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2] 디 임팩트 15권 22화
도현의 말에 놀라지 않은 사람들이 없었다. 특히 리타와 로나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자세로 고개를 삐딱하게 만든 채 도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들은 마치 멀리 탐험을 마치고 돌아온 모험가의 재미난 이야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호기심과 기대감이 충만해 있었다.
그녀들의 시선을 접한 도현은 엉뚱하게도 홍영을 떠올렸다. 홍영은 이계에서 그가 겪은 작은 일도 궁금해했었고, 그 눈빛이 꼭 저랬다.
‘홍영.’
보고 싶은 홍영의 얼굴이 떠올라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문 채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저 녀석 뭐 하는 거야?”
기다리다 지친 짐브리오가 손을 뻗어 리드만의 앞에 놓여 있는 과일 접시에서 과일을 하나 꺼내 집어 던졌다.
서걱.
대검에 잘린 과일이 탁자 위로 떨어졌다.
“정신이 딴 데가 있으면서도 검으로 몸은 보호하네.”
짐브리오가 감탄할 때 도현이 머쓱한 표정으로 깨어나 주위를 둘러봤다.
“죄송합니다. 뭘 좀 생각하느라. 혹시 바크 드라모스라는 이름을 들어 보셨습니까?”
“바크 드라모스?”
짐브리오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방 안에 다른 사람들을 쳐다봤다.
“영주는 저 이름을 들어 보셨소? 난 모르겠는데.”
“나도 처음 듣는 이름이네. 리드만, 자넨 아는가?”
“예? 뭐라고 하셨지요?”
도현이 홍영의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리드만은 무거운 눈꺼풀을 밑으로 내리며 순간 살짝 잠이 든 상태였다. 율리비어스에게 다친 짐브리오를 치료해 주느라 신성력을 아끼지 않았고, 그 여파로 그는 몸이 무척 피곤한 상태였다. 그 상태에서 술이 들어가자 잠이 슬며시 왔던 것이다.
“바크 드라모스라는 이름을 들어 봤느냐고 물었네.”
“바크 드라모스요? 글쎄요, 모르겠는데요.”
“그런가?”
리드만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영주는 주름살 가득한 리드만의 어깨를 다독이며 일으켜 세웠다.
“리드만, 그만 들어가 쉬게, 힘들어 보여.”
“괜찮습니다, 영주님. 도현의 얘기를 들어 줘야죠.”
“자네 없어도 들을 사람 많아. 어서 방으로 가게.”
“리드만 사제님, 제가 나중에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주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도현까지 거들자 리드만 사제는 별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자네 얘기는 나중에 듣지.”
리드만 사제가 피곤한 얼굴로 걸음을 옮길 때, 갑자기 짐브리오가 다가와 그를 번쩍 안아 들었다.
“뭐 하는 건가?”
“방까지 내가 편히 모셔다 드리겠소. 날 치료하느라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내가 모른 척하면 개지, 개야.”
“괜찮네.”
“가만있으시오. 도현, 금방 올게.”
방을 나간 짐브리오는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돌아왔다. 한건물에 방이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짐브리오가 돌아오자 다시 얘기는 도현이 말한 바크 드라모스라는 이름에 집중됐다.
로나나 리타도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라며 고개를 저었고 마지막으로 사람들의 시선은 어베인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묘했다. 아는 것 같기도 하고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대장, 도현이 우리에게 던진 이름을 들어 보셨소?”
“음, 생각이 날 듯 말 듯 해서 머릿속이 간지럽군.”
도현은 괜히 이름을 물어봐서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나 싶었다. 그래서 바크 드라모스에 관해 얘기를 해 주려고 했다.
그 순간 어베인이 탁자를 손으로 내리치며 껄껄 웃었다. 웃음이 시원해서 눈가에 주름이 가득 접혔다.
“이제 기억이 나는군. 하도 오래전에 들은 얘기라서 영영 기억을 못 할 뻔했어.”
“그 이름을 들어 보셨습니까?”
“들어 봤네. 바크 드라모스, 이계에서 넘어온 검은 용.”
“알고 계시는군요.”
도현이 놀라는 모습에 어베인은 자신이 어렵게 기억해 낸 옛이야기에 만족했다. 마치 어려운 수수께끼를 맞힌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장, 이계에서 넘어온 검은 용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오?”
“아주 오래전 이계의 문이 잠시 열렸을 때, 검은 용이 우리 세상으로 넘어왔다는 전설이 있네. 인간의 모습을 한 그는 바크 드라모스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떠돌며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았다고 하더군.”
