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 임팩트-393화 (393/575)

[393] 디 임팩트 16권 18화

“네, 원로님.”

칼 솜씨가 뛰어난 호위 무사 보링이 호랑이 얼굴로 묵직하게 대꾸했다.

“나는 평화롭게 지내고 싶은데, 크샤코 가문의 부자가 자꾸 나를 자극하는구나. 어떻게 생각하느냐?”

“명만 내려 주시면 제가 올라르와 카심의 목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되었다. 넌 내 곁에서 나를 지켜 줘야지.”

베노아는 정원에 내리는 비를 지그시 노려봤다.

카샨이 많은 일꾼과 병력을 이끌고 고대 도시 너머 북쪽 미개척 지역으로 들어간 지 한참이 지났다.

얼음탑주도 고대 왕궁의 발굴을 끝내고 카샨이 간 곳으로 추정되는 북쪽 미개척 지역으로 사라졌다.

대체 무슨 일을 꾸미는 건지 신경이 쓰이고 불안했다.

크샤코 가문의 장남 카심은 호전적인 녀석이고 버릇이 없어 올라르의 사후에 브링틱을 독차지하기 위해 무리수를 둘 수도 있다.

탐욕은 많고, 가지고 있는 것을 고맙게 느끼지 못하는 놈.

그것이 베노아가 지켜본 올라르의 장남 카심이었다.

그 혼자였을 땐 별문제가 없었지만, 20년 전 집을 나갔던 둘째 아들 카샨이 얼음탑주의 제자가 되어 돌아오면서 안심이 되지 않았다.

얼음탑은 대륙에 걸쳐 많은 마법사들을 보유하고 있고, 탑주는 대륙에서도 알아주는 마법사다. 카샨을 징검다리 삼아 얼음탑과 크샤코 가문이 연합하면 심각한 상황이 도래할 수도 있었다.

원로 히반과 이 문제를 두고 상의를 하고 있긴 하지만, 의심되는 상황만으로 행동에 나서기에는 아직은 명분이 부족했다. 게다가 평화로운 브링틱이 뒤집어질까 봐 선뜻 전쟁을 일으킬 수도 없었다.

“나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인데…… 몰라주는군.”

그는 시녀에게 손짓을 했다.

“파로야를 피워라.”

그의 지시에 시녀가 당황하며 허리를 숙였다.

“원로님, 파로야는 다 떨어졌습니다.”

“떨어져? 언제 말이냐?”

부작용이 없는 환각제 파로야가 없다는 말에 베노아의 음성이 높아졌다.

시녀가 몸을 떨 때 호위 무사 보링이 나섰다. 그는 귓속말로 말했다.

“원로님, 마지막 양을 아침에 사용하셨습니다.”

“내가? 난 기억이 없는데…….”

“물론 이런 사소한 일까지 기억하실 필요는 없지요.”

“흠, 생각해 보니 아침에 사용한 것 같군. 그래서 내가 뭐라고 말했지?”

보링은 아침의 일을 전혀 기억 못 하고 있는 것 같은 베노아의 모습에 살짝 표정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는 내색 않고 답했다.

“파로야 상인을 부르라 명하셨습니다.”

“그랬군.”

때마침 회랑 저편에서 파로야 상인이 나타났다.

“원로님, 저기 상인이 오고 있습니다.”

잠시 후, 상인이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저를 찾으셨다기에 출항을 늦추고 왔습니다.”

“기특한 사람이로군.”

“별말씀을요.”

원로의 칭찬에 상인은 겸손한 얼굴로 살짝 허리를 숙였다.

“내가 자넬 부른 건 파로야 때문이야. 지난번에 구입한 물건이 벌써 다 떨어졌어. 항구를 떠나기 전에 가지고 있는 물건을 몽땅 내게 팔고 가게.”

“예?”

“왜 놀라나, 물건을 사겠다는데 좋아해야지.”

“원로님, 죄송하지만 파로야는 더 이상 없습니다.”

베노아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없어?”

“예, 다 팔렸습니다.”

“고가의 환각제라서 쉽게 나갈 물건이 아닌데, 정말 다 팔렸단 말인가?”

거듭 확인하듯 베노아가 묻자, 상인은 긴장된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원로님. 한 사람이 찾아와 모두 구입해 갔습니다.”

“네 이놈!”

벌떡 의자에서 일어난 베노아는 노한 얼굴로 손가락질을 하며 말했다.

“감히 내가 사용할 물건을 남겨 두지 않고 모두 팔다니, 네놈이 죽고 싶은 게냐!”

“요, 용서해 주십시오, 원로님. 한 번에 많이 구입하셔서 오래 사용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걸 핑계라고 대느냐! 네놈을 당장!”

