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 디 임팩트 16권 24화
어베인은 고개를 돌려 방 한편에 누워 잠이 든 로나를 응시했다. 뜨거운 열기에 고통받던 그녀가 편안히 잠을 자는 모습이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었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건가?”
어베인은 도현의 계획에 대해 물었다. 로나는 치료가 됐고, 거인의 섬은 사라졌다. 더 이상 브링틱에서 볼일이 없는 것이다.
술잔을 비운 도현은 옷 속에 가려진 자신의 타투를 생각하며 왼팔을 내려다봤다.
그가 이쪽 세계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은 경험상 대략 3개월에서 4개월 사이로 추정되었다. 혹은 더 짧을 수도 있고.
지구에서 새로운 스톤을 찾아 타투의 에너지를 충전시키지 않는 한은 이것이 그가 가진 마지막 시간이었다.
몬스터들을 잡으며 조금의 내공이라도 더 쌓을 수 있는 시간들이지만, 도현은 마음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씨드 나무의 샘에서 얻은 힘 덕분에 그의 내공은 바다처럼 깊고 넓어져 있는 상태다. 패도적인 무공을 사용하던 태선군과 힘으로 싸워도 더 이상은 밀리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방심할 순 없지만, 그만큼 그의 모든 능력치가 씨드 나무의 샘에서 기운을 흡수한 이후로 상승해 있었다. 구태여 내공을 조금 더 얻기 위해 동료들과 이 자리에서 헤어져 몬스터들을 찾아 헤맬 필요는 없는 것이다.
“글쎄요, 대장은 어떤 생각이십니까?”
도현이 대장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자, 어베인은 미소를 보였다.
“나와 짐브리오는 새 영지를 찾는 딘을 도우려고 하네. 이미 약속도 했고.”
“그렇군요. 새 영지는 어디로 할 건지 얘기가 오고 갔습니까?”
“악명 높은 영주 커딜과 이안의 영지 중 한 곳을 고려 중이네. 자네도 알겠지만, 그들은 우리를 죽이려고 마법사로 구성된 추적대를 보낸 자들이네.”
도현도 그들이 누군지는 알고 있었다. 최초의 폭주를 하게 된 것도 커딜과 이안이 보낸 마법사와 싸우다 그렇게 됐으니까.
“하지만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그들의 영지를 고려하고 있는 게 아니네. 영지민들에게 못된 짓을 많이 해서 욕을 많이 먹는 녀석들이라, 딘이 새 영주가 되더라도 영지민들의 반발이 적을 것 같기 때문이지.”
“영주가 되려면 많은 싸움을 해야겠군요.”
도현이 술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영지전이라는 게 그렇다네. 피가 흐르지 않고는 주인이 바뀔 수가 없는 법이지. 다만, 압도적인 힘으로 상부를 무너트리면 흘리는 피가 훨씬 적겠지.”
“3개월 사이에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3개월?”
“여기서 그곳에 가는 시간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어베인은 술잔을 손안에서 만지작거렸다.
“3개월이라…… 솔직히 말하면 자네 없이 우리들만으로 딘을 그곳의 영주로 추대하는 건 매우 어려울 거야. 많은 시간이 필요할 거고.
“제가 함께하면요?”
“자네가 함께하면 커딜과 이안은 죽은 목숨이 아니겠나? 두려울 게 없겠지. 3개월 안에 가능할 수도 있어.”
도현은 술을 단숨에 비웠다.
“그럼 그렇게 하지요. 같이 가겠습니다.”
“고맙군. 자네가 함께해 주면 모두가 기뻐할 거네. 하지만 의무감 때문에 가야 할 필요는 없네.”
“대장, 제가 의무감 때문에 같이 가겠다고 하는 것 같습니까?”
도현이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어베인은 도현의 눈을 들여다봤다.
“그건 아닌 것 같군. 좋아, 우리 힘을 모아 딘에게 새 영지를 만들어 주세.”
술을 비운 어베인은 천천히 앞으로 쓰러졌다. 정신력으로 끝까지 버티던 그로서도 이것이 한계였다.
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집 안을 둘러봤다.
사람들은 술에 취해 곯아떨어져 있었다. 침을 흘리며 자고 있는 리타의 몸을 바로 눕혀 준 도현은 집 밖으로 나와 황금빛 타투에 손을 댔다.
‘돌아가자.’
로나를 구하고 씨드 나무의 샘에서 힘을 얻은 도현은 밝은 마음으로 게이트를 열었다.
이곳은 수개월의 시간이 지났지만, 지구는 한 달이 조금 더 지났을 것이다.
우우우웅.
