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 임팩트-398화 (398/575)

[398] 디 임팩트 16권 23화

이디언의 고함 소리에 세상모르고 자던 헬구스가 눈을 번쩍 떴다.

“이 돼지 같은 인간! 그렇게 편하게 잠을 자도 되는 거야!”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디언?”

헬구스가 주춤거리며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뭘 어쨌다고.”

“칼라치는 씨드를 얻지 못했어. 그렇다면 슬퍼해야 하잖아, 힘들어하고. 네 친구니까!”

이디언은 소리를 치며 발길질을 했다. 턱 높이까지 올라오는 그녀의 발길질에 놀란 헬구스는 옆으로 몸을 피했다.

“왜, 왜 이러는 거야. 나도 슬퍼하고 있다고.”

“그게 슬퍼하는 모습이야! 며칠간 너를 봐 왔어. 돼지처럼 먹고, 돼지처럼 자고 있잖아. 양심이 있으면 그러면 안 되지! 칼라치는 씨드를 못 얻었는데!”

절규하듯 외치는 그녀의 모습에 헬구스는 기가 죽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특별히 잘못한 게 있어서가 아니라 말대꾸를 했다간 그녀가 더욱 발작을 일으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디언, 그만하시오. 그는 아무 잘못도 없으니.”

칼라치는 그녀를 번쩍 안아서 헬구스로부터 떼어 냈다.

“아니에요. 그는 잘못이 있어요. 난 헬구스를 당신 친구라고 생각했어요. 어려워도 그는 같이했으니까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그는 배신자예요. 우리의 친구가 아니라고요!”

“이디언!”

칼라치는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움찔한 이디언은 자신을 안고 있는 칼라치를 올려다봤다.

괴로워하는 칼라치의 표정이 생생하게 눈에 들어왔다. 눈빛도 슬펐다.

“왜 그래요, 칼라치. 왜 울려고 해요.”

“당신이…… 살아 있어서 너무 기뻐서 그렇소.”

그의 대답에 이디언의 눈빛이 크게 요동쳤다.

“나 때문에 당신은 씨드를 못 얻었어요. 섬에 갔다면 틀림없이 씨드는 당신 차지였을 텐데, 내게 화나지 않아요?”

“전혀.”

칼라치는 이디언을 꼭 끌어안았다.

“씨드와 당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면 만 번을 물어도 난 망설임 없이 당신을 택할 거요.”

“칼라치.”

“내 몸속에서 느껴지는 내 진심에 귀를 기울여 보시오.”

칼라치의 부드러운 말에 이디언은 눈을 감고 칼라치의 몸을 느꼈다.

‘나를 원망하지 않고 있어. 따뜻해.’

온화한 날씨와 모닥불 앞에서도 추위에 떨어야 했던 그녀의 비정상적인 몸과 마음이 칼라치의 온기를 이어받아 차츰 정상으로 돌아갔다.

한동안 시간이 멈춘 듯 뜨겁게 안고 있었던 둘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제 좀 진정이 됐소?”

“네.”

이디언은 칼라치의 품에서 떨어져 헬구스에게 걸어갔다.

“미안해요, 헬구스.”

“미안하긴, 난 돼지처럼 먹고 자는 놈인데. 맞는 말이지.”

“당신을 귀찮아했지만 진심은 아니었어요. 당신은 칼라치가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유일한 친구예요. 알죠?”

헬구스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코를 만졌다.

“그런가?”

“브링틱을 떠나도 우리 함께해요, 당신만 싫지 않으면.”

“어디로 갈지 정해는 놓았고?”

헬구스의 물음에 중년의 여마법사 이디언은 칼라치 옆에 서며 말했다.

“그건 브링틱으로 가면서 정해요.”

로나는 집을 나섰다. 햇살이 눈부셔 그녀는 잠시 눈을 찡그리다가 밝은 미소를 지으며 양팔을 벌려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선조들을 단명시킨 저주받을 병이 사라졌다는 게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동료들이 아니었다면 그녀의 운명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어베인, 짐브리오, 딘, 리드만 사제, 리타, 약을 제조해 준 톨리핀 그리고 도현까지, 어느 한 사람 고맙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도현에 대한 고마움은 좀 더 특별했다.

그녀는 햇볕 아래에서 약초를 다듬고 있는 톨리핀의 옆에 앉았다.

“몸은 어떤가?”

“좋아요.”

“어제 말했지만 치료는 됐어도 그사이 상한 체력을 회복시키는 것도 중요해. 당장은 무리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게 좋아.”

“그럴게요.”

