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1] 디 임팩트 17권 1화
단체 사진
보육원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는 장철호의 눈빛은 어두웠다. 정확히는 ‘윤희’와 닮은 듯한 여자아이를 보고서부터다.
‘잘한 짓일까?’
3천만 원을 구해 달라던 그녀에게 경멸 어린 시선을 던지고 가로수길 찻집을 나섰던 그 일이 여전히 철호에게는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과거로 회귀해 같은 상황에 처한대도 역시 같은 말과 행동을 했을 것 같다.
‘잊어버리자.’
장철호는 애써 얼굴을 밝게 하고 원장실로 향했다.
보육원은 그에게 고향이나 다름없다. 기억의 시작부터 있던 곳이니 태어난 곳을 모르는 그에게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보육원은 그의 진짜 고향이 될 수는 없었다. 오갈 데 없는 사연 많은 아이들의 집합처라는 불편하고 냉정한 현실이 어릴 적부터 그의 머릿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고향에서 느낄 만한 깊은 정감이나 푸근함을 보육원에서 기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가 보육원을 찾아온 건, 다른 게 있어서가 아니다.
“원장님, 여기.”
오랜만에 만난 나이 지긋한 원장에게 아이들 학용품과 약간의 돈이 든 봉투를 건넨 장철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원장실 소파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려고?”
“일이 있어서요. 또 오겠습니다.”
“철호야.”
문을 열고 나가려던 장철호는 뒤를 돌아봤다. 말썽쟁이였던 그에게 서슴없이 매질을 했던 엄한 원장 할머니가 조용히 다가와 그의 양팔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다시 얼굴 보니 좋구나.”
“건강 좀 신경 쓰세요, 아이들만 너무 챙기시지 말구요.”
다소 무뚝뚝한 말투였지만 장철호의 진심이 느껴졌는지 원장 할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마.”
장철호는 격투기 선수로 입지를 다지면서 1년에 한두 차례는 원장 할머니를 만나러 오곤 했었다. 그러다 어깨 부상 이후로 발길을 끊었다가 이번에 오랜만에 찾아온 것이다.
“갈게요. 나오지 마세요.”
다리가 불편해 보이는 원장 할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한 장철호는 원장실을 나와 복도를 걸었다.
그의 걸음걸이는 평소보다 빨라져 있었다. 헤어진 윤희와 어렸을 때부터 같이 걸어 다녔던 이 복도에서 되도록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자꾸만 생각난다, 윤희와 함께한 시간들이.’
한때 심장을 꺼내서라도 사랑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던 사랑하는 여자를 단칼에 잘라 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해야 한다.
가로수길 찻집에서 만난 윤희는 변해 있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그랬는지 모른다. 그만 바보같이 모르고 있었을 뿐.
산적처럼 험한 인상을 가진 장철호가 얼굴이 벌게진 채로 도망치듯 보육원 건물에서 뛰쳐나오자, 근처에 아이들이 기겁을 하며 뿔뿔이 흩어졌다.
“괴물이다!”
“도망가!”
철없는 아이들이 자신을 재밌는 놀이 대상으로 삼아 장난을 거는 모습에 장철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냉정을 되찾아 갔다.
“공부 열심히 해, 이놈들아!”
“아저씨나 공부하세요!”
꺄르르 웃는 아이들과 한동안 놀아 주던 그는 보육원을 나와 차에 올랐다.
“미안하다. 오래 기다렸지?”
“아니에요.”
도현은 멀리서 손을 흔드는 몇몇 아이들을 보았다. 티 없이 맑아 보였다.
“이곳에서 형도 저 아이들처럼 뛰어놀며 자랐겠네요.”
“그렇지 뭐.”
철호가 지냈던 보육원에 처음 와 본 도현은 무슨 생각인지 차를 출발시키는 대신 차에서 내렸다.
“뭐 하는 거야?”
“잠시만 기다리세요.”
철호가 보육원에 간다는 말에 운전기사를 자처하며 따라나선 도현은 철호가 조금 전 걸어 나왔던 길을 되짚어 보육원으로 향했다.
얼마 뒤 도현이 돌아와 차 시동을 걸었다.
“뭐 하고 온 거냐?”
“원장님 만나서 형 어릴 때 모습이 어떤지 듣고 왔어요.”
“뭐?”
“아이들과 매일 싸우고 학교에서도 말썽만 피우고, 아주 와일드한 학창 시절을 보냈던데요?”
“너, 너!”
