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4] 디 임팩트 16권 19화
생기가 급격히 빠져나간 전투 몬스터는 반 바퀴 회전하며 비로 축축한 정원에 힘없이 쓰러졌다.
쿠웅.
순식간에 여러 마리의 전투 몬스터를 없애 버린 도현은 남은 몬스터들을 더 이상 상대하지 않고 회랑을 걸어가는 베노아를 향해 달려갔다.
“막아라!”
눈 깜짝할 사이에 전투 몬스터들을 죽이고 달려오는 도현의 모습에 화들짝 놀란 보링이 외쳤다.
잘 훈련된 수십 명의 궁수들이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강철 화살을 연이어 빠르게 날렸다.
피피피핑.
강철 화살들은 검은 구름을 형성하며 도현을 벌집으로 만들어 놓으려 했다.
그러나 도현의 움직임은 너무도 빨라서 단 한 발의 화살도 그를 맞힐 수가 없었다. 심지어 궁수들이 미리 그가 움직일 공간을 짐작해 화살을 날렸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도현은 바람과 같은 사나이였다.
뒤를 쫓아온 전투 몬스터를 죽이고 화살 비까지 뚫은 도현이 회랑 안으로 진입하자, 백여 명의 중무장한 철갑병들이 그를 막으며 검으로 공격했다.
고된 검술 훈련을 해 왔는지 철갑병들은 무거운 철갑을 걸치고 있으면서도 몸이 빠르고 검은 정교했다. 그런 자들이 목숨을 버리듯 용감하게 싸우려 하자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하지만 충천한 그 기세만으로는 도현의 앞을 가로막을 수가 없었다.
도현이 슬쩍슬쩍 몸을 이동하며 철갑병들 사이를 스치듯 지나쳐 갈 때마다 저들의 몸을 보호하던 단단한 갑주가 부서지고 그 안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커헉!”
“윽! 검이 너무 빨라 안 보여!”
도현이 지나간 자리에는 팔과 다리에 부상을 입은 철갑병들이 낙엽처럼 우수수 쓰러졌다.
앞을 막는 철갑병들을 빠르게 제압한 도현은 검집에 검을 넣은 후 회랑 끝에서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조금 전 베노아가 호위 무사들과 함께 이곳으로 올라간 것이다.
“죽어라!”
2층에서 호위 무사 둘이 기습을 가했다.
퍼엉.
도현의 장풍에 다리를 맞은 호위 무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막지 마시오, 죽고 싶지 않으면.”
“우리는 목숨으로 원로님을 지킬 것이다!”
도현의 장풍에 다리가 부러져 주저앉았던 호위 무사들이 비장하게 소리치다가 도현의 발길질에 머리를 얻어맞고 계단으로 굴러떨어졌다.
정신을 잃은 그들을 힐끔 내려다본 도현은 걸음을 옮겨 2층 긴 복도를 응시했다.
저택에서 일을 하는 시녀들이 비명을 지르며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왔다 갔다 하는데 정신이 없었다.
도현은 뚜벅뚜벅 복도를 걷다 문이 굳게 닫힌 어느 방 앞에 섰다.
“베노아, 나오시오. 내가 원하는 건 갈모아티요.”
안에서 아무런 대답이 없자 도현은 문을 박살 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기다렸다는 듯 베노아의 호위 무사들이 공격을 가해 왔다.
유연한 몸놀림으로 그들의 공격을 몇 차례 피한 도현은 상대의 손목을 잡은 후 팔뚝으로 턱을 올려 쳤다.
덜컥.
마나를 사용하는 뛰어난 호위 무사가 제대로 실력 발휘도 못 하고 허무하게 정신을 잃으며 쓰러지고 말았다.
다른 세 명의 호위 무사들도 마찬가지 신세였다. 브링틱에서 나름 유명한 그들이었으나 차원이 다른 고수인 도현은 검을 사용하지도 않고 박투술만으로 그들을 제압한 것이다.
주위에 쓰러진 호위 무사들을 넘어 방 안 깊숙이 들어간 도현은 안쪽에서 베노아를 발견했다. 그는 호위 무사 보링과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갈모아티를 내놓으시오.”
“이런 미친 녀석.”
스르릉.
호위 무사 보링이 검을 뽑았다.
“감히 약탕기 하나 때문에 이 난리를 피우다니! 누구도 원로님을 위협하지 못한다!”
그의 검에서 밝은 빛이 났다. 마나를 주입한 검 끝을 도현을 향해 내세운 그는 도현이 한 발자국이라도 더 가까이 오면 바로 공격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정말 끝까지 해 볼 생각이오?”