스르릉.

호위 무사 보링의 검을 뽑은 그는 검을 빠르게 휘둘렀다. 상인의 턱수염이 귀신처럼 잘려 나갔다.

“남부 대륙에서 넘어온 장사치 녀석을 내가 친히 만나 주고 거래까지 해 주었더니, 내가 우습게 보였느냐? 응?”

서늘한 검이 턱 밑에 와 있자 상인의 몸이 덜덜 떨렸다. 베노아의 눈에서 살기를 느낀 것이다.

브링틱에서 왕처럼 권력을 행사하는 베노아에게 죽어도 그를 위해 나서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이곳에서 만큼은. 그저 개죽음인 것이다.

“살려 주십시오, 원로님. 제가 지금 즉시 배를 띄워 남부 대륙으로 가, 파로야를 구해 오겠습니다!”

“네놈이 올 동안 파로야 없이 고통스럽게 지내란 말이냐?”

검이 턱 깊숙이 들어와 상인의 살갗을 살짝 베었다. 회랑 바닥에 붉은 피가 한 방울 떨어졌다.

“지, 지금 저를 죽이시면 분이야 풀리시겠지만, 파로야는 어, 어떻게 구하시겠습니까? 파로야 상인은 흔치 않습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베노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다가 천천히 검을 내렸다.

“누구냐, 네놈의 물건을 한 번에 다 사 갔다는 녀석이?”

“카샨입니다.”

“카샨? 크샤코 가문의 차남 카샨을 말하는 것이냐?”

깜짝 놀란 표정으로 베노아가 물었다.

“그, 그렇습니다. 배에서 물건을 구입해 갔습니다.”

“카샨이…… 약도 하나?”

베노아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는 보링에게 검을 돌려주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당장 항구로 달려가 배를 타고 파로야를 구해 와라. 두 달을 주겠다. 그 안에 오지 않을 시엔 네놈 목에 현상금을 붙이겠다.”

“감사합니다, 원로님.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죽다 살아난 상인은 핼쑥해진 얼굴로 병사들을 따라 회랑에서 멀어져 갔다.

상인이 사라지자 베노아는 의자 손잡이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카샨이 내 약을 다 사 가다니! 이 망할 녀석! 설마 일부러 그런 것인가?”

몸을 부르르 떨던 그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진정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쉽사리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당분간 파로야 없이 지낼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파로야를 안 해서 그런가? 헛것이 보이는군.’

의자에 머리를 기대 멍하니 비가 내리는 정원을 바라보던 베노아는 비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위에 사람이 서 있자 자신이 헛것을 본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호위 무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원의 나뭇가지 위에서 회랑을 바라보는 사내는 실제 사람이었던 것이다.

“원로님을 보호해라!”

암살자가 들어온 것이라 여겼는지 호위 무사 보링이 크게 외치며 호각을 불었다.

날카로운 호각 소리는 비바람을 뚫고 저택 내부로 빠르게 퍼져 갔다.

콰아앙!

비상시 동원되는 전투 몬스터 10여 마리가 저택의 담장을 부수고 나타났다.

크샤코 가문의 전투 몬스터들이 주로 도끼를 사용한다면, 튜샨 가문의 전투 몬스터들은 철퇴를 이용했다.

갑옷과 철퇴로 무장한 5미터급 하이드로우 전투 몬스터들이 정원을 가득 메우며 회랑 앞에 도열했다.

다다다다닥.

곳곳에 몸을 숨기고 있던 궁수 수십여 명도 정원에 침입한 사내를 향해 활을 겨눴고, 백여 명 가까운 중무장한 철갑병도 어느샌가 나타나 회랑 양쪽을 물샐틈없이 보호했다.

사전에 철저히 훈련이 됐는지 베노아를 보호하기 위한 일련의 대처는 무척 신속했다.

정원의 나뭇가지 위에서 그 모든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던 도현은 의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는 베노아에게 소리쳤다.

“베노아 원로! 난 당신을 죽이기 위해 온 게 아니요! 한 가지 물건을 되찾아가기 위해 왔을 뿐이오! 그것만 주면 순순히 물러가리다!”

정원에서 비를 맞으며 외치는 도현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시간에 쫓기는 입장인 도현은 갈모아티를 구하기 위해 질질 시간을 끌지 않았다.

예의와 기다림이 필요한 상황이 있고, 과감하게 나아가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지금은 후자였다.

회랑에서 도현의 목소리를 들은 베노아는 어이가 없었다. 많은 호위병과 전투 몬스터가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데, 침입자는 이들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모습이었다.

좋게 말하면 배포와 용기가 있어 보이고, 달리 말하면 겁 없이 들어온 미친 녀석인 것이다.

