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9] 디 임팩트 16권 14화
루시앙과 싸우던 거인이었는데, 거인은 본능적으로 언덕에 오른 침입자를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이라도 있는지 루시앙을 버려두고 도현을 순간적으로 가로막은 것이다.
루시앙과 싸우다 한쪽 손목을 잃은 거인은 잘린 손목을 송곳처럼 땅에 찔러 넣었다.
콰앙!
땅을 뚫고 들어갈 만큼 거인의 손목 공격은 위력적이었지만, 도현의 움직임을 따라잡을 만큼 빠르진 않았다.
거인을 스쳐 지나간 도현은 푸른 막의 마법 결계에 한층 가까워졌다.
도현은 달리면서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율리비어스와 싸우던 거인 마법사가 그를 향해 번개 마법구를 연속해서 날리고 있었다.
그는 호신강기를 펼쳤다.
쿠웅! 쿠웅!
두 번의 묵직한 울림 속에 번개 마법구는 공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호신강기를 거둔 도현은 달리는 데 집중했다.
‘아니, 저놈이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탑주는 뗏목 위에 있던 도현이 갑자기 나타나자 왠지 가슴이 덜컥했다.
거인들의 공격을 회피하며 기를 쓰고 마법 결계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 마치 먹이를 노리고 전력을 다해 낙하하는 한 마리 매와 같았다.
사냥감을 알고 달려드는 무서운 매.
그것이 지금 도현의 몸짓이었다.
‘설마?’
표정이 굳어진 탑주가 몸을 날리며 외쳤다.
“모두 저놈을 막으시오!”
거인들이 도현을 쫓는 통에 두 손이 자유로워진 율리비어스와 쌍둥이 검객은 탑주의 외침에 그를 쳐다봤다.
“막을 이유가 있소? 어차피 마법 결계는 저자 힘으로 부수지도 못할 것을. 아마 거인에게 포위당해 혼쭐이 날 거요.”
세티앙의 말에 탑주가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저놈이 만약 론의 지팡이를 가지고 있다면 어찌할 것이오!”
“뭐요?”
“저 녀석이 고대 왕궁에서 론의 지팡이를 빼돌렸을지도 몰라서 하는 소리요!”
탑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 사람은 거인들에게 쫓기는 도현을 향해 맹렬히 달려갔다.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일단 잡고 볼 일이었다. 씨드를 얻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이고 지금껏 거인들과 싸웠는데 남 좋은 일을 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네 이놈! 멈추어라!”
탑주가 뒤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도현은 이미 마법 결계 지척에 도달한 상태였다.
‘조금만 더.’
-더는 갈 수 없다, 인간이여!
20미터 가까운 크기의 거인이 하늘을 날아 결계 앞에 뚝 떨어졌다.
섬광이 번뜩이는 눈빛으로 도현을 내려다보던 거인은 허리를 천천히 낮추더니 달려오는 도현을 향해 불타오르는 검을 번개처럼 좌우로 그었다. 마치 뛰어난 무사가 한 호흡에 수십 번의 칼질을 하듯 거인의 검은 훌륭했다.
화르르르.
화염 폭풍이 깃든 놀라운 거인의 검술을 앞에 둔 도현은 손가락으로 허리의 검을 튕겨 올렸다.
스르릉.
달리면서 세타이움 장검을 뽑아 든 도현은 거인이 눈에서 뿜어내는 섬광 못지않은 강렬한 안광을 발산하며 거인의 검 속으로 뛰어들었다.
‘여기서 발이 묶이면 거인과 탑주 일행에게 같이 공격당한다. 빠르고 힘 있는 검으로!’
푸른 검광이 몇 차례 번쩍이는가 싶더니, 잠시 후 도현이 검을 거둔 모습으로 나타났다.
언제 검을 사용했냐는 듯이 도현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를 가로막았던 거인을 스쳐 지나갔다.
검으로 도현을 막았던 거인은 다리가 잘려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뒤에서 그 모습을 목격한 세티앙과 루시앙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거인의 화염 검술을 단숨에 무력화시키고 다리까지 잘라 낸 도현의 검술은 그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깊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 왔다!’
도현은 품 안에서 론의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언덕 정상에 자리 잡은 커다란 크기의 푸른 막이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위치해 있었다. 내부는 푸르스름한 막의 힘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제발, 한 번에 열려라!’
도현은 뒤에서 내리치는 거인의 주먹을 피하며 앞으로 크게 점프했다.
“이얏!”
도현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큰 기합 소리가 터져 나왔고, 둥글게 몸을 말은 도현의 몸이 회전하며 푸른 막에 도달했다.
