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1] 디 임팩트 16권 16화
“그럼 어떡하면 좋겠소?”
“그냥 죽어라.”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헬구스는 옆으로 몸을 굴렸다.
쩌어엉.
그가 있던 곳이 새하얗게 얼어서 햇빛을 반사했다.
“죽은 놈의 물건을 가진다 해서 나를 죽이려 하다니! 내가 그를 죽였나!”
“시끄럽다, 이놈!”
“못된 할망구 같으니!”
“이놈!”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샤비엔다는 흙탕물을 튀기며 도망가는 헬구스의 몸을 얼음덩어리로 만들어 버리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마법을 사용하기 직전 입으로 피를 토하며 주저앉았다.
‘응?’
도망치려던 헬구스는 주저앉은 샤비엔다의 뒷모습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앞은 정상이었지만 등은 장기가 보일 만큼 심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여기에 오기 전 누군가와 심하게 다툰 모양이었다.
“하아, 하아, 가까이 오너라!”
“싫소. 날 죽이려 하는 게 아니오.”
“지금 도망가면 내 몸 상태가 이래도 널 단숨에 죽일 수 있다. 하지만 가까이 오면 널 살려 주겠다.”
“왜 가까이 오라는 거요?”
헬구스는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네게 부탁할 게 있어서다.”
“거기서 말하시오, 잘 들리니.”
샤비엔다는 헬구스를 표독스럽게 노려보다가 크게 기침을 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네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얼음탑주에게 이 말을 꼭 전해 줬으면 한다.”
“얼음탑주에게 말이오?”
“그래, 드비오가 샤비엔다를 기습해 죽였다고 말을 전해라. 샤비엔다는 바로 나다.”
그녀는 자신이 살 수 없는 부상을 당한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죽더라도 이 억울함을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얻는 게 뭐요?”
“내가 죽으면…… 내 물건을 가지고 가라. 돈을 좋아하는, 뚱뚱한 녀석아.”
잠시 헬구스를 노려보던 그녀는 울컥울컥 피를 토해 내더니 힘없이 흙탕물 속으로 쓰러졌다.
첨벙.
물을 사방으로 튀기며 물속에 몸을 처박은 샤비엔다를 한동안 지켜보던 헬구스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녀의 몸을 뒤집어 봤다.
“죽은 얼굴도 무섭게 생겼군.”
헬구스는 그녀의 품을 뒤져 묵직한 금화 주머니를 챙겼다.
“안됐지만 당신 부탁은 못 들어주겠소. 사람을 잘 보고 부탁해야지.”
그래도 한 가닥 미안함은 있었는지 헬구스는 그녀의 시체를 끌어다 물이 없는 숲 안쪽에 던져 놓았다.
“물속보다는 그곳이 나을 거요.”
“이봐.”
“아이고 깜짝이야.”
헬구스는 기겁을 하며 뒤를 돌아봤다. 이번엔 또 누군가 싶었다.
“어라, 당신은?”
“오랜만이로군. 도현에게 이야기는 들었다.”
짐브리오가 알은척을 했다.
다크캐슬의 감옥에서 짐브리오에게 구함을 받은 헬구스는 그를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반갑소.”
웃으며 인사를 한 헬구스는 뒤에 서 있는 세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도현이 서 있었고, 처음 보는 어린 소녀와 중년 남성도 서 있었다.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도현의 물음에 헬구스는 머리를 긁적였다.
“물에 빠진 이디언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녀를 찾아다니고 있었네. 그러다 뭐 짭짤하게 부수입도 올리고 있었고.”
“저 여자는 샤비엔다 아닙니까?”
“험, 맞네. 드비오란 작자에게 기습을 받아서 죽었다고 탑주에게 알려 달라는 괴상한 부탁을 하며 내 앞에서 죽더군.”
“그렇군요.”
도현은 샤비엔다의 시신을 잠시 바라보다가 짐브리오에게 말했다.
“짐브리오, 헬구스에게 그녀를 넘겨주십시오.”
“갈 길이 바빴는데 잘됐군. 헬구스, 받으시오. 당신이 찾던 여자니까.”
짐브리오는 호수에서 발견한 이디언을 헬구스에게 넘겼다. 정신을 잃은 그녀는 가늘게 숨을 쉬고 있었다.
“이 여자를 당신들이 어떻게?”
“호수에서 죽어 가던 걸 도현이 구해 온 거요. 배에 찬 물을 빼 놨으니까 죽진 않을 거요.”
이디언을 품에 안은 헬구스는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지 바로 길을 떠나려는 도현에게 서둘러 물었다.
“혹시 섬에 다녀왔나?”