로나는 대답하며 약초의 뿌리와 잎사귀를 분리하는 작업을 거들었다.

그런데 그 손길이 매우 정확하고 빨랐다. 그녀가 가세하자 순식간에 집 앞에 가득했던 약초 손질이 끝나 버렸다.

톨리핀은 엉거주춤 일어서며 로나를 쳐다봤다. 체력 회복에 신경 써야 한다고 주의를 준 게 조금 전인데, 그녀는 혼신의 힘을 다해 약초를 다듬은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함부로 힘을 쓰면 안 되는데.”

“사실, 힘들지 않아요. 아직 마르고 예전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았지만, 몸이 굉장히 가볍고 행동도 민첩해졌거든요.”

“씨드 나무가 병만 치료해 준 게 아니라 몸도 변화시켰나 보군.”

톨리핀은 잘됐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좋은 약을 만들어 주신 덕분이에요.”

“뭘 또 새삼스럽게. 어제 그렇게 고맙다는 얘기를 하고선.”

톨리핀은 예전의 외모를 조금씩 찾아가는 로나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때 멀리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렸다.

“정말 대단한 사내야. 어제도 보니 절벽 한쪽을 폐허로 만들어 놓더니, 지금도 또 그러나 보군. 이러다 산을 다 망치겠어.”

“제가 가 볼게요.”

로나는 도현이 수련하는 곳이 어디인지 짐작이 갔다. 고문받은 상처를 치료하며 한동안 이 산에서 시간을 보냈던 그녀는 주변 지리를 거의 꿰뚫고 있었다.

무성한 수풀과 가파른 산길을 힘들어하지 않고 빠르게 오른 그녀는 얼마 후 수직으로 깎인 절벽 밑 넓은 공터에서 도현을 발견했다.

검을 든 그는 절벽을 마주 보며 서 있었다.

그녀는 공터로 내려가지 않고 약간 높은 위치에서 도현을 가만히 지켜봤다. 중요한 수련을 하는 것 같아서 지금 내려가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참을 미동 없이 검과 함께 서 있던 도현이 검을 위에서 아래로 부드럽게 내리그었다.

꽝 소리와 함께 절벽이 진동했다. 절벽 한쪽이 무너지고 있었다.

도현은 들고 있던 검을 수십 미터 허공으로 던졌다.

스르릉.

또 한 자루의 검을 뽑아 그것마저 하늘을 향해 던졌다.

두 자루의 세타이움 장검을 모두 비검술로 날려 보낸 도현은 양손을 이용해 검을 조종하기 시작했다.

실제 사람이 휘두르는 검처럼 정교하고 날카로운 호검술이 두 자루 검에서 완벽하게 펼쳐졌고, 그 영향으로 인해 수십 미터 높이의 절벽엔 온통 비검술이 만들어 낸 검 자국이 가득했다.

전보다 한층 상승된 비검술이었다.

절벽에 불꽃이 튀기고 돌가루가 비처럼 쏟아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로나의 눈엔 놀라움이 가득했다.

도현의 검술이 대단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본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실제로 보니 생각보다 더 대단했다.

도현이 손을 움직일 때마다 두 자루 검이 높고 넓은 절벽 전역에 걸쳐 깊은 상처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한동안 비검술을 수련한 도현은 허공에서 날아오는 검을 회수해 그림 같은 동작으로 검집에 넣었다.

“이제 나와도 됩니다, 로나.”

도현이 담담한 눈빛으로 말했다.

“알고 있었군요.”

로나는 경사진 곳을 미끄러지듯 내려와 도현의 옆에 섰다.

“조금 전에 그 검술은 뭐예요?”

“비검술요. 봐 줄 만했나요?”

“마법처럼 보였어요. 그 검과 싸우는 사람은 무척 당황할 것 같아요.”

로나는 고개를 돌려 도현이 수련하던 절벽을 올려다봤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높게 보였다. 절벽은 부서지고 파이고 베여 엉망이었다.

“이러다간 절벽이 아예 사라지겠어요.”

“과장이 심한데요?”

도현은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로나는 절벽을 망가트리고 도망치듯 내려가는 도현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계곡에 도착한 도현은 차가운 물로 세수를 했다. 땀과 먼지로 인해 지저분해져 있던 그의 얼굴이 깨끗해졌다. 그동안 제법 기른 수염도 다 정리해서 더욱 말끔해 보였다.

물가에 발을 담그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로나가 말했다.

“누구 만나러 가요?”

“예?”

순간 당황한 도현이 말을 더듬었다. 그녀 말대로 도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염을 자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얼굴이 들떠 있는 것 같아서요.”

