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0] 디 임팩트 15권 10화
도현이 몸과 머리가 분리된 몬스터를 바라보며 의아해할 때, 갑자기 단 근처의 대리석 바닥에서 푸른빛을 발산하는 알 수 없는 문자들이 일제히 떠올랐다.
수십 개의 문자들은 한데 어울려 별처럼 반짝이다가 홀의 천장 근처에서 퍼즐을 맞추듯 제자리를 찾아갔다.
빛나는 문자들은 원형의 형태를 이루며 완벽한 문장을 구성했고, 곧 문장에서 붉은 빛이 폭사돼 목이 잘린 몬스터를 비췄다.
신비로운 문자의 출현에 호기심이 생겨 가만히 지켜보던 도현은 어이가 없었다.
목이 어느새 붙어 버린 몬스터가 그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는데, 그 기세가 상상도 못 할 만큼 강해져 있었다.
붉은 빛이 폭사되는 대검이 수십 개로 늘어나며 도현을 사방에서 압박했다.
도현은 검을 들어 막으려다가 호신강기를 펼쳤다.
콰콰콰쾅쾅쾅.
철벽처럼 단단한 호신강기가 거칠게 흔들렸다. 도현은 내공을 더욱 끌어올려 호신강기에 힘을 불어 넣었다.
카아아아아!
붉은 기운에 휩싸인 몬스터는 도현이 만든 호신강기에 뛰어올라 미친 듯이 대검을 내리쳤다.
대검에 깃든 엄청난 몬스터의 힘에 강기막이 곧이라도 파괴될 것처럼 거칠게 흔들렸다.
콰아앙.
급기야 전력을 다한 것 같은 몬스터의 대검이 도현의 호신강기를 뚫고 들어왔다.
머리 지척까지 내려온 몬스터의 대검을 올려다보던 도현은 순간적으로 호신강기를 풀어 버렸다.
발판이 사라진 몬스터가 대검을 내리꽂은 상태에서 밑으로 툭 떨어졌다. 그 순간 도현의 대력금강수가 몬스터의 가슴에 작렬했다.
쾅.
가슴이 박살 난 몬스터가 대검을 든 채 허공으로 튕겨져 올라가자, 도현은 그런 몬스터를 내버려 둔 채 단을 향해 달려갔다.
그의 시선은 높은 천장에서 빛을 발산하는 문자들에 고정되어 있었다. 일종의 마법진 같았다.
‘몬스터의 목을 베도 저 마법진 때문에 죽지 않을 거야. 반대로 저걸 없애면 몬스터도 그 생명력이 다하겠지.’
도현은 뒤를 힐끔 쳐다봤다.
몬스터가 괴성을 지르며 쫓아오고 있었다.
철제 의자가 부서져 있는 단 위에 도착한 도현은 20미터 가까운 높이의 홀 천장 부근에 생성된 마법진을 향해 검을 집어 던졌다.
그때 뒤에서 쫓아오던 몬스터도 대검을 집어 던졌다.
마치 도현의 의도를 짐작한 것 같은 재빠른 대처였다.
채애엥.
빛살처럼 빠르게 날아온 대검에 정확히 얻어맞은 도현의 검이 불꽃을 만들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러나 도현이 손끝을 움직이자 추락하던 그의 검이 날개라도 달린 것처럼 다시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도현이 비검술을 펼친 것이다.
무서운 속도로 날아간 도현의 검과 홀 천장에서 빛을 뿜어내던 문자들이 충돌했다.
소리는 없었다. 대신 눈 뜨고 정면으로 쳐다볼 수 없는 밝은 빛이 파괴된 마법진에서 생성돼 사방으로 뻗어 갔다.
도현은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려 눈을 보호했다. 계속 쳐다보다가는 시신경이 손상될 것 같았다.
잠시 후 빛이 사그라지자 도현은 고개를 들어 문자로 만들어진 마법진이 있던 공간을 확인했다.
마법진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도현은 단을 내려와 근처에 쓰러져 있는 몬스터를 향해 걸어갔다.
‘모습이 변했어.’
살점이 너덜거리고 송곳니가 길게 뻗어 나왔었던 그의 외모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정상적인 인간의 외모를 갖춘 노인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도현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천장을 보며 누워 있던 노인은 도현이 다가오자 떨리는 중저음의 목소리로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용자여…… 고맙도다. 그대가 나를…… 긴 세월의 고통 속에서 구해 줬구나.”
도현은 노인의 말에 일순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고맙다고 말하는 노인의 신체가 먼지처럼 부서지며 사라지고 있었다. 처음엔 발이 없어지더니 종아리, 무릎을 거쳐 어느새 허벅지까지 타고 올라왔다.
