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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임팩트-392화 (392/575)

[392] 디 임팩트 16권 17화

뒷짐을 진 상태에서 주먹을 으스러져라 쥔 그는 우연히 야영지 바깥쪽으로 시선이 갔다. 그쪽은 들판이었는데 뭔가가 빠르게 지나쳐 간 느낌이었다.

‘잘못 봤나?’

고개를 갸웃한 카샨은 얼음 늑대를 소환해 들판 쪽으로 달려갔다.

상당히 넓은 들판 위에 달빛이 쏟아지고 있었고 쥐죽은 듯 고요했다.

조금 전에 누군가가 이쪽으로 지나갔다면 아직 이 들판 위에 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몬스터든.

‘씨드 때문에 내가 너무 민감해 있었나 보군.’

카샨은 얼음 늑대의 방향을 돌려 야영지로 돌아갔다.

물 흐르듯 달린다는 말은 지금 도현을 뜻하는 듯했다. 산 하나를 넘어온 도현은 숲을 지나 크샤코 가문이 야영하는 들판의 옆을 일절 소리 내지 않고 부드럽게 지나쳤다.

씨드 나무의 샘에서 엄청난 힘을 흡수한 후, 그의 전신은 의지에 따라 깃털처럼 가벼워지기도 하고 때론 쇳덩이처럼 묵직하게 변하기도 했다. 로나를 업고 엄청난 속도로 달리면서도 별다른 소음을 내지 않았던 이유는 전신을 깃털처럼 가볍게 만든 뒤, 숙련된 그의 신법을 발휘하여 달렸기 때문이다.

도현이 지나간 자리는 사박거리는 소리만 잠시 맴돌다 사라질 정도로 아주 조용했다. 게다가 빠르기도 빨라서 로나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뜨면 어느새 새로운 환경이 펼쳐져 있었다.

도현은 조금 전 지나쳐 온 들판을 힐끔 뒤돌아봤다.

‘카샨이 있었어.’

매의 눈을 가진 도현은 빠르게 달리면서도 순간적으로 야영지 안에 있던 카샨을 놓치지 않았다.

‘다음에 찾아가도록 하지.’

탑주의 목숨을 취한 도현은 다음 상대로 카샨을 찍어 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로나와 함께 톨리핀의 집으로 가는 게 더 중요한 상황이기 때문에 그대로 지나친 것이다.

“힘들지 않아요?”

로나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깼어요?”

“네. 힘들지 않아요?”

로나가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괜찮아요. 그보다 불편하면 말해요. 잠시 쉬어 가도 되니까요.”

말을 하면서도 도현의 두 다리는 부지런히 움직였다.

로나는 귓속으로 들어오는 바람 소리가 꼭 태풍이 오는 날 들리는 강한 바람 소리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도현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빨리 달리고 있는 것이다.

톨리핀은 산속 통나무집 앞에서 약초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그늘에 말린 약초에서 향이 솔솔 올라와 그의 코를 자극했다.

“잘 말랐군.”

약초 냄새만 맡아도 상태가 어떤지 구분할 수 있는 그는 더 이상 말리지 않고 나무를 짜서 만든 통에 말린 약초를 몽땅 쓸어 넣었다.

그는 약초가 든 나무통을 약초들을 보관하는 작은 창고에 넣은 후 밖으로 나왔다.

날이 흐린 게 비가 올 것 같았다.

“오랜만에 비가 오겠어.”

그는 비가 올 때만 제 효과를 내는 약초를 캐기 위해 비를 막아 주는 가죽 겉옷을 걸치고 호미와 가방을 준비했다.

쿠쿵!

천둥이 몇 번 치더니 비가 후두두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그는 시원한 빗소리를 들으며 집을 나서려 했다. 하지만 비를 뚫고 불쑥 나타난 건장한 사내의 등장에 발목이 붙잡혔다.

“안녕하셨습니까.”

도현의 인사에 톨리핀의 눈이 커졌다.

“아니, 자네는?”

“그동안 별일 없으셨습니까?”

“인사는 나중에 하고 안으로 들어가세. 자네 등 뒤의 사람이 심상치 않아 보이는군.”

한눈에 도현의 등에 업혀 있는 로나의 몸 상태를 알아본 톨리핀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도현은 그를 따라 통나무집으로 들어가 바닥에 깔린 털가죽 위에 조심스럽게 로나를 눕혔다.

‘다행이야, 로나가 버텨 줘서.’

