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7] 디 임팩트 15권 17화
“잠시만 기다려 보게.”
돈조르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말을 탄 중년인들이 숙영지 병사들을 헤치며 다급히 달려왔다.
“돈조르니 경!”
말에서 뛰어내린 서너 명의 중년인들은 재빨리 돈조르니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눈빛이 날카롭고 안광이 번뜩이는 게 보통 사내들이 아니었다.
“너희들은 대공의 친위대가 아니냐?”
한시도 대공의 곁에서 떨어져서는 안 되는 친위대가 이곳에 나타나자 돈조르니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돈조르니 경! 대공의 서신입니다!”
“대공의 서신?”
전령이 아닌 이들이 직접 온 게 불길해 돈조르니는 주위에 탑주 일행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서둘러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이런 망할 놈들이!”
서신을 다 읽은 돈조르니가 몸을 부르르 떨며 분노했다.
“대공은 지금 어디 계시는 거냐!”
“붉은 성에 계십니다. 돈조르니 경이 어서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놈들을!”
대공의 서신을 와락 움켜진 그는 탑주를 지그시 노려봤다.
“오늘은 그만 가 봐야겠군. 다음에 다시 봅시다, 탑주.”
“좋으실 대로.”
탑주는 대공 알조베티 베일의 신변에 뭔가 변고가 있음을 직감하고 여유로운 태도로 답했다.
“항구로 간다!”
돈조르니는 황급히 5천 병사들을 이끌고 배가 정박해 있는 브링틱 항구를 향해 떠나갔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율리비어스가 만든 번개에 불탄 군막들만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여기저기서 타오르고 있었다.
“모두들 수고하셨소. 우리도 그만 돌아갑시다. 상황을 보니, 베일 가문은 당분간 이쪽에는 관심을 둘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탑주의 말에 세티앙과 루시앙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싱겁게 끝났군.”
율리비어스는 두 발을 움직여 아까 만든 마법진을 다시 만들었다.
하늘에서 강력한 번개가 내려와 빈 숙영지를 강타했다.
콰아앙!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숙영지가 쑥대밭이 되었다. 로제로가 마법으로 율리비어스의 마법을 막지 않았다면 수많은 병사들이 떼죽음을 당했을 것이다.
겁 없이 나무에서 뛰어내려 공격하는 몬스터를 대검으로 두 쪽을 낸 도현은 언덕에 올라 고대 도시로 가는 방향을 응시했다. 하루 정도만 더 가면 도착할 것 같았다.
높은 언덕을 넘어가던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낮췄다.
언덕 아래 5미터 급 전투 몬스터 하이드로우 수십 마리와 수백의 병사들이 사방을 경계하며 이동하고 있었다.
‘크샤코 가문의 병력이군.’
전투 몬스터와 병사들이 걸친 갑옷은 크샤코 가문 고유의 형태였다.
‘어딜 가는 거지?’
고대 도시와 상당히 떨어진 미개척 지역에 등장한 전투 병력에 도현이 의아해할 때, 숲에서 더 많은 인원들이 나타났다.
하이드로우보다는 작은 체구지만 상체가 엄청나게 발달된 4미터 급 일꾼용 몬스터 수백 마리와 그들을 움직이는 조련사들, 족히 천여 명은 되어 보이는 인부 차림의 사람들, 이들의 옆과 뒤를 보호하는 수십 마리의 또 다른 5미터 급 전투 몬스터와 수백 명의 병사.
‘상당한 규모다.’
많은 전투 몬스터와 일꾼용 몬스터, 거기에다 2천 명이 넘어 보이는 병사와 인부 들을 목격한 도현은 이들의 등장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미개척 지역에서 대체 뭘 하려고 저렇게 많은 병력과 일꾼용 몬스터들이 함께 움직이는 거지? 개척은 아닌 것 같은데.’
개척을 위한 것치고는 고대 도시에서 너무 멀리 왔다. 앞에서부터 차근차근 개척하는 게 이치에 합당했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수상해. 가까이 가서 조사해 보자.’
거대한 곡괭이와 온갖 짐들을 어깨에 걸치고 느릿느릿 이동하는 일꾼용 몬스터들을 언덕 위에서 응시하던 도현은 신법을 발휘해 저들이 향하는 방향을 앞질러 갔다.
척후에 해당하는 전투 몬스터들이 보이기 시작하자, 도현은 울창한 숲의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무성한 나뭇잎이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며 듣기 좋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높은 나뭇가지 위에 몸을 숨긴 도현은 바로 밑을 통과하는 대규모 행렬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살펴봤다.
