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8] 디 임팩트 16권 13화
리타의 머리를 쓰다듬은 도현은 짐브리오와 딘을 한차례 둘러본 후 섬을 향해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렸다.
비호처럼 날아간 그는 거친 호수의 물을 왼발로 부드럽게 밀어내며 앞으로 쭉 치고 나아갔다.
‘된다!’
수면 위를 낮게 날아간 그는 물에 빠지기 직전 오른발로 물을 다시 밀어냈다.
처음엔 불안정했던 그의 몸이 횟수를 거듭할수록 점차 안정됐다.
물 위를 달리는 것은 사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수법이었다. 뗏목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 손바닥으로 물을 쳐 내며 우연히 깨달은 물을 다루는 법을 발에도 적용해 봤는데, 그것이 성공한 것이다.
다듬을 게 아직 많은 수법이었지만, 어찌 됐든 지금 당장은 사용하는 데 지장이 없었다.
“진짜 괴물은 탑주가 아니라 바로 저 녀석이야.”
짐브리오는 갈라진 섬의 오른쪽으로 향하고 있는 도현의 뒷모습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샘
“탑주, 베일 가문의 그 용병이 어찌 여기까지 와 있는 게요?”
섬에 올라와 거인의 언덕을 향해 달려가던 세티앙과 루시앙이 얼음 늑대를 탄 탑주에게 한목소리로 물었다.
“그걸 내가 어찌 알겠소이까?”
다소 퉁명스럽게 대꾸한 탑주는 앞에서 쓰러지는 나무를 순간적으로 얼려서 박살을 내 버렸다.
‘그 녀석을 이렇게 만들어 줘야 하는데!’
그의 심기는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섬의 상황이 긴박해 무시하고 지나쳐 왔지만, 도현에게 맞아 이빨이 왕창 부러진 수모가 떠올라 감정을 절제하기가 쉽지 않았다.
‘시작이 안 좋아…….’
얼음 늑대를 타고 앞서가던 탑주는 차가운 빛이 어린 회색빛 눈동자로 오른쪽을 돌아봤다. 눈부신 백마를 탄 율리비어스가 표정 없는 얼굴로 그의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거인들을 약화시키는 마법이라고 하더니, 섬을 아예 망가트렸어. 이런 뻔뻔한 늙은이 같으니라고.’
율리비어스가 마법 구조물을 통해 발동시킨 마법으로 인해 호수의 물이 산처럼 높이 떠밀려 와 배가 몽땅 부서지고 탑의 마법사들 태반이 물에 휩쓸려 생사조차 불분명했다. 드비오나 샤비엔다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일이 왜 벌어진 것이냐는 탑주의 물음에 율리비어스는 태연하게 이렇게 답했다.
-걱정 마시오, 탑주. 약속대로 거인들은 약화되어 있을 테니까.
섬에서 방패막이로 사용하려던 부하들을 잃은 탑주는 속이 끓어올랐지만 꾹 참고 호수를 얼리며 섬까지 온 것이다.
“율리비어스, 섬이 가라앉고 있소이다. 이것도 예상한 거요?”
“그럴 리가 있겠소. 씨드를 원해서 당신을 돕고 있는데 말이오. 섬이 가라앉고 있는 일은 나도 참으로 애석하게 생각하는 바요.”
“거인들을 없애도 마법 결계가 남아 있소. 섬이 가라앉기 전까지 마법 결계를 풀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질책하는 듯한 탑주의 말투에 율리비어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탑주, 힘들여 거인들을 약화시키는 마법을 만들었더니 이제 와서 나를 탓하는 거요? 애초에 약속했던 론의 지팡이를 당신이 구해 왔다면, 마법 결계는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 안 그렇소?”
송곳처럼 파고드는 그의 예리한 지적에 탑주는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탑주와 율리비어스의 갈등을 옆에서 지켜보던 세티앙이 쇳소리가 묻어나는 저음으로 말했다.
“우리 형제가 몇 달을 허비하며 브링틱에서 시간을 보낸 건 씨드라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오. 섬이 가라앉고 있어서 초조하긴 하지만, 이럴수록 힘을 합해야 하는 게 아니겠소?”
냉정한 세티앙의 말에 탑주는 화를 삭이며 전방을 바라봤다. 멀리 거인의 언덕이 보이고 있었다.
“다 왔소, 저곳이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인의 언덕에서 커다란 바위가 날아와 그들을 묵사발로 만들어 버리려 했다.
콰아앙!
포탄이 터진 것처럼 땅이 깊숙이 들어갔다.
“거인들이 약화됐다면 더 이상 저들은 불사의 존재가 아니겠지.”