“보링, 물어보거라, 뭘 찾으러 왔는지.”

흥미가 생긴 베노아는 침입자를 공격하려는 병사들을 중지시키고 보링에게 지시를 내렸다.

“원로님, 제가 녀석을 잡아다 무릎을 꿇리겠습니다. 그때 녀석을 심문하시는 게 어떠십니까?”

“그러다 녀석이 먼저 죽기라도 하면 내 궁금증을 누가 풀어 주겠느냐? 홀로 여기까지 들어올 정도면 이미 죽음은 각오한 녀석 같으니, 번거롭게 하지 말고 물어보기나 해.”

“알겠습니다, 원로님.”

보링은 빗속의 정원수 위에 서 있는 도현을 향해 우렁차게 외쳤다.

“뭘 찾으러 왔다는 거냐!”

“갈모아티를 찾으러 왔소! 10년 전 약초꾼 노인에게서 빼앗아 간 약탕기 말이오!”

도현의 힘 있는 대답은 보링의 뒤에 서 있는 베노아의 귀에도 똑똑히 들렸다.

베노아가 잠시 생각에 잠겼을 때, 충성심 깊은 보링이 발끈하며 외쳤다.

“이런 건방진 놈! 감히 우리 원로님이 약초꾼의 약탕기나 빼앗을 분 같으냐! 그런 모욕적인 말을 지껄이다니!”

“보링, 조용하거라.”

“원로님, 더 두고 보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단칼에 녀석의 목을 베어 버리겠습니다!”

“사실이다, 오래전에 그런 일이 있었어.”

“예?”

보링은 머쓱한 표정으로 원로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것 때문에 왔다니, 의외야.’

베노아는 비가 더 거세지는 정원을 지그시 노려봤다.

10년 전쯤, 그의 아들이 죽어 갈 때 몸에 좋다는 온갖 약초를 다 사용했다. 그때 가문의 치료사 중 한 명이 약을 빨리 제조할 수 있는 약탕기를 가진 노인이 있다고 고했고, 그는 사람을 시켜 그 물건을 빼앗아 왔다.

그것이 갈모아티였다.

아들이 죽은 뒤, 그 물건은 먼지에 쌓인 채 어딘가에 처박혔을 것이다.

당시 아들을 치료했던 가문의 치료사들을 몽땅 죽여 분풀이를 했던 베노아는 그때 사용한 약탕기를 찾으러 왔다는 도현의 말에 옛 생각이 다시 떠올라 마음이 울적해지고 왠지 모를 분노가 끓어올랐다.

그에겐 더 이상 아들이 없었다.

크샤코 가문의 장남 카심 같은 한심해 보이는 놈이라도 내 아들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 적이 있을 만큼, 그는 아들을 잃은 아픔이 여전히 가시지 않고 있었다.

“원로님, 어떻게 할까요?”

침묵이 길어지는 원로를 향해 보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떠올리게 만드는구나.”

도현을 힐끔 쳐다본 베노아는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없애라.”

“예!”

원로의 지시가 떨어지자 보링이 호각으로 신호를 보냈다.

전투 몬스터들이 도현을 향해 짓쳐 들었다.

도현은 그를 무시하고 회랑을 걷고 있는 베노아의 옆모습을 차갑게 바라보다가 가볍게 몸을 띄웠다.

붉은 눈의 몬스터가 휘두른 거대한 철퇴가 도현이 좀 전까지 서 있던 나무를 처참하게 짓이겼다.

우쩌저적 쿠웅.

도현을 놓친 전투 몬스터는 공중을 올려다봤다. 빗속에 떠있던 도현이 쏜살같이 내려오고 있었다.

콰앙!

대력금강수에 머리를 맞은 5미터급 전투 몬스터의 목이 몸속으로 밀려 들어가며 기괴한 모습으로 변했다.

혀를 길게 내민 전투 몬스터는 힘없이 앞으로 쓰러졌다. 도현의 무지막지한 힘에 즉사한 것이다.

“갈모아티를 돌려주면 그냥 간다 하지 않았나!”

콰콰쾅!

양쪽에서 달려드는 거대한 덩치의 전투 몬스터들을 대력금강수로 날려 버린 도현은 뒤이어 등 뒤에서 빠르게 접근하는 검은 철퇴를 피하지 않고 발로 걷어찼다.

커다란 바위도 부술 만큼 막강한 힘이 서려 있는 전투 몬스터의 철퇴가 도현의 발길질을 견디지 못해 무기의 주인인 전투 몬스터에게로 되돌아갔다.

철퍼덕.

거대 투구를 착용하고 있는 전투 몬스터의 안면이 되돌아온 뾰족한 철퇴에 맞아 반쯤 함몰됐다.

크르르르.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