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 임팩트-386화 (386/575)

[386] 디 임팩트 16권 11화

“고맙군.”

이들은 몸에 거의 짐이 없었다. 모두 리타의 마법 주머니 안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음식과 물, 심지어 비상시 사용할 활과 창과 방패, 검도 여러 개씩 마법 주머니 안에 들어 있었다.

무기들은 고대 도시에서 떠나올 때부터 준비해 온 것들이었다.

도현의 마법 주머니에도 몇 가지 무기들이 들어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딘은 동료들이 떠나자 리타가 준 사슴 고기를 질겅질겅 씹으며 나무에 기대 마법 구조물을 응시했다.

“맛있군.”

배도 고팠고 맛도 있어서 사슴 고기는 금세 바닥났다. 영주 체면에 땅에 떨어진 걸 주워 먹기 좀 그랬지만,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슬그머니 허리를 숙여 흙이 묻은 말린 사슴 고기를 몇 번 닦아 낸 후 입에 넣었다.

“하아, 리드만이 없으니 외롭군.”

늘 붙어 다니던 리드만이 옆에 없으니 딘은 왠지 허전하고 외로웠다. 로나를 돌보는 일만 아니었다면 리드만은 악착같이 그를 따라오려 했을 것이다.

“거인의 섬에서 일이 잘돼야 할 텐데…….”

마법 구조물을 바라보는 딘의 눈빛이 깊어졌다.

화창한 날이었다. 하늘은 푸르렀고 구름은 없었다. 여느 날처럼 강렬하고 뜨거운 햇빛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더운 날씨 속에 마법 구조물은 거대한 생명체처럼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십 미터 높이의 마법 구조물 꼭대기에서도 호수 안에 있는 거인의 섬은 볼 수가 없었다. 섬이 호수 안쪽 깊이 있기도 했지만, 두꺼운 안개층이 시야를 가렸기 때문이다.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마법 구조물 꼭대기에 서 있던 율리비어스는 아래를 내려다봤다.

백여 명 가까운 얼음탑 마법사들과 탑주, 쌍둥이 검객들이 보였다.

‘미천한 놈들, 오직 나만 바라보고 있군. 오냐, 내가 창안한 마법진이 어떤지 그 위대한 모습을 지금부터 보여 주겠다.’

평생 마법에 미쳐 살아온 그는 자신이 그동안 깨달은 마법적 지식과 마법진이 더해진 결과물을 모두에게 보이는 이 순간이 아주 흥분되고 짜릿했다.

간밤에 자신이 설치한 마법진이 이상 없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한 그는 땅으로 내려와 말했다.

“탑주, 시작하겠소.”

“수고해 주시오.”

탑주의 음색에는 약간의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율리비어스의 마법 구조물이 실패하면 거인과 직접 싸울 수밖에 없다. 고대의 강자들도 정복하지 못한 불사의 거인들과 싸워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이 그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에 불사의 거인들을 약화시키는 율리비어스의 마법 구조물은 매우 중요했다.

긴장된 시선으로 율리비어스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은 탑주나 쌍둥이 검객만이 아니었다.

“시작하려나 봐.”

숨어서 지켜보던 리타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녀 주위에는 도현과 딘, 짐브리오가 모여 있었다.

“실패만 해 봐라, 가만 안 둘 테니까.”

불사의 거인은 씨드를 탐하는 모두에게 걸림돌이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율리비어스를 응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리타, 락제프의 목소리가 들려.”

“응? 그랬어?”

도현의 지적에 리타는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자수정을 꺼내 들었다.

“저 부르셨어요?”

-대체 몇 번을 불러야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냐?

마법 구조물에 정신이 팔려 있던 리타는 배시시 웃었다.

“죄송해요. 왜 부르셨어요?”

-율리비어스란 녀석이 만든 마법 구조물을 보고 싶다.

“씨드 찾는 일엔 관심 없으시다면서요?”

-관심은 없다만, 네가 죽으면 누가 날 소멸시켜 주겠냐.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락제프도 은근히 신경이 쓰였나 보다.

“알았어요. 잘 보여요?”

나무 사이에 숨어 저들의 움직임을 살피던 리타는 자수정을 어깨높이로 들어 올렸다.

자수정 속에 맺힌 락제프의 커다란 눈동자가 스르륵 움직여 마법 구조물에 초점을 맞췄다.

-저런 자가 내 시대에 존재했다면, 큰 명성을 얻었을 텐데.

마법 구조물을 발동시키려는 율리비어스를 보며 락제프가 감탄하듯 말했다.

