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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임팩트-378화 (378/575)

[378] 디 임팩트 16권 3화

입술을 터질 듯 깨문 그녀는 휘두르던 단검을 벽에 던졌다. 빠르게 날아간 단검은 벽에 달라붙어 있는 작은 벌레를 뚫고 벽에 박혔다.

“하아, 하아.”

격렬한 단검술로 호흡이 가빠진 그녀는 벽에 박힌 단검을 뽑아 가죽으로 만들어진 단검집에 꽂아 넣었다.

‘좀 걸어야겠어. 도현과 같이 가자고 할까?’

도현이 산책을 함께 가 주겠다고 말한 사실을 떠올리던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에게 자꾸 의지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건 좋지 않아…….’

도현이 그의 방에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홀로 산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로나는 헝클어진 긴 금발을 뒤로 한데 묶은 후, 방문을 열었다.

2층 복도에 선 그녀는 도현의 방이 있는 복도 끝을 잠시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계단을 밟았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던 그녀는 멈칫했다. 도현이 올라오고 있었다.

“산책 가는 겁니까?”

아래층에서 올라오던 도현의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가요.”

“아니에요. 혼자 갈 수 있어요.”

도현은 그녀의 의지 깊은 눈빛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뒤에 감춘 손을 내밀었다.

“그럼 이걸 보고 가요.”

“그건…….”

“찾았어요, 론의 지팡이를.”

붉은 수정 지팡이가 도현의 손에서 밝게 빛났다.

얼음탑주는 막바지 발굴이 한창인 고대 왕궁을 지상에서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었다.

넓은 궁은 원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이 황폐한 채로 민낯을 드러냈고, 인부들은 얼음탑 마법사들의 지휘를 받아 바닥을 샅샅이 긁어내 한 점의 유물이라도 놓치려 하지 않았다.

“론의 지팡이가 파괴되어 산산조각이 났을 수도 있겠어. 흔적을 찾을 수 없을 만큼.”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탑주의 말에 좌우에 서 있는 노마법사 드비오와 샤비엔다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렇습니다, 탑주님.”

실질적인 발굴은 거의 다 완료된 상황이었다. 기대한 론의 지팡이는 왕궁터에서 발견되지 않았고, 그것은 탑주를 실망감에 빠트리기에 충분했다.

깊게 가라앉아 있는 탑주의 회색빛 눈동자가 대꾸를 한 드비오와 샤비엔다를 차례로 응시했다.

“아니면 일꾼들 중 누군가가 그것의 가치를 몰라보고 몰래 숨겨 용병 시장의 암시장에 내다 팔아 버린 것일 수도 있겠지…….”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탑주님.”

발굴 감독과 감시를 책임진 드비오와 샤비엔다는 긴장한 안색으로 말했다.

“자네들의 책임을 묻자고 한 얘기가 아니야. 가능성을 열어 두자는 것이지.”

“외람된 말씀이지만, 애초부터 이곳에 론의 지팡이가 없었던 것은 아닐까요?”

자신의 생각을 별뜻 없이 말하던 드비오는 탑주의 차가운 시선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죄송합니다, 탑주님.”

“아닐세, 드비오. 자네의 지적이 틀리다 말할 순 없겠지, 론의 지팡이가 고대 왕궁에 있을 거라는 것은 고대 기록에 의지한 나의 판단일 뿐이니까. 하지만 말이야, 일단은 론의 지팡이가 왕궁에 있었을 거란 생각으로 접근해 볼 필요가 있겠어.”

“물론입니다, 탑주님. 용병 시장의 암시장을 오늘이라도 당장 조사해 보겠습니다.”

드비오는 면전에서 탑주의 판단을 의심하는 발언을 한 자신의 실언에 난처해하다가 서둘러 답했다.

“조용히 알아보게, 시끄럽게 굴지 말고.”

“알겠습니다.”

탑주가 자리를 떠나자 드비오의 뻣뻣해졌던 목 근육이 풀렸다.

“샤비엔다, 어쩌면 좋겠소? 용병 시장의 암시장을 조사해야 하는데, 당신이 가시겠소?”

“탑주와 대화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당신인 것 같은데.”

약간은 쌀쌀맞은 태도로 말을 한 샤비엔다는 시선을 발굴지로 돌렸다. 둘의 관계는 베져스와 후투가 죽은 이후로 굉장히 서먹해져 있었다.