론의 지팡이를 믿고 몸을 던진 도현은 푸른 막과 충돌하기 전까지의 그 짧은 순간이 그렇게 긴장될 수가 없었다.
이미 섬의 대부분은 가라앉았고 언덕도 조만간에 같은 신세가 될 상황이었다. 거인과 탑주 일행의 위협은 물론이고 촉박한 시간과도 싸움을 벌여야 하는 처지인 것이다.
입을 굳게 다문 도현은 론의 지팡이를 앞세운 상태로 마침내 푸른 막과 충돌했다.
‘어!’
물컹거리는 느낌과 함께 도현은 푸른 막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진입했다.
휘리릭.
몸의 균형을 잡으며 땅에 착지한 도현은 급히 뒤를 돌아봤다. 마법 결계는 그대로였다. 그 자신만 이 안의 공간으로 들어온 것이다.
“네놈이 론의 지팡이를 훔쳐 갔구나!”
분노한 탑주의 목소리가 얼핏 들렸고 그 뒤에 거인과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으로 들어왔다.”
기쁨에 찬 도현은 정신을 차리며 결계 안을 서둘러 살폈다.
내부는 흙과 바위 그리고 샘 하나가 전부였는데, 샘 안에는 은은한 서기가 뿜어져 나오는 작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혹시 저게 씨드 나무?’
샘 안의 나무가 락제프에게 들었던 씨드 나무라는 걸 직감한 도현은 샘으로 다가갔다.
“씨드가 안 보인다. 나무만 있을 뿐.”
샘 밖에서 나무를 자세히 살핀 도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나무는 혹독한 겨울을 보내는 것처럼 왜소하고 앙상했다. 나뭇잎도 꽃도 열매도 안 보였다. 그 어디에도 씨드로 보이는 것은 나무에 달려 있지 않았다.
주위를 재차 둘러봤지만 마법 결계 안은 샘만이 존재했다. 전설대로라면 이 샘 안의 나무가 씨드 나무인 셈이다.
“씨드가 아직 생성돼지 않은 건가? 아니면 사라진 건가?”
허리까지밖에 안 오는 작은 나무를 보며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던 도현은 뒤에서 들리는 큰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거인들이 힘이 다했는지 탑주 일행에게 한 명씩 제거되고 있었다.
“네놈을 잡아서 얼음으로 만들어 조각조각 내 주겠다!”
결계 안으로 들어간 도현을 질투한 탑주의 악에 받친 목소리가 생생히 들려왔다.
‘결계가 약해지고 있다.’
도현이 들어온 후 푸른 막이 서서히 희미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조만간 탑주와 그 일행도 이곳으로 들이닥칠 것 같았다.
“음.”
도현은 착잡한 시선으로 샘 안의 나무를 응시했다. 온갖 일을 겪으며 여기까지 왔는데, 기대했던 씨드는 없었다.
맥이 탁 풀린 도현의 머릿속에 죽어 가는 로나의 모습이 그려졌다.
뗏목에서 기다리는 정 많은 짐브리오의 얼굴도.
‘돌아가서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물론 도현도 씨드를 먹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욕심도 있었고. 그러나 당장 씨드가 없는 상황에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동료들에 대한 걱정이었다.
샘 밖에서 나무를 지그시 응시하던 도현은 품 안에서 마법 주머니를 꺼냈다.
“어쩔 수 없지, 저 나무라도 뽑아 가는 수밖에.”
은은한 서기를 발산하는 씨드 나무에 뭔가 효과가 있을 수도 있다. 씨드가 없으니 저것으로라도 로나의 병을 고쳐 볼까 하는 마음에 도현은 나무를 뽑아 갈 생각까지 한 것이다.
어차피 놔둬 봤자 무너지는 섬과 함께 호수 밑으로 가라앉을 상황이었다.
‘저 나무가 효과가 있어야 할 텐데.’
첨벙.
정강이까지 오는 얕은 샘으로 도현이 발을 담근 순간이었다. 샘 안에 고인 물이 빛을 내며 들끓기 시작했다.
‘뭐지?’
돌연한 변화에 주춤거리던 도현의 얼굴이 뒤로 획 꺾였다.
“크윽!”
고통을 수반한 불처럼 뜨거운 기운이 갑자기 발을 통해 흡수되고 있었다.
‘움직일 수가 없다!’
두 발이 샘의 바닥에 달라붙은 것처럼 도현은 꼼짝할 수가 없었고, 그 상태에서 그는 계속 기운을 흡수해 갔다.
‘엄청난 기운이다. 제어할 수가 없을 정도로!’
고개를 뒤로 젖힌 상태에서 사시나무 떨듯 흔들리던 도현의 몸이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서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어느새 빛나는 샘의 물은 다 말라 있었다.