일꾼용 몬스터 수백 마리가 무거운 짐을 메고 쿵쿵대며 지나간 땅을 크샤코 가문의 인부들이 투덜대며 지나치고 있었다.
“여기 굉장히 위험한 곳이라고 들었는데, 이렇게 계속 들어가도 되나 몰라.”
“그러게 말이야. 난 여기로 오는 줄도 몰랐다고. 고대 도시 옆에서 작업을 한다고 해서 따라온 거지, 돈을 많이 준다고 해서. 그런데 이렇게 깊숙이 들어올 줄이야.”
“전투 몬스터가 백 마리나 동행하는 걸 보면, 보통 위험한 작업이 아닌 것 같아. 정신 바짝 차려야겠어.”
“그나저나 이상해. 대체 어떤 작업을 하는데 이 많은 일꾼용 몬스터들이 필요한 거지? 성이라도 쌓으려나?”
인부들이 나누는 대화를 나무 위에서 엿듣던 도현은 인부 옆을 호위하는 전투 몬스터가 자신이 숨어 있는 나무 위를 올려다보자 지체 없이 몸을 날렸다.
콰앙!
5미터 급 전투 몬스터가 집어 던진 거대한 도끼가 도현이 숨어 있던 지점을 정확히 박살 냈다.
후두두두둑.
나무 상단이 몬스터의 도끼에 맞아 부서지며 땅으로 떨어지자, 밑을 지나는 인부들이 화들짝 놀라며 뿔뿔이 흩어졌다.
도끼를 집어 던진 전투 몬스터 곁으로 병사들과 전투 몬스터 두 마리가 다가왔다.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이 녀석, 왜 도끼를 던진 거야?”
“잘못 봤나 보지. 이 녀석들도 가끔 실수를 하잖아.”
붉은 눈을 번뜩이며 도현이 사라진 나무를 노려보던 전투 몬스터는 저만치 떨어진 자신의 도끼를 주워 들고 행렬에 다시 합류했다.
‘이들도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왔나 보군. 그만큼 크샤코 가문의 상부가 비밀 유지에 신경을 썼다는 건데, 대체 이들의 목적이 뭘까?’
전투 몬스터의 공격을 피해 근처의 다른 나무 위에 숨어 있던 도현은 조금 전 인부들이 나눈 몇 마디 대화를 통해 이들의 움직임이 매우 비밀스럽게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을 유추해 냈다.
“잠시 휴식을 취한다!”
앞에서 고함 소리가 들리자 일꾼용 몬스터 뒤를 따라 걷던 인부들이 제자리에 앉아 땀을 식혔다.
개중에는 볼일을 보기 위해 근처 수풀로 뛰어가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도현은 그중 한 사람을 나무 위에서 내려다보다가 은밀히 따라갔다.
다섯 명으로 한 조를 이룬 용맹한 사내들은 눈과 귀가 아주 밝다는 공통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은신과 도주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위험한 몬스터를 만나더라도 살 확률이 매우 높았다.
몸을 낮춘 자세로 미개척 지역의 숲을 빠르게 통과하던 그들은 등에 방패를 찬 적발 거한과 마주쳤다.
흠칫한 그들은 잠시 망설이다가 바늘처럼 생긴 암기를 일제히 날렸다.
파바바바박.
칼라치가 서 있던 뒤편의 나무에 수십 개의 암기들이 빼곡히 박혔다.
“사라졌다! 조심해!”
조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옆에서 불쑥 나타난 칼라치가 방패를 가볍게 휘둘렀다.
허리가 절단된 두 명의 사내들이 눈을 크게 뜨고 숲에 쓰러졌다.
“이 자식!”
살아남은 세 명은 검을 휘둘러 칼라치를 공격했다. 손발을 맞춰 오랜 시간 검술을 수련했는지, 세 명의 검술은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우며 적발 거한 칼라치를 압박했다.
“다른 기술은 없나?”
방패로 이들의 공격을 슬쩍슬쩍 막아 내며 칼라치가 물었다.
“목을 내놔, 이 개자식아!”
“없나 보군.”
칼라치는 순간적으로 방패를 빠르게 세 번 밀쳤다.
쾅쾅쾅.
강력한 방패 공격에 전신 뼈가 으스러진 사내들은 허공을 날아 나무에 처박혔다.
그들의 죽음을 잠시 응시하던 칼라치는 방패에 기댄 자세로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음 늑대가 나무 사이를 통과하며 달려오고 있었다.
“모두 몇 명째지?”
얼음 늑대를 탄 카샨이 시체를 둘러보며 물었다.
“서른일곱.”
“두 원로들이 어지간히 신경이 쓰였나 보군.”
