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0] 디 임팩트 16권 15화
“이보시오, 율리비어스!”
“나를 탓하지 마라. 전설의 씨드를 복용한 자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만큼 난 절실하지 않으니까.”
율리비어스는 말 머리를 돌려 도현을 응시했다.
씨드가 없다는 도현의 말이 거짓말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구태여 모험을 할 이유가 없었다. 고대의 위대한 마법사 론의 마법을 흔들어 놨다는 것에 만족하고 이쯤에서 물러나는 게 좋았다.
“가자!”
율리비어스가 마법으로 소환한 백마의 허리를 차자 백마는 흔들리는 언덕을 바람처럼 내려가더니 호수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저런 비겁한 자를 봤나! 도망을 치다니!”
율리비어스를 비난한 탑주는 쌍둥이 검객을 돌아봤다.
“뭐 하시는 거요?”
“우리도 떠나겠소.”
세티앙과 루시앙 형제는 언덕 위를 달리더니 그대로 호수에 뛰어들었다.
격한 물살을 뚫은 그들은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섬에서 육지인 망각의 숲까지는 먼 거리였지만, 그들에겐 별문제가 되지 않는 듯 보였다.
“씨드를 구하지 못했으니 왕자를 어떻게 키울지 참으로 걱정이오.”
동생의 말에 세티앙은 헤엄을 멈추고 잠시 물속에서 멀리 보이는 언덕을 응시했다.
베일 가문의 용병과 얼음탑주가 싸우고 있었다.
“애초에 씨드를 먹이려고 한 우리 생각이 잘못일 수도 있어. 중요한 건 왕자의 의지인 것을.”
“사실 나도 그런 생각이 좀 들긴 했었소. 한데, 저 용병의 검술이 대단하지 않았소? 아까 거인을 벨 때 말이오.”
“흠, 그렇더군. 우리와 충분히 검을 겨룰 만한 상대였던 것 같아. 가볍게 검을 배운 사람 같지는 않은데, 어느 가문의 인물인지 모르겠군.”
“씨드까지 복용한 것 같으니, 이제 그를 상대하기란 보통 어려운 게 아닐 거요.”
그들은 도현이 씨드를 복용했다고 믿고 있었다.
가라앉는 언덕을 바라보던 그들은 몸을 돌려 다시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율리비어스와 쌍둥이 검객이 떠나고 홀로 남은 탑주는 악귀 같은 얼굴로 도현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마법을 사용해도 도현의 강력한 호신강기와 그의 빠른 몸놀림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냉정한 눈빛으로 다가오는 도현의 모습에 힘이 빠진 탑주는 괴성을 질렀다.
“죽어라!”
탑주의 지팡이가 밑으로 내려가자, 도현을 향해 하늘에서 거대한 얼음 망치가 쏜살같이 떨어졌다.
호신강기로 얼음 망치를 튕겨 버린 도현의 몸이 흐릿해지더니 어느새 탑주의 옆에 나타났다.
“이건 케일 경의 목숨값이다.”
도현의 검이 번개처럼 탑주의 팔을 스쳐 지나갔다.
툭.
지팡이를 든 탑주의 팔이 땅으로 떨어졌다.
“크악!”
잘린 탑주의 팔에서 굵은 핏방울이 비처럼 쏟아졌다.
퍼억.
도현의 발길질에 언덕 아래로 굴러간 탑주는 몸이 호수의 물에 반쯤 잠겼다.
“네까짓 용병 놈에게 내가 당하다니, 크크크. 씨드를 먹더니 강한 척을 하는구나.”
탑주의 비웃음에 도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래로 내려간 그는 망설임 없이 탑주의 등에 검을 꽂았다.
세타이움 장검이 등을 통해 심장을 관통했다. 고통에 몸을 부르르 떠는 탑주에게 도현이 한쪽 무릎을 꿇고 말했다.
“강한 척을 하는 게 아니야, 실제로 강해진 거지.”
“그, 그때 네놈을 죽였어야…… 허억!”
대륙에서 손꼽히던 강자인 얼음탑주는 자신의 죽음이 믿어지지 않는지 눈을 크게 치켜뜨고 죽음을 맞이했다.
검을 회수한 도현은 발로 탑주의 어깨를 밀었다.
한쪽 팔을 늘어뜨린 채 엎드려 죽은 탑주는 호수의 물살 속에 휘말려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쿠웅!
언덕이 크게 흔들리며 또다시 호수 물이 차올랐다. 섬의 다른 곳은 거의 대부분 물에 잠긴 지 오래였다.
