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3] 디 임팩트 15권 13화
“일꾼용 몬스터들이라…….”
“발굴지에서 봤다시피 훈련된 몬스터들은 홀로 수십 명의 역할은 충분히 하고도 남소. 석재로 마법 구조물을 세우는 것도 일꾼용 몬스터들의 도움을 받으면 생각보다 시간을 크게 단축시킬 수 있을 것이오.”
“제자의 가문이라서 비밀 유지도 쉽고?”
“그렇소.”
탑주가 빙그레 웃으며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율리비어스는 탑주와 세티앙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만 가 봐야겠소. 마법 구조물을 완성시켜야 하니까.”
까마귀 한 마리가 밤하늘을 날아 방벽을 넘어가고 있었다.
플레온 가문의 병사들이 지키는 방벽을 하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던 까마귀는 바람을 타며 날갯짓을 부지런히 했다.
어두운 곳도 환하게 보이는 까마귀의 눈을 이용해 저 밑에 보이는 작은 물체까지 샅샅이 식별하며 비행하던 리타는 발굴이 진행 중인 고대 왕궁 위를 두 차례 선회하며 현재 모습이 어떤지 정확하게 확인했다.
‘진도가 많이 나갔는걸. 고대 왕궁 잔해들이 상당히 드러났잖아?’
리타는 까마귀를 조종해 고대 왕궁를 지나쳐 건물들이 밀집되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밤이 깊어 불이 거의 꺼진 건물들이었지만 개중에는 아직도 불이 환한 곳도 있었다.
‘와아, 엄청난데?’
고대 왕궁에서 나온 유물들을 밤늦게까지 분류하며 조사하는 커다란 유물 창고에는 눈부신 황금 유물들과 석판, 썩은 양피지, 장신구류 등 다양한 종류의 유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서 분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유물 창고가 대여섯 개나 붙어 있었다.
‘어? 드비오다.’
창가에서 안을 들여다보던 그녀는 피곤한 표정으로 분류 작업을 감독하는 노마법사 드비오를 발견하고는 잠시 지켜보다가 날개를 퍼덕이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얼음탑 마법사들이 창고마다 서너 명씩 붙어 있네. 딘의 말대로 얼음탑주가 여기서 론의 지팡이라도 찾고 있는 것 같아. 바보들.’
그녀는 높은 하늘에서 건물들을 내려다보다가 어느 한 건물을 향해 빠르게 내려왔다.
‘아, 머리 어지러워. 하늘을 날아서 좋긴 한데, 아직 적응이 안 돼.’
속도를 줄인 그녀는 건물을 지키는 병사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2층 어느 창가에 사뿐히 걸터앉았다.
‘여기가 그 노인의 숙소?’
리타는 이곳에 오기 전 내부 첩자가 작성해 보내 준 건물 배치도를 본 상태였다. 2층의 이 넓은 방이 정체가 의심스러운 노인의 방이었다.
방벽 밖에서 그녀의 몸을 업고 기다리는 짐브리오와 로나는 이 노인의 정체를 파악해 보라고 했다.
‘안에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창가에서 안을 몰래 들여다보던 리타는 까마귀 부리로 살짝 틈이 벌어진 창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을 날며 노인의 신분을 밝혀낼 만한 것을 찾아다니던 그녀는 책상에 착지했다.
‘응? 이게 뭐지?’
그녀는 커다란 종이에 기록된 그림을 자세히 살펴봤다. 펜이 있는 걸로 보아 이 방의 주인이 그린 게 틀림없었다.
복잡한 구조의 건물 설계도에 리타는 까마귀 눈을 껌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상한 그림이네. 건물 옆면에 왜 마법진 같은 게 그려져 있지? 밑에도 그렇고.’
삼각형 모양의 건축물은 겉 표면에 많은 마법진 같은 게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한동안 그림을 살펴보던 리타는 복도에서 들리는 발소리에 놀라 황급히 창가로 날아갔다.
방문이 벌컥 열리며 탑주를 만나고 돌아온 율리비어스가 안으로 들어섰다.
책상으로 향하던 그는 창문이 반쯤 열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눈빛이 살짝 변했다.
창가로 다가간 그는 창문을 활짝 열어 밖을 날카롭게 살폈다.
숙소 밑에 경비병들은 이상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밖은 아주 고요했다.
하지만 율리비어스는 느낌이 이상했다.
발끝으로 마법진을 그리자 바닥에서 흰 빛이 뿜어져 나와 방 전체를 휘감았다.
율리비어스의 눈에 새 모양을 한 흐릿한 물체가 창문을 열고 들어와 방 안을 날아다니는 게 보였다. 새 모양의 흐릿한 물체는 책상에도 앉아 있다가 창문을 통해 다시 밖으로 사라졌다.