“기분이 좋으니까 그럴 수밖에요. 당신이 치료됐잖아요.”

“이상한데. 꼭 그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요?”

로나가 미심쩍다는 듯 바라보자 도현은 하하 웃으며 그녀 곁에 앉았다.

계곡 물가에 나란히 앉은 둘은 흘러가는 계곡물을 한동안 말없이 보기만 했다.

물에 반사된 햇빛이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었다. 떠내려가는 나뭇잎을 보며 로나가 말문을 열었다.

“고마워요. 당신이 아니었으면 계곡의 이 아름다운 풍경을 다시는 보지 못했을 거예요.”

“내가 혼자 한 게 아니잖아요. 우리 모두가 해낸 일이죠. 로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병과 싸우려 했고.”

“다행이다 싶어요, 당신과 만난 게.”

“나도 그래요. 당신들을 만난 게.”

둘은 다시 입을 다물고 고요한 계곡 풍경에 빠져들어 갔다.

시간이 빠르게 흘러 계곡에 햇살이 더 들지 않을 때쯤 여러 사람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로나와 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봤다.

“로나!”

망각의 숲에서 돌아온 동료들이 기쁜 얼굴로 뛰어오고 있었다.

조용했던 산속 통나무집은 로나의 완치를 축하하는 술판이 벌어져 잔칫집처럼 시끌벅적했다.

“자, 로나가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으니, 그녀를 위해 잔을 듭시다.”

어베인이 술잔을 들며 말하자 사람들이 일제히 잔을 머리 높이로 들어 올렸다.

약초꾼 노인 톨리핀은 같이 잔을 드는 게 쑥스러워 그냥 있다가 리타가 웃으며 눈짓을 하자 제일 늦게 잔을 들어 올렸다.

“로나를 위해!”

어베인의 선창에 나머지 사람들이 후창을 했다.

“로나를 위해!”

술잔이 모두 비워지자 사람들은 다시 잔을 채웠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로나를 구하기 위해 너나없이 자기희생을 마다하지 않았소. 이 어베인은 평생 그보다 진한 우정은 보지 못했소.”

어베인은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도현을 향해 깊은 신뢰의 눈빛을 보냈다.

“얼음탑주를 죽이고 씨드 나무를 구해 온 도현을 위해 다시 한 번 잔을 듭시다. 도현을 위해!”

“도현을 위해!”

큰 소리와 함께 술잔은 비워졌고 다시금 잔이 채워졌다.

어베인은 방 안에 모인 사람들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며 여덟 번의 잔을 모두 비우게 하고서야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그의 심정은 당장 이 자리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로나가 어렸을 때부터 함께 대륙을 돌아다니며 긴 시간을 보낸 그로서는 로나가 남이 아닌 피붙이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로나, 머리 빡빡 밀어라. 그래야 머리가 금방 자란다.”

짐브리오의 말에 로나는 자신의 머리에 손을 가져갔다. 병 때문에 그녀의 머리카락은 거의 다 빠진 상태였다. 일부가 남긴 했지만 보기 흉했다.

그녀는 도현 앞에서 머리카락 얘기를 꺼내는 짐브리오가 얄미웠는지 눈을 살짝 치켜떴다.

“오오, 그래, 그 눈빛. 예전의 로나의 모습이 슬슬 돌아오는구나.”

짐브리오는 호탕하게 웃다가 얼굴이 굳어졌다. 리타가 만든 거대한 얼굴이 다가와 그를 삼키려 했기 때문이다.

“로나 놀리면 혼내 줄 거야.”

“이게 정말! 너 그 흉악한 마법 다시는 사용하지 말랬지!”

“흉악해? 진짜 삼킨다?”

짐브리오는 침대만 한 크기의 로나 얼굴이 입을 쩍 벌리며 삼키려 하자 깜짝 놀라 집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사람들은 그 모습이 우스웠는지 크게 웃으며 즐거워했다.

밤늦도록 도현이 사 온 두 통의 술통을 모두 비우는 괴력을 발휘한 그들은 하나둘 자리에 쓰러져 그대로 잠이 들었다.

“영주님, 저 먼저 자겠습니다.”

“잘 자게, 리드만.”

딘과 리드만은 대화를 주고받은 뒤 거의 동시에 바닥에 쓰러졌다.

“우리 둘만 남았군.”

어베인은 도현의 잔에 술을 따랐다.

“수고했네.”

“아닙니다.”

“자네가 아니었으면 오늘 이렇게 즐겁게 술을 마실 수 없었을 것 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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