도현은 붉은 빛으로 일렁이는 타원형의 게이트를 향해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대체 관장님은 언제 돌아오시는 거지?’
하체에 납덩이를 달고 보법 수련을 하던 최준영은 힐끗 앞을 쳐다봤다. 호태식, 이호선, 김유진이 조 사범의 지도를 받으며 호검술 수련을 하고 있었다.
‘나도 목검을 가지고 싶다.’
목검을 들고 수련하는 선배들의 모습이 부럽기 그지없었다.
도현의 도움으로 요사스러운 기운에서 해방된 최준영은 심신을 단련하기 위해서 호검술 도장에 나온 지 두 달이 훌쩍 넘은 상태었다.
검을 배우기 위한 기초 체력 훈련 겸 보법 수련은 이를 악물고 참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혹독했다.
처음 한 달간 피똥을 싼 게 여러 번이고 두 달째는 그나마 적응이 되어 보법 수련에 진도가 있었다.
옆에서 발로 걷어차도 하체의 중심과 자세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자신감이 있었지만, 조 사범은 관장이 오기 전까지는 목검 수련에 임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더 해.
그 말 한마디에 최준영은 무너지는 가슴으로 오늘도 보법 수련에만 매진하고 있는 중이었다.
‘얼른 관장님이 오셔서 나를 이 지옥 같은 형벌에서 꺼내 주셔야 하는데. 저 냉정한 조 사범은 매일 구박만 하고.’
도장 바닥의 흰 점들을 밟으며 보법 수련을 하던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그의 머리에 용주의 목검이 날아왔다.
따악.
머리부터 발끝까지 찌릿했다.
“잡생각하지 말고 보법 수련에 집중하라고 했지?”
“잡생각 안 했는데요?”
눈물을 찔끔 흘린 최준영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다 보여, 자식아. 어디서 거짓말을. 너, 왜 한숨 쉬었어?”
“숨이 차서…….”
“형이 자식아, 너 잘되라고 특별히 열심히 봐주고 있는데, 이렇게 하면 되겠어?”
목검으로 또 때릴 것처럼 용주가 자세를 잡자 최준영은 두 손으로 얼른 머리를 막았다. 하지만 목검은 그의 엉덩이에 찰싹하고 달라붙었다.
“엉덩이는 안으로 더 집어넣고, 시선은 바닥이 아니라 정면!”
엄한 용주의 지적에 최준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죄송합니다!”
도장이 떠나가라 외치는 그의 모습에 용주는 피식 웃었다.
“목쉰다. 쓸데없는 곳에 기력 낭비하지 말고, 도장에서 수련하는 동안은 제대로 집중하자.”
“알겠습니다. 저 그런데 사범님.”
“왜?”
“관장님은 언제 오시는 겁니까?”
“오실 때 되면 오시겠지.”
두루뭉술한 대답을 한 용주는 최준영을 지나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언제 올지 내가 어떻게 아냐? 이계에 갔는데. 그나저나 이번엔 얼음탑주에게 안 깨져야 하는데.’
거인의 섬에 있는 씨드를 두고 싸움이 벌어질 것 같다고 했기 때문에 용주는 그 결과가 어찌 될지 걱정되면서도 기대가 됐다.
네 명의 관원들은 저녁 교육이 끝나자 어울려 근처 분식집으로 몰려갔다. 이호선 피디와 김유진 작가가 시간이 되면 가끔 이렇게 모여 먹으러 가곤 했다. 호검술 도장에서 교육을 받는 관원이라 봐야 그들이 전부였기 때문에 이들은 사이가 돈독한 편이었다.
“최준영, 힘들어도 견뎌, 우리도 다 거쳐 왔으니까.”
김유진은 말을 하며 순대를 집어 막내인 최준영의 입에 넣어 주었다.
“고맙습니다.”
입에 순대를 물고 순박하게 웃는 그의 모습에 다른 관원들은 미소를 지었다.
처음에 힘들어하기에 그만두나 싶었는데, 한 달, 두 달 버티며 여기까지 왔다.
“너, 그런데 우리 도장은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집도 멀면서?”
“저요?”
최준영은 떡볶이를 집으며 무심코 말했다.
“관장님이 저를 도와주신 일이 있어서요. 그 일 때문에 관장님을 존경하게 됐고, 검도 배우고 싶고, 뭐 그래서요.”
“무슨 일을 도와주셨는데?”
이호선 피디가 라면을 씹으며 물었다.
“저 그게…….”
“어머 얘 봐. 너 지금 우리 사이에 비밀을 두려고 하는 거니? 서운하다.”