당황한 장철호는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그래도 학교는 꼬박꼬박 나갔어, 자식아. 개근상도 있다고.”
“어, 정말인가 보네? 그냥 넘겨짚은 건데.”
도현은 미소를 지으며 차를 운전했다.
“걱정 마세요. 원장님은 형 칭찬만 했으니까.”
“기부하고 왔냐?”
뭔가 짚이는 게 있는지 장철호가 물었다.
“네, 조금요.”
“자식이, 그러지 말라니까.”
“형 때문에 한 게 아니에요.”
도현은 사이드미러로 멀어지는 보육원을 힐끔 쳐다봤다.
“마음이 움직여서 그런 거지.”
“하아, 그래, 마음이라는 게 움직이면 막기 어렵지.”
씁쓸한 얼굴로 조수석에 등을 깊숙이 기댄 장철호는 두 눈을 감았다.
안성 시내를 거쳐 서울로 향하던 도현은 장철호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박세중이 형에게 여전히 코치를 맡아 달라고 한다면서요. 하실 겁니까?”
“안 해. 뭐 예쁘다고 그놈 코치를 해.”
“저 없을 때 도장에 몇 번 찾아왔다는데.”
차선을 바꾸며 도현이 말했다.
“따끔하게 한 소리 해 놨으니까 더는 찾아오지 않을 거야. 신경 안 써도 돼.”
“그래요…….”
“그 녀석은 코치가 필요한 게 아니라 격투 선수로서의 책임감을 먼저 되찾아야 해. 자만심과 나태함에 빠져 시합 준비를 제대로 못 해서 패한 거니까.”
그의 말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에서 패한 박세중의 경기를 도현은 뒤늦게 인터넷에서 봤다. 확실히 그때 경기에 임하던 박세중의 눈빛과 자세는 준비된 자라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현역으로 복귀할 생각은 없는 거죠?”
“한때는 복귀 생각도 하긴 했는데, 반칙이라는 생각이 좀 들어서. 이제 그곳은 나의 무대가 아니다.”
기예잡술서상의 외공을 꾸준히 익히고 있는 장철호의 몸은 일반인이 충격을 줄 수 없는 경지에 올라 있었다. 격투 선수를 일반인이라고 표현하기는 좀 그랬지만, 장철호의 기준으로는 일반인이었다.
아마 장철호가 현역으로 복귀하면 케이지 안의 모든 경기가 싱겁게 끝이 날 가능성이 높다.
큰 명성과 부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지만 장철호는 마음을 접었다. 20대 날 선 청춘을 보낸 격투기 무대에서 그가 그리워한 건, 땀 냄새 가득한 상대방의 체취와 맹렬한 도전 의식이었지 무조건적인 승리가 아니었다.
“꼭 그걸 반칙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형이 그만큼 노력해서 이룬 경지니까요. 용주에게 매일 그렇게 맞고 버틸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겠어요?”
목검이 하루에도 몇 자루씩 부러져 나갈 정도로 매질을 당하는, 고문 같은 수련 방식을 믿고 따라갈 사람은 흔치 않다. 그 고통을 우직하게 참고 견뎌 내며 수련을 해 온 장철호였기에 외공이 빛을 발한 것이다.
“그래도 마음이 안 간다. 너 같은 격투 선수가 존재하지 않는 한, 내가 다시 그곳으로 가야 할 이유가 없어.”
며칠 전 이계에서 돌아온 도현의 주먹 한 방에 외공이 깨진 장철호는 거대한 충격을 받고 벽에 날아가 처박히고 말았다.
원래도 강했지만 씨드 나무의 샘에서 강한 힘을 흡수한 도현이 그 단단한 외공의 방어막을 손쉽게 깨고 들어온 것이다.
장철호의 몸에서 생성된 반탄력까지도 극복하고 들어온 도현의 주먹은 그야말로 사신의 손길이나 다름없어서 장철호에게 벼락같은 고통을 선사했다.
“이제 격투기 무대에서 싸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목표가 생겼다.”
“더 중요한 목표요?”
“기예잡술서의 외공을 마스터하는 거. 서른여섯 개의 혈도 중 아직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 게 스무 개가 넘어. 이것을 내 것으로 만들면, 네 주먹 한 방은 견뎌 내겠지.”
“형도 참.”
피식 웃은 도현은 라디오를 틀었다. 차 안에 잔잔한 노래가 흐르기 시작했고 장철호는 길게 하품을 했다.