이것이 조금 전 상황이었다.
마법진을 이용해 그가 오기 전 상황을 흐릿한 모습으로 재생해 낸 그는 뚜벅뚜벅 창가로 걸어가 밖을 한동안 응시하다 천천히 창문을 닫았다.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리타가 눈을 뜨자, 로나는 짐브리오에게 말했다.
“리타가 돌아왔어요. 그만 가요.”
“어, 알았어.”
리타를 등에 업은 상태로 방벽 밖 어둠 속에서 기다리던 짐브리오는 지쳐 보이는 그녀를 등에 업고 로나와 함께 방벽에서 재빨리 멀어져 갔다.
마법 구조물
허리에 검을 찬 영주 딘은 깊은 눈매로 지하 발굴지를 내려다봤다.
늪지를 걷어 내고 발굴을 하자 지하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는 고대의 신전 유적 일부가 부서진 모습으로 등장했다. 락제프의 말대로 늪지 지하에 고대 신전이 존재한 것이다.
화로가 군데군데 어둠을 몰아내고 있는 신전 유적지를 내려다보던 딘은 하품을 하는 리드만에게 말했다.
“졸리면 가서 자지 않고 왜 따라왔는가?”
“영주님이 안 주무시는데, 제가 어떻게 먼저 자겠습니까?”
“어제는 일찍 잔 것 같은데.”
“그때는 기도를 드리다 깜빡 잠이 든 거죠.”
“기도하다 잠이 들면 무슨 꿈을 꾸나? 일곱 신과 꿈속에서 만나나?”
딘이 발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그럴 리가요. 오래전 짝사랑한 여인과 만나는 꿈을 꿉니다.”
“타락한 사제로군.”
“병으로 일찍 죽은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미처 하지 못한 게 평생 후회가 됩니다. 늙어서 일곱 신을 보게 될 날이 머지않은 지금도 말입니다.”
눈가에 주름이 가득한 리드만은 아련한 눈빛으로 답했다.
“슬픈 이야기야……. 나도 가끔 날 버리고 간 그녀가 떠오르네, 영지전에 패한 나를 비웃으며 침을 뱉던 그녀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한 딘은 양쪽으로 기른 콧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자아, 그만 위로 올라가 볼까?”
달빛을 등에 지고 발굴지가 이상 없는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본 딘은 방벽에 올라 용병들의 경비 상태를 점검했다.
도현이 몬스터 사냥을 떠난 이후로 딘은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야간 순찰을 본인이 직접 했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니었고, 그것은 일종의 책임감이었다.
방벽을 한 바퀴 돈 그들은 숙소가 있는 건물로 향했다.
“리드만, 자넨 그만 방에 가서 쉬게.”
“어디 가시려고요?”
“어베인의 방.”
딘은 정탐을 간 짐브리오와 로나, 리타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같이 가시죠, 영주님. 저도 어떻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눈에 잠이 가득한데 괜찮겠나?”
“그럼요, 괜찮습니다.”
그러나 리드만은 어베인의 방 의자에 앉자마자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고, 그런 리드만을 보며 딘과 어베인은 술잔을 기울였다.
“훌륭한 사제요.”
어베인의 말에 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겐 과분한 사람이지.”
“일곱 신을 모시는 사제들 중 리드만 사제보다 치유력이 뛰어난 사람은 아마 없을 거요.”
“그런데 자신의 몸은 치유하지 못해 하루가 다르게 저렇게 쇠약해지고 있으니 내가 가슴이 아프오.”
의자에서 잠이 든 리드만을 보는 딘의 얼굴은 그늘져 있었다. 그에게 리드만은 수하가 아니라 가족 같은 사람이었다.
“영주는 리드만 사제를 거인의 섬에 데리고 갈 생각이시오?”
“안 된다고 했는데, 본인이 부득불 우기니 내가 방도가 없소.”
“그렇군요.”
책상에 엉덩이를 기댄 상태로 술을 마시던 어베인은 진지한 눈빛으로 딘을 응시했다.
“좀 성급한 말이긴 하지만, 우리가 만약 씨드를 얻게 된다면 제1순위는 도현이 될 거요.”
“도현이 들으면 놀라겠는걸. 그는 당신들이 로나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말이오.”
“도현이 없다면 씨드도 없소. 그가 우리들의 목숨을 구해 준 건 물론, 론의 지팡이를 찾을 수 있는 환경을 거의 다 만들어 주었으니까. 아무리 내가 로나를 위한다 해도 도현의 희생을 모른 척할 수 없는 거요. 그러니 씨드가 한 개뿐이면 그 주인은 당연히 그가 되어야 하는 거지.”
