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9] 디 임팩트 15권 9화
지난 열흘간 거의 쉬지 않고 수많은 인간 몬스터들과 싸우며 그가 체득한 일종의 싸움 기술이었다. 무공과는 다른 생존 본능이 극대화되어 나타난 고도의 감각인 것이다.
싸움은 적을 물리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얼마만큼 상처를 덜 입고 싸우느냐는 것도 중요하다. 특히 다수의 적과 긴 전투를 벌일 때는 그것이 생명을 보존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도현은 열흘간의 치열한 전투를 통해 공격을 예측하고 회피하는, 그 동물적인 감각을 온몸으로 터득하게 됐다.
서걱.
허공에서 그림자를 만들며 떨어지던 몬스터의 머리를 순식간에 베어 버린 도현은 검을 밑으로 내렸다.
싸움은 치열했지만 결국 서 있는 건 그 혼자였다.
바닥엔 수많은 녹슨 철갑과 병장기 들이 나뒹굴었고, 그 사이를 검은 재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심호흡을 하며 주변을 둘러본 도현은 몸을 돌려 웅장한 건물 앞에 섰다.
커다란 아치형의 입구가 대리석 계단 위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에 무엇이 있을까…….’
병사 몬스터들은 이곳을 최후까지 지키다 사라져 갔다. 성을 움직이는 어떤 존재가 이 건물 안에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지만 단언할 수 없었다.
밑에서 아치형 입구를 올려다보던 도현은 발걸음을 옮겨 10여 개 정도 되는 대리석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뚜벅뚜벅.
도현의 발소리가 크게 들릴 만큼 주변은 아주 고요했다.
아치형 입구에 선 도현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낡고 육중한 문이 그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기괴한 소리를 내며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안을 살펴보던 그는 천천히 건물 내부로 진입했다.
‘넓군.’
대리석 바닥이 길게 이어진 탁 트인 내부는 전체적으로 직사각형 구조였는데, 수백 명이 들어와도 좋을 만큼 홀이 넓고 천장은 지나치다 싶게 높았다.
촛불 하나 없었지만 내부는 밝았다. 수십 개의 창문을 통해 건물 좌우 양쪽에서 밝은 햇살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대단하군.’
내부를 장식하는 장식물은 별다른 게 없었다. 있다면 오직 하나, 내벽에 섬세한 솜씨로 조각된 수천 명의 여성과 남성이었다.
남성들은 하나같이 영웅의 기개가 엿보이는 전사들로 온갖 괴물들과 싸우고 있었고, 미의 여신처럼 아름다운 여성들은 들과 산에서 노래하며 남성들에게 힘을 북돋아 주고 있었다.
‘놀라워, 천장까지 조각을 다 해 놨다니.’
그림도 아닌 조각이 뒤덮은 이 놀라운 홀의 모습에 긴장하며 내부를 살피던 도현은 거듭 감탄했다.
생동감이 넘치고 제각각 얼굴이 달라 보이는 이 조각들을 다 구경하다가는 하루를 꼬박 보내야 할 정도였다.
고대의 솜씨 좋은 장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내벽에 걸작을 남긴 게 분명했다.
조각에서 시선을 뗀 도현은 건물 제일 안쪽에 위치한 단을 향해 걸어갔다.
대략 50센티 높이의 단 위에는 박살이 난 의자의 잔재가 흩어져 있었다.
‘철을 녹여 의자 형태로 만들었나 보군. 누가 이렇게 의자를 부순 거지? 보통 힘으로는 불가능했을 텐데.’
쇠로 만들어진 등받이 부분과 다리의 일부분을 확인한 도현은 단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그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는 환영이 잠시 떠올랐다 사라졌다.
‘신전은 아닌 것 같고…… 성을 통치하는 성주가 자신의 위엄을 보이는 집무실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단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도현은 의문을 품으며 단에서 내려왔다.
‘내 착각이었나? 아무것도 없어.’
병사 몬스터들이 이곳으로 향하는 길을 철저히 막아서 뭔가 중요한 게 있을 줄 알았다. 한데, 막상 와 보니 텅 빈 홀이었다.
‘조금 더 조사해 보자.’
도현은 시간을 들여 홀 내부를 꼼꼼히 다시 조사해 봤지만 비밀스러운 공간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마법의 장막으로 그의 눈을 속였다면 모를까, 실제로 이 건물 내부는 눈앞에 홀이 전부였다.
뭔가 찜찜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만 나가자.’
그는 결국 밖으로 나와 대리석 계단 위에 서서 주변 일대를 둘러봤다.
며칠간 그와 싸웠던 성의 병사 몬스터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이제 나밖에 없는 건가?”