일요일 오후, 차는 고속도로에서 거북이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도현아, 폭주가 해결되지 않은 게 참 아쉽다. 그렇지?”
씨드 나무의 샘에서 힘을 얻은 것까지는 좋았지만 폭주라는 시한폭탄을 없애지 못한 게 장철호는 찜찜한 모양이다.
“극강의 경지에 오르면 폭주가 사라진다고 했으니, 노력해 봐야죠.”
스므차 성주가 한 말을 떠올리며 도현이 답했다.
“가늠이 안 된다. 지금도 네 능력을 보면 인간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인데, 이 정도 수준으로도 안 된다면 극강의 경지라는 게 도대체 어떤 거야?”
“글쎄요.”
도현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계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몇 개월 안 된다고 했는데, 그럼 또 스톤을 찾아야 하잖아?”
“그러면 좋겠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스톤을 못 구해도 너무 실망하지 마라.”
“예. 근데, 철호 형, 고시원에서 이제 그만 나와야죠?”
도현은 지나가는 말로 슬쩍 물었다.
“…….”
장철호는 지금도 고시원에 살며 막노동을 하고 있었다.
“제가 이번에 이계에서 꽤 많은 돈을 벌어 왔잖아요. 도장 가까운 데 집 구해 놓을 테니까, 그곳에서 사는 건 어떠세요?”
사실 도현이 오늘 장철호와 함께 보육원을 방문한 이유는 그의 도움을 받지 않으려는 장철호를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도현에게 수십억이 있어도 장철호는 단돈 천 원조차 그냥 받으려 하지 않았다.
어깨 부상을 당한 이후로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려는 그의 삶의 태도는 존중하고 이해하지만, 도현은 자신의 수중에 돈이 풍족해질수록 그냥 지켜만 보는 게 불편했다.
“고맙긴 한데…… 전에도 얘기했잖아, 난 지금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고. 좁은 고시원도 내게는 편안한 장소다.”
“도장 가까이 집이 있으면 좋잖아요. 검 수련이나 외공 수련도 하기 좋고.”
“그럼 도장과 가까운 고시원을 찾아볼까?”
“형.”
“농담이야, 자식아. 눈을 크게 뜨고 노려보기는.”
헛기침을 한 그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고시원에서 조만간 나올 생각이었어. 일 하면서 돈이 좀 모였거든. 도장 근처에 작은 월세를 구할 돈은 되니까 굳이 날 도우려고 할 필요 없다.”
도현은 잠시 말없이 운전을 하다가 주머니에서 이계에서 가지고 온 금화 한 개를 꺼냈다.
“받으세요.”
“이건 왜?”
“기념품이에요.”
철호는 물끄러미 도현의 손가락 사이에 끼인 금화를 내려다보다가 손을 뻗어 받았다.
“좋네, 금화.”
“좋죠? 한 개 더 있는데 받으실래요?”
“그럴까?”
심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은 하룻밤 사이에 흑발이 백발이 되고 한순간에 늙어 버린다는 말이 있다.
청선이 그 말에 꼭 부합됐다.
사부인 태선군에게 버림받은 그는 중년의 나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얼굴엔 주름이 가득했고 머리카락은 눈처럼 희게 변해 있었다.
70대 노인이라고 해도 믿길 정도였다.
산속 바위에 앉아 초점 없는 시선으로 산 아래를 내려다보던 청선이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허허, 허허허. 하하하, 하하하하!”
깊은 산중에 그의 공허한 웃음소리가 메아리쳤다.
“기껏 살려 놓았더니 네 녀석이 하는 짓이라고는 매일 미친 자처럼 웃는 것뿐이로구나.”
못마땅한 표정으로 다가온 무허는 바위에 올라 청선의 옆에 가부좌를 틀었다.
바위는 길고 넓어서 두 사람이 앉아 있어도 공간이 넉넉했다.
두 사람 사이엔 냉랭한 기류가 흘렀다. 웃음을 그친 청선은 무허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차라리 날 그 자리에서 죽게 놔뒀어야 했소. 그랬다면 이리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테니까.”
“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사부에게 짐승처럼 버려지고 목숨까지 위협받았는데도 말이다. 네게 지금 필요한 건 분노와 복수심이지 그런 나약한 말들이 아니야.”
“사숙은 내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오.”
“내가 노일문을 죽여서?”
청선은 죽은 노 사제를 떠올리며 먼 곳에 시선을 두었다.
“사숙이 분란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섭상도 다른 사제들도 그날의 참극을 일으키지 않았을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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