“좋소. 내가 용병 시장의 암시장을 조사해 보도록 하지.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분명히 해 둡시다. 베져스와 후투가 죽은 건 나나 카샨 탓이 아니라 바로 당신과 죽은 그들 탓이오. 그러니 애꿎은 내게 분풀이하려고 하지 좀 마시오.”

“뭐라고?”

몸을 획 돌리며 드비오를 노려보는 백발의 여마법사 샤비엔다의 두 눈동자에서 하얀 불길이 타올랐다.

드비오는 그 시선을 회피하지 않고 마주 노려봤다.

“그날 싸움은 원래 탑주가 처음부터 개입하기로 했었는데, 베져스와 후투 그리고 당신 때문에 탑주가 나서지 않은 게 아니요? 그깟 베일 가문의 용병쯤은 당신들만으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에 말이오.”

샤비엔다의 주름진 얼굴에 경련이 일어났다.

그녀가 젊었을 때부터 함께 얼음탑에서 공부해 온 베져스와 후투는 차기 얼음탑주로 그녀를 암묵적으로 지지했을 정도로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그런 그들의 죽음은 든든한 울타리가 사라진 격이어서 그녀를 외롭고 가슴 아프게 했다. 그런데 그것이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고 하니 그녀의 마음은 들끓기 시작했다.

브링틱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사리판단이 정확하고 냉철했던 그녀였지만, 도현에게 친구이자 든든한 지지자들을 잃고 큰 패배까지 당한 뒤에는 좀처럼 예전의 그녀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유야 어쨌든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도와만 줬어도, 베져스와 후투가 그리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가 누구를 돕는단 말인가? 탑주의 부러진 이빨과 어깨를 보지 못했소? 그만큼 강한 용병이 작정하고 손을 썼는데, 나와 카샨이 어떻게 대처할 수 있었겠소? 예상치 못한 베져스와 후투가 운이 없었던 것이지.”

샤비엔다는 도현의 검에 당한 옆구리 상처가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상처는 오래전에 아물었지만 그날의 흉터가 보기 흉하게 길게 남아 있었다.

드비오를 노려보던 그녀는 옆구리에 손을 얹은 채 뒤돌아섰다.

가만히 서서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드비오는 그녀가 더는 아무 말이 없자 굳은 얼굴로 몸을 돌렸다.

‘기회를 봐서 없애 버려야겠군.’

그는 샤비엔다의 눈 깊은 곳에서 언뜻 보이던 살심을 놓치지 않았다. 언젠가 그녀는 살심을 외부로 드러내고 그를 죽이려 할 것이다. 그것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드비오는 앉아서 당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망할 것 같으니라고. 씨드 때문에 머리가 아파 죽겠는데 말이야.’

드비오는 수족처럼 부리는 자신의 부하 마법사 여러 명을 대동하고 용병 시장으로 향했다.

철저한 감시 상태로 발굴이 진행된 상황에서 론의 붉은 수정 지팡이가 외부로 반출됐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탑주의 지시를 따르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그나저나 설마 그자가 어딘가에서 나를 지켜보는 건 아니겠지?’

드비오는 용병 시장으로 가는 길에 주변을 끊임없이 살폈다.

얼마 전 율리비어스와 싸운 검객은 다름 아닌 베일 가문의 그 용병이 분명해 보였다. 앙심을 품고 그를 노린다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다.

‘다 늙어서 이런 위기가 계속 찾아오다니. 점술가가 말한 거대한 파도에 덮일 운명이 지금이던가?’

떠돌이 점술가가 말한 불길한 점괘를 머릿속에서 애써 지운 그는 사람들로 떠들썩한 용병 시장에 발을 디뎠다.

론의 지팡이를 찾은 기쁨으로 간밤에 술을 많이 마시고도 새벽 일찍 일어난 도현은 2층 창가에서 소리 없이 뛰어내렸다.

나비가 내려앉듯 땅에 사뿐히 착지한 그는 숙소 건물 뒤에 위치한 작은 숲으로 들어갔다.

동이 트기 전 새벽 공기를 한껏 들이마신 그는 호검술을 처음부터 끝까지 느릿느릿 이어 가며 검과 자신을 하나로 만드는 수련을 했다.

그는 검이 검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마음을 표현하는 붓이자 세상을 관통하는 높은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는 숭고한 물건으로 여겨졌다.

사람을 상하게 하고 때로는 나 자신을 보호하는 무기란 사실은 변함이 없었지만, 그것은 검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일차원적인 행동이었다.

‘검으로 마음을 닦아 도를 추구한다.’