도현의 시선은 검을 겨누고 있는 보링이 아니라 그 옆 베노아에게로 향해 있었다.
베노아는 고집스러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 요구가 그렇게 과한 거요? 10년 전 빼앗아 간 물건을 돌려 달라는 게?”
“주고 안 주고는 내가 정한다.”
베노아가 처음으로 도현에게 말했다.
“난 당신을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소. 정원에서 당신이 상인과 얘기할 때부터. 그러지 않은 이유는 내가 당신을 죽일 이유가 없기 때문이오. 내 목적은 갈모아티였으니까. 하지만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내 마음이 달라질 수도 있소.”
“닥쳐라! 감히 내가 있는데 원로님을 네놈이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소리를 치던 보링의 허리가 서늘해졌다. 고개를 숙여 아래를 보니 갑옷의 허리 부분이 길게 베여 맨살이 드러나 있었다. 검이 조금만 깊이 들어왔어도 내장이 쏟아질 뻔했다.
‘언제?’
도현의 어깨가 꿈틀거리는 것만 봤을 뿐 그 뒤에 검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보지도 못했다.
“당신은 그만 끼어들었으면 좋겠어.”
보링에게 가슴 서늘한 경고를 날린 도현은 다시 베노아를 응시했다.
“갈모아티를 내놓으시오.”
“넌 누구냐?”
“갈모아티를 빼앗긴 사람의 대리인이오. 내가 받아 갈 충분한 명분이 있지 않소?”
“약초꾼 노인이 대단한 자를 보냈군.”
베노아의 볼살이 씰룩거렸다.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단숨에 많은 병사들과 전투 몬스터들을 무너뜨린 도현의 실력에 내심 놀라는 중이었다.
호위 무사들도 약한 존재들이 아닌데, 어린아이 다루듯 하는 것도 인상 깊었고.
‘갈모아티를 주지 않으면 정말 날 검으로 벨 눈빛이야. 무서운 놈.’
한동안 도현의 위아래를 자세히 뜯어보던 베노아의 뇌리에 누군가가 떠올랐다.
‘가만, 이자는 혹시?’
고대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과 관련해 여러 정보들을 접할 수 있는 위치인 그는 베일 가문의 용병으로 알려진 도현의 초상화도 가지고 있었다. 눈앞의 사내가 그 용병과 어딘지 흡사해 보였다.
“얼음탑주와 크게 싸우고 사라졌다는 베일 가문의 용병이 혹시 자네 아닌가?”
베노아의 질문에 도현은 순순히 인정했다. 굳이 숨길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명성이 도움이 된다면 그것을 이용해 베노아의 고집을 꺾고 갈모아티를 받아 가는 게 좋았다.
“화제의 주인공이 날 찾아왔군. 보링, 검을 치워라.”
“예? 하지만.”
“어서.”
보링은 검을 거두었다.
그때 전투 몬스터들이 2층 창문을 부수며 거대한 상체를 밀어 넣었다.
“원로님을 지켜라!”
일단의 호위병들이 도현에게 피해를 당하지 않은 전투 몬스터를 이끌고 저택을 부수며 난입하려고 했다.
“그만!”
베노아가 손짓하자 도현을 공격하려던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베노아는 고개를 돌려 도현에게 말했다.
“갈모아티를 돌려주겠네.”
떨리는 손
비가 그치고 하늘에 달이 떴다.
브링틱 성을 빠져나온 마차와 일단의 기마병들은 어두운 길을 쉬지 않고 달리고 있었다.
두두두두두.
스무 기의 기마병들이 화려한 마차의 앞과 뒤를 호위하고 있었는데, 마차 안에는 원로 베노아와 도현이 타고 있었다.
갈모아티는 브리틱 성에 있는 베노아의 저택에 없고 튜샨 가문 소유의 성에 있었다. 그래서 그곳으로 함께 가고 있는 중이었다.
덜거덕거리는 마차 안에서 지그시 도현을 보던 베노아가 입을 열었다.
“약초꾼 노인에게선 의뢰비로 얼마를 받았나?”
베일 가문의 용병으로 알려진 도현이 약초꾼의 의뢰를 받았다 여겼는지 베노아가 물었다.
마차 밖을 보며 튜샨 가문의 성에 어서 도착하기를 기다리던 도현은 고개를 돌려 베노아를 쳐다봤다.
“적당히 받았습니다.”
로나 얘기를 베노아에게 할 이유가 없어서 도현은 짤막하게 답했다.
“그 사람은 운이 좋군, 자네처럼 뛰어난 용병을 고용하다니 말이야. 고대 도시 때문에 많은 용병들이 브링틱에 들어왔지만, 자네만 한 사람은 보지 못한 것 같아.”
