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7] 디 임팩트 14권 12화
청선의 눈에서 불길이 일었다.
“지금 네 실력으로 섭상을 상대할 수 있겠느냐?”
“…….”
얼굴이 붉어진 청선의 모습에 태선군이 말없이 차만 들이켰다.
“노일문이 죽고 네가 입산한 뒤로, 내 몸이 정상이 아니었다. 새로운 깨달음을 앞에 두고 그만 심마가 찾아와 심신이 안정되지 않았지.”
태선군은 마치 남의 일을 얘기하듯 자신의 일신상에 벌어진 이야기를 담담히 했다.
“심마가 오니 무공이 퇴보했다. 평생 수련한 무공이 퇴보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의 심성은 점점 악랄해져 갔다.”
말을 하는 태선군의 눈빛 저 깊은 곳에서 붉은 빛이 번뜩이다 사라졌다.
“그렇다 보니 내 무공의 절반도 사용할 수가 없었다. 섭상과 그 녀석들에게 당한 진짜 이유는 내 심마 때문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그 가소로운 것들이 어찌 감히 이 몸에 손 하나 까딱이나 할 수 있었겠느냐?”
“알고 있습니다, 사부님. 고정하시고 청심단을 복용하십시오. 속이 편안해지실 겁니다.”
태선군은 단약을 들고 서 있는 청선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청선의 머리칼은 하얗게 변했고, 눈가에는 잔주름이 많았다.
“너도 나이를 먹었구나, 청선아.”
“아닙니다, 사부님. 나이를 먹기는요.”
태선군은 천천히 손을 뻗어 제자의 손에 들려 있는 청심단을 받아 입안에 넣었다. 그러곤 차를 비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을 챙겨 오너라. 떠나야겠다.”
“사부님, 그 몸으로 어디를 가시겠다는 겁니까?”
“섭상이 곧 이곳으로 올 것이다. 단전이 손상돼서 내가 널 언제까지 지켜 줄지는 모르겠지만, 널 살려서 옥룡산 아래로 내려보내겠다.”
청선은 사부의 말에 부끄러워 눈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검선문의 대제자로서 사부를 지켜 주지는 못할망정 되려 보호를 받는 처지가 돼 버린 것이다.
“사부님.”
“어허! 검을 가지고 오래도!”
피가 섞인 기침을 하던 태선군이 탁자를 내리쳤다.
청선은 참담한 심정으로 간단한 짐을 챙겨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검 두 자루가 들려 있었다.
태선군과 청선이 사라진 지 얼마 안 돼 섭상과 그 일행이 등선궁에 도착했다.
그들은 방 안에 놓인 찻잔과 바닥에 있는 핏자국을 발견했다.
“아무래도 사형의 말이 맞는 것 같소. 사부가 이곳에 다녀간 것 같소. 그것도 방금 전에.”
바닥에 피를 조사하던 셋째 오비가 아쉬운 눈빛으로 섭상을 쳐다봤다.
“대사형도 없습니다. 차 주전자가 따뜻한 걸 보면 조금 전까지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등선궁 내부를 조사한 사제들의 보고에 섭상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유독 청선만 아끼더니 죽음을 앞두고도 기어이 등선궁까지 온 미련한 사부였다.
예상이 들어맞아서 기쁘긴 하지만, 청선에 집착하는 사부의 어리석음이 씁쓸하기도 했다.
‘사부, 옥룡산에서 끝을 내 주겠소, 대사형 당신도.’
섭상은 비가 쏟아지는 마당으로 몸을 날리며 외쳤다.
“얼마 가지 못했을 것이다! 쫓아!”
마귀
도현은 바람처럼 나무 위를 달리고 있었다. 처음엔 나무 밑을 달렸지만 마음이 조급해지자 조금이라도 더 빨리 도착하기 위해 나무 꼭대기의 가지들을 이용해 훌쩍훌쩍 날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비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나무 위를 달리던 도현은 옥룡산 동쪽 지류의 산을 타고 빠르게 넘어갔다.
깊은 홈이 파인 바위 골짜기가 나타나자 그는 나무 위에서 뛰어내려 오랜만에 땅을 밟았고, 바위 골짜기 지역을 건넌 그는 다시 나무가 보이자 그 위로 몸을 날렸다.
타다다닥.
나뭇가지들을 지그재그로 타고 올라간 그는 높은 나무 꼭대기에 올라 잠시 숨을 고르며 북서쪽을 응시했다.
