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6] 디 임팩트 14권 21화
“망할 얼음탑주!”
리타는 작은 입술로 얼음탑주의 욕을 하며 발을 굴렀다. 어베인의 말대로 얼음탑주를 죽이지 않으면 도현의 복수라고 말할 수 없었다.
“반드시 내 손으로 얼음탑주를 죽여 버리겠어요!”
살기를 풀풀 날리던 리타는 주머니에서 자수정을 꺼냈다.
“락제프, 그곳에서 나와 내 몸으로 들어와요. 그래서 얼음탑주를 죽여 줘요.”
자수정 속 눈동자가 깜빡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이런 때일수록 마법 공부에 집중해.
“도현이 무사한지 걱정돼서 공부가 돼야죠.”
-어베인, 도현이 죽었을 것 같은가?
눈동자가 스르륵 움직여 탁자 앞에 서 있는 어베인을 응시했다.
어베인은 술을 한 모금 하며 천천히 답했다.
“어젯밤에 크샤코 가문의 전투 몬스터들과 병력들이 북쪽 산으로 이동했소. 내 생각으로는 도현을 찾기 위한 움직임 같았소. 도현은 살아 있을 거요.”
“우리도 가서 도현을 찾아봐요.”
리타가 목소리를 높였다.
“딘과 짐브리오가 갔으니 그들을 믿고 기다려 보자. 그리고 도현을 아무도 못 찾을 수도 있어. 어쩌면 그는 북쪽 산이 아니라 벌써 다른 곳으로 이동했을 수도 있으니까.”
5미터 급 전투 몬스터 하이드로우가 붉은 눈을 번뜩이며 산을 수색하고 있었다.
전투 몬스터 뒤로는 무장한 크샤코 가문의 병사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5미터 급 전투 몬스터 다섯 마리와 병사 1백 명씩 짝을 이룬 크샤코 가문의 수색대는 열 개 조로, 모두 합하면 전투 몬스터 쉰 마리와 병력 1천 명이었다.
그들은 어젯밤부터 북쪽 산맥의 산들을 조사하고 있었다.
“몬스터다!”
산 위에서 마주친 3미터 급 몬스터 몇 마리가 측면에서 병사들을 공격하려다 전투 몬스터에 의해 가로막혔다.
훈련이 잘된 전투 몬스터는 능동적으로 병사들을 보호하며 겁 없이 덤벼드는 3미터 급 몬스터들을 갈가리 찢어 죽여 버렸다.
크르르르.
산에 서식하는 몬스터의 사체를 밟고 선 전투 몬스터는 비릿한 숨소리를 냈다.
“이동!”
수색대는 병력 손실 없이 계속 수색을 이어 갔다.
그들이 사라진 직후, 딘과 짐브리오는 바위 사이에 있는 수풀 속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영주, 어떻게 보시오? 저놈들도 도현을 찾으려고 하는 것 같지 않소?”
짐브리오의 물음에 딘은 얼굴에 튄 몬스터의 피를 손등으로 닦아 내며 답했다.
“그런 것 같군. 좋은 징조야, 도현이 확실히 살아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그거야 우리가 먼저 찾았을 때나 좋은 징조지.”
둘은 수색대가 간 곳과 정반대되는 왼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들이 향하는 곳은 이미 그들이 거쳐 온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이야, 고대 도시 일에 브링틱 가문들이 개입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이번엔 예외인가 보군. 저들이 도현을 찾는 게 맞는다면 말일세.”
“얼음탑 마법사 중에 크샤코 가문과 관계가 깊은 녀석이 한 명 있소. 카샨이라고 브링틱 원로의 차남이지. 아무래도 그놈이 탑주의 지시를 받고 가문의 병력을 동원한 것 같소.”
짐브리오는 말을 하면서도 두 눈은 쉴 새 없이 도현의 흔적을 발견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건 딘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산에 들어온 이후로 거의 휴식을 취하지 않고 밤을 새우며 계속 도현을 찾고 있었다.
“리타가 욕한 은발의 중년 마법사 이름이 카샨이었지.”
딘이 기억을 더듬어 말했다.
“맞소, 그놈이오. 아무튼 얼음탑 마법사들은 모두 개자식들이오. 도움이 되지 않는 망할 것들.”
욕설을 시원하게 내뱉던 짐브리오의 몸이 살짝 굳어졌다. 전방의 높은 나무 위에 사람의 신발로 보이는 게 언뜻 보였기 때문이다.
“영주.”
“나도 보았네.”