한동안 몬스터로 변한 인간들과의 싸움을 회상하던 도현은 왜 그들이 그렇게 변했는지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해 가슴 한편이 답답했다.
‘이곳은 고대의 성이 분명해 보이는데…… 혹시 락제프는 그 이유를 알고 있을까?’
자수정 속에 영혼이 들어가 있는 고대의 마법사 락제프라면 이 이상한 일에 대해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그에게 물어보자.’
도현은 대리석 계단을 내려오다 성주의 집무실 건물 그림자에 문득 시선이 갔다.
‘그렇지, 건물 외부는 확인 안 해 봤어.’
내부만 확인했던 도현은 빠르게 건물 외부를 한 바퀴 빙 돌았다. 수상한 점이 보이지 않자, 그는 건물 외벽을 타고 지붕 위로 올라갔다.
‘누군가 있다!’
넓은 지붕 위를 걸으며 주위를 훑어보던 도현의 시선에 검은 망토를 걸친 자가 웅크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포착됐다. 등을 보이고 앉아 있어서 그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덩치가 상당한 자였다.
‘강한 기세가 느껴진다. 그동안 상대해 온 몬스터와는 차원이 달라. 혹시 몬스터가 아니라 사람인가?’
가만히 등을 보이고 있는데도 사방을 압도하는 기운이 풍겼다.
도현은 몬스터인지 사람인지 아직 판단이 서지 않는 자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지붕을 반 바퀴 돌아 그의 전면에 섰다.
도현의 시선을 느꼈는지, 웅크리고 앉아 있던 자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콰앙.
도현이 서 있던 지붕이 폭발하며 그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검은 망토를 걸친 자가 공간을 좁히며 날아와 검으로 내리친 것이다.
‘위험했어!’
간발의 차로 기습 공격을 피한 도현은 공중에서 검을 뽑아 밑으로 무서운 속도로 하강했다. 그의 검은 새파랗게 빛이 나고 있었다.
그가 처음부터 진지하게 싸움에 임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망토를 걸친 자의 기습 공격 속에서 높은 검술의 경지를 엿본 것이다.
단 한 수였지만 그거면 족했다.
어쭙잖은 검술이었다면 기습 공격을 하는 순간, 도현의 검에 반격당해 그의 몸이 되레 여러 조각이 돼 버렸을 것이다.
도현이 그러지 못할 정도로 일순간에 살기 가득한 검을 휘몰아쳐 온 것이다.
콰앙. 쾅쾅.
망토 걸친 자는 대검으로 도현의 검을 막아 내며 포효했다.
“크아아아아!”
살점이 여기저기 뜯기고 송곳니가 길게 뻗어 나온 모습이 도현이 그동안 상대해 온 인간 몬스터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그 실력만큼은 천지 차이였다.
지붕 위에 내려선 도현의 검과 대검이 정면으로 충돌하며 엄청난 기파가 사방으로 뻗어 갔다.
쿠쿠쿵쿵쿵.
은은히 흔들리는 지붕 위에서 도현과 대검을 든 몬스터는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여 합의 치열한 공방전을 벌여 갔다. 둘 다 얼마나 빨리 움직이는지 눈으로 그 위치를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였다.
번쩍이는 섬광과 큰 소음이 지붕 왼편에서 발생했다면 잠시 뒤에는 그 반대편 지붕 위에서 둘의 충돌이 일어났다.
바람처럼 지붕 위를 달리며 검을 섞고 있는 둘의 모습은 하늘의 제왕 자리를 놓고 싸우는 두 마리의 매와 같았다.
쿠웅!
도현이 피한 자리의 지붕이 균열을 일으키며 먼지 폭풍을 만들어 냈다.
무시무시한 위력의 대검을 피한 도현은 경사가 약간 진 지붕을 미끄러져 내려가다가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파닥거리며 순식간에 몬스터의 배후로 접근했다.
도현의 눈빛은 먹이를 노리는 호랑이처럼 차가웠다.
지붕에 꽂힌 대검을 뒤늦게 뽑아낸 몬스터는 목을 노리고 날아오는 도현의 검을 눈앞에서 간신히 막아 냈다.
콰앙.
수십여 합을 대등하게 싸우던 몬스터는 도현이 작정하고 휘두른 검의 힘에 밀려 뒤로 넘어지더니 지붕 위를 데굴데굴 굴러 건물 아래로 추락했다.
도현은 비호처럼 지붕 위에서 뛰어내렸다.
‘없다.’
땅에 있어야 할 몬스터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공중제비를 돌며 땅에 사뿐히 착지한 도현은 길게 생각하지 않고 부서진 창문을 통해 건물 내부로 뛰어들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몸을 숨길 만한 곳은 이곳밖에 없었다.
