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7] 디 임팩트 16권 2화
“아니면 다시 돌아오면 되지 않나. 살짝 튕겨서 말이야. 걱정 말게, 땅에 떨어지기 전에 내가 안아 줄 테니까.”
“알겠습니다, 영주님. 요즘 허리도 안 좋은데…….”
허리를 괜스레 두드리던 그는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지하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정말 괜찮을까?’
도현은 반신반의하며 입구로 접근하는 리드만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입구 근처에서 잠시 멈칫하던 리드만은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한발 더 내디뎠다. 짐브리오가 빛의 공격을 받고 튕겨져 나간 지점이었다.
침을 꿀꺽 삼키며 다가올 충격을 기다리던 리드만은 시간이 흘러도 빛이 공격하지 않자 대담하게 지하 계단에 발을 걸쳤다. 그 순간, 어두운 지하 공간에서 밝은 빛이 나타나 빠른 속도로 그의 몸을 강타했다.
‘결국 하늘을 날겠군.’
그러나 리드만의 예상과는 달리 밝은 빛은 그의 몸에 부딪치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아픔도 충격도 없었다.
한동안 기다려도 더 이상의 빛은 등장하지 않았다. 리드만은 환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영주님, 전 무사합니다!”
“계단을 내려가지 말고 잠시 거기서 기다리게. 확인해 볼게 있으니까.”
리타의 눈이 검게 변했다. 잠시 후,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입구에서 느껴졌던 힘이 사라졌어요. 리드만 사제님이 열쇠 역할을 한 것 같아요.”
‘이곳에 론의 지팡이가 있을까?’
위태롭게 버티고 있는 지하 계단을 통해 제단 뒤에 감춰진 지하 공간으로 내려온 도현은 지하 내부를 둘러봤다.
입구와 가까운 주변 내부는 돌과 흙, 먼지만 가득했다.
“저기 통로가 있는데?”
횃불을 든 짐브리오가 큰 소리로 말하며 성큼성큼 그쪽을 향해 걸어갔다.
좁은 통로는 몇 걸음 걷지 않아 금세 끝이 났고, 그 끝에는 석실이 존재했다.
석실 안으로 들어서던 사람들은 내부 광경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제법 넓은 석실 중앙에 놓인 작은 조각상에서 성스러운 빛이 흘러나와 석실 내부를 은은히 밝혀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빛이야.’
빛을 보는 것만으로도 모든 근심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스스로 발광하는 조각상은 놀랍게도 나무로 만들어진 여신의 상이었다.
여신은 양손에 둥근 달과 초승달을 하나씩 든 모습으로 우아하게 서 있었는데, 도현은 그녀가 누군지 짐작됐다.
‘일곱 신 중 하나인 달의 여신 디오라노.’
50센티 정도 되는 작은 크기의 나무 여신상이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모습은, 신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도 잠시 동안만큼은 열렬한 신도로 변화시킬 만큼 엄숙하고 신비스러웠다.
사제인 리드만은 홀린 표정으로 조각상을 향해 걸어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다.
“디오라노시여…….”
기도를 드리는 리드만의 옆엔 고대 사제복을 입은 해골이 엎드려 있었다.
‘신전 대사제인가?’
도현이 보기에 그는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여신상을 향해 기도를 한 것 같았다.
그의 예상이 맞았는지 해골을 가까이서 응시하던 락제프의 입에서 탄식과 같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결국 이렇게 갔군……. 자네의 죽음을 수천 년이나 지난 지금 내가 확인하고 있다니, 신이 내게 벌을 내리는 것인가?
깊은 감정을 토로한 그는 자수정으로 사라지려 했다.
“스승님! 스승님! 잠시만요! 이분 장례식을 치를까요?”
-필요 없다, 이곳이 그의 무덤이니까.
그 말을 끝으로 락제프의 음성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스승님이 괴로우신가 봐.”
시무룩한 표정의 리타는 호주머니 속에 자수정을 넣으며 옆에 서 있는 도현을 응시했다.
“스승님을 위해서 내가 하루라도 빨리 소멸시켜 드려야 하는 걸까?”
“원하시니까.”
“하지만 난 그러기 싫은데…….”
리타는 말끝을 흐렸다. 마법을 배우며 티격태격하면서 깊은 정이 들었나 보다.
도현은 리타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말했다.
“가야 할 사람은 가야 하는 거야, 본인이 원한다면 말이야. 억지로 우리가 붙들 수는 없어. 리타도 그걸 원하는 건 아니잖아.”
리타는 수천 년 전에 죽은 대사제를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락제프가 있어야 할 곳은 현재가 아니라 과거였다.