검선이 되어 우화등선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저 끝없이 광활한 우주의 한 존재로 태어나 그 의미를 찾아가는 긴 여정에 있어서 검은 그의 정신을 지극히 높은 곳에 이르도록 도와준다.

그 과정 중에 쇠붙이에 불과한 검은 생명력을 얻고 주인과 교감하며 하나가 되어 간다.

검을 휘두르는 도현의 두 눈은 감겨 있었고, 그의 검이 나무 사이를 지나칠 때마다 우람한 나무들이 태풍에 떨듯 진동했다.

도현이 두 눈을 떴을 땐 근처의 나무들이 쏟아 낸 수많은 초록 나뭇잎들이 주위에 가득했다.

검을 거둔 도현은 나뭇잎들 위에 가부좌를 틀고서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작은 숲의 소리가 그의 귀로 온통 빨려 들어오는 것 같았다, 곤충과 새가 우는 소리부터 숲이 숨 쉬는 듯한 기이한 소리까지.

‘아침이 온다.’

밤새 멈춰 있던 숲의 생명력이 아침과 함께 다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누군가 다가오고 있어.’

명상에서 깨어난 도현은 앞을 봤다. 리드만 사제가 아침 햇살을 등지고 서 있었다.

“영주님은 여전히 코를 골며 주무시는데, 자네는 참으로 부지런하군.”

도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리드만 사제가 만류하며 그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숲에 여유가 느껴지는군.”

“그렇습니까?”

도현은 빙그레 웃으며 옆에 앉은 리드만을 응시했다. 별생각 없이 리드만을 보던 도현은 어딘지 달라 보이는 그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사제님, 얼굴에 주름이 많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그런가?”

리드만은 헛기침을 하며 얼굴을 만졌다. 주름지고 탄력 없었던 피부가 어느 정도 팽팽해져 10년은 젊어진 듯했다.

얼굴을 만지는 손등의 주름도 일부 사라져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요 근래 쇠약해진 듯했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활력이 넘쳐 보였다.

‘어떻게 된 일이지?’

마치 10년 전으로 회귀한 듯한 리드만의 신체적 변화에 도현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몸의 변화를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네. 자고 일어났더니 몸이 가볍더군. 이상한 기분에 거울을 봤는데, 꼭 10년 전 내 모습을 보는 것 같더군, 하하하!”

유쾌한 그의 웃음소리가 시원하게 숲으로 뻗어 갔다. 목소리도 다른 때와 달리 힘이 넘쳤다.

“어떻게 된 건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 아무래도 어제 제단 지하에서 찾아낸 성물 때문인 것 같네.”

“성물요?”

“그렇다네. 잠을 잘 때 성물을 품에 안고 잤거든.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자고 일어났더니 성물이 내 품에 안겨 있는 거야. 원래는 침대 옆 책상에 놓아두고 잤는데 말일세.”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성물을 품에 안고 잔 리드만의 신체가 10년은 젊어진 것이다.

“그런데 말일세. 성물에서 자체 발광하던 빛이 사라졌네. 성물의 기운을 내가 흡수해서 이리 젊어진 게 아닌지,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겁기도 하다네.”

리드만 사제의 어깨가 밑으로 축 처졌다. 10년은 젊어졌다는 인간적인 기쁨과 별개로, 성물이 자신 때문에 평범한 나무 여신상으로 변한 것 같아 마음이 심란했던 것이다.

사실 그 때문에 그는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조용히 방을 나와 이 숲으로 들어왔다가 우연히 도현을 발견했다.

‘성물은 정말 신비로운 물건이구나.’

정황상 성물이 리드만의 육체에 변화를 준 것 같았다.

도현은 어제 지하에서 본 달의 여신상을 잠시 떠올리다가 리드만에게 말했다.

“성물이 빛을 잃고 그 빛이 사제님을 조금 젊어지게 만든 것은 신의 뜻이 아닐까요?”

“신의 뜻을 내게 맞게 곡해하면 곤란하다네.”

“그럼 책상 위에 있던 성물이 어떻게 사제님의 품 안에 있었겠습니까?”

“음…….”

리드만은 이 말에는 뭐라고 반박할 수가 없었다. 성물을 소중히 여기는 그는 혹시나 성물이 훼손될까 봐 책상 위에 그냥 놓아둔 것도 아니고 작은 상자에 넣어서 보관했었다. 그가 몽유병이 있는 게 아니고서야 감히 성물을 끌어안고 침대에서 잠을 잘 수가 없는 것이다.

“진정 일곱 신의 뜻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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