“싸워 보면 내 마법이 성공했는지 안 했는지 알 수 있을 거요. 갑시다.”
율리비어스의 백마가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는 땅을 빠르게 돌파하며 네 명의 거인이 지키고 서 있는 언덕 정상을 향해 달려갔다. 그 뒤를 탑주와 쌍둥이 검객이 바람처럼 쫓았다.
-죽음을 자초하는 인간들이여, 지옥의 불이 담긴 검으로 육신을 멸해 지옥으로 보내 주마!
율리비어스의 마법이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몰라도 거인들은 곧장 언덕 주변에 숨겨진 마법의 지옥 불 검과 방패를 소환해 양손에 들었다.
검붉은 불길이 타오르는 검과 방패를 든 네 명의 거인들은 언덕의 사방위를 지키며 네 갈래로 접근하는 강력한 도전자들을 맞아 거대한 지옥의 불 검을 휘둘렀다.
경사가 진 언덕 밑으로 세상을 한 줌 재로 만들어 버릴 듯한 화염 폭풍이 거세게 밀어닥쳤다.
땅이 갈라지고 싱크홀처럼 구멍이 생기고 있는 위태로운 섬을 달려 거인의 언덕 부근에 도착한 도현은 발걸음을 서서히 멈췄다.
거인과 탑주 일행이 언덕 주변을 폐허로 만들며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20미터 가까운 거인과 그 10분의 1도 안 되는 크기의 인간이 한데 어울려 싸우는 게 어떤 면에선 비현실적인 모습으로 보이기도 했다.
거인이 휘두르는 거대한 화염 검을 피해 허공으로 솟구친 침묵의 기사단 출신의 노검객 세티앙의 검이 빛을 발하는 순간, 수십 가닥의 검기가 날아가 거인의 전신을 두드렸다.
대부분은 거인의 불타오르는 방패에 막혔지만, 일부는 거인의 팔과 다리에 적중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거무튀튀한 고무 같은 걸쭉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상처가 아물지 않는다. 더 이상 불사의 거인이 아니야.’
언덕 가까이 다가가 싸움을 지켜보던 도현은 율리비어스의 마법 구조물이 거인들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엄청난 재생 능력으로 상처를 극복해 왔던 거인들의 몸이 평범해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여 거인들의 싸움 능력까지 평범해진 건 아니었다.
도현은 탑주와 싸우고 있는 거인을 바라봤다. 탑주가 소환한 빙룡을 주먹으로 후려쳐 바닥으로 떨어트린 거인이 발로 빙룡의 머리를 밟아 꼼짝 못하게 한 후, 바닥에 꽂아 둔 불타는 검을 뽑아 그대로 빙룡의 목을 베어 버리고 있었다.
쿠아아아아!
거인의 발에 짓밟힌 빙룡이 몸부림을 치다가 애처로운 비명을 지르며 소멸됐다.
“이놈!”
빙룡과 함께 거인을 상대하던 탑주의 몸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와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불타는 방패로 탑주의 마법을 막은 거인이 무서운 눈길로 탑주를 노려보았다.
-강자에 대한 예우로 너를 한번 살려 주었다. 약속을 어기고 다시 찾아온 너에게 죽음을 선고한다.
“부활한 거인이여, 다시 네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라!”
두 눈이 투명하게 변한 얼음탑주가 지팡이를 내리치자 하늘에서 거대한 얼음 망치가 생성돼 거인의 머리를 후려쳤다.
거인은 방패를 들어 머리 위를 가렸다.
집채만 한 얼음 망치를 막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거인도 그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우저저저적.
불타오르는 방패가 얼어서 금이 가는가 싶더니, 큰 소리를 내며 박살이 난 것이다.
방패를 잃은 거인은 포효하며 거대한 주먹으로 탑주가 있는 곳을 내리쳤다.
쿠웅!
간발의 차로 거인의 주먹을 피한 탑주가 두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극강의 한기가 거인의 전신을 순식간에 휘감아 그를 꽁꽁 얼려 버렸다.
‘됐나?’
탑주가 잠시 숨을 돌리려는 그 순간, 한 겹 얼음 속에 갇혀 있던 거인이 얼음을 깨고 나왔다.
탑주의 안색이 굳어졌다.
섬이 가라앉고 있어서 한시라도 빨리 거인들을 없애고 언덕 정상에 펼쳐진 마법 결계까지 가야만 했다. 한데 약화된 게 분명한 거인들의 힘이 만만치가 않았다. 아무래도 제압하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쌍둥이 검객과 율리비어스 역시 그와 비슷한 처지였다.
