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1] 디 임팩트 16권 6화
짐브리오는 구멍 난 벽 앞에서 도망치는 드비오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그러나 드비오는 짐브리오의 도발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살기 위해 몸을 피하는 데만 집중했다.
도현은 얼음 늑대를 타고 도망가는 드비오를 향해 짐브리오의 비수를 번개처럼 집어 던졌다. 비수는 수많은 목조건물이 세워진 어두운 골목으로 막 사라지던 드비오를 끝까지 추격해 그의 등에 힘 있게 꽂혔다.
“크윽!”
얼음 늑대에서 떨어질 듯 상체가 흔들리던 드비오는 간신히 중심을 잡으며 어둠 속으로 빠르게 모습을 감췄다.
도현은 드비오를 추적해 없애 버릴 수도 있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드비오의 마법에 생명이 위험해진 여러 사람들이 있었다.
“암거래 상인을 구해야 돼. 그에게 받을 물건이 있어.”
짐브리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도현은 암거래 상인과 그 부하들을 가둬 놓은 단단한 얼음벽을 대력금강수로 부숴 버린 후,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집 밖으로 끌어냈다.
도현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진 암거래 상인은 곧장 용병 시장을 떠날 준비를 했다. 미친놈처럼 행동하던 노마법사가 얼음탑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후환이 두려웠던 것이다.
피해를 당하고도 도망쳐야만 하는 현실이 억울했지만, 수십 년간 암거래 일을 하면서 사실 이런 일은 여러 번 경험했다.
이길 수 없으면 잠시 자리를 피해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된다. 사는 게 그런 것이다.
“힘들더라도 조금 더 서둘러라! 아침에 항구에서 배를 타고 떠나야 하니까!”
얼어붙은 몸이 회복된 지 얼마 안 돼 몸이 으슬거리고 뼈마디가 시렸지만, 암거래 상인의 부하들은 창고에 있는 고대 유물들을 서둘러 마차에 실었다.
부하들을 다독이던 암거래 상인은 기침을 하며 뒤에 서 있는 도현과 짐브리오에게 다가갔다.
“미안하네, 짐브리오. 벌이 대부분 죽어서 말이야.”
“별수 없지 않소. 당신 탓도 아니고. 그래도 몇십 마리라도 살아남아서 다행이오.”
짐브리오는 벌집이 든 작은 벌통을 내려다보며 아쉬움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배로 운반된 벌통 속의 벌들은 긴 여행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많은 수가 죽어 버렸다.
“그래, 그 수정은 찾던 수정이 맞나?”
“안타깝게도 우리가 찾는 게 아니었소.”
짐브리오는 손에 든 무색 투명한 수정을 암거래 상인에게 되돌려줬다. 수정은 드비오가 부순 지팡이 하단에 달려 있던 것이었다.
“혹시나 해서 암시장에서 구입했는데, 아쉽게 됐군.”
사실 오늘의 사건은 모두 이 수정 때문에 벌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계의 수정을 구하려는 도현과 짐브리오는 암거래 상인에게 그것의 특징을 무색의 투명한 수정 구슬이라고 설명했었다. 그 때문에 암시장에서 엇비슷해 보이는 것을 발견한 암거래 상인이 지팡이를 통째로 구입한 것이다.
“대체 그 마법사가 붉은 수정 지팡이에 왜 그렇게 목을 맨 건지 모르겠어. 혹시 자네는 아나?”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소?”
짐브리오는 시치미를 뚝 뗐다. 론의 지팡이로 오해해 벌어진 일이라는 게 짐작됐지만, 여기서 그 사실을 말해 줄 수는 없었다.
“다 됐습니다!”
떠날 준비가 끝났다는 수하의 보고에 암거래 상인은 마차에 오르기 전 도현에게 재차 고맙다는 말을 했다.
“당신이 아니었으면 얼어 죽을 뻔했소. 정말 고맙소.”
마차에 오른 그는 지체 없이 용병 시장을 떠났다. 언제 얼음탑 마법사들이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만 가자.”
짐브리오는 벌통을 소중한 보물처럼 옆구리에 꼈다.
“암거래 상인에게 벌을 구해 달라고 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놀랐지?”
“그 벌은 어디에 사용하려는 겁니까?”
도현은 아직 이 벌이 왜 필요한지 답을 듣지 못했다.
“얼음탑주와 싸울 때를 대비해 준비한 거야. 이 벌은 평범한 녀석이 아니거든. 침에 마비 성분이 있어서, 쏘이면 잠시 동안은 꼼짝할 수가 없게 돼.”
“그래요?”
“마비 효과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지만, 그래도 얼음탑주처럼 강한 녀석들과 싸울 때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지 않겠어?”
