을 했는지 체험을 해 봤습니다. 그만 나가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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