“칭찬하지 마세요. 곧 우리와 싸우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싸우게 되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죽일 생각만 해라. 넌 말과 달리 실제 행동엔 독한 구석이 부족해.

고대에 몬스터를 동원해 도시 국가 라빌을 공격하기도 한 락제프는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걱정 마세요, 오늘은 이 리타가 마녀처럼 독해질 테니까요.”

-내가 믿는 건 네가 아니라 도현이다.

락제프의 눈동자가 도현에게 향했다.

-일이 잘 풀려 거인의 섬에서 씨드를 구하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과감히 포기하고 물러나는 것도 필요하다. 도현, 넌 실력만큼 냉정함을 갖춘 사람이니, 내 말뜻을 잘 헤아릴 거라고 믿는다.

모여 있는 네 명 중 실질적인 리더 역할을 맡게 된 도현은 론의 지팡이를 가지고 있었다. 거인의 섬에서 어떤 판단을 내리느냐는 오로지 도현의 몫이었다. 어깨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조심하겠습니다.”

신중한 눈빛으로 대답한 도현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마법 구조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시작인가?’

거대한 마법 구조물의 하단에 율리비어스가 손을 대고 있었는데, 그곳을 시작점으로 해서 마법진들이 하나둘 눈부신 빛을 발산했다.

마치 가로등의 불빛이 순차적으로 켜지듯 아래서부터 위로 빠르게 빛을 내며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마법진의 모습은 일견 아름답기까지 했다.

우우우우우웅.

시간이 갈수록 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백광은 강렬해져만 갔고, 마법 구조물 주위로는 세찬 회오리바람이 생성돼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그 회오리바람 때문에 얼음탑의 마법사들은 몸을 제대로 가누기 힘들 정도였다.

그러나 마법 구조물의 변화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웅장한 크기의 거대한 마법 구조물 전체가 무너질 듯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쿠쿠쿠쿠쿵.

“저거, 저러다 무너지는 거 아냐?”

짐브리오가 긴장된 음색으로 말했다. 마법 구조물의 진동이 얼마나 심한지 제법 떨어진 곳에 숨어 있는 그들 주위의 땅까지 흔들릴 정도였다.

“돌로 지은 이유가 다 있었군. 나무로 지었다면 저 진동을 견디지 못하고 폭삭 주저앉았을 거네.”

딘은 말을 하며 나무에서 떨어진 나뭇잎을 머리 위에서 치웠다.

“저기 봐! 한쪽이 무너지고 있잖아!”

마법 구조물의 진동을 견디지 못한 하단의 모서리 일부분이 쩍 소리를 내며 와르르 무너진 모습에 짐브리오가 눈을 크게 떴다.

“멍청이들! 튼튼하게 만들었어야지!”

리타가 발을 구르며 크샤코 가문의 일꾼들을 탓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책임이 아니었다. 수십 개의 마법 증폭진이 만들어 낸 엄청난 힘은 아무리 튼튼한 석조 건물이라 해도 온전히 버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거대한 마법 구조물의 일각이 무너지고 있는 와중에도 눈빛 하나 변하지 않고 차분히 사태를 관망하던 도현이 한마디 했다.

“빛이 모이고 있어.”

각자 눈부신 빛을 토해 내던 마법진의 빛들이 마침내 마법 구조물의 꼭대기로 이동했다.

꼭대기에는 율리비어스가 설치한 마법 파괴진이 존재했는데, 수십 개의 마법 증폭진이 일으킨 엄청난 마력의 힘이 그 안으로 흘러 들어가자 작동하기 시작했다.

파앗!

번쩍이는 붉은 빛기둥이 하늘로 솟구쳤다.

끝없이 올라간 붉은 빛기둥이 어느 순간 직각으로 꺾이더니 안개에 가려진 거인의 섬 상공을 향해 날아갔다.

마법 구조물의 진동은 멈췄고 마법진의 빛도 사라졌다. 사람들의 관심은 이제 안개 호수 저 너머로 날아간 붉은 빛기둥에 쏠렸다.

얼마 후,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엄청난 굉음이 호수 저 안쪽에서부터 빠르게 전파됐다.

콰아아아앙!

인상을 찡그리게 만들 정도로 소리의 위력은 대단했다.

‘가까이서 이 소리를 들었다면, 고막이 버티지 못했을 거야.’

귀가 먹먹해진 리타는 소리가 안 들린다는 시늉을 했고 짐브리오가 머리를 몇 번 흔들어 주자 괜찮다는 손동작을 했다.