“네. 칼라치는 섬에 안 보이던데, 이디언 때문에 오지 않은 겁니까?”
대충 전후 사정을 파악한 도현이 걸어가며 말했다.
“그렇다네. 섬은 잘 다녀왔나?”
많은 것을 함축한 그의 질문에 도현은 가볍게 미소를 짓기만 했다.
“지금은 바쁘니 언제고 기회가 되면 길게 얘기를 나누죠.”
헬구스는 궁금한 게 많았지만 뭔가 사정이 있어 보이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잘 가게.”
“몸조심하십시오, 헬구스.”
도현과 그 일행이 물이 없는 숲에서 속도를 내며 사라지자, 이디언을 안고 서 있던 헬구스는 목청을 가다듬고 칼라치를 찾았다.
“칼라치! 이디언을 찾았네! 어디 있나, 칼라치!”
갈모아티
로나는 다행히 그들이 도착할 동안 무사히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불덩이 같은 그녀의 몸은 식을 줄 몰랐고, 음식을 입에 넣기도 힘겨워했다.
조촐한 저녁상이 차려진 식탁 앞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도현이 구해 온 씨드 나무의 처리를 두고 여러 의견을 나누었다.
“대장, 한시가 급하니 저걸 즙으로 만들어서 먹여 봅시다.”
짐브리오의 말에 리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저걸 갈아서 물에 타서 먹여야 할지도 몰라. 저 나무껍질 자체가 약일 수도 있잖아.”
“그럼 즙도 먹여 보고 껍질을 갈아서 먹여 보기도 하고, 동시에 하면 되지.”
“그럴까?”
짐브리오의 주장에 리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씨드 나무로 보이는 저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로나의 병에 효과가 있는지조차도 불분명했고. 다만, 신비로운 씨드를 만들어 낸 나무이니 한 가닥 기대를 거는 마음이었다.
“약도 잘못 사용하면 독이 되는 법이지.”
짐브리오와 리타의 얘기를 듣고 있던 어베인이 생각 깊은 얼굴로 말했다.
“그 말뜻은 잘 알겠지만, 지금은 가릴 처지가 아니잖습니까, 대장. 그리고 명색이 씨드 나무인데 뭘 하든 독이 되지는 않을 것 아니오.”
“씨드 나무는 지금 우리가 걸 수 있는 최후의 희망이야. 씨드 나무가 어떤 신비로운 효능이 있다면, 그것을 잘 살릴 만한 방법을 써서 로나를 치료해야 돼.”
“그 의견에 동조하는 바요.”
조용히 식사를 하던 딘이 천으로 입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급할수록 신중해야 하는 법이니, 어설프게 씨드 나무를 사용하지 맙시다.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기는 게 좋을 것 같소.”
“누구에게 말이오?”
짐브리오가 술을 한 모금 하며 물었다.
“브링틱엔 약재를 잘 다루는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네. 심지어 몬스터까지 길들일 정도로 말이야. 찾아보면 씨드 나무의 효능을 가장 잘 이끌어 낼 사람이 있을 거야.”
“말은 쉽군. 그들이라고 씨드 나무를 본 적이 있겠소? 거기서 거기겠지. 그리고 그들을 어떻게 믿겠소?”
“톨리핀은 어떻습니까?”
도현의 말에 어베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마침 그를 생각하고 있었네.”
톨리핀은 뛰어난 의술을 겸비한 약초꾼 노인으로, 예전에 도현이 어베인 일행을 크샤코 가문의 감옥에서 구해 올 때 같이 구해 줬던 사람이다.
“나와 로나가 고문을 당해 크게 다쳤을 때, 그는 단시간에 우릴 회복시켜 줬네. 그때 본 그는 여러 약초에 해박한 사람이었어. 그 정도 실력이면 믿고 맡길 만하지 않겠나? 우리와 인연도 있고.”
어베인의 말에 짐브리오는 턱을 매만졌다.
“그 노인의 실력이 뛰어나긴 했죠. 음…… 하지만 로나의 몸 상태가 저리 안 좋은데, 톨리핀에게 언제 가서 약을 만들어 달라고 합니까?”
“그게 문제인데…….”
“제가 로나를 업고 가겠습니다.”
“자네가?”
도현이 나서자 사람들이 모두 그를 쳐다봤다.
“제가 전력을 다해서 가면 이틀 안에 톨리핀의 산속 거처까지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가다가 로나의 몸 상태가 정말 안 좋아진다면, 그 자리에서 씨드 나무의 즙을 먹이든 갈아서 먹이든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전까지 그녀가 무사하다면, 톨리핀의 손에 씨드 나무를 맡겨 보도록 하죠. 어떠십니까?”