망각의 숲에서 고대 도시를 거쳐 톨리핀의 집까지 오는 그 먼 거리를 단 이틀 만에 주파한 도현은 두 다리가 부서질 것처럼 아팠다.

엄청난 육체적 능력과 내공의 힘을 가졌다지만, 그도 인간인 이상 지치고 힘이 들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업혀 있는 로나에게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서 더욱 신경을 썼기 때문에 몸의 피로가 가중됐다.

“도현…….”

로나는 눈빛으로 도현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밤낮없이 잠 한숨 자지 못하고 극한의 속도로 달려온 도현의 몸 상태가 어떨지 짐작이 됐다.

힘없는 눈빛으로 도현을 잠시 바라보던 그녀는 눈동자를 돌려 익숙한 얼굴의 노인에게 초점을 맞췄다.

몇 달 만에 만난 톨리핀에게 뭔가 말을 할 듯 입모양을 만들던 그녀는 결국 제대로 된 인사를 건네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톨리핀의 주름진 얼굴에 안타까운 빛이 흘렀다.

감옥에서 고문을 당한 로나와 어베인을 치료해 줬던 그는 당시 로나의 집안 사정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대대로 알 수 없는 병으로 단명한다는 여자들의 운명.

그의 능력으로 어떻게 할 방도가 없어서 그저 로나가 스스로 병을 극복하고 오래 살기만을 바랐었다. 한데 결국 이렇게 죽어 가는 모습으로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결국 몹쓸 병이 닥쳐온 것이로군.”

“이것을 봐 주십시오.”

정신을 잃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로나를 내려다보던 톨리핀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은은한 서기가 감도는 팔뚝만 한 크기의 나무가 도현의 손에 들려 있었다.

약초에 민감한 톨리핀의 코가 본능적으로 벌렁거렸다.

“허어, 이런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는 나무는 처음이로군.”

“향기가 납니까?”

도현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를 비롯해 동료들은 이 나무에서 아무런 향도 맡을 수 없었다. 그런데 톨리핀은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아주 깊고 그윽한, 맑은 향이 흘러나오는군. 한번도 맡아 보지 못한 깨끗한 향이야. 이건 대체 어디서 구한 건가?”

약초는 물론 식물에도 해박한 지식이 있는 톨리핀이지만, 본 적이 없는 나무였다.

은은한 서기가 감도는 것을 보니 매우 진귀한 물건임이 틀림없었다.

도현은 톨리핀에게 이것이 씨드 나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설명해 주었다. 이 나무를 약재로 사용하는 데 참고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도현의 설명에 크게 놀란 톨리핀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의 손에 들린 나무를 내려다봤다.

“어쩐지 평생 맡아 본 적 없는 깨끗한 향을 풍긴다 했더니, 그런 것이었군. 그래, 그것으로 로나의 병을 치료해 보고 싶다고?”

“네, 이게 로나에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믿을 건 당장 이것밖에 없어서요. 이 나무가 로나에게 약이 되도록 힘을 써 주시겠습니까?”

도현이 씨드 나무를 내밀며 톨리핀의 눈을 바라봤다. 잠시 시선을 주고받던 그는 천천히 도현이 내민 씨드 나무를 받았다.

“이 나무가 보통 나무가 아니라는 건 풍기는 향만으로도 알 수가 있었네. 하지만 로나의 병을 치료해 줄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가 없네.”

“결과에 원망을 품진 않겠습니다. 그런 생각을 가졌다면 애초에 여기로 오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부탁드립니다.”

“음.”

톨리핀은 고개를 돌려 몸에서 강한 열기를 내뿜는 로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자신을 찾아온 이들에게 실망감을 주긴 싫었지만 결과는 예측하기 어려웠다.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약초의 효과를 최대한 끌어내는 데는 탁월한 사람이네. 씨드 나무가 가지고 있는 범상치 않은 기운을 끌어내 약으로 만들어 보겠네.”

“감사합니다.”

도현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지만 자네의 도움이 필요하네. 지금도 로나는 위독한 상태지만, 내가 보기에 며칠 뒤엔 진짜 큰 위험이 닥칠 것 같아. 그 전에 씨드 나무를 약으로 만들어야 해.”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먼 거리를 달려오느라 피곤했지만 도현은 바로 움직일 것처럼 물었다.

“갈모아티가 필요하네. 그것이 있으면 씨드 나무를 약으로 만드는 시간을 며칠은 단축시킬 수 있어. 없어도 씨드 나무를 약으로 만들 수 있지만, 그만큼 시간이 오래 걸려 자칫 로나가 약도 써 보지 못할 수도 있네.”