“뭔가 큰 변화가 일어난 것 같긴 한데…… 정확한 건 가 봐야 알겠지?”

딘의 말에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준비한 배로 돌아가서 거인의 섬으로 가죠. 저들도 움직이고 있습니다.”

마법 구조물 앞은 호수였는데, 그곳엔 크고 작은 여러 척의 배들이 물가에 정박해 있었다. 크샤코 가문의 일꾼들이 마법 구조물과 함께 만들어 놓은 배들이었다.

일꾼들 중엔 배를 만들 수 있는 기술자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목재가 풍부한 망각의 숲을 이용해 몇 척의 배를 만드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들이 배로 향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도현과 일행은 몸을 돌려 뗏목을 숨겨 둔 곳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수풀 속에 숨겨 둔 무거운 뗏목을 호수가에 띄운 그들은 배에 올라타기 전 술을 한 모금씩 나눠 마셨다.

“남은 술은 무사히 돌아와서 마시자.”

짐브리오의 힘 있는 말에 도현은 살짝 미소를 보였다.

“긴장되세요?”

“그럼 너 같으면 긴장 안 되겠냐, 천당과 지옥이 바로 저 앞에서 결정될 판에. 흐흐흐, 안 그렇소, 영주?”

짐브리오가 딘의 어깨에 손을 슬쩍 올리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질색을 한 딘이 짐브리오의 얼굴을 뒤로 밀어냈다.

“자네 얼굴을 가까이서 보니 흉악하기 그지없군.”

“흉악하다고? 난 매력 있는 얼굴인데?”

“누가 그런 헛소리를 했는가?”

“내가 했소. 이 덜떨어진 영주 같으니라고, 하하하!”

호수의 물을 손으로 떠서 번개처럼 영주의 얼굴에 뿌린 짐브리오는 제일 먼저 뗏목 위에 올랐다.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자네의 물장난은 나중에 갚도록 하지.”

“그럽시다. 어서 오르시오.”

조금 전까지 딘과 장난을 쳤던 짐브리오의 눈빛은 진중하게 바뀌어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목숨을 바쳐 싸울 준비를 마친 상태 같았다.

뗏목에 오른 그들은 안개가 낀 호수 안으로 서서히 진입했다.

“잠시만요.”

본격적으로 노를 저으려던 짐브리오가 노를 젓다 말고 도현을 응시했다.

“왜?”

“물결이 이상합니다.”

조금 전까지 잔잔했던 호수의 물이 바람도 없는데 출렁이고 있었다. 노를 젓지 앉자 배는 호숫가 자갈밭을 향해 조금씩 밀려나기까지 했다.

“원래 겉은 평온해도 물 밑은 요동치는 법이야. 신경 쓰지 말고 가자. 이러다 너무 늦게 도착한다.”

“어? 저게 뭐야!”

뗏목 가운데 앉아 있던 리타가 벌떡 일어나 안개가 짙게 낀 호수 안쪽을 가리켰다.

시커멓게 보이는 뭔가가 안개를 밀어내며 그들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바다에서나 볼 수 있는 엄청난 높이의 큰 물결이었다.

해일처럼도 보이는, 높고 거대한 물결은 도현의 작은 뗏목을 집어삼키려는 듯 빠르게 접근하고 있었다.

항구가 끼어 있는 영지를 소유했던 영주 딘은 바다에 대해 비교적 익숙한 편이었다.

“호수에 해일이 일어나다니, 놀랍군. 어서 피하세. 저놈에게 걸리면 살아남기 힘들어.”

“배는 어쩌고 말이오?”

짐브리오는 미련이 남는지 뗏목의 노를 굳게 잡고 물었다. 그도 바보가 아니어서 저 물결이 위험한 건 알았지만, 그렇다고 뗏목을 포기하기도 그랬다.

이 뗏목이 부서지면 새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 시간만큼 거인의 섬에 가는 게 늦춰진다.

약화됐을지도 모르는 거인들과 탑주 세력이 싸우는 동안 기회를 엿봐야 했기 때문에, 저들보다 너무 늦게 거인의 섬에 도착하면 불리한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짐브리오의 마음을 짐작한 도현이 서둘러 말했다.

“저 엄청난 높이의 물을 보십시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길이도요. 호수 전체에 이런 해일과 같은 물이 덮치고 있을 겁니다.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얼음탑주의 배들도 결코 무사치는 못할 겁니다.”

“아, 그렇군!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그 녀석들 배도 부서지겠지? 어서 도망가자!”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