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 디 임팩트 15권 15화
냉정하게 말한 그녀는 얼음 사슬로 용병을 얼린 후 일꾼용 몬스터가 끄는 수레를 향해 집어 던졌다.
파삭!
얼음 깨지는 소리와 함께 용병의 신체가 산산조각 나 버렸다. 인정사정없는 행동이었다.
“발굴지 유물을 단 하나라도 훔치는 녀석은 모두 저 꼴이 될 거다!”
몸을 흔들며 입으로 피를 토하듯 외치는 그녀의 광기 젖은 모습에 플레온 가문의 병사나 용병 들은 모두 소름이 돋았다.
발굴지에는 수십여 명의 얼음탑 마법사들이 돌아다니며 발굴을 감시하고 있었지만, 물건을 훔치려는 자를 저렇게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린 마법사는 없었다.
멀리서 그 장면을 지켜보던 드비오는 옆에 서 있는 카샨에게 말했다.
“그녀는 우리를 미워하고 있네. 베져스와 후투의 죽음에 우리 책임도 있다는 거야.”
다섯 명의 차기 탑주 후보에 포함되기도 한 베져스와 후투는 차기 탑주로 샤비엔다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녀와 가까웠던 그들은 지난번 싸움에서 도현의 손에 의해 모두 목숨을 잃었다.
당시 드비오와 카샨은 싸움에 적극적이지 않았고, 그것을 눈치챈 샤비엔다는 그들에게 싸늘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베져스와 후투는 우리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 용병에게 죽은 겁니다. 용병이 강했으니 말입니다.
“그녀는 외골수적인 기질이 강해. 차후로 우리와 가까워지기는 어려울 거야.”
샤비엔다를 지그시 응시하던 드비오는 카샨의 옆모습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자네는 씨드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접었나 보군.”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여전히 자넨 탑주에게 충성을 보일 뿐, 딴마음이 없어 보이니 하는 말일세.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어 버렸어.”
드비오가 아쉬운 눈빛으로 말했지만 카샨은 칼라치와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지 않았다.
“하긴, 세티앙과 루시앙, 거기에다 악명을 떨친 율리비어스까지 합류했으니, 자네가 그런 선택을 한 것도 이해가 되네.”
“카샨 님!”
얼음탑주의 수발을 드는 어린 마법사가 뛰어왔다. 그는 탑에서 증원된 약 백 명가량 되는 마법사들 중 한 명으로, 원래 탑에 있을 때부터 탑주의 방과 서재를 맡아 청소하던 소년이었다.
어린 마법사는 헐떡이며 달려와 탑주의 말을 전했다.
“탑주께서 찾으십니다.”
“알았다.”
카샨은 드비오를 응시했다.
“이따 뵙죠.”
“그러지. 수고하게.”
멀어지는 카샨의 뒷모습을 보며 드비오는 작게 중얼거렸다.
“정말 씨드를 포기한 건가?”
의심스러운 눈빛이 그의 눈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얼음탑주는 기다리던 카샨 대신 방을 먼저 방문한 플레온 가문의 로스 경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약 5천에 달하는 베일 가문의 병력이 어제 밤 늦은 시각, 브링틱 항구를 통해 들어왔다고 합니다.”
브링틱 항구에 배치한 부하로부터 전서구를 받은 로스는 약간은 긴장된 표정으로 탑주를 보며 말했다.
“지휘관은 누구던가?”
“돈조르니 베일입니다.”
“돈조르니 베일…….”
“알조베티 베일의 숙부입니다.”
“누군지는 나도 알고 있다네. 대공이 자신의 숙부를 보낼 정도라면, 내게 단단히 화가 났다는 뜻이로군.”
탑주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어렸다.
“대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비를 해야겠지.”
“그럼 발굴에 투입된 병사와 용병 들을 내일부터는 방벽 경비에 전원 투입해 방벽 수비를 강화하고 정예병들은…….”
“로스, 발굴을 멈춰선 안 되네.”
탑주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곧 전쟁이 벌어지게 됩니다. 일단 전쟁에서 승리한 후, 발굴을 재개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싸움은 내가 하겠네. 자넨 지금처럼 발굴에 집중해 주게. 어디 보자, 드비오 말로는 보름이면 고대 왕궁 발굴이 끝날 거라고 예상하던데, 맞는가?”
대공의 숙부와 싸워 어떻게 하면 승리할까 머릿속이 복잡해져 있던 로스는 탑주가 발굴에만 신경 쓰는 것 같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아, 예. 저희들도 그렇게 예상은 하고 있습니다.”