“놀랄 것 없다, 용자여. 이미 난 죽은 자. 그대가 마법진을 파괴했기에 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허벅지가 사라지고 있는 노인을 보며 도현은 무거운 음성으로 물었다.
“난 이 성의 성주다. 그대가 없앤 몬스터들은 바로 내 백성이었지…….”
“보고 있었군요.”
“저 깊은 마음속으로 그대를 응원하였다. 그들이 모두 그대의 검에 죽어 영혼이 해방되기를 말이야…….”
몸이 사라지고 있는 성주는 도현에게 깊은 감사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누가 당신들을 이렇게 만든 겁니까?”
“바크 드라모스의 짓이다.”
“바크 드라모스요?”
“이계의 문이 열렸을 때 우리의 세계로 넘어온 검은 용이지.”
도현은 성주의 대답에 흠칫했다.
‘이계에서 검은 용이 넘어왔다고?’
성주는 사라지는 자신의 팔을 보며 회한에 잠긴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나도 떠도는 이야기만 들었었지, 검은 용 바크 드라모스가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을 떠돌며 우리들 곁에 살아간다고 말이야. 하지만 그가 우리 성을 방문할 줄은 몰랐네.”
가슴과 팔이 완전히 사라진 성주는 얼굴만 남아 도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도현은 바크 드라모스에 관해 궁금한 게 많았지만 질문을 해도 그 답을 듣기도 전에 성주의 얼굴이 사라질 것 같았다. 그래서 도현은 자신을 성주라고 밝힌 노인의 마지막 말을 막지 않고 조용히 들어 주었다.
“고맙네…… 바크 드라모스의 저주를 풀어 줘서…….”
퍼석.
도현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주의 얼굴이 먼지처럼 변해 사라져 버렸다.
‘강한 기운이 들어온다.’
타투를 통해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강한 기운이 해일처럼 밀려들어 와 도현의 몸속을 휘돌다 단전의 내공과 합쳐졌다.
한쪽 무릎을 꿇고 성주와 대화를 나눴던 도현은 그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빈 공간을 잠시 응시하다가 천천히 몸을 세웠다.
“영면에 드시길…….”
열흘이 넘게 싸워 온 인간 몬스터들의 정체는 그의 짐작대로 이 성에서 살았던 고대의 사람들이었다.
“검은 용 바크 드라모스라니, 전혀 들어 보지 못한 이름이야.”
그는 제자리에 서서 넓은 홀을 둘러봤다. 고대에 존재했을 바크 드라모스의 그림자가 왠지 여전히 이 공간을 지배하는 것 같아 가슴 한편이 섬뜩했다.
‘사람으로 변한 용이라니…… 마주친다고 해도 누가 알아보겠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고대의 바크 드라모스를 나름의 상상력으로 머릿속에 그려 보던 도현은 마법진과 충돌한 자신의 외날 검을 향해 걸어갔다.
바닥에 처박힌 그의 검은 검신이 부러져 있었다.
“여기서 쓸 만한 검 두 자루를 모두 잃었군.”
그의 시선이 근처에 뒹굴고 있는 대검에 꽂혔다. 몬스터로 변한 성주가 사용하던 대검이었다.
도현은 허리를 굽혀 그 대검을 손에 쥐었다.
은색으로 빛나는, 폭이 넓은 대검은 양손으로 사용해야 할 만큼 아주 묵직했다.
티이잉.
손가락으로 대검의 검신을 두드리자, 청아한 소리가 넓은 홀에 가득 찼다.
부우웅. 부우웅.
양손으로 대검을 휘두를 때마다 공기가 갈라지는 호쾌한 소리가 났다.
도현은 검신이 부러진 외날 검을 허공에 띄운 후 대검을 부드럽게 옆으로 그었다.
불꽃이 일어나며 검신이 반듯하게 잘렸다. 도현의 내공으로 보호되지 않는 외날 검은 대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명검이야.”
예전 상해의 황 사장이 그에게 전설의 간장 같은 명검이라며 아끼던 검을 선물로 준 적이 있었다.
태선군에게 빼앗겼었는데, 지금 이 대검은 그것보다 더 뛰어나 보였다. 단지 양손으로 사용하는 대검은 도현이 추구하는 검술과는 거리감이 있는 무기였다.
‘아쉽군.’
아무리 무기가 좋아도 손에 맞지 않으면 제 실력을 백 프로 발휘하기가 어려웠다.
“검은 아주 좋은데 말이야.”
아쉬운 시선으로 대검을 내려다보던 도현은 긴 세월 속에서도 녹 하나 슬지 않은 은색의 대검을 어깨에 걸치고 뒤돌아섰다. 고대 도시로 복귀하기 전까지 그는 이 대검으로 몬스터 사냥을 계속할 생각이었다.