“톨리핀의 거처는 고대 도시를 지나 한참을 더 가야 하는데, 정말 이틀 안에 도착할 수 있겠나? 너무 무리하는 게 아닌가?”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한 사람을 업고 그 먼 거리를 그 짧은 시간 안에 도착하는 건 거의 불가능할 것 같았다. 설사 가능하더라도 몸에 굉장한 무리가 갈 수도 있었다.
“해 보겠습니다. 로나의 목숨이 걸린 일이니까요.”
도현은 시간을 아끼기 위해 저녁을 먹은 후 바로 출발 준비를 했다.
“힘들더라도 조금만 참아요.”
로나를 등에 업은 도현이 고개를 살짝 돌려 말했다. 로나의 몸은 너무도 뜨거워서 도현의 등이 후끈할 정도였다.
“괜찮……겠어요?”
들릴락 말락 하는 목소리로 로나가 걱정을 담아 말했다.
거인의 섬에서의 일을 모두 들은 그녀는 도현이 씨드 나무를 가지고 약초꾼 노인 톨리핀에게 최대한 빨리 가려고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 몸에서 나오는 열기가…… 당신을 상하게 할 수도 있어요.”
“괜찮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로나는 내가 톨리핀의 집까지 가는 동안 버텨만 주면 됩니다. 알았어요?”
도현의 믿음직스러운 말에 로나는 마른 미소를 지으며 그의 등에 머리를 기댔다.
“알았어요.”
로나의 몸을 천으로 단단히 고정시킨 도현은 주위에 서 있는 동료들에게 말했다.
“먼저 가서 기다리겠습니다. 조심해서 오십시오.”
“그래, 우리도 바로 출발할 테니 톨리핀의 집에서 보자.”
짐브리오는 도현의 등에 업혀 있는 로나의 눈을 보며 씨익 웃었다.
“로나야, 우리 또 보자. 씨드 나무가 널 치료해 줄 거야.”
“그래요.”
로나는 동료들과 짧은 작별 인사를 나눈 뒤 마지막으로 밤낮으로 간호를 해 준 리드만 사제를 쳐다봤다.
“고마웠습니다, 사제님. 일곱 신의 가호로 제가 여기까지 버틴 것 같아요.”
“가는 길도 일곱 신께서 지켜 주실 테니까, 걱정 말고 가서 기다리게. 우린 또 만날 수 있을 거야.”
자애로운 리드만 사제의 미소에 로나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사제님.”
마법 구조물을 짓고 떠난 크샤코 가문의 일꾼들과 병력은 숲과 들판이 만나는 지점에 야영을 하고 있었다.
거대한 도끼를 든 5미터급 전투 몬스터 하이드로우 수십 마리가 야영지 주변을 돌아다니며 보초를 서고 있어서 야영지는 비교적 안전했다.
“씨드는 어떻게 됐을까?”
천막에서 잠을 청하던 카샨은 거인의 섬에서의 일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뒤척이던 그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챙겨 입고 천막 밖으로 나섰다.
일꾼들뿐만 아니라 병사들까지 마법 구조물을 짓는 일에 동원돼 호된 노동을 해서인지 순찰을 도는 병사들은 피곤에 찌들어 있었고, 얼굴도 홀쭉하게 변해 있었다.
‘입단속을 해도 소용없겠지?’
2천 명이나 되는 일꾼들과 병사들의 모든 입을 단속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가문으로 돌아간 이튿날이면 아마도 두 원로들의 귀에도 그들이 무슨 일을 하고 돌아왔는지 정보가 들어갈 것이다.
뭐 그래도 상관없다. 그들이 관심을 가졌을 땐 이미 탑주와 쌍둥이 검객, 율리비어스가 거인의 섬에서 어떤 식으로든 결판을 지었을 테니까.
‘칼라치와 함께 끝까지 씨드를 노려 볼 걸 그랬나?’
카샨은 갈등 끝에 씨드를 단념하고 차기 탑주 자리에 만족하기로 한 자신의 선택이 현명했다는 걸 모르진 않았다. 거인의 섬에서 탑주나 다른 강자들을 상대할 실력이 자신에겐 없다는 게 명확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에선 아쉬움이 사라지지 않았다. 저들이 씨드를 두고 싸우다가 공교롭게도 네 명 모두 치명상을 입고 힘을 못 쓰는 경우가 발생하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말이다.
“이미 늦은 일. 앞으로가 중요하다. 돌아가서 탑주 자리를 인정받고 고대 마법을 배워 강해진다. 씨드는 또 이 대륙 어딘가에서 나타날 수 있으니까. 그땐 내가 씨드를 차지하고 말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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