“그래요? 소름 끼치네, 용이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다닌다니. 그런데 그건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짐브리오가 술을 따르며 물었다.
“내가 젊었을 때 깊은 산을 넘어가다가 모닥불을 피워 놓고 야영을 하는 여행객들을 만났네. 그들의 호의로 그날 밤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냈지. 그들에게 들었어.”
옛 생각을 하는 그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도현이 ‘바크 드라모스’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그는 죽는 날까지 그 이름을 다시 떠올릴 일이 없었을 것이다.
젊은 시절을 잊고 살던 그는 모처럼 몸과 마음이 그때로 돌아가 젊어지는 것 같았다.
그 기분으로 그는 자신이 바크 드라모스를 어떻게 알게 됐는지 보다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은 다섯 명의 여행객과 나는 술과 음식을 나누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네. 알고 보니 그들은 영주들이 아끼는 희귀한 고서나 기록, 그림 등을 똑같이 만들어 주는 필사가이자 화가였다네. 뛰어난 문장과 그림 실력을 갖춘 사람들이었지. 영지전이 벌어진 영주의 성을 도망쳐 새로운 고용주를 찾아 여행을 하고 있다더군.”
“오래되고 귀한 책들이나 기록들을 필사했다면, 일반인들은 알 수 없는 평범치 않은 많은 이야기들을 알고 있었겠군요.”
도현의 말에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그때 난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은 호기심 많은 청년이었어. 나이 지긋한 그들은 내가 제일 신기하고 무서운 얘기를 해 달라고 하자, 곰곰이 생각하다가 검은 용 바크 드라모스 얘기를 해 주었다네.”
“그게 왜 제일 신기하고 무서운 얘기예요?”
맞은편에 앉아 있던 리타가 목을 길게 빼며 물었다.
“그 필사가이자 화가들은 전설의 검은 용 바크 드라모스가 지금도 우리 주변에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믿고 있었으니까. 그들에게는 그게 가장 신기하고 무섭게 느껴졌던 거야.”
“설마요, 전설일 뿐이겠죠.”
리타가 장난스럽게 혀를 내밀었다.
“도현, 이게 내가 아는 바크 드라모스의 정체네. 이제 자네 얘기를 들어 볼까?”
어베인은 젊은 시절의 기억에서 돌아와 도현을 응시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쏠리자, 도현은 대검을 벽에 기대어 놓고 말문을 열었다.
“거리상으로 망각의 숲보다 훨씬 먼 곳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회색빛 대지를 발견하게 됐습니다…….”
도현은 검은 용 바크 드라모스의 저주에 걸려 몬스터로 변한 고대 성의 성주와 그 안의 사람들 이야기를 해 주었다.
평소에 잘 놀라는 성격이 아닌 딘조차 도현의 얘기가 길어질수록 수시로 표정이 바뀌었다.
“그렇게 해서 이 검을 제가 소유하게 된 겁니다. 성주의 영혼이 사라지고 남아 있던 고대의 성은 땅속으로 가라앉으면서 폐허로 변했고요.”
도현의 긴 설명이 끝났지만 방 안의 사람들은 바크 드라모스가 벌인 끔찍한 저주에 충격을 받았는지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이거 안 믿을 수도 없고, 참.”
짐브리오가 머리를 긁적였다. 도현이 직접 겪은 일이다 보니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야, 그럼. 대장이 옛날에 만난 그 필사가들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이 있잖아? 인간으로 변한 그 지랄 같은 용이 지금도 우리 주변에 있다는 게.”
“지겨워서 자기가 살던 곳으로 돌아갔을 수도 있지.”
로나가 따라 준 술을 쭉 들이켠 리타가 손등으로 입술 주변을 닦아 내며 말했다.
“그랬으면 좋겠다. 아무튼 만나서 좋을 게 없는 존재니까.”
바크 드라모스를 각자 생각하며 술을 마시던 사람들은 점차 도현의 지독함에도 놀라워했다.
생각해 보니 그 많은 인간 몬스터를 모두 베어 내며 성안에 들어가 끝을 봤다는 게 아닌가.
“며칠 걸린 건가?”
딘이 과일을 입에 넣으며 물었다.
“열흘 정도 걸린 것 같습니다.”
“자네도 참 독하군. 검을 잡은 손바닥이 버티던가?”
도현은 상처가 아물어 다시 굳은살이 깊게 박인 손바닥을 보며 답했다.
“갈라지고 피가 뚝뚝 떨어지더군요.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누군가는 이들을 끝내 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요.”