“서두르자.”
탑주를 상대하느라 시간을 소비한 도현은 놀랍도록 가벼운 몸동작으로 언덕 정상의 샘을 향해 달려갔다.
샘에 도착한 그는 은은한 서기에 감싸인 작은 나무를 조심스럽게 파냈다.
“아! 뿌리가 삽시간에 썩어 버렸어!”
도현이 나무를 캐내는 순간, 잔털이 난 뿌리 부위가 시커멓게 색이 변해 악취를 뿜어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나무줄기까지 타고 오르며 나무 전체를 썩게 만들려 했다.
싹둑.
번개처럼 빠른 검으로 나무의 중간을 쳐 낸 도현은 그때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나무 전체가 악취를 내며 썩어 버릴 뻔했다.
“반도 못 살렸군.”
팔뚝만 한 길이로 줄어든 씨드 나무를 마법 주머니에 넣어 보관한 도현은 지체 없이 몸을 날렸다.
‘이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는데…….’
씨드 나무가 있는 샘물에서 엄청난 힘을 흡수한 도현은 미소를 지을 수가 없었다. 로나를 위한 씨드를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회오리치는 섬 주변의 물살을 날듯 통과해 물 위를 한동안 달리던 그는 수십 미터 떨어진 곳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동료들을 발견했다.
“도현!”
뗏목 위의 리타가 손을 흔들었다.
쉬이이익.
물 위를 미끄러지듯 이동한 도현은 사뿐히 뗏목 위에 올랐다. 물을 평지 밟듯 달려온 그의 대단한 움직임에 사람들은 거듭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그래, 어떻게 됐어?”
짐브리오가 급히 물었다.
도현은 짐브리오를 비롯해 딘과 리타를 차례로 둘러보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씨드 나무는 발견했지만…… 씨드는 없었습니다.”
“뭐?”
짐브리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도현은 거인의 언덕에서 벌어진 일에 관해 자세히 설명해 주며 마법 주머니 안에서 씨드 나무를 꺼냈다.
뿌리도 없고 몸통만 있는 나무였지만 은은한 서기는 그대로 남아 있어서 범상치 않은 나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잘했다. 이거라도 가지고 가서 어떻게 손을 써 보자. 수고했어.”
짐브리오는 미안해하는 도현의 등을 두드리며 애써 미소를 보였다.
“아무래도 씨드 나무에 열린 씨드가 샘물에 떨어졌던 것 같습니다. 그 물에서 제가 힘을 흡수한 것 같고요.”
도현은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온 기운이 씨드의 기운이 아닌지 의심이 됐다. 그래서 더 미안했다.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네.”
딘이 노를 저으며 말했다.
“그리고 설사 그렇다 해도 자네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잖은가? 자넨 최선을 다했으니 미안해할 이유가 없어. 오히려 거인과 강자 들 사이에서 씨드 나무라도 구해 왔으니 칭찬받을 일이지.”
“맞아, 도현. 이 씨드 나무도 대단해 보이니까 로나의 병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야.”
리타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말했다.
“섬에서 있었던 일은 더 이상 신경 쓰지 말고 이거나 마셔라.”
짐브리오는 리타가 마법 주머니에서 꺼내 준 술을 도현에게 권했다.
도현이 그동안 얼마나 노력해 왔는지 옆에서 지켜봤기 때문에 씨드가 없어서 속상한 건 도현이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다는 것을 짐브리오는 잘 알고 있었다.
술병을 받아 든 도현은 술을 크게 몇 모금 마셨다.
“로나에게 돌아가죠.”
뗏목 뒤에 자리 잡은 도현이 손바닥으로 호수의 물을 때리자 물기둥이 하늘로 솟구쳤고, 뗏목이 좌우로 흔들리며 앞으로 빠르게 나아갔다.
얼마 뒤, 거인의 섬은 호수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이디언! 이디언!”
적발 거한 칼라치는 해일처럼 밀어닥친 호수의 물에 폐허로 변한 숲 일대를 미친 듯이 헤매고 다녔다.
배가 산더미 같은 물에 휩쓸려 두 조각이 나면서 같이 타고 있던 이디언과 헤어지고 말았다. 숲으로 떠밀려 온 칼라치는 피눈물을 흘리며 이디언을 찾고 있었지만, 그녀의 생사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
“이디언! 제발 대답을 해 봐!”
호수의 범람으로 흙탕물이 무릎까지 차오른 숲에서 사람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어쩌면 이디언은 숲까지 밀려온 게 아니라 저 깊은 호수 어딘가에 잠겨 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자 칼라치는 세상이 노랗게 보이며 현기증이 밀려왔다.