“보름이면 끝날 일을 싸움 때문에 질질 끌 수는 없네. 서둘러 발굴을 완료하고 이곳을 떠나는 게 좋지.”
“그게 뜻대로 되겠습니까?”
로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얼음탑주가 점령한 사실을 알면서도 저들이 왔다는 건, 뭔가 대비책을 세웠다는 뜻이다.
로스의 우려를 짐작한 듯 탑주가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이보게, 로스, 날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
“아닙니다, 탑주님.”
“한 가지만 말해 주도록 하지. 자네가 누군지 궁금해하는 쌍둥이 노인들의 정체를 말이야. 그들은 침묵의 기사단 출신인 세티앙과 루시앙 형제라네. 들어는 봤겠지?”
탑주의 말에 로스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륙 최강자에 속하는 형제 검객이 이곳에 와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미 종적을 감춘 지 20년이 넘은 그들이었고, 소문만 무성한 사람들이었다.
“대단한 분들이 와 계셨군요.”
“대공의 숙부 걱정은 하지 말고, 자네는 발굴이 최대한 빨리 완료되도록 하게. 싸움은 내게 맡겨 두고. 알겠나?”
“알겠습니다, 탑주님.”
로스가 물러가자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카샨이 조용한 발걸음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이쪽으로 와 앉아라.”
가까이 그를 부른 탑주는 서랍에서 둘둘 말린 커다란 종이를 꺼냈다. 펼치자 오늘 아침 율리비어스가 완성해 건네준 마법 구조물이 탁자 위에 모습을 보였다.
“이게 무엇인지 아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씨드를 지키는 거인들은 부상을 당해도 상처가 저절로 아물며 피해를 입지 않는다. 마법까지 사용하지.”
카샨도 거인들의 위용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힘이 약화되면 상황은 달라지겠지.”
“이 마법 구조물로 거인들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겁니까?”
“율리비어스가 발동시키면 가능하다. 우리는 거인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거인들이 세상으로부터 빨아들이는 마나를 차단하려고 한다. 론이 펼친 마법을 방해하는 것이지.”
카샨은 속으로 크게 놀라며 율리비어스가 구상한 마법 구조물을 내려다봤다.
‘괜히 마법 천재로 불리는 게 아니었군. 이런 걸 만들어 내다니.’
마법 구조물이 그려진 종이에 시선이 빼앗긴 제자에게 탑주가 술잔을 건넸다.
“카샨.”
“예, 탑주님.”
“앞으로 둘만 있을 때는 탑주라 부르지 말고, 스승이라고 불러라.”
“예?”
“왜 놀라느냐? 너와 난 사제지간이 아니냐? 그동안은 너에게 엄한 스승이고 싶어서 냉정하게 대했지만, 내 속뜻은 그게 아니었다. 넌 하나밖에 없는 나의 제자이니라.”
경험한 적 없는 다정한 탑주의 어조에 카샨은 얼떨떨했다.
“카샨.”
“예, 탑주님.”
“어허!”
“스승님.”
어색한 단어가 카샨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카샨을 지그시 바라보던 탑주는 술을 한 모금 한 후, 본론을 꺼냈다.
“이 마법 구조물은 거인의 섬과 최대한 가까운 곳에 설치되어야 한다. 망각의 숲 안에 있는 안개 호수 근처가 좋겠지. 문제는 이 커다란 마법 구조물이 모두 석재로 지어져야 한다는 것인데…… 아무래도 카샨 네가 힘을 써 줘야겠다.”
“제가 말입니까?”
“그래, 망각의 숲 근처의 산에서 채석하고 운반해서 마법 구조물을 세우는 일련의 작업을 너희 가문의 일꾼용 몬스터들이 해 줬으면 한다.”
탑주의 말에 카샨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마법 구조물 설계도엔 높이와 길이 등이 상당히 자세하게 표기되어 있었다. 대단한 크기였다. 이 정도 구조물을 돌로 짓는 건 대공사였다.
공사 기간에 따라 투입되는 일꾼용 몬스터와 인력이 달라지겠지만, 탑주의 성격상 단시간 내에 완성하라고 주문할 가능성이 높았다.
수백의 일꾼용 몬스터들과 그에 상응하는 조련사들, 게다가 근처 몬스터들의 습격을 방어할 전투 몬스터들과 병사들 까지 고려하면 가문의 힘이 상당히 투입되어야 한다.
“스승님, 감히 이런 말씀 드리는 게 죄송스럽지만…….”
“난 네 입에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말이 듣고 싶다.”
“스승님, 제가 비록 크샤코 가문의 차남이긴 하지만, 이 정도 대공사를 하려면…….”
“차기 탑주 자리를 네게 약속하지.”