어베인의 말속에는 거짓이 없어 보였다.
“짐브리오나 로나도 동의한 거요?”
“그들과는 이미 이야기를 끝낸 상태요. 영주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동의하오. 그럼 씨드가 두 개가 있다면 그다음 차례는 로나가 되겠군. 맞소?”
어베인은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주가 우리를 위해 큰 역할을 해 주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애초에 우리 목적을 무시할 수는 없소.”
“아름다운 로나가 나이 들었을 때 어떻게 변할지 나도 궁금하긴 하오. 씨드를 먹어 그녀가 병이 낫는 건 나도 원하는 바요.”
딘은 빙그레 웃으며 제2순위가 로나인 것을 지지했다.
“감사하오, 영주. 만약 씨드가 세 개가 있다면 그땐 영주에게…….”
“아, 그만합시다. 도현과 로나가 먼저고 그다음에 씨드가 또 있다면 우리 한데 모여 운에 맡긴 상태로 긴 나무 뽑기를 해서 순서를 정합시다.”
씨드 욕심을 버린 듯한 딘의 태도에 어베인은 그가 새삼 크게 보였다.
“짐브리오에게 들었소. 새로운 영지를 찾는다고. 이번 일이 무사히 끝나면, 새로운 영지를 얻는 데 내가 미력하게나마 힘을 보태 주겠소.”
“하하하. 뭐, 그럼 나야 좋고. 한데, 씨드 분배를 하고 싶어도 거인이라는 높고 위험한 벽이 있지 않소. 상황에 따라선 얼음탑주와 맞서 싸워야 될지도 모르고. 난 솔직히 살얼음을 걷는 기분이오.”
말을 하는 딘이나 듣는 어베인이나 똑같이 얼굴에 긴장이 서렸다.
거인도 힘겨운 상대고 명성 있는 최강자 중 하나인 세티앙과 루시앙이 얼음탑주 측에 합류한 사실도 큰 부담이었다.
시간이 제법 흘러갔을 때, 정탐을 하고 온 짐브리오 일행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야, 좀 내려라 이제. 무거워 죽겠다.”
짐브리오가 지친 얼굴로 등에 매달려 있는 리타에게 핀잔을 주었다.
“까마귀 마법을 사용해서 몸이 피곤해서 그렇다고. 누군 땀 냄새 나는 이 등에 계속 업혀 있고 싶은 줄 알아? 도현도 아니고 말이야.”
리타는 짐브리오의 등에서 내려오며 한마디 했다.
“코 골면서 자고 온 게 몸 핑계는.”
로나는 말다툼하는 그들을 지나쳐 어베인과 딘, 잠이 깬 리드만 앞에 섰다. 그들은 모두 까마귀 마법을 이용한 정탐이 어땠는지 궁금한 표정들이었다.
“리타의 까마귀 마법은 성공적이었어요. 들키지도 않았고. 다만 의문의 노인 정체는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고 해요. 리타, 짐브리오와 그만 다투고 와서 설명해 줘.”
“응.”
리타는 그녀가 까마귀의 눈으로 본 것들을 빠르게 설명했다. 그러다 목이 탔는지 어베인이 따라 준 술을 비우고는 다시 설명을 이어 갔다.
“내 능력이 아직은 부족해서 까마귀 마법을 오래 지속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의문의 노인이 있던 방을 끝으로 정탐을 끝냈죠.”
“수고했다, 리타. 고생이 많았구나. 피곤해 보여.”
어베인의 칭찬에 리타가 해맑게 웃었다.
“괜찮아요. 날 업고 온 짐브리오와 로나가 힘들었죠.”
“험, 알긴 아는군.”
짐브리오가 리타의 잔에 술을 가득 채워 줬다.
“그 노인의 책상 위에서 본 그림이 독특했다고?”
“네, 그려 줄까요?”
“기억나?”
“내 기억력은 보통이 아니거든요.”
리타는 책상 위에 종이를 펴고 잠시 눈을 감았다. 까마귀의 눈으로 본 그림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쓱쓱. 쓱쓱쓱.
망설임 없이 커다란 종이에 율리비어스가 그린 마법 구조물 설계도를 똑같이 그린 그녀는 술잔을 비우며 뒤돌아섰다.
“자, 보세요. 마법진으로 의심되는 것들이 건축물 겉면에 굉장히 많이 그려져 있으니까요.”
그녀의 손에 들린 종이를 모든 사람들이 둘러서서 자세히 살펴봤다.
“뭐 이런 게 다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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