듣고 보니 갈모아티라는 게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

“갈모아티가 뭡니까?”

“약을 달이는 그릇이네. 약탕기지.”

“약탕기요?”

도현의 시선이 문가로 향했다. 그곳엔 차갑게 식어 있는, 높이 30센티 정도의 은색 용기가 놓여 있었다.

예전에 이곳에 방문했을 때 톨리핀은 저 약탕기에 온갖 약초를 넣고 화로에서 달이고 있었다.

“갈모아티는 저런 일반 약탕기와는 다르네. 약효를 쉽게 뽑아내는 장점이 있지. 그래서 오래 달이지 않아도 돼. 결론적으로 약의 제조 시간이 굉장히 단축되지.”

“그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가지고 있지 않으신 걸 보면, 구하기 어려운 물건인가 보군요.”

“그렇다네. 상점에서 구할 수 없는 특별한 물건이야. 브링틱에는 아마 그 물건이 단 한 개만 존재할걸.”

“예?”

도현은 그 희소성에 깜짝 놀랐다.

“그럼 그 한 개를 제가 구해 와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불행히도 그런 셈이지. 위험할 수도 있고.”

톨리핀이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괜찮습니다. 그 위치만 알려 주십시오. 제가 구해 오겠습니다.”

“갈모아티는 튜샨 가문의 원로 베노아가 가지고 있을 거네.”

“아, 그가 가지고 있었군요.”

도현은 살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브링틱의 지배 구조를 알고 있었다. 세 가문의 수장들이 각기 원로가 되어 원로 회의를 통해 브링틱을 지배했다.

그들을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그 이름은 여러 번 들었다.

“원래 갈모아티는 내 물건이었네. 약초꾼 집안인 우리 선조 중 한 분이 어디선가 구해 오신 물건인데, 그자가 강제로 빼앗아 갔지. 한 10년은 된 것 같군.”

“그렇군요.”

“내 물건을 되찾아 달라는 요구 같아 민망하네만, 그런 의도는 전혀 없다는 것만 알아주게.”

“알고 있습니다. 갈모아티는 어떤 모양입니까?”

톨리핀에게 갈모아티의 외관을 설명 들은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겠습니다. 갈모아티를 구해 오죠.”

“잠깐, 이거라도 마시고 가게.”

톨리핀은 방 안에 있는 주전자에서 검은 물을 따랐다.

“마시게. 몸의 피로가 좀 가실 거야.”

“감사합니다.”

도현이 쓴 한약 같은 물을 마실 동안 톨리핀은 약재가 있는 창고에서 상쾌한 향이 우러나오는 말린 꽃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는 그것을 로나의 머리맡에 두었다. 그러자 몸에서 나는 열기에 괴로워하던 로나의 표정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습니다.”

“말하게.”

“크샤코 가문의 감옥엔 왜 갇혀 있었던 겁니까?”

“내가 말해 주지 않았나 보군.”

톨리핀은 얼마 남지 않은 흰 머리카락을 긁적이며 도현을 향해 돌아섰다.

“전투 몬스터를 길들일 때 들어가는 약초가 있네. 그것을 내가 그들에게 팔았는데, 몬스터 몇 마리가 잘못돼 죽었다네. 그 죄목으로 감옥에 갇혔지.”

“책임이 있었던 겁니까?”

“책임은 무슨, 훈련시키는 자들 잘못이지. 난 잘못 없어.”

그는 확신을 갖고 말했다.

“궁금증이 풀렸나?”

“네, 다녀오겠습니다.”

도현은 로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문을 열고 나갔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는데, 도현은 그 비를 맞으며 묵묵히 산 아래로 내려갔다.

‘10년 전에 빼앗아 간 물건을 지금도 그가 가지고 있을지 모르겠군.’

도현은 튜샨 가문의 베노아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발걸음을 빨리해 순식간에 산을 벗어나 브링틱 성으로 향했다.

브링틱 성의 저택에 머물고 있는 원로 베노아는 회랑을 걷다 문득 정원을 바라봤다. 그가 아끼는 정원수가 비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비 구경이나 해 볼까.”

“의자를 준비할까요?”

호위 무사 보링의 말에 원로 베노아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금 장식이 된 호화로운 의자가 회랑 복도 중간에 즉시 준비됐고, 베노아는 느긋한 얼굴로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의 주위엔 호위 무사 여섯 명과 시녀 두 명이 그의 감상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숨죽이고 서 있었다.

“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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