카샨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초대 탑주가 남긴 고대 마법도 온전히 네게 전수해 주겠다. 그것을 익히는 순간, 너의 마법은 크게 상승할 것이다. 진정한 대마법사의 길로 가는 거지. 나를 보거라. 내가 탑주가 되기 전에 너보다 강한 마법사였을 것 같으냐? 천만에. 난 탑주가 되었기 때문에 강해진 것이야. 탑주는 탑의 상징이자, 쓰러지면 안 되는 존재니까.”
말을 잠시 끊고 제자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탑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뒷짐을 진 그는 창밖을 보며 물었다.
“비밀리에 가문의 사람들과 몬스터들을 동원할 수 있겠느냐?”
“……할 수 있습니다.”
오랜만에 사슴 사냥을 다녀온 크샤코 가문의 원로 올라르는 호위병들과 말을 타고 브링틱 성으로 돌아와 원로관 근처에 있는 저택으로 향했다.
“아니, 두 원로께서 이 시간에 웬일이시오?”
집 앞에 모여 있는 일단의 병사들 사이로 튜산 가문의 원로 베노아와 볼란벤 가문의 원로 히반이 서 있었다.
“오래간만에 술이나 하려고 찾아왔는데, 사냥 중이라는 말을 듣고 돌아가려던 참이었습니다.”
히반의 대답에 올라르가 말에서 가볍게 뛰어내려 다가왔다.
“다행입니다, 내가 늦지 않게 와서. 자 자, 안으로 들어갑시다. 내가 잡은 사슴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왕이면 무희도 부릅시다.”
베노아의 말에 올라르가 기분 좋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로의 불빛이 어둠을 몰아내는 정원에서 노출이 심한 옷을 입은 미녀 무희들이 흥겹게 춤을 추었고, 세 원로들은 그 모습을 즐겁게 바라보며 술을 마셨다.
“이것은 내가 특별히 내리는 상이니라, 하하하!”
술이 얼큰히 올라온 베노아가 무희의 춤이 끝나자 금화를 뿌렸다.
“감사합니다, 원로님.”
정원에 뿌려진 금화를 챙긴 무희들은 뒷걸음질 쳐 정원에서 물러났다.
악사와 무희 들이 사라진 정원은 조용해졌고, 세 원로들은 한적한 분위기 속에서 술자리를 계속 이어 갔다.
“고대 도시가 또 시끄러워지겠어요. 베일 가문의 병력이 들어왔으니 말입니다.”
베노아가 사슴 고기를 먹으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고대 도시에서 빼앗긴 땅을 되찾겠다고 오는 그들을 두고 뭐라고 말을 할 수도 없고.”
히반이 술을 따르며 베노아의 말에 대꾸했다.
“그래도 그들이 브링틱 항구에서 낸 통행세가 상당해서 흐뭇합니다. 우리 성내의 상인들도 그들에게 전쟁 물품을 팔아서 좋고요.”
“하하하! 그건 그렇지요. 이 손톱 어떻소, 베노아 원로? 내 첩이 다듬어 준 것인데, 보기 좋소?”
“아주 아름답습니다.”
“언제 기회를 봐서 내 첩을 보내 줄 테니, 손톱 손질을 받아 보시오.”
“기대하지요.”
웃고 떠드는 두 원로들의 모습을 탁자 끝에서 바라보던 올라르는 수하가 다가오자 술잔을 내려놓았다.
“무슨 일이냐?”
수하는 올라르만 들을 수 있게 손으로 입을 가리고 귓속말처럼 작게 보고했다.
“기다리라고 해.”
“알겠습니다, 원로님.”
올라르는 술잔을 비운 후 베노아와 히반에게 말했다.
“모처럼 즐거운 시간인데, 이 사람이 사냥을 다녀와서인지 조금 피곤하군요. 다음에 더 즐거운 시간을 가집시다.”
술자리를 그만 끝내자는 올라르의 말에 베노아와 히반이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십시다. 아, 참 그런데 말이오, 올라르 원로. 아들 걱정이 크시겠소이다.”
“아들 걱정이라니요?”
올라르가 베노아를 응시했다.
“카샨이 얼음탑주의 제자가 아닙니까? 가까운 사이니 대공의 숙부가 이끄는 병력과 누구보다도 더 치열하게 싸우려 들게 아닙니까?”
“아, 그렇군. 그러고 보니 올라르 원로께서 마음이 심란하시겠소이다. 대공의 숙부가 만만치 않게 준비했을 것 같은데…….”
히반이 베노아의 말을 거들며 걱정해 주듯 말했다.
“알아서 잘 대처하겠지요. 난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카샨이 죽어도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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