무성한 나뭇잎으로 몸을 감추고는 있지만 미처 신발까지는 가리지 못했다.
크샤코 가문이 심어 놓은 감시병일 수도 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둘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주변을 빠르게 훑으며 나무로 뛰어 올라갔다.
“어! 너!”
“자네!”
짐브리오와 딘은 나무 위에 서 있는 사람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크게 놀라 입을 딱 벌렸다. 신발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도현이었던 것이다.
나뭇가지 위에 팔짱을 끼고 서 있던 도현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여기서 보니 반갑네요, 영주님, 짐브리오. 저를 찾고 있었습니까?”
“당연하지, 이 사람아!”
“무사했구나! 자식!”
딘과 짐브리오는 곧 정신을 차리며 기쁜 얼굴로 웃었다.
도현은 이계로 돌아온 후 폭포 뒤 동굴을 나와 고대 도시를 향해 이동 중이었다.
주로 나무와 나무 사이를 건너며 움직였는데, 그러다 좁은 길에 나타난 딘과 짐브리오를 우연히 발견하고는 일부러 슬쩍 신발을 노출시킨 것이다.
반가움에 벌인 약간의 장난이었다.
그들이 여기에 나타난 것만으로도 도현은 그들의 의도를 짐작했다.
‘내가 걱정돼서 온 거겠지.’
도현은 마음이 훈훈해졌다.
“내려가시죠.”
나무 밑으로 내려온 딘과 짐브리오는 도현의 위아래를 살폈다. 의외로 건강해 보였다.
“어떻게 된 거야? 우리는 네가 몸에 피 칠을 하고 숨만 깔딱이는 게 아닌지 걱정을 했는데.”
짐브리오가 걸쭉한 음성으로 물었다.
“칼라치가 도움을 줬습니다.”
“뭐? 칼라치 그놈이 널 도왔다고?”
짐브리오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고, 옆에 있던 딘은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말없이 도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도현은 얼음탑주의 손에서 칼라치가 자신을 구해 주고 어느 정도 치료까지 해 주었다고 설명했다.
“이상한 놈이네. 언제는 죽이려고 발버둥을 치며 덤비더니. 왜 그런 거래?”
“저와 공정한 상태에서 제대로 싸우고 싶다고 하더군요. 일전에 자신을 죽이지 않고 살려 준 것에 대한 빚도 갚았다고 하고요.”
“자식이 그래도 짐승 같은 놈은 아니네. 은혜를 갚을 줄도 알고. 고맙긴 하다.”
짐브리오는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도현을 도운 칼라치를 칭찬했다.
“베일 가문의 땅에서 벌어진 얼음탑과의 싸움은 어땠나?”
조용히 듣고만 있던 딘이 근처 바위에 엉덩이를 붙이며 그날의 사정을 물었다.
“얼음탑주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희생은 많았지만 제가 마법사들을 한 명씩 죽이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벌어진 싸움을 설명하는 도현의 음성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케일 경과 반돌로의 죽음이 떠오른 것이다.
그날 밤, 술잔을 나누며 반돌로는 도현에게 처음으로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며 딸을 소개시켜 주겠다고 말했고, 케일 경은 즐겁게 술을 마셨다. 그리고 그들은 싸우다 죽었다.
도현의 책임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도현은 얼음탑주를 막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진하게 남아 있었다.
“베일 가문의 땅은 어떻게 됐습니까?”
“남부 대륙에서 꽤 영향력이 있는 대영주 플레온 가문의 병력이 얼음탑과 함께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네.”
딘은 로나에게 들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렇군요.”
도현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섣부른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그곳엔 얼음탑주가 자리를 잡고 있을 테니까.”
걱정을 담아 말한 딘은 몸을 세우며 기지개를 크게 한번 했다. 도현을 찾자 몸의 긴장감이 살짝 풀리며 피곤이 몰려온 것이다.
“도현, 그런데 자네, 정말 괜찮은 건가? 폭주를 해서 몸이 정상이 아닐 텐데?”
딘은 경험상 폭주의 후유증이 꽤 오래간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도현이 산에 숨어 있더라도 활발히 움직일 수 없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도현은 부상당한 얼굴도 아니었고 아픈 구석도 없어 보였다. 오히려 눈빛은 호수처럼 잔잔했고 여유로움이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이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현은 딘의 질문에 난감해졌다. 차원 이동해서 몸을 회복하고 돌아왔다고 사실대로 말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언젠가는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전 괜찮습니다, 영주님.”
“음…… 혼돈의 마나를 수련하는 방식의 차이인가? 나는 강해질수록 폭주의 후유증이 더 오래 남던데, 자넨 아닌가 보군.”