짐브리오는 도현이 수련을 간 동안 나름 얼음탑주를 상대하기 위해 여러 수를 준비해 둔 것 같았다.
“독은 안 통해도 이 마비 침은 통할 거야.”
“벌침을 빼내서 사용할 겁니까?”
“아니, 벌침의 마비 효과는 벌이 직접 사람을 쏘아야만 효과가 있어. 벌이 광분했을 때 벌침에 마비 성분이 들어가는 것이거든.”
“그 말씀대로라면 벌을 조종해서 대상을 공격해야 한다는 건데, 벌을 조종할 수 있습니까?”
“없지, 내가 무슨 능력이 있어서.”
짐브리오의 태연한 대답에 살짝 기대를 가지고 질문했던 도현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럼 어떻게 이 벌을 이용할 겁니까? 필요할 때 벌이 대상을 공격해야 하는데요.”
“다 방법이 있지. 이 벌이 싫어하는 향이 있거든. 몇 가지 꽃들을 조합하면 그 향을 만들 수 있어.”
도현은 며칠 전 짐브리오가 꽃을 짓이겨 작은 유리병에 담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 향을 공격하려는 대상에게 묻히면, 그 향에 자극받은 벌들이 소리 없이 다가가서 콱 쏘고 말지.”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하지만 저라면 벌이 공격하려는데 앉아서 당할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러니까 정신없이 싸울 때 슬쩍 이 벌을 사용해야 하는 거지. 탑주가 너랑 싸우는데 이깟 벌 한 마리가 주변에 얼쩡거린다고 해서 신경이나 쓰겠어? 세티앙이나 루시앙도 마찬가지고.”
짐브리오의 꼼수에 도현은 나직하게 웃으며 골목길을 나와 상점 거리로 접어들었다.
“왜 웃냐? 이게 말이야, 우리 집안의 비전 암살법 중 하나야. 이 벌을 이용하는 수법은 우리 집안의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몰라. 향 제조법도 마찬가지고. 암거래 상인도 내가 왜 이 벌을 구해 달라고 하는지 모를 정도로 말이야.”
“네에.”
“전에 이야기해 준 적이 있지? 왕이 약속을 어겨서 우리 집안의 할아버지와 그 형제들이 왕을 암살했다가 그 여파로 집안이 몰락했다고. 그때 왕을 어떻게 암살했는지 알아? 이 마비벌을 이용했어. 막강한 왕의 친위대가 마비벌에 쏘여 잠깐의 틈이 벌어진 사이에 목숨을 버리면서 왕의 목에 검을 꽂아 넣은 거라고.”
짐브리오는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커진 걸 의식했는지 주변을 살피며 목소리를 다시 낮췄다.
“아무튼 거인의 섬에서 씨드를 차지하기 위해서 뭐든 해야 할 것 아니냐? 이 마비벌이 소용이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준비해서 나쁠 건 없겠지.”
“그럼요. 그런데 벌이 많이 죽어서 어떡합니까?”
“어쩔 수 없지, 살아 있는 벌이라도 잘 관리해서 나중에 사용해야지. 사실 이 마비벌은 구하기 쉬운 게 아니거든. 암거래 상인에게 구해 달라고 의뢰를 했을 때도 못 구할 가능성이 반은 넘었어.”
짐브리오는 말을 하며 벌통을 품 안에 꼭 끌어안았다.
“내 자식 새끼처럼 소중히 관리해야지.”
망각의 숲 근처에는 구릉지처럼 높이가 낮은 산이 하나 존재한다. 한쪽 면은 수목이 자라고 다른 한쪽 면은 회색 암석이 외부로 드러난 산.
이곳이 앞으로 마법 구조물에 쓰일 석재를 제공할 산이었다.
얼음 늑대를 타고 주변을 둘러보던 카샨은 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해가 뜨며 사방을 밝히고 있었다.
산 밑엔 어젯밤에 도착한 크샤코 가문의 숙영지가 어지럽게 펼쳐져 있었다.
“칼라치, 어디서 지낼 건가?”
“하루 정도 더 들어가 보려고. 그곳이라면 탑주가 나중에 오더라도 관심을 가지지 않겠지.”
산 정상 바위에 앉은 칼라치가 멀리 보이는 망각의 숲을 보며 답했다.
마법 구조물을 지으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동안 칼라치는 이디언과 같이 머물 곳이 필요했다.
“지낼 곳을 정하면 다시 찾아오지.”
칼라치가 떠나자 홀로 남은 카샨은 생각 깊은 표정으로 산 밑 숙영지를 바라보다가 얼음 늑대를 타고 산 아래로 내려갔다.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 산 밑에 도착한 그는 아침을 준비하려 분주한 병사들을 지나쳐 부대 지휘관의 숙소로 들어갔다.