방 안이 조용해졌다. 도현이 겪었을 외롭고 치열한 전투가 그의 담담한 말투 속에서 가슴 깊이 전해져 왔다.
“보통 정신력과 의지가 아니야. 자네가 이대로 계속 성장한다면, 북부와 남부 대륙에 홀로 우뚝 설 날이 머지않아 찾아올 것 같군.”
딘은 도현을 아주 높이 평가했다.
“별말씀을요.”
“도현, 그 검 좀 잠깐 볼까?”
자리에서 일어난 짐브리오는 도현에게 다가와 대검을 내려다봤다. 오래된 검이지만 은색 검신이 아주 단단해 보였다. 날도 살아서 빛이 나고 있었고.
“이거 네 손에는 안 맞는 검이지?”
“적응은 됐지만 아무래도 제 검술에 적합한 검은 아닙니다.”
도현은 아쉬운 눈빛으로 말했다. 검은 좋았지만 그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르는 검이다.
“짐브리오! 설마 도현의 검을 탐내는 건 아니지?”
리타가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내가 이런 대검을 어디다 사용하게 탐을 내?”
“그럼 왜 물어봐?”
“다 깊은 뜻이 있어서 물어본 거야.”
짐브리오는 대검을 자세히 살펴보다가 어베인을 돌아봤다.
“대장, 내가 보기에 이 대검 재질이 특별한 것 같아요. 세타이움이 들어간 것 같은데요. 녹 하나 없이 긴 세월을 버틴걸 보면 말입니다. 튼튼한 검을 망가트릴 정도의 단단한 날을 봐도 그렇고요.”
“그래 보이는군.”
“세타이움요?”
도현이 궁금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짐브리오가 설명을 했다.
“세타이움은 철을 강하게 만드는 오색 빛깔의 특별한 돌을 말하는 거야. 검을 만들 때 그것을 적절히 섞어 넣으면, 아주 좋은 검이 탄생하지. 그런데 아주 희귀해서 세타이움이 들어간 검은 좀처럼 구경하기가 힘들어.”
세타이움이 들어간 검의 특징은 도현의 대검처럼 세월과 상관없이 온전한 강도와 날카로움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녹도 슬지 않는 특별함까지 갖추고 있었다.
“대검을 사용할 게 아니라면 이걸 녹여서 도현이 네게 맞는 외날 장검을 만드는 게 좋을 것 같다. 대검에 세타이움이 들어가 있다면, 녹여 검을 다시 만든다고 해도 기본적인 검의 성질은 바뀌지 않을 테니까.”
“그래요?”
도현은 기쁜 얼굴로 양손 대검을 바라봤다.
“질 좋은 검이 나온다는 말씀이죠?”
“그렇지. 물론 세타이움이 들어간 검도 장인에 따라 품질이 달라질 수 있지만, 웬만하면 좋은 검이 나올 거다. 용병 시장에 내가 아는 대장장이가 있으니까, 내일이라도 나랑 함께 가 보자고.”
검객에게 검은 자신의 분신과 같았다. 함께 호흡하고 피와 땀이 스며들어 주인과 마음이 통하는 그런 검.
도현은 평범한 검이라 해도 자신과 일치된 검이라면 명검 못지않은 위력을 발휘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내구도가 약한 평범한 검은 그의 강한 내공이 깃든 높은 경지의 검술을 오래 버티지 못하고 결국 생명을 소진하고 만다. 점점 강해지는 그의 내공과 검술을 무리 없이 소화해 줄 단단한 검이 필요했다.
앞으로 강한 상대들과 얼마나 싸워야 할지 모른다.
당장 탑주 세력이 있었고, 폐관 수련에 들어간 태선군도 나중에 상대해야만 한다.
무기의 이점을 바라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싸우다가 그의 검이 파괴돼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불상사는 막아야 했다.
‘이 대검 정도의 강도와 날카로움을 유지한 장검이 내 손에 들어오면, 검 때문에 물러날 일은 없을 거야.’
도현은 대검 손잡이를 손으로 꽉 움켜잡았다.
술자리가 끝나고 방 안으로 돌아온 어베인은 아침이 오기 전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기 위해 나무 침대에 몸을 뉘였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하던 그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도현이 서 있었다.
“죄송합니다, 주무시고 계셨습니까?”
“아니네. 들어오게.”
도현이 방 안으로 들어오자 옆으로 비켜서 있던 어베인은 방문을 닫고 뒤돌아섰다. 술을 마시다 조금 전에 헤어진 도현이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궁금했다.
“좀 앉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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