10미터 정도 되는 마법 결계의 천장까지 떠오른 도현은 그 상태에서 전신을 활처럼 펴며 괴성을 질렀다.
“으아아아아!”
마법 결계인 푸른 막이 안에서부터 거미줄처럼 균열이 가더니 종국엔 유리창 깨지는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거인들을 없애고 마법 결계를 난타하고 있던 탑주와 쌍둥이 검객, 율리비어스는 놀란 눈으로 공중을 올려다봤다. 결계가 깨지며 공중에 떠 있는 도현의 모습이 보인 것이다.
강력한 기파를 사방으로 발산하며 떠 있는 그의 모습은 절대 강자의 면모를 보여 주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자가 씨드를 복용했나 보군.”
세티앙이 심상치 않은 도현의 모습에 침음을 흘리며 말했다.
탑주와 율리비어스는 서둘러 샘으로 달려가 봤다. 물이 고갈된 샘 안에 은은한 서기가 감도는 작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긴 했지만, 그 나무엔 아무것도 매달려 있지 않았다.
이들은 도현이 씨드를 가로챘다고 판단했다.
“힘만 들었지 얻은 게 없어.”
율리비어스는 표정 없는 얼굴로 공중을 올려다봤다.
정신을 차린 도현이 도도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네놈이 감히 론의 지팡이를 도적질해 가고 급기야 씨드까지 훔쳐 먹었구나!”
탑주는 분노로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다. 초대 얼음탑주가 도달한 위대한 대마법사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그는 씨드를 얻는 데 전력을 다했다.
한데, 눈앞에서 씨드를 도둑맞았다고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회색빛 눈동자가 붉어질 정도로 화가 난 그를 도현은 공중에서 차갑게 내려다봤다.
‘몸이 말할 수 없이 가볍다. 전신에 힘이 넘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기분이야.’
전신 모공을 통해 미세한 공기의 흐름이 느껴졌고 시력은 가공할 만큼 좋아져 땅에서 그를 올려다보는 저들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까지 똑똑히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단전의 내공 역시 폭발적으로 상승해 섬에 오기 전보다 두 배 이상은 늘어난 것 같았다.
환골탈태라는 표현은 과할 수 있지만, 그 정도 말이 아니면 지금의 몸 상태를 표현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만큼 도현의 몸 상태는 최고였다.
엄청난 내공의 힘으로 공중에서 자세를 유지하던 도현이 탑주에게 말했다.
“어떻게 죽고 싶은가?”
“뭐라?”
“당신과 나 사이엔 풀어야 할 매듭이 있을 텐데.”
콰앙!
순식간에 지상으로 내려온 도현이 대력금강수로 탑주의 가슴을 후려쳤다.
탑주는 다급히 얼음 방패로 막았지만, 눈부시게 빛나는 청색 강기로 휩싸인 도현의 대력금강수는 얼음 방패를 종잇장처럼 찢어 버리며 그대로 탑주의 가슴을 강타했다.
바위도 두부처럼 부숴 버리는 대력금강수에 가격당한 탑주가 가슴 한쪽이 움푹 들어가며 뒤로 튕겨져 나갔다.
“우엑!”
피를 토한 탑주가 데굴데굴 굴러 세티앙과 루시앙 형제의 발밑까지 밀려났다.
“감히 네놈이!”
탑주는 가슴을 부여잡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막판에 얼음 갑옷으로 가슴을 보호하지 않았다면, 도현의 한 수에 즉사할 뻔했다. 가슴 서늘한 상황이었다.
“모두 힘을 합해 저놈을 없애 버립시다!”
그러나 탑주의 말에 율리비어스와 쌍둥이 검객은 반응이 없었다. 그들은 도현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차갑고도 서늘한 기운을 대적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내 말이 안 들리는 거요!”
“그와 싸워서 얻을 게 뭔지 모르겠소.”
“저자 품에 또 다른 씨드가 있을 수도 있지 않소이까!”
탑주가 세티앙을 보며 외쳤다.
“씨드는 내게 없다. 하지만 덤비겠다면 받아 주지.”
도현이 허리의 검을 뽑아 손에 들었다. 자신감에 찬 강한 기세가 주변을 휩쓸었다.
잠시 동안 그들 사이에 정적이 감돌았다.
언덕의 흔들림이 심해져 갔다. 곧 있으면 이 언덕도 호수에 완전히 잠길 것 같았다.
주변을 쓸어 본 율리비어스는 눈부신 백마를 소환했다. 백마에 올라탄 그는 탑주에게 말했다.
“바보 같은 인간, 적을 만들어 씨드를 넘기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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