옷을 갖춰 입던 중년의 지휘관이 서둘러 인사를 했다.
“오셨습니까, 카샨 님.”
“주변을 돌아보니 가까운 곳에 맹수와 몬스터가 상당히 많아. 전투 몬스터를 이용해 주변을 안정시키는 게 좋겠어.”
“알겠습니다, 카샨 님.”
공손히 대답한 지휘관은 머뭇거리며 물었다.
“저어, 그런데 말입니다. 여기서 채석한 돌들을 들판 너머에 펼쳐진 회갈색 숲으로 옮겨 건물을 짓는다고 하셨는데…… 왜 그래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지휘관.”
“예?”
“시키는 대로만 하게.”
“아, 예. 죄송합니다, 카샨 님.”
차가운 눈빛으로 지휘관을 바라보던 카샨은 몸을 돌려 천막을 나가려다가 무슨 할 말이 더 남았는지 걸음을 멈췄다.
“저 숲은 망각의 숲이라고 불리는 곳이네. 저 안에 악령이 돌아다니고 있으니, 내가 허락하기 전에는 그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게 해.”
“악령이 말입니까?”
지휘관의 얼굴이 굳어졌다. 산에 있는 돌을 캐서 추후 저 숲으로 옮겨야 하는데, 악령이라니.
“그리 걱정할 것 없어. 망각의 숲의 악령은 우리 병사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상대할 테니까.”
“여기에 또 누가 오는 겁니까?”
지휘관이 알고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저 병력과 인부들을 통솔해 카샨이 지시한 방향으로 따라온 것뿐이었다.
카샨은 대답하기 전 얼음탑주와 율리비어스, 쌍둥이 검객을 잠시 떠올렸다. 그들을 생각하자 머리 한쪽에 두통이 왔다. 씨드를 두고 그들과 어떻게 싸워야 할지 머릿속이 아주 복잡했다.
‘당신들은 씨드를 차지해도 되고 나는 안 된다는 법은 없지 않나?’
차기 탑주 자리를 탑주에게 보장받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순 없었다.
“얼음탑 마법사들이 머지않아 올 거야. 그리 알고 있게.”
짤막하게 답한 그는 천막을 힘 있게 젖히고 밖으로 나갔다.
‘빌어먹을 놈, 왜 하필 그때 그곳에 나타나서.’
몸에 하얀 천을 감고 침상에 누워 있던 드비오는 몸을 뒤척이다 미간을 찌푸렸다. 봉합한 등의 상처에서 적지 않은 통증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위험했어.’
도현이 던진 비수에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끄응.”
신음을 흘리며 침상에서 억지로 일어난 그는 식은땀을 흘리는 얼굴로 술을 따라 마셨다.
등에 부상을 입고 돌아왔을 때, 샤비엔다의 비웃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죽었을 때 제일 좋아할 사람은 바로 그년이야.”
탁자 위에 술잔을 거칠게 내려놓은 그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탑주가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탑주님.”
“그렇게 움직여도 되는가? 등의 부상이 심한 것 같던데.”
탑주는 느린 동작으로 다가오며 걱정해 주듯 말했다.
“괜찮습니다. 이 정도 부상으로는 이 드비오를 어찌할 수 없으니까요.”
“자넨 젊었을 적이나 지금이나 호탕한 구석이 있어.”
“별말씀을요. 면목 없습니다. 베일 가문의 그 용병 녀석을 제 손으로 없애 버렸어야 했는데요.”
“으응, 아닐세. 치열하게 싸우다가 부상까지 입고 돌아왔으면, 자넨 할 만큼 한 거지. 일어나 있지 말고 가서 침대에 눕게.”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비겁하게 도망치다 비수를 맞은 드비오는 탑주에게는 목숨을 걸고 싸운 것처럼 자신을 포장했다. 현장에서 살아남은 마법사는 그 자신밖에 없으니 그의 말이 곧 진실인 셈이다.
드비오는 탑주가 침대에 누우라고 재차 권하자 못 이기는 척 침대로 갔다.
“암거래 상인의 집에 가 보니 아무도 없더군. 예상대로야.”
도현이 나타났다는 말에 탑주는 직접 용병 시장에 다녀왔다. 그곳에 여전히 있을 거라고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빈 집 안을 훑어본 후 조용히 고대 도시로 돌아왔다.
“자꾸 그자와 부딪치는 게 마음에 걸려.”
율리비어스 사건도 그렇고 이번 일도 그렇고, 탑주는 보이지 않는 거미줄 같은 끈이 자신을 노리는 것 같아 마음이 찜찜했다.
“드비오, 몸 회복에 집중하게, 조만간 이곳을 떠나 망각의 숲으로 가야 할 것 같으니까.”
“탑주님, 그럼 론의 지팡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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