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3] 디 임팩트 17권 3화
료쿄는 몸을 돌려 캠프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구사저, 같이 갑시다! 내가 실제로 그렇게 하겠다는 말은 아니잖습니까?”
“내일 이 산을 내려가야겠어, 이곳은 찾아볼 만큼 찾아봤으니까.”
명상에 잠겨 있던 도현이 두 눈을 서서히 떴다. 홍영이 맑은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만 일어나셔야죠, 관장님. 위에서 다들 기다리고 있다고요.”
장난스럽게 말하는 홍영을 향해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인 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명상을 한다는 게 3시간을 넘게 해 버렸다.
관장실에 준비해 놓은 목검을 챙긴 도현은 홍영과 함께 지하 도장을 나와 5층으로 향했다.
5층 도장엔 최준영이 상기된 얼굴로 다른 관원들과 함께 도현이 오기만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도현이 홍영과 함께 들어서자 최준영은 건조해진 입술에 침을 한번 묻혔다.
“오셨습니까, 관장님.”
최준영을 비롯해 호태식, 이호선, 김유진이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형식적인 인사가 아닌 따뜻한 감정을 담아 인사를 건넨 도현은 용주 옆에 섰다.
용주는 도현이 자신의 옆에 서자 목청을 가다듬은 뒤 입을 뗐다.
“오늘은 최준영 관원의 목검 수여식이 있겠습니다. 최준영 앞으로.”
“앞으로!”
군대처럼 복명복창을 한 최준영이 후다닥 뛰어서 도현 앞에 섰다.
‘아, 드디어 목검을 받게 됐어.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고된 체력 훈련과 보법 수련을 거친 최준영은 터져 나오려는 감격의 눈물을 이를 악물고 참았다.
도현은 감정에 복받쳐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진 그를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좀 더 일찍 목검을 줬어도 됐는데…… 아무튼 고생했다.”
“아닙니다, 관장님! 참을성을 키울 수 있어서 제게는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럼 한 달만 더 해 볼까?”
“아, 아닙니다.”
“잘 따라와 줘서 고맙다. 이제 넌 우리 도장의 네 번째 정식 관원이야.”
도현은 최준영에게 목검을 건넸다. 귀중한 보물처럼 양손으로 목검을 받은 최준영은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감사합니다, 관장님. 열심히 호검술을 배우겠습니다.”
“목검은 날이 없는 나무 검이지만 항상 날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신중히 다뤄야 한다. 검은 마음가짐이 절반이야.”
“명심하겠습니다.”
“너 눈물이 왜 이렇게 많아?”
용주는 콧물을 훌쩍이며 눈물을 흘리는 최준영을 형처럼 토닥여 줬다.
“뚝 그쳐.”
“조 사범님, 감사합니다.”
“내일부터 호검술 빡 시게 가르쳐 줄 테니까 정신 바짝 차려. 알았어?”
“예.”
“축하해.”
김유진 작가의 말에 도복 소매로 눈물을 훔치던 최준영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축하한다. 잘 버텼어.”
이호선 피디와 호태식의 축하 말에 최준영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선배님들. 열심히 하겠습니다.”
관원들이 축하해 주는 모습을 한쪽에서 지켜보던 도현은 담담한 얼굴로 벽에 걸린 액자 속 아버지의 사진을 봤다.
‘아버지, 관원들 수는 적지만 그래도 다들 괜찮아 보이지 않습니까?’
아버지 사진을 한동안 바라보던 도현은 홍영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한 사람이라도 가르쳐야 한다며 도장 문을 열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었다.
아버지 복수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던 도현에게 사실 그것은 그렇게 큰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주장이 옳았다. 아버지의 호검술 도장이 이렇게 명맥을 이어 가게 된 것이다.
도장의 명맥이란 결국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가 존재할 때만이 유지된다.
“고마워요, 홍영 씨.”
“뭐가요?”
“이 모든 게요.”
도현의 깊은 시선에 홍영은 볼이 약간 붉어졌다.
“자, 다들 이쪽으로 모여 보세요.”
5층 사범실에서 카메라를 들고 나온 용주가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도장 벽이 너무 허해. 단체 사진이라도 찍어서 걸어 놓읍시다.”