쏟아지는 비로 인해 시야가 꽉 막혔지만 방향을 정확히 알고 있는 그는 등선궁과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비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밟고 위태롭게 서 있던 도현의 몸이 다시 움직였다.
이 나무에 있었던가 하면 잠시 후에는 수십여 미터 떨어진 또 다른 나무 위에 그가 서 있었다. 그야말로 절정의 신법이었다.
얼마 뒤 그는 다른 산 하나를 넘어가고 있었다. 이 산만 넘으면 등선궁을 품고 있는 산과 지척이었다.
콰앙!
시퍼런 번개가 도현이 지나는 인근에 떨어져 비에 젖은 나무 한 그루에 불꽃을 일으켰다.
‘잘못하면 몸에 맞을 뻔했어.’
도현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산을 넘어갔다.
계속해서 나무만 밟으며 이동하던 그가 우뚝 멈춰 섰다. 숲 사이로 언뜻 사람을 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쏴아아아.
3층 높이의 나무 위에서 비를 맞으며 미동도 않고 아래를 내려다보던 도현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가 있는 나무 밑을 검선문의 제자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료쿄와 주성하도 포함되어 있었다.
앞서 달리던 섭상이 돌연 신법을 멈추며 도현이 있는 나무 위를 휙 돌아봤다.
뭔가 이상했는지, 순식간에 도현이 있는 나무에 오른 섭상은 주위를 빠르게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무슨 일입니까, 사형!”
아래서 사제들이 부르는 소리에 섭상은 나무를 내려왔다.
“누가 있는 것 같았는데…… 잘못 봤나 보다. 가자.”
섭상과 사형제들이 사라지자 도현이 처음에 있던 나무와 조금 떨어진 나무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등선궁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주성하에게 듣기론 청선과 태선군을 잡기 위해서 등선궁으로 간다고 했다. 저들의 움직임을 볼 때 등선궁은 이미 거쳐 온 게 확실했다.
‘쫓고 있구나!’
태선군과 청선은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옥룡산 산줄기를 타고 이동 중이었다.
등선궁에서 산 밑으로 가는 몇 가지 길과 지름길은 섭상도 훤히 알고 있는 터라 그 길로 내려갔다가는 섭상과 마주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섭상이 예상치 못한 길로 가는 게 좋을 것 같다며 태선군이 청선을 데리고 산을 비스듬히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부상을 입은 몸인데도 불구하고 태선군의 신법은 그야말로 물 흐르듯 거침없었다. 오히려 뒤를 따라가는 청선이 그 속도를 못 맞출 정도였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았던 태선군의 신법도 그 생명력이 다 해 가고 있는 듯했다.
“우엑.”
신법을 발휘해 달리던 태선군이 절벽가 근처 숲에서 피를 토하며 앞으로 고꾸라진 것이다.
“사부님!”
청선이 사부의 몸을 끌어안았다. 태선군의 호흡은 거칠고 불규칙하게 변해 있었다.
“놓아라. 일어설 수 있다.”
태선군은 제자의 팔을 밀어내고 홀로 일어서려 했지만, 결국 다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한계에 다다른 것 같았다.
나무에 기댄 태선군이 담담한 시선으로 청선을 바라봤다.
“아쉽구나. 몸이 더 따라 주지 않다니…….”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청선이 태선군을 업으려 했다.
“부질없다. 네 발걸음만 늦출 뿐이야. 날 두고 가거라.”
“그럴 수 없습니다.”
청선은 강제로 태선군을 데리고 가려 했다.
“날 더 이상 비참하게 만들지 마라.”
“사부님.”
“산을 내려가기도 전에 나의 숨은 멈출 것이다. 너의 할 일은 따로 있어.”
“죽을 때 죽더라도 제 품에서 죽으십시오.”
청선은 오래전 잠깐이었지만 자신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 주던 사부의 얼굴이 떠올라 눈가가 젖어 갔다.
“여린 녀석 같으니.”
태선군은 한탄을 하며 그의 몸을 억지로 끌어안고 가려는 청선의 목을 검집으로 가볍게 때렸다.
숨이 턱 막힌 청선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스르릉.
검을 뽑은 태선군이 나무에 등을 기댄 상태로 땅에 검을 꽂았다.
“무인이 무공을 등한시하면 그 존재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나의 죽음이 널 자극해 무인으로서 성장을 이루기 바란다.”
“사부님…….”