도현을 치켜세운 그는 흰 가루가 든 작은 목함을 꺼내 그 안에서 약간의 흰 가루를 손바닥에 올려놨다.
“자네도 좀 할 텐가?”
“그게 뭡니까?”
“환각제네. 원래 부작용 없는 파로야를 사용했는데, 자네도 정원에서 본 상인 녀석이 카샨에게 몽땅 팔았다고 하더군. 그래서 별수 없이 이거라도 사용하려고. 아, 카샨이 누군지는 알겠지? 베일 가문의 발굴지에서 얼음탑과 맞서 싸웠으니 말이야.”
“알고 있습니다.”
“할 텐가?”
베노아는 흰 가루가 든 목함을 내밀었다. 도현은 목함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나만 하지.”
그는 흰 가루를 콧구멍에 대고 깊게 흡입했다.
“하아, 좋군.”
마차 벽에 머리를 기댄 베노아는 마차가 좌우로 흔들릴 때마다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기분이네.”
도현은 자신의 앞에서 스스럼없이 환각제를 흡입한 베노아에게 물었다.
“왜 그런 약을 하는 겁니까?”
“둘 있던 아들들은 나보다 먼저 죽고 나이는 들어 가고 남은 건 늙어서 축 처진 이 몸밖에 없는데, 내가 어디서 삶의 낙을 찾겠는가?”
비감에 젖은 베노아의 대답에 도현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둘 사이에 흐르던 긴 침묵은 베노아가 입을 열면서 다시 깨졌다.
“자네, 혹시 내 의뢰를 받을 생각은 없나?”
“의뢰요?”
“자넨 용병 아닌가?”
눈을 감고 있던 베노아가 눈을 뜨며 반듯한 자세로 앉아 있는 맞은편의 도현을 응시했다.
“갈모아티를 가지고 가면 자넨 약초꾼과의 계약이 끝날 것이니, 그 뒤에 내 의뢰를 좀 받아 달란 말이네.”
“글쎄요.”
“안 될 이유라도 있나?”
베노아는 환각제가 들어 있는 목함을 열며 물었다.
“이번 일이 끝나도 해야 할 일이 또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가? 매우 바쁜 사람이로군.”
환각제를 다시 흡입한 그는 환각제가 많이 남은 목함을 마차 밖으로 집어 던졌다. 파삭거리는 소리와 함께 목함 속의 흰 가루가 길가에 흩어졌다.
“그래도 내 의뢰를 들어줬으면 하는데.”
“…….”
도현은 덜컹거리는 마차의 움직임에 따라 몸을 가볍게 흔들며 지그시 베노아를 쳐다봤다. 아직 갈모아티를 받지 못한 상태였다. 뭔가 바라는 게 있는 것 같은 베노아의 행동에 도현은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일단 들어나 보죠.”
“카샨이 상인에게 사 간 파로야를 구해다 주게. 그게 내 의뢰네.”
뜻밖의 의뢰였다.
“카샨에게 있는 파로야를 훔쳐 오라는 겁니까?”
“훔쳐 오는 게 아니라 원래 내 것이었을 물건을 정상으로 되돌려놓자는 것이네. 그놈이 나의 유일한 낙을 가로챘다는 것을 난 참을 수가 없어! 일부러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괘씸한 놈 같으니!”
“파로야는 또 구할 수 있는 게 아닙니까?”
“두 달이네, 파로야 상인이 내게 오기까지 기다려야 할 시간이. 어쩌면 오지 않을 수도 있고. 다른 환각제로는 그것을 대체할 수가 없어. 난 그걸 되찾아야겠네. 자네 정도의 실력이라면 카샨이 대단한 마법사라고 해도 구해 올 수가 있지 않나?”
“카샨이 어디 있는 줄 아십니까?”
도현의 질문에 베노아가 헛기침을 했다.
“고대 도시 너머 북쪽 미개척 지역으로 들어간 지 꽤 되었네. 정확한 위치는 모르고.”
“그런데도 나보고 그를 찾아서 파로야를 구해 오라고 의뢰를 하는 겁니까? 위치도 모르면서?”
물론 도현은 카샨이 브링틱으로 복귀 중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이야기해 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 하지만 시도는 해 볼 수 있지 않는가? 그리고 혹 카샨을 발견하면, 그놈이 미개척 지역에서 뭘 하고 있는지도 겸사겸사해서 내게 알려 주고.”
“파로야는 핑계군요. 진짜 목적은 카샨이 뭐 하고 있는지 그게 궁금한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내 목적은 파로야네. 아무튼 내 의뢰를 받아 주겠나? 금화 3천 개를 주지. 부탁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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