많은 전투 몬스터와 일꾼용 몬스터 들이 크샤코 가문에서 빠져나간 사실을 두 가문이 모를 리가 없었다. 다만, 그 이유나 목적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사람을 보내 뒤를 밟게 한 것이다.
얼음 늑대에서 내린 카샨은 챙겨 온 술과 음식을 건넸다.
“며칠만 더 뒤에서 수고해 주게. 쫓아오는 자들이 더 있을 것 같아.”
“그렇게 하지.”
칼라치는 근처 바위에 앉아 술을 물 마시듯 들이켰다.
“헬구스와 이디언은 잘 있겠지?”
“별일 없네.”
남장을 한 이디언은 헬구스와 함께 인부로 위장해서 앞서 가고 있는 행렬에 껴 있었다.
“망각의 숲까지는 얼마나 더 가야 하나?”
“서두르면 열흘 정도.”
카샨은 가문의 몬스터들과 사람들을 데리고 탑주보다 한발 먼저 망각의 숲을 향해 가고 있었다. 탑주는 고대 왕궁에서 론의 지팡이를 찾은 후에 뒤따라오기로 했다.
그러나 카샨의 최종 목적지는 망각의 숲이 아닌, 그 인근에 채석이 가능한 산이었다.
그곳에 진을 치고, 데리고 간 일꾼용 몬스터들과 인부들을 동원해 마법 구조물에 필요한 돌들을 준비해 놓아야 했다. 운반과 마법 구조물을 세우는 것은 나중에 탑주 일행이 오면 하기로 계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그런 유치한 방법이 통할지 모르겠군.”
칼라치가 빈 술병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카샨을 지그시 응시했다.
카샨이 탑주는 물론, 세티앙과 루시앙, 율리비어스까지 상대할 비책이라고 가져온 게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유치해서 칼라치는 그 방법이 먹힐까 의심이 됐다.
“치졸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어쩔 수가 없지 않나. 탑주와 친구들이 너무 강해 정면 승부로는 어려우니 말일세. 효과가 있기를 바라야지.”
카샨은 말을 하며 품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안에는 갈색 가루가 약간 들어 있었다.
남부 대륙을 오가는 상인이 가지고 온 파로야라는 희귀한 환각 열매 가루로, 튜산 가문의 원로 베노아가 상인에게 구매한 물품이기도 했다.
원로 베노아가 사고 남은 전체 양을 카샨이 이곳에 오기 전 상인에게 몽땅 구입했다.
엄청난 돈이 지출됐지만, 카샨은 이것을 이용해서라도 기회를 엿보고 싶었다.
“칼라치, 당신이 날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도 당신만큼 이 일에 사활을 건 사람이야. 쓸 수 있는 패는 다 동원해 봐야지. 이 환각제를 태운 연기가 그들에게 미미하게라도 영향을 끼치기를, 난 이 물건을 산 이후부터 기도했어. 당신도 기도를 해 보라고.”
카샨은 얼음 늑대를 만들어 위에 올라탔다.
“아, 그런데 칼라치, 당신이 탑주로부터 구해 갔던 그 용병 말인데, 어떻게 손잡을 방법이 없나? 지금이라도 그가 꼭 있었으면 좋겠는데.”
“헛소리하려면 집어치워. 그자와 난 물과 불처럼 같이할 수 없는 사이니까. 그가 너와 손잡으면 난 널 떠난다.”
차가운 눈빛으로 말하는 칼라치에게 카샨이 미소를 보였다.
“오해하고 있군. 그자를 이용하자는 말이야.”
“전에 말했지, 내가 그자를 살려 준 건 내 손으로 직접 죽이고 싶어서라고.”
엉덩이를 털고 일어선 칼라치는 먹다 남은 음식을 카샨이 타고 있는 얼음 늑대 앞에 툭 던졌다.
“허튼수작 부리지 마.”
인부로 위장해 이디언과 같이 움직이던 헬구스는 시원한 표정으로 바지춤을 올렸다. 아랫배에 힘을 잔뜩 줬더니 이마에 땀이 가득 맺혔다.
볼일을 보는 도중 혹시 몬스터가 튀어나오지 않을까 긴장이 돼서인지 그는 평소보다 볼일을 보는 데 시간을 많이 들였다.
“시원합니까?”
머리 위에서 들리는 도현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헬구스는 급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도현이 나무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도현!”
“쉿!”
도현이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리자, 헬구스는 주위를 살핀 뒤 숲 안쪽으로 빠르게 들어갔다.
휴식을 취하고 있는 크샤코 가문의 사람들과 적당히 거리를 둔 그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서로 마주 봤다.
“다시 보니 반갑군. 몸은 다 나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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