청선은 사부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사부의 행보가 마음에 들지 않아 속으로 원망도 많이 했지만, 그를 키워 준 사람이다. 죽어 가는 사부의 모습에 가슴이 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검선문의 문주는 이제 너다. 너는 살아남아 문주로서 반도가 된 네 사제들의 죄를 물어야 한다. 알겠느냐!”
“그리하겠습니다.”
청선의 대답을 들은 태선군은 허허로운 시선으로 비가 내리는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봤다.
“결국은 옥룡산에 내 뼈를 묻는구나…….”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던 태선군이 청선을 바라봤다.
“청선아, 마지막으로 물을 게 있다.”
“하문하십시오, 사부님.”
태선군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청선의 어깨를 짚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원신공을 전대 문주께 전수받았느냐?”
태선군의 물음에 청선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전대 문주는 나의 스승님이셨다. 그분이 나의 어떤 면이 마음에 안 드셔서 문주 무공을 전수해 주시지 않고 임종하셨는지 지금껏 살아오면서 원망을 많이 했다. 하지만 이젠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죽음이 눈앞인 마당에.”
청선의 두 눈을 들여다보며 태선군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청선아, 전대 문주께 오원신공을 전수받았지? 나는 아니지만 네게라도 그 무공이 제대로 전수되었다는 말을 듣고 싶다.”
“오원신공은…….”
“그래, 오원신공은?”
긴장했는지 청선의 어깨를 짚은 태선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한동안 뜸을 들이던 청선이 대답을 완성했다.
“오원신공은 전수받지 못했습니다. 임종의 그 순간, 전대문주님은 편안한 얼굴로 제게 미소를 보이셨을 뿐입니다.”
“정말이냐? 정말 아무것도 네게 남긴 게 없단 말이냐?”
태선군은 실망 가득한 눈빛으로 재차 물었다.
“그렇습니다, 사부님.”
“음…… 그렇단 말이지…….”
태선군은 뭔가 생각하는 눈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너의 말을 믿으마.”
태선군이 땅에 꽂아 둔 검을 뽑아 들고 천천히 일어섰다.
그런데 몸을 일으킨 그의 기세가 갑자기 돌변하기 시작했다.
핏기 없던 태선군의 얼굴은 점차 정상으로 돌아와 생기가 흘렀고, 검을 든 자세에서는 여유로움과 힘이 넘쳤다. 숨소리도 건강했다. 방금 전까지 죽어 가던 모습과 비교되는, 너무도 극적인 변화였다.
“사, 사부님, 이게 대체…….”
놀란 청선이 주춤거리며 일어섰다.
“혹시나 해서 이런 속임수까지 썼는데…… 넌 오원신공을 끝까지 모른다고 하는구나. 기대하던 답이 아니었어.”
속임수라는 말이 사부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청선의 표정이 굳어졌다.
“속임수라고요?”
“섭상과 제자 녀석들이 날 배신한 건 사실이다. 그 자리에서 몽땅 죽일까 하다가 가만 생각해 보니 오히려 좋은 기회였다. 내가 죽어 가는 극한 상황이라면 네 입에서 오원신공과 관련된 진실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게 거짓이었단 말입니까, 제게 오원신공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사부의 집요함에 놀란 청선의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파였다.
제자들의 배신을 이용해 확인을 하다니, 화가 나는 것보다 서글픔이 앞섰다.
“이제는 믿으마. 내가 죽어 가던 순간에도 너는 오원신공이 없다고 하니 믿을 수밖에.”
“저를 어쩌실 생각입니까?”
사부의 눈가에 어리는 살기를 감지한 청선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오원신공 때문에 널 지금껏 감싸 주었다. 그런데 이제 그럴 필요가 사라졌으니 내가 어떤 선택을 할 것 같으냐?”
차가운 미소가 태선군의 입가에 걸렸다.
“사부님,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습니까? 대체 사부님 마음속엔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 겁니까!”
“마귀다. 한 마리 마귀가 들어와 더욱 강해지라고 나를 부채질하는구나.”
태선군의 손이 청선의 복부에 살며시 닿는 순간, 청선의 입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워낙 은밀히 다가온 손이라 청선은 피할 사이도 없었다.
목에서 솟구쳐 나오는 핏물을 입 밖으로 게워 내던 청선은 비틀거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왜 우는 것이냐? 죽음이 고통스러운 것이냐?”
“사부가 불쌍해서 우는 것입니다.”
“미친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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