“뽑아서 저희들에게도 한 장씩 주세요.”
김유진 작가가 좋아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열 장씩이라도 뽑아서 줄 테니까, 자 자, 얼른 관장님 옆에 나란히 서요.”
호태식은 은근슬쩍 도현의 오른편에 섰다. 이왕이면 관장 옆에 나오는 사진이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비단 그만이 아니었다. 이호선 피디와 김유진 작가가 서로 자기 자리라며 우기고 있었다. 도현의 바로 왼편은 홍영의 차지였기 때문에 감히 그 자리까지는 넘보지 못한 것이다.
“저기 오늘은 제가 목검을 받은 날인데요. 제가 관장님 오른편에 서면 안 될까요?”
최준영의 말에 호태식과 이호선, 김유진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새카맣게 어린 후배가 어디서. 넌 끝에 가서 서.”
“예? 하지만.”
“왜 이렇게 시끄러워!”
지금껏 조용히 사진 찍기를 기다리던 장철호가 소란을 참지 못하고 눈을 부라렸다. 그는 도장에서 장 사범으로 통하고 있었다.
“관장님이 계속 기다리고 계시잖아.”
“죄송합니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얼른 결정해.”
결국 즉석에서 가위바위보를 한 그들은 이긴 순서대로 도현의 오른편에 나란히 섰다.
“헤헤.”
김유진 작가는 싱글벙글 웃으며 도현의 옆에 섰다. 그녀가 최후 승자인 것이다.
그 옆으로 호태식과 이호선 그리고 최준영이 섰다.
“자, 그럼 찍습니다!”
삼각대에 카메라를 맞춰 놓은 용주는 자동으로 사진이 찍히기 전에 얼른 달려가 최준영의 곁에 섰다.
“목검 축하한다.”
“사범님…….”
“웃어. 히이, 김치.”
번쩍이는 카메라 섬광과 함께 단체 사진이 찍혔다.
사진 속 사람들은 구김살 없는 얼굴로 모두 환하게 웃고 있었다.
#도로시
조용한 새벽.
쿠웅!
낡은 호텔 방문을 박차고 나선 용주의 삼촌 조 박사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복도를 달렸다. 그 뒤를 복면을 쓴 사내가 쫓아왔다.
위층에서 내려올 생각을 안 하는 엘리베이터를 빠르게 지나쳐 비상구 계단을 뛰어 내려가던 조 박사는 밑에서 올라오는 또 다른 복면인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3층으로 들어갔다.
“거기 서!”
복면인의 억센 영어 톤에는 화가 잔뜩 묻어나 있었다. 잡히면 끔찍한 일을 당할 것 같았다.
제발 누구라도 나타나 이 위기에서 구해 줬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품었지만 복면인들과의 거리는 점점 좁혀져만 갔다.
“죽여 버리겠어!”
잭나이프를 들고 쫓아오는 복면인의 살기등등한 모습에 조 박사의 심장은 너무 두근거려서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용주야! 삼촌 죽겠다!’
멀리 고국에 있는 조카의 이름을 속으로 부르며 절망에 빠진 그는 호텔 복도 끝에 존재하는 고풍스러운 창문을 향해 몸을 던졌다.
복면인들에게 잡혀서 험한 꼴을 당하느니 차라리 모험을 해 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호텔 3층에서 떨어지더라도 반드시 죽는다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빼빼마른 조 박사는 품 안에 안고 달리던 튼튼한 사각 가방을 방패처럼 앞으로 내민 채 창문을 부수고 호텔 건물 바깥으로 뛰어내렸다.
“독한 새끼!”
박살이 난 호텔 복도 끝 창문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복면인들은 능숙한 몸놀림으로 호텔 외벽을 타고 내려갔다.
거미 인간처럼 벽을 타고 내려온 그들은 머리에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조 박사에게 다가갔다.
숨은 쉬고 있었다.
피가 묻은 조 박사의 가방을 챙긴 그들은 호텔 직원과 사람들이 모이자 황급히 자리를 떴다.
일주일 뒤, 머리에 붕대를 감고 팔에 깁스를 한 조 박사는 런던에 있는 병원에서 퇴원을 했다. 3층에서 뛰어내린 그는 호텔 옆 인도의 가로수에 걸리면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것이다.