“거인을 죽이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 것 같소!”
탑주가 거인을 피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마법 결계로 갑시다! 시간이 없으니 거인들 대신 그곳을 직접 노려 봅시다!”
“이놈들이 가만히 있겠소!”
루시앙이 거인의 발목을 검으로 그으며 외쳤다.
상처가 깊이 났는데도 불구하고 거인은 아랑곳없이 루시앙에게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숨통이 끊어지기 전까지는 끝까지 달려들 태세였다.
“위험은 감수해야지 않겠소! 지금이 아니면 씨드는 이대로 섬과 함께 사라질 거요!”
“루시앙! 결계로 간다!”
몸을 굴려 거인의 화염 검을 피한 세티앙이 쌍둥이 동생에게 외쳤다.
“알겠소. 갑시다!”
탑주와 쌍둥이 검객이 움직이자, 율리비어스도 보조를 맞춰 언덕 정상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그가 있던 자리는 거인이 펼친 번개 마법구가 폭발해 흙과 돌들을 태워 버리고 있었다. 거인들 중 하나는 마법사로서 번개 마법구를 사용할 수 있었는데, 율리비어스가 그를 상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마법 결계로 향하자 거인들은 분노한 눈빛으로 미친 듯이 뒤쫓아 순식간에 결계 앞을 막아섰다.
-어떤 자도 여기에 접근할 수 없다.
“이놈들을 상대하지 말고 피하면서 저 결계를 파괴해 봅시다!”
네 명의 강자들은 거인들의 공격을 회피하며 각자의 수단으로 푸른 막을 형성하고 있는 마법 결계에 공격을 퍼부었다.
시간이 많았다면 마법적인 해결책을 고민해 봤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푸른 막은 그들의 공격에도 끄떡없이 일정한 형태를 유지했다.
콰앙!
거인의 발길질에 스친 세티앙의 몸이 허공으로 튕겨져 올랐다. 결계를 공격하다 거인의 공격을 순간적으로 놓친 것이다.
뒤이어 탑주도 입으로 피를 뿜으며 언덕 아래로 튕겨져 굴러 내려갔다.
거인들을 방치한 채 결계를 노리는 행위가 얼마나 위험한 행동인지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세티앙과 탑주가 당하자 남은 루시앙과 율리비어스는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거인들이 둘씩 짝지어 그들을 공격하자, 도저히 당해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가소로운 인간들.
“섬이 가라앉고 있다. 끝까지 우리를 막을 필요가 있는 가!”
기침을 하며 일어선 탑주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거인을 보며 외쳤다.
-우리는 이곳을 지킬 뿐이다. 인간들이여, 지옥에나 가거라.
거인들과 탑주 일행은 언덕에서 다시 뒤엉켜 좀 전보다 훨씬 치열한 싸움을 벌여 갔다.
그사이 섬의 침몰은 가속화됐고, 언덕 주변으로 호수의 물이 차올랐다.
‘더 이상은 기다릴 수가 없어.’
저들의 싸움을 지켜보며 마법 결계로 가기 위한 적당한 타이밍을 재고 있던 도현은 언덕 아래 바위 뒤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거인들과 네 명의 강자들의 힘이 다할 때까지 기다리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마법 주머니 안에 보관 중인 론의 지팡이를 꺼낸 도현은 그것을 품 안에 넣고 잠시 심호흡을 했다.
‘론의 지팡이가 제대로 효과를 발휘해야 할 텐데.’
론의 지팡이가 마법 결계의 열쇠라는 것만 알 뿐이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는 락제프도 알지 못했다. 도현이 직접 맞닥트려 해결해야 할 상황인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자칫하다간 거인과 탑주 일행 양쪽에서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시간을 끌지 않고 단번에 마법 결계를 열고 들어가 씨드를 구해 오는 게 최선의 시나리오였지만, 두고 볼 일이었다.
콰콰콰쾅쾅!
지축이 흔들리는 굉음과 함께 두 발로 서 있을 수 없을 만큼의 강력한 충격이 섬을 관통했다.
경사진 언덕 위에서 싸우던 거인들과 탑주 일행이 휘청거렸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도현이 몸을 날렸다.
이제껏 그가 발휘했던 그 어떤 신법보다도 빠른 극쾌의 신법이 그의 몸을 통해 발현됐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미처 사라지지 않은 도현의 잔상이 남아 시간이 흐른 후에야 사라지는 놀라운 광경이 연출됐다.
쉬이이이익.
수백 미터 높이의 언덕 정상을 향해 바람을 가르며 빛살처럼 달려가던 도현의 앞에 거인이 불쑥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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