성주의 시신이 사라진 곳을 가라앉은 얼굴로 잠시 바라보던 도현은 성주의 집무실 밖으로 걸어 나가다가 표정이 굳어졌다.
갑자기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거칠게 흔들렸다.
도현이 밖으로 나오자마자 큰 소리를 내며 성주의 집무실 천장과 벽이 무너져 내렸다.
땅의 흔들림은 계속 이어졌다.
‘심상치 않은데.’
밖에 나와서 보니 언덕 위에 세워진 성 전체가 요동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땅이 갈라지고 성이 폭삭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빨리 벗어나자.’
신법을 발휘해 성 밖으로 향하는 도현을 향해 높은 첨탑들이 우르르 무너지며 쏟아져 내렸다.
쿠쿠쿵. 쿠쿠쿠쿵쿵.
머리를 덮으며 기울어지는 첨탑들을 간발의 차로 피하며 달리던 도현은 얼마 후, 흔들리는 성벽에 도달했다.
휘익.
경쾌한 신법으로 성벽을 타고 올라간 도현은 산사태처럼 와르르르 무너지는 성벽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등 뒤에서 날카로운 성벽의 돌 조각들이 날아왔지만 도현은 호신강기로 튕겨 버렸다.
전력을 다해 성을 빠져나온 도현은 언덕을 내달리면서 뒤를 돌아봤다. 웅장했던 언덕 위의 성이 거대한 먼지구름에 뒤덮여 있었다.
‘성이 폐허가 될 정도로 무너지고 있군.’
성이 무너지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려왔다.
까마귀
대공 알조베티 베일의 숙부 돈조르니는 열여덟이라는 어린 나이에 가문을 떠나 넓은 세상을 돌아다녔다.
그런데 우습게도 다섯 명의 형제 중 넷째로 태어난 그에게 관심을 두는 가문의 사람은 별로 없어서 그가 떠나도 며칠 동안 알지 못했을 정도였다. 영리하고 싸움에 능한 다른 형제들과 달리 그는 단순하고 허약해 빠져서 인기가 없었으니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가문에서 느끼는 소외감과 외로움, 거기에 반항심이 더해져 돈조르니는 가문을 떠나 세상으로 나왔다.
베일 가문의 직계로 태어나 나름 귀한 신분인 그는 돈이 없어 굶기도 하고 길가에서 노숙을 하다 강도와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밑바닥 생활이 뭔지 제대로 경험한 그였지만 오히려 가문에서보다 고생스러운 이 생활이 더 즐거웠다.
필요하면 과감히 남이 버린 음식 찌꺼기를 먹을 정도로 의지가 강해졌다. 여행하다 만난 강도와 산짐승, 몬스터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길을 가면서도 검을 휘둘렀다.
그러다 보니 그는 어느 순간 자신이 그리 허약한 존재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애초에 형제들 중 제일 약한 존재가 아니었다. 다만, 그 자신이 강해져야 할 이유를 모르고 있었을 뿐.
내재된 재능을 깨친 돈조르니의 발전은 눈부셨고, 그는 모험가로서 세상을 떠돌며 바람과 비를 즐기는 낭만적인 사람이 되어 갔다.
용병으로 호송도 해 주고, 상인의 딸과 하룻밤을 즐기다 들켜 줄행랑을 치기도 했다.
그렇게 북부 대륙을 거쳐 배를 타고 바다 건너 남부 대륙까지 진출한 그는 다양한 사람들과 접촉하며 자신만의 즐거움을 찾아갔다.
가문에 틀어박혀서는 절대 사귈 수 없는 다양한 부류의 친구들을 사귀고, 잔인하리만치 냉혹한 상황에 떠밀려 생사의 고비를 수차례 넘기도 했다.
그렇게 원 없이 세상을 떠돌다 부친의 비보를 접하고서야 가문으로 복귀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나?”
여관 문을 열고 절뚝거리며 들어오던 마법사 로제로가 물었다. 상념에서 깨어난 돈조르니는 의자에 앉는 친구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옛날 생각을 하고 있었네.”
“옛날 생각?”
로제로가 손가락을 살짝 움직이자 덜 닫힌 여관 방문이 쿵 하고 닫혔다.
“무슨 옛날 생각?”
“자네가 마법서를 산적에게 빼앗겼다고 징징대던 그때 말일세.”
“잊을 만하면 또 그 이야기를 꺼내는군. 이번 일을 도와주고 다시는 자네를 보지 않겠어.”
찬바람이 일어나는 로제로의 대답에 돈조르니는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세상을 떠돌던 아주 오래전, 그는 로제로를 도와 산적이 강탈해 간 마법서를 되찾아 주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들은 친구가 되었다.
“이 사람은 누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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