“그렇지…….”
“힘내.”
“응.”
둘은 대화를 마치고 석실 중앙의 높은 단 위에 놓인 성스러운 여신상을 함께 쳐다봤다.
“여긴 성물을 보관하는 장소인가 봐.”
“그런 것 같아. 다른 것도 있는 것 같고.”
도현은 석실을 조사하는 짐브리오와 어베인, 딘에게 시선을 돌렸다. 석실 안에는 먼지 쌓인 상자들이 수십여 개나 있었는데, 그것을 열어 일일이 내용물을 확인하고 있었다.
“우리도 같이 찾아보자.”
“응.”
상자 안에는 신을 찬미하는 고서와 그림이 대부분이었다.
‘론의 지팡이는 품 안에 숨길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지팡이라고 했어.’
도현은 락제프가 설명해 준 론의 지팡이 외양을 떠올리며 조사하던 상자를 한쪽에 내려놨다.
이 안에는 없었다.
밑에 상자를 열어 보려던 그의 시선이 상자 뒤편의 벽면으로 향했다. 석실 모서리 부분에 해당하는 구석진 곳이었는데, 작은 막대기 같은 게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기대어져 있었다.
‘설마?’
도현은 상자를 훌쩍 뛰어넘어 벽에 기대어진 그것을 집어 들었다.
팔뚝만 한 길이의 그것은 끝에 붉은 수정이 박힌 지팡이였다.
‘론의 붉은 수정 지팡이!’
도현은 기쁜 얼굴로 뒤돌아섰다.
“찾은 것 같습니다.”
“뭐?”
상자를 열며 허탕을 치던 짐브리오를 비롯한 어베인과 딘, 리타가 급히 그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기도를 마친 리드만도 다가왔다.
“젠장, 진짜 찾았군, 으하하하!”
론의 붉은 수정 지팡이를 이리저리 흔들며 짐브리오가 크게 기뻐했다.
“락제프의 말이 틀리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로군. 수고했네.”
그동안 신전을 발굴하며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던 어베인은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는 듯 얼굴 표정이 밝아졌다.
“이것이 그것이로군.”
짐브리오의 손에서 건네받은 론의 붉은 수정 지팡이를 리드만과 함께 눈앞에서 구경하던 딘은 손을 내미는 리타에게 지팡이를 넘겨줬다.
리타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고대의 대마법사 론의 지팡이를 살펴봤다.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일반적인 마법 지팡이와는 달랐다.
‘그냥 장식품 같은 지팡이처럼 보여.’
마법 지팡이라면 으레 표면에 적혀 있어야 할 마법어도 없었다. 그래서 평범한 지팡이처럼 보였다.
이것이 어떻게 거인의 섬에 있는 마법 결계를 여는 능력을 갖춘 건지 의아했지만, 그건 닥쳐 보면 알 수 있을 일이었다.
‘마나를 주입해 볼까?’
호기심을 견디지 못한 리타는 그 자리에서 슬쩍 마나를 주입했다가 번개를 맞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며 급히 지팡이를 떨어트렸다.
지팡이가 땅에 닿기 직전, 도현의 손이 매처럼 날아와 지팡이를 낚아챘다.
“왜 그래?”
도현의 물음에 리타가 쩌릿쩌릿한 손바닥을 주무르며 답했다.
“지팡이에 마나를 넣어 봤는데, 칼로 쑤시는 고통이 손바닥을 관통했어. 함부로 사용할 게 아니야.”
놀란 그녀의 모습에 짐브리오가 고소하다는 듯 웃었다.
“론의 지팡이가 괜히 론의 지팡이겠냐? 흐흐흐.”
“치이, 자꾸 그렇게 웃지 마. 큰 얼굴로 꽉 삼킨다.”
짐브리오는 리타의 거대한 얼굴이 생각나 웃음을 뚝 그쳤다.
“대장, 오늘 밤은 술판을 크게 벌입시다. 지팡이도 찾았으니 말이오.”
“그래야겠지.”
어베인은 붉은 수정 지팡이를 들고 있는 도현을 잠시 바라보다가 석실 안에 흩어져 있는, 먼지 쌓인 수십 개의 상자로 시선을 돌렸다.
내용물을 확인하지 않은 상자들이 아직 많았다.
앞서 조사한 상자처럼 신과 관련된 고서나 그림만 보관된 상자라 해도 밖으로 가지고 나가야 한다. 고대 신전을 발굴하며 나온 유물들이 거의 다 훼손되어서 아쉬워하는 리드만 사제를 위해서였다. 상자 안에 온전히 보관된 고대 신전 유물들은 묵묵히 그들을 돕고 있는 리드만에게 큰 선물이 될 수도 있었다.
