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8] 디 임팩트 15권 8화
“부딪쳐 보면 알 수 있겠지.”
칼라치는 강철 방패를 들고 다시 수련에 들어갔다.
“어어, 조심하라고.”
날카로운 방패 날에 옷이 살짝 베인 헬구스가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이봐 칼라치, 기분 나빠하지 말고 내 말 좀 들어 봐. 내가 쭉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이번 일은 우리만으로는 벅찬 것 같아. 차라리 이 정보를 베일 가문 측에 넘겨주고 적당히 대가를 받는 게 어떤가?”
“베일 가문이 브링틱에 들어왔나?”
허공 높이 집어 던진 강철 방패를 회수하며 칼라치가 물었다.
“공개적으로 병력이 들어온 건 아니지만, 베일 가문을 대표할 만한 인물이 은밀히 들어와 있는 건 맞지. 내가 어제 브링틱 시장에서 우연히 그와 마주쳤거든.”
“누군데 베일 가문을 대표할 만하다는 거지?”
“베일 가문의 대공 알조베티 베일의 숙부 돈조르니 베일 이네.”
“돈조르니 베일?
칼라치가 흥미를 보이는 것 같자, 헬구스가 가까이 다가와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대공의 숙부라면 충분히 베일 가문을 대표할 만하지 않나?”
“그를 자네가 어떻게 알고 있지?”
“험, 이 몸이 왕실에서 지내던 때에 부친인 왕을 만나러 온 그를 본 적이 있지. 만찬장에서 대화도 나눠 봤다고. 어제 시장에서 서로 알아보고 우린 잠시 동안 껄껄 웃기까지 했다네. 아주 멋진 노인네야.”
헬구스는 26년 전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들먹거렸다.
“어떤가? 이 정도 인물이라면 우리에게 약속할 만한 권한이 많지 않겠나? 씨드와 관련된 정보를 넘겨주고 우린 빠지자고. 그 대신 대가를 받아 챙기는 거야.”
“씨드를 포기하고 적당히 돈을 받아 챙겨 쥐새끼처럼 도망가자는 뜻이지?”
가만히 듣고 있던 칼라치가 강철 방패에 기대 헬구스를 지그시 노려봤다.
“너무 위험하니까 하는 말이지. 자네도 강하지만 자네보다 쟁쟁한 강자들이 툭툭 튀어나오고 있잖은가. 씨드를 노리다가 죽음의 표적이 될 수 있다고.”
“헬구스, 난 어머니가 죽고 시궁창에서 뒹굴며 맹세한 적이 있다. 강해질 수 있는 기회가 오면 그게 무엇이든 놓치지 않겠다고. 엘바를 먹으며 죽음을 각오한 내가, 씨드를 눈앞에 두고 죽음이 두려워 물러날 것 같나? 이 칼라치가!”
칼라치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강철 방패가 정원 깊숙이 박혔다.
“난 포기하지 않아, 싸우다 먼지가 되는 한이 있어도.”
“하지만 이디언을 생각해 보라고. 자네도 솔직히 이디언 때문에 걱정이지 않나?”
그의 말에 칼라치의 눈빛이 짧지만 강하게 흔들렸다.
“난 둘이 잘됐으면 해서 해 주는 말이었다고. 내가 뭐 돈 벌자고 한 말 같은가?”
헬구스는 헛기침을 몇 번 하며 발로 근처에 있는 정원수를 괜히 걷어찼다.
한동안 말이 없던 칼라치는 땅에 박힌 강철 방패를 뽑았다.
“대공의 숙부가 왜 이곳에 온 것 같나?”
그의 목소리는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그거야 뻔하지, 지난번 일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전 때문이겠지. 베일 가문의 체면상 아무리 얼음탑주라 해도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지.”
“돈조르니가 탑주를 상대할 만큼 강자인가?”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어, 그의 무력에 관해 알려진 게 별로 없어서. 아무튼 대공의 숙부가 이곳에 와 있다는 게 중요해. 그가 준비 없이 왔겠나? 그 정도 인물이? 모르긴 몰라도 얼음탑주를 찍어 누를 강자를 대동하고 왔을 거야.”
베일 대공의 숙부 돈조르니와 몇몇 노인들이 어둠 속에서 불이 환하게 밝혀진 방벽 위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이 바라보는 건 얼음탑과 플레온 가문이 차지한 옛 베일 가문의 땅에 둘러쳐진 방벽이었다.
수차례 전투를 벌이며 부서진 방벽은 플레온 가문의 병사들이 보수해서 예전처럼 높고 단단해져 있었다. 그 위를 플레온 가문의 병사들이 눈을 부릅뜨고 경계를 서고 있었다.