아침까지만 해도 섬에서 반드시 씨드를 얻자고 다짐을 하며 웃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찢어지고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을 뽑아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디언!”
절규하듯 외친 칼라치가 흙탕물에 엎드려 낮게 오열했다. 차가운 그의 가슴에 뜨거운 불꽃을 안겨 준 이디언은 이렇게 가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또다시 찾아올 고독하고 외로운 시간이 두려워진 칼라치는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났다.
저 멀리 섬이 가라앉고 있는 게 보였다. 씨드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어젯밤에 뜨겁게 불살랐던 그녀와의 사랑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이디언, 어디 있소!”
“칼라치!”
근처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칼라치는 번개처럼 소리가 들린 쪽으로 달려갔다.
그곳엔 헬구스가 물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창백한 낯빛을 보니 익사를 간신히 면한 모양이었다.
쿨럭거리던 헬구스는 실망한 얼굴로 서 있는 칼라치를 올려다봤다.
“얼굴이 왜 그런가? 내가 반갑지 않나?”
“이디언은?”
“이디언? 자네와 같이 있던 게 아닌가? 물이 덮쳤을 때 자넨 이디언 손만 꽉 잡고 있었잖은가.”
“물속에서 놓쳤어.”
“저런!”
헬구스는 걱정 깊은 얼굴로 쉬고 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쩐지 이디언 이름을 애타게 불러서 이상하다 했지. 같이 찾아보세.”
“부상을 입은 것 같은데, 괜찮겠나?”
허벅지에서 흘러내리는 헬구스의 피를 보며 칼라치가 말했다.
“움직이는 덴 지장이 없네. 어서 찾아보세. 숲의 검은 악령이 이디언을 해칠 수도 있으니까.”
“자넨 이디언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나?”
칼라치가 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둘은 같이 죽자고 맹세한 사이가 아닌가? 자네가 살아 있으니, 그녀 또한 살아 있겠지.”
헬구스의 말에 칼라치는 힘이 다시 샘솟는 것 같았다.
“카샨이 씨드를 단념하고 돌아섰을 때 내가 포기했다면, 이디언은 괜찮았겠지?”
“이제 와서 그런 소리를 해서 뭐하나? 이디언도 자네처럼 씨드를 찾는 데 적극적이었잖아.”
“나를 위해서였지.”
칼라치는 흙탕물에 떠 있는 익사한 얼음탑 마법사를 보며 굵은 저음으로 말했다.
“하긴,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었지. 그년, 자넬 진심으로 사랑한 것 같으니까. 내게도 한때 그런 여자가 있었는데…… 다크캐슬까지 날 쫓아와 매달렸던 아름다운 여자가.”
눈빛이 몽롱해진 헬구스는 부러진 나무에 발이 걸린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험, 난 이쪽을 찾아볼 테니, 자넨 밑을 찾아보게.”
“그러지.”
헬구스는 한 손에 검을 뽑아 든 상태로 숲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거인 한번 구경하려고 여기까지 따라왔는데, 거인은 구경도 못 하고 물만 실컷 마셨네. 퉤엣!”
입안에 달라붙어 있던 이물질을 뱉어 낸 그는 으스스한 느낌이 묻어나는 숲 안쪽을 경계하며 물이 찬 곳까지만 길게 둘러봤다.
호수의 물에 떠밀려 왔다면 물이 있는 어딘가에 걸려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애석하게 호수에서 죽었군. 돈은 내가 가지고 가겠네.”
살이 퉁퉁 불어 죽은 얼음탑 마법사의 품 안을 뒤적인 그는 귀중품을 꺼내 주머니에 넣은 후 뒤돌아서다 몸이 굳어졌다. 백발의 여마법사 샤비엔다가 기척 없이 나타나 소름 끼치는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감히 얼음탑 마법사의 물건을 훔치다니.”
헬구스는 살기를 띤 샤비엔다의 눈빛에 긴장이 돼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마법 구조물을 짓는 현장에서 샤비엔다를 멀찍이서 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카샨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만큼 무서운 마법사였다. 칼라치 말로는 탑주 다음으로 강한 마법사가 그녀라고 했으니, 고양이 앞에 쥐처럼 헬구스는 몸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미, 미안하오. 돌려 드리리다.”
헬구스가 주섬주섬 귀중품을 꺼내 놓으려 하자, 샤비엔다는 어이가 없었는지 코웃음을 쳤다.
“감히 나랑 장난을 치자는 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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