“상자를 챙겨 가야겠지?”
“당연한 거 아니오?”
짐브리오가 대꾸하며 리타를 봤다.
“마법 주머니, 가지고 있지?”
“응.”
“상자 싹 쓸어 담아.”
“알았어.”
마법 주머니를 꺼낸 리타는 총총 뛰어다니며 석실에 흩어져 있는 상자들을 손바닥만 한 작은 가죽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지켜보던 도현도 수중에 있는 마법 주머니를 꺼내 반대편 방향으로 걸어가 상자를 주머니에 담아 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 개의 상자가 도현과 리타의 마법 주머니 안으로 사라졌다.
“저거 하나만 있으면 도둑질하기 참 편하겠는데…….”
짐브리오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입맛을 다셨다.
“다 됐습니다.”
도현이 리타와 함께 돌아오자 어베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건 석실 중앙의 단 위에서 성스러운 빛을 발산하는 작은 여신상이었다.
탐이 났지만 손대면 신의 노여움을 받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도둑이자 모험가로서 고대 유적을 많이 조사해 본 어베인과 짐브리오는 그동안 마음이 가지 않는 물건은 절대 건들지 않았다.
“대장, 저건 우리가 손댈 물건이 아닌 것 같습니다. 리드만 사제라면 몰라도.”
“내 생각도 그래.”
어베인은 고개를 돌려 리드만을 봤다. 리드만은 엄숙한 표정으로 여신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시간이 흐른 뒤, 리드만이 딘에게 말했다.
“영주님, 성물을 여기 두고 그냥 갈 수 없습니다.”
“챙겨 가게. 대사제도 성물이 이곳에 영원히 잠들기를 바라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야.”
“그렇겠죠?”
리드만은 단 위에 놓인 여신상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그 순간 석실이 진동하며 천장의 돌 조각들이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쿠쿠쿠쿠.
“여, 영주님, 성물을 여기 놔둬야 하나 봅니다.”
당황한 리드만이 여신상을 단 위에 원위치시키려 했다.
“바보 같은 소리 말게! 어서 따라 나와!”
딘이 리드만의 팔을 붙잡았다.
“하지만 성물을 집자마자 석실이 무너지려 하잖습니까?”
“이 사람아, 오랜 세월로 이미 천장이 무너지려 했어. 균열이 심각했다고. 우연의 일치니까 신경 쓰지 말고 챙겨!”
성물을 들고 우물쭈물하는 리드만을 도현이 번쩍 안아 들었다.
“가시죠, 영주님.”
도현이 리드만을 안고 달려가자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도 그때서야 그 뒤를 따라 석실을 빠져나갔다.
쩌저저적 콰콰쾅!
마지막까지 안 나가고 천장의 붕괴를 지켜보던 딘은 위에서 떨어진 커다란 돌에 맞아 산산조각이 난 신전 대사제의 유골을 보며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편히 잠드시오, 대사제. 성물은 이제 리드만이 잘 보관할겁니다.”
허리를 편 그는 어서 나오라는 도현의 외침 소리를 들으며 서둘러 밖으로 향했다.
깊은 바닷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악몽을 꾼 로나는 숨이 탁 막히는 표정으로 격하게 눈을 떴다.
“하아, 하아.”
온몸이 젖을 만큼 땀을 흘린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두 발을 나무 바닥에 댔다.
물이 아닌 나무의 시원하고 단단한 촉감에 그녀의 심장은 차츰 정상으로 돌아왔다.
‘악몽 따위에 내 힘을 빼앗길 순 없어.’
하루 중 그녀가 정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쇠약해진 육체가 그녀의 정신까지 옭아매기 전에 그녀는 자신을 보호해야만 했다.
악몽이 자신의 미래를 투영하는 것 같아 불안했지만, 그런 것에 정신을 빼앗기며 하루를 보내는 건 멍청한 행동이었다.
지금도 그녀의 동료들은 그녀를 위한 마음으로 거인의 섬을 찾아가려 하고 있다.
말린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닌 이상, 그녀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강한 모습을 보여 줘야 했다. 그것이 그녀가 현재 할 수 있는 동료들에 대한 예의였다.
도현이 돌아온 이후로 그녀의 결심은 더욱 확고해진 상태였다.
물을 따라 마신 그녀는 방 안에서 단검을 휘두르며 쇠약해진 육신을 조금이나마 자극했다.
‘엄마, 난 싸우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피에 섞인 저주에 굴복하진 않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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