“도둑놈들이 남의 땅에 와서 집주인 노릇을 하는군.”
나이 지긋한 돈조르니의 말에 주변에 서 있는 몇몇 노인들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
“돈조르니, 자네가 원하면 지금이라도 저 도둑놈들을 쫓아낼 수 있네. 말만 하게.”
눈빛이 얼음처럼 차가운 마법사 로제로가 말했다. 그는 다리 한쪽이 무릎 아래로 없어서 의족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약간 서 있는 게 삐딱했다.
그는 얼음탑주를 상대하는 걸 도와 달라는 친구 돈조르니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은거해 있던 곳에서 오랜만에 세상에 나온 마법사였다.
“자네 말에 힘이 나는군.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네, 친구. 조만간 대공의 연락이 올 거야. 그것에 따라 플레온 가문의 처리가 결정되겠지.”
북부 대륙에 기반을 둔 베일 가문은 남부 대륙의 대영주 플레온 가문의 확실한 입장을 듣고 싶어 했다. 그래서 플레온 가문에 전령이 가 있는 상태였다.
끝까지 얼음탑과 함께한다면 브링틱과 가까운 항구도시 융트에 대기 중인 베일 가문의 대규모 병력이 브링틱으로 진군해 대공의 숙부인 돈조르니의 지휘 아래 얼음탑과 플레온 가문의 병사들을 남김없이 죽일 것이다.
돈조르니는 몸을 돌려 그의 뒤에 나란히 서 있는 세 명의 인물들을 흐뭇하게 쳐다봤다.
마법사 로제로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얼음탑주를 상대해도 충분할 만큼 뛰어난 마법사였다. 그리고 옆에 서 있는 거구의 노인 커크는 수십 년 전 이름을 날린 쌍도끼의 달인이었고, 마지막 보통 키의 노인 에이저는 주 무기인 활을 사용해 홀로 요새를 점령할 만큼 강한 인물이었다.
대공인 조카의 부탁을 받은 돈조르니는 변방인 브링틱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모적인 싸움을 완전히 종식시키기 위해 친구인 이들 세 명을 세상으로 끌어내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만 돌아가세.”
돈조르니와 세 명의 노인들은 머리에 천으로 된 넓은 모자를 눌러쓰고 어두운 방벽 사이 길을 천천히 걸어갔다.
“돈조르니, 어제 시장에서 뚱뚱한 친구와 알은척을 하던데 누구인가?”
쌍도끼를 사용하는 거구의 노인 커크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물었다. 그의 이빨은 짐승의 것처럼 모두 날카로웠다. 흡사 늑대 인간처럼 보이는 그에게 돈조르니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헬구스 말이로군. 남부 대륙에 있는 왕국의 서자인데, 왕실의 암투에 밀려 도망 다니는 자야. 아주 오래전에 잠깐 만난 사이지.”
“하도 반갑게 웃으며 말을 해서 난 또 가까운 사이인 줄 알았지.”
“그자가 아주 넉살이 좋아. 먼저 웃으며 말을 하는데 내가 인상을 쓸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기도 하군, 하하하!”
돈조르니와 그의 친구들은 넓은 고대 도시를 벗어나 용병 시장으로 향하는 대로를 걸었다.
“돈조르니, 듣기로 고대 왕궁에 씨드가 있다는, 믿지 못할 소문이 떠돈다는데 사실인가?”
활을 등에 멘 노인, 에이저가 조용히 물었다. 그 질문이 나오자 로제로와 커크가 거의 동시에 돈조르니를 쳐다봤다.
친구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쏠리자 돈조르니는 허리에 찬 검 손잡이에 가볍게 손을 올리며 답했다.
“약간의 가능성은 있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 약간의 가능성은 다른 고대 유적을 발굴할 때도 늘 존재해 왔네. 고대 왕궁을 발굴한다고 해서 씨드가 있으란 법은 그 어디에도 없네. 있으면 당연히 좋겠지만 말이야.”
없을 거라는 식의 말에 로제로가 물었다.
“하면 얼음탑주가 왜 나선 건가?”
“고대 왕궁에 있을지 모르는 마법서 때문이 아닐까 싶네만. 아니면 씨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를 가진 것일 수도 있고.”
말을 하던 돈조르니는 고개를 돌려 어둠에 잠긴 고대 도시를 응시했다.
“나중에 물어보세, 감히 베일 가문의 충성스러운 신하 반돌로와 케일을 죽인 이유가 뭔지.”
싸늘한 살기가 그의 몸에서 피어올랐다.