도현이 성주의 집무실로 진입한 순간, 3층 높이의 창문에 매달려 있던 몬스터가 아래로 뚝 떨어지며 창문을 넘어온 도현의 머리를 노렸다.
그러나 이미 기습을 대비하고 있던 도현은 몬스터의 공격을 피한 뒤, 도리어 역습을 가했다.
번쩍이는 검광이 몬스터의 몸을 수없이 두드리며 스치고 지나갔다.
몬스터가 착용하고 있는 황금색 갑옷이 쩍쩍 소리를 내며 부서졌고, 등 뒤로 펄럭이던 검은 망토는 여기저기 구멍이 나고 잘려서 대리석 바닥에 떨어졌다.
‘머리 부분은 철저히 방어하는군.’
몬스터는 영리한 판단을 내렸다. 도현의 역습을 온전히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는지, 대검으로 머리 부분만 집중적으로 방어했다.
그러나 도현은 설렁설렁 싸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한번 승기를 잡자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그의 검술은 더욱 정교해졌고, 검에 실린 내공은 더욱 강해졌다.
놀랄 만한 힘과 대단한 검술로 성주의 집무실에서 도현과 맞서 싸우던 몬스터는 융단폭격 같은 도현의 거센 공격에 두들겨 맞다가 뒤로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쿠웅.
벽이 진동할 정도로 크게 충돌한 몬스터를 향해 재차 강력한 검을 날리려던 도현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검신에 거미줄 같은 금이 생기더니 챙 소리와 함께 검이 서너 조각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대리석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검 조각들을 잠시 내려다보던 도현은 오른쪽 허리에 찬 검을 뽑았다. 두 자루 검 중 남은 한 자루였다.
‘조금은 더 버틸 줄 알았는데…… 아쉽군.’
몬스터의 대검은 보통 검이 아니었다. 짐브리오가 용병 시장에서 고가의 돈을 주고 구입해 온 두 자루 외날 검은 이름 있는 장인이 만든 것이었는데, 그중 하나를 이렇게 망가트려 버린 것이다.
지붕 위에서 몬스터와 싸울 때 검이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고 예상은 했었다. 몬스터의 대검과 부딪힐 때마다 검의 날이 상하는 게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빨리 검이 망가질 줄은 몰랐다. 그의 생각보다도 더 몬스터의 대검은 예리하고 센 녀석이었다.
그나마 도현이 검기로 검을 보호하며 몬스터의 대검을 상대했기에 여기까지 온 것이지, 그러지 않고 일반인이 사용했다면 지붕 위에서 벌써 검이 깨지고 말았을 것이다.
어찌 됐건 한 달 넘게 손때를 묻히며 잘 사용해 오던 검이 몬스터의 대검에 파손되자 도현은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도현은 고개를 들어 달려오는 몬스터를 차분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그가 공격을 잠시 중단한 사이 벽에 처박혀 있던 몬스터가 벌떡 일어나 대검을 들고 저돌적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빨리 끝내지 못하면 남은 검마저 망가지겠어.’
도현은 왼손을 펴 대리석 바닥에 흩어져 있는 그의 부서진 검 조각들을 가리켰다.
허공으로 떠오른 검 조각들은 도현의 손짓에 따라 빙글빙글 회전을 하다 대검을 들고 달려오는 몬스터를 향해 총알처럼 빠르게 날아갔다.
몬스터가 대검을 휘둘러 검 조각들을 먼지처럼 부숴 버리는 사이, 도현이 날린 장풍이 몬스터의 무릎에 소리 없이 적중했다.
우저저적.
뼈가 외부로 튀어나오는 중상을 입은 몬스터가 달려오는 속도를 이기지 못해 바닥을 구르며 넘어지자, 절정의 신법을 발휘한 도현은 넘어져 있는 몬스터의 곁을 스치며 벼락같은 일 검을 날렸다.
몬스터는 대검으로 도현의 검을 막으려 했지만 완벽한 타이밍을 잡은 도현의 극치에 다다른 쾌검술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번쩍.
눈부신 섬광이 몬스터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
몬스터의 목을 잘라 버린 도현은 쾌검술을 펼친 자세로 천천히 뒤돌아섰다.
‘이상한데? 몬스터 시체가 그대로 남아 있어.’
그동안 상대해 온 인간 몬스터들은 숨이 끊어지는 즉시 불타오르며 재로 변했었다. 그런데 강력한 검술을 소유한 이 몬스터는 그렇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타투를 통해 흡수되는 기운도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설마 아직 안 죽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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