김유진 작가가 코를 찡그리며 눈을 흘겼다.
“아니, 그게 아니라, 말하기 좀 그래서요.”
“그렇게 말하니까 더 궁금하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조금만 얘기해 주면 안 돼?”
김유진 작가가 살랑살랑 웃으며 묻자 최준영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내심 방송국에서 일을 하는 김유진 작가를 좋아하고 있었다.
“저, 사실은 관장님이…….”
“말하기 곤란하면 억지로 말할 필요 없어. 사정이 있는 것 같은데.”
호태식이 슬쩍 최준영을 째려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시선에 최준영은 정신을 차리며 하려던 말을 중단했다.
최준영은 도장에 오기 전부터 호태식을 알고 있었다. 엄마 친구의 동생이었고 그는 자신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이 자리에서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관장이 퇴마사처럼 요사스러운 기운을 쫓아냈다는 사실을 비밀로 하라는 얘기를 무당인 호태식의 누나에게 들었기 때문에 그는 입조심을 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여기서 말을 하면 엄마 친구인 무당의 말을 어기는 셈이었다.
“태식 씨, 왜 그래요, 막 말하려고 하는데.”
김유진이 아쉬운 얼굴로 중간에 끼어든 호태식을 타박했다.
“불편해하는 것 같아서요.”
김유진과 이호선은 최준영이 눈을 마주치지 않고 먹는 데만 집중하자 더 이상 도현이 뭘 도와줬는지 묻지 않았다.
“내일 봐요.”
이호선과 김유진이 차를 타고 떠나자 분식집 앞엔 호태식과 최준영 달랑 둘만 남게 되었다.
호태식은 멀어지는 이호선의 차를 보며 말했다.
“준영아.”
“예…….”
“우리 누나가 너 입조심하고 다니라고 분명히 얘기했지?”
“예, 하셨습니다.”
“관장님은 퇴마 쪽 일에 관심이 없으신 분이야. 너도 우리 누나가 간신히 부탁해서 고쳐 준 거라고. 알겠어?”
호태식이 어깨에 손을 올리자 최준영은 움찔했다.
“입조심하자, 사람들에게 소문 퍼지지 않도록.”
“예, 주의할게요.”
“따라와.”
“어딜요?”
“왜 겁먹어, 자식아. 집에 태워다 준다고.”
최준영은 호태식의 차를 얻어 타고 집으로 가며 물었다.
“선배님,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뭔데?”
차선을 바꾸며 호태식이 물었다.
“관장님 말입니다. 산에 수련을 가셨다고 하는데, 언제쯤 돌아오세요?”
“준영아.”
“예?”
“관장님은 말이다, 바람 같은 분이시다. 바람이 뭐냐? 소리 없이 왔다가 소리 없이 가는 게 바람 아니냐? 그렇게 알고 있어.”
최준영은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물었다.
“선배님, 무슨 말씀인지 통 모르겠는데요? 뭘 그렇게 알고 있으라는 거죠?”
교차로 신호등에 걸린 호태식은 속도를 줄이며 운전대에 양팔을 걸쳤다.
“나도 모른다는 뜻이다.”
“……네.”
홍영은 도현이 없는 지하 도장에서 검을 수련하고 있었다.
사사사삭.
검 끝에 내공을 모아 휘두르자 뱀이 풀숲을 지나가는 소리가 나며 공기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호검술뿐만 아니라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배운 사검도 틈틈이 수련했다.
검술이야 호검술이 월등히 앞서지만, 아버지가 생각날 때면 사검을 수련하며 그리움을 해소하곤 했다.
화장기 없는 청순한 얼굴은 땀이 가득했고 도복 자락은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펄럭였다.
지하 도장을 넓게 사용하며 한 마리 나비처럼 우아하게 움직이다가 독을 품은 뱀처럼 치명적인 공격을 퍼부은 그녀는 서서히 숨을 고르며 검을 회수했다.
그녀는 밀걸레로 바닥의 땀을 닦아 낸 뒤, 관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습관처럼 도현이 사 온 수묵 산수화를 들여다봤다.
강과 나룻배 한 척 그리고 그것을 내려다보는 산.
정적인 느낌 속에 고요히 흐르는 시간을 담은 작품이다.
도현은 이것을 매우 아끼며 자주 바라보곤 했다. 그녀는 도현 대신 그림을 바라보며 그의 무사 귀환을 기원했다.
도현이 수묵 산수화 속에 자신을 투영하며 심신의 안정을 꾀했다면, 그녀는 기도의 대상으로 자신의 소원을 빌고 있는 것이다.
‘별일 없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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