바크 드라모스
며칠에 걸쳐 도현은 홀로 성을 점령하고 있었다. 처음엔 내성 언덕 아래에서 기마 몬스터들과 싸웠지만, 지금은 성문을 돌파해 내성 깊숙한 곳까지 진출했다.
싸움은 갈수록 치열해졌다. 병사 몬스터들은 도현이 내성에서 가장 거대한 건축물로 향하자 온몸을 던져 막아섰다.
퍼엉.
첨탑 위에서 몸을 던져 공격하는 대담한 병사 몬스터를 대력금강수로 날려 버린 도현은 좌우에서 긴 창으로 협공하는 몬스터들을 피해 허공으로 점프했다.
허공 높게 떠오른 그는 우아한 자세로 몸을 비틀었다. 지상에서 병사 몬스터들이 집어 던진 녹이 잔뜩 슨 수십여 개의 창들이 아슬아슬하게 도현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도현은 몸을 회전시키며 병사 몬스터가 잔뜩 모여 있는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쿠웅.
도현의 힘 있는 착지에 가까이 서 있던 병사 몬스터들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뒤로 휘청거렸다. 그가 두 다리에 강한 내공을 실어 땅바닥에 충격을 준 것이다.
잠시 빈 공간이 생기자 도현은 거센 검막을 일으켰다.
쌍검이 일으키는 푸른색 검막은 병사 몬스터들이 휘두르는 병장기들을 불꽃을 일으키며 모조리 튕겨 버렸다.
검막이 일시적으로 풀리며 순간적으로 빈손이 된 병사 몬스터들을 향해 푸른 검광이 빛살처럼 쏘아졌다. 번쩍이는 빛줄기에 맞은 병사 몬스터들은 하나같이 몸이 불타오르며 사라져 갔다.
삽시간에 수십의 병사 몬스터들을 처리한 도현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내성의 중심 건물 격인 성당 모양의 거대한 건축물로 향하는 자갈길 위에서 수백의 병사 몬스터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현은 본능적으로 성당처럼 생긴 건축물에 이 성을 움직이는 존재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성안의 병사 몬스터들이 저곳을 중심으로 방어했기 때문이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훔친 도현은 손바닥에 감긴 천이 풀리지 않게 입과 한 손을 이용해 양쪽으로 힘껏 잡아당겼다.
터지고 갈라진 손바닥의 상처를 천으로 압박한 도현은 병사 몬스터가 사용하던 낡고 녹이 슨 타원형의 철 방패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는 성당 모양의 건축물로 향하는 자갈길을 두껍게 경비하는 수백의 병사 몬스터들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도현에게 무의미한 싸움은 없었다. 검을 휘두르고 주먹으로 적을 후려치는 모든 동작은 그에게 분명한 목표를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고 있다.
‘이들을 잠재우고 나는 힘을 얻는다.’
그는 성을 발견하고 호기심에 찾아왔다가 몬스터로 변한 인간들과 싸우게 됐다.
마음이 편치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회피할 수는 없었다. 회색빛 대지에서 괴물로 사는 것보다는 영혼이라도 편하게 이들을 소멸시켜 주는 게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결과물로서 그는 많은 내공과 실전 경험을 쌓고 있었다.
“너희들이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난 끝까지 너희들을 잡을 거야. 그것이 이 오래된 고성과 함께 망가지고 있는 너희들을 구해 주는 길 같으니까 말이야.”
말을 끝낸 도현은 들고 있던 묵직한 방패에 내공을 주입했다. 철 방패 테두리가 부르르 떨리며 달라붙은 녹이 우수수 떨어졌다.
내공이 주입된 철 방패를 허리 높이로 들어 올린 도현은 옆으로 회전시키며 집어 던졌다.
강한 기세로 날아간 철 방패는 두꺼운 병사 몬스터들의 벽을 일시에 허물어 버렸다. 도현은 방패가 휩쓸고 간 그 자리를 통과하며 좌우로 검을 번개처럼 휘둘렀다.
그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몬스터가 불타오르며 재로 변해 갔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거센 불길은 도현의 손에 죽은 병사 몬스터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병사 몬스터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도현을 악착같이 공격했다.
불길과 검은 재로 사방이 엉망인 가운데, 도현은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몬스터들의 무기를 자연스럽게 막아 내며 반격을 가했다.
쉬이익.
푸른 검광이 번쩍일 때마다 어김없이 두셋의 병사 몬스터들이 불타올랐다.
‘몸이 이전보다 더욱 민감하게 반응한다.’
기감으로 느끼던 적의 살기와 공격을 이제는 몸의 세포들이 일어나 아우성치며 그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기감과는 또 다른 일종의 동물적인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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