“영주, 그게 뭐 중요하오. 도현의 몸이 정상이면 그걸로 족한 거지. 어서 돌아갑시다. 동료들이 걱정하며 기다릴 거요.”
“험, 그러지. 도현, 어서 가세.”
고대 도시로 돌아가는 도중 딘은 도현이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아 괜히 그에게 눈치를 줬다.
도현은 그런 딘의 시선을 느꼈지만 속으로 웃으며 모른 척했다.
“아니, 근데 옷과 신발이 왜 그 모양이야? 그 칼은 뭐고?”
뒤늦게 도현의 복장이 우스웠는지 짐브리오가 달리면서 물었다.
앞서 달려가던 도현은 뒤따라오는 짐브리오와 딘에게 헬구스의 옷과 신발, 칼이라고 설명해 줬다.
‘신발이 작아서 신경 쓰이는데?’
도현은 헬구스가 준 검신이 짧고 넙적한 칼로 가죽 신발의 앞부분을 일부 잘라 냈다. 발가락이 드러났지만 조이는 답답함이 사라지고 시원했다. 마치 샌들 같았다.
도현은 달리면서 공기를 깊게 흡입했다. 지구와 같은 공기였지만 묘하게 그의 몸을 자극하는 이계의 맛이 느껴졌다.
차도, 높은 빌딩도 없는 곳.
캬아아아.
불쑥 튀어나온 하급 몬스터의 목을 넙적한 칼이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미미한 기운이 도현의 몸으로 흡수돼 내공으로 변화해 갔다.
도현은 갈수록 빨라졌고, 짐브리오와 딘은 그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땀을 흘려야만 했다.
“같이 가, 이 인간아!”
보다 못한 짐브리오가 한 소리 했고, 도현은 그때서야 머쓱한 얼굴로 속도를 줄여 갔다.
“안녕하십니까, 사제님.”
리드만의 등장에 야간 방벽 경비를 서던 용병이 인사를 했다. 깡말랐지만 근성이 있어 보이는 용병 사내는 늪지 발굴지에 고용된 용병들 중 한 명이었다.
“오, 자네로군.”
리드만은 며칠 전 자신이 치료해 준 용병의 인사에 알은척을 했다.
용병은 벌목을 하다가 옆에서 쓰러지는 나뭇가지에 옆구리가 뚫렸었는데, 리드만이 치료해 줘서 목숨을 건졌다. 그 때문에 깡마른 용병은 리드만을 방벽에서 만나자 지체 없이 허리를 숙이고 인사를 했다. 생명의 은인인 것이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땐 제가 정신이 없어서 사제님께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습니다.”
“괜찮네.”
용병의 정중한 인사에 넉넉한 미소를 지은 리드만은 방벽 난간에 손을 얹고 멀리 북쪽을 응시했다. 그가 모시는 영주 딘이 도현을 찾아 떠난 지 며칠이 됐지만 아직 연락이 없었다.
“내가 모시고 갔어야 했는데…….”
늙은 리드만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하염없이 북쪽 어둠만 바라봤다.
그 모습이 무거워 깡마른 용병은 한동안 말을 걸지도 못하고 방벽 아래만 묵묵히 내려다봤다.
“물 좀 마셔도 되겠나?”
“예? 아 네. 드십시오. 여기.”
깡마른 용병은 허리에 찬 수통을 꺼내 리드만에게 건네줬다.
“시원하군.”
물을 몇 모금 마신 리드만은 수통을 돌려줬다.
“저어, 사제님.”
수통을 받은 용병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누굴 기다리십니까?”
“그래 보이나?”
“네…… 얼굴 표정이 저희 어머니와 비슷했거든요.”
“자네 어머님과?”
리드만은 흥미가 생겼는지 용병의 얼굴을 쳐다봤다. 용병은 주저하다가 말을 계속했다.
“저희 아버지도 용병이셨거든요. 1년에 한 번씩 집에 오셨는데, 어머니는 아버지가 오시기 전까지 늘 근심 가득한 얼굴로 언덕에서 내려오는 길을 바라보셨습니다.”
“음, 그러셨군.”
“하도 오랫동안 어머니의 그런 얼굴을 봐 왔기 때문에 저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의 얼굴은 보자마자 알 수 있습니다.”
리드만은 눈이 큰 깡마른 용병에게 미소를 보였다.
“자네 말이 맞네. 자네 어머니의 그 깊은 근심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나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네. 그것도 한 명이 아닌 두 사람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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