아직 움직이기 불편한 몸을 이끌고 병원을 나선 그는 택시를 잡아탄 후, 한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용주야.”
-네, 삼촌. 오랜만이네요. 왜 그렇게 연락이 안 돼요?
“그럴 일이 있었다.”
-도현이 돌아왔어요.
“별일 없었지?”
-그럼요, 도현이는 불사신이잖아요. 근데 목소리가 왜 그래요? 어디 편찮으세요?
“그게 말이다…….”
조 박사는 잠시 망설이다가 자신에게 벌어진 일들을 설명했다.
-예? 뭐라고요!
용주는 조 박사가 런던의 고미술상에게 큰돈을 주고 구입한 중세 유물을 강탈당한 데다 호텔에서 떨어지기까지 했다는 말에 크게 놀라며 흥분했다.
-경찰에 신고는 하셨어요?
“당연히 했지. 하지만 아직 범인들에 대한 단서도 못 찾고 있는 것 같아.”
-호텔에 CCTV와 목격자들은 있을 거 아니에요.
“그것만으로는 어려운가 봐. 내 사건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이대로 사건이 묻힐 것 같다는 삼촌의 힘없는 암시가 용주의 피를 뜨겁게 만들었다.
-아, 열 받네.
“대체 그놈들이 어떻게 알고 날 찾아왔는지…….”
-뻔하죠! 삼촌에게 물건 판 놈들이 다시 회수해 간 거라고요. 그렇지 않으면 그놈들이 어떻게 삼촌 물건을 노리고 왔겠어요. 딱 보면 답 나오잖아요.
“나도 그런 의심이 들긴 하지만 증거가 없으니.”
-걱정 마세요, 삼촌. 이 쌍놈의 새끼들 제가 가서 다 조져 버릴 테니까요. 아, 죄송합니다, 삼촌. 제가 입이 좀 걸었네요. 아무튼 걱정 마세요. 제가 영국으로 가서 복수해 드릴게요.
“고맙긴 하다만 그러다 네가 다칠 수도 있어.”
-지금 삼촌 돌아가실 뻔한 거라구요. 그걸 듣고 제가 어떻게 참습니까?
흥분한 용주의 목소리가 점점 커져만 갔다.
-그리고 한두 푼 손해 보는 거예요? 1억 넘게 주고 산 물건이라면서요. 돈을 회수하든지 아니면 물건을 되찾든지 해야죠. 삼촌의 치료비도 받아 내고.
“너 영어 못하잖아. 와도 어떻게 일을 처리하려고. 난 거동하기가 쉽지 않은 형편이다.”
-영어에서 막히네, 젠장. 아, 삼촌, 옆에 도현이 있는데요. 잠시 바꿔 달라네요. 아무튼 제가 갈 테니까 그렇게 아세요.
도현이 용주의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박사님, 많이 다치셨습니까?
“3층에서 떨어진 것치고 심한 부상은 아니네. 머리가 좀 찢어지고 팔이 부러졌지.”
-위험한 상황이었군요.
“후우, 긴박했지, 난생처음 그런 공포감을 느꼈으니까.”
자조 섞인 말을 한 조 박사는 택시 창밖을 응시했다.
-박사님, 빼앗겼다는 중세 유물이 꼭 필요한 물건입니까?
“초고대 문명을 연구하는 내게는 귀중한 자료라고 말할 수 있네.”
-그럼 제가 영국으로 가겠습니다.
“자네가 오겠다고?”
-네, 찾는 데 힘을 써 보겠습니다.
관원들 교육은 당분간 홍영과 장철호가 봐주기로 했다.
큰일 만들지 말고 조심하라는 홍영의 걱정 어린 말과 범인들을 3층에서 한 명씩 떨어뜨리고 오라는 장철호의 무시무시한 말을 동시에 듣고 온 도현과 용주는 런던 히드로 공항에 발을 디뎠다.
입국 심사를 마친 그들은 작은 짐 가방을 들고 택시에 탔다. 좋은 일로 온 게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표정은 다소 무거워 보였다.
“물건을 팔고 다시 회수해 가! 상도라고는 전혀 없는 양아치 새끼들 같으니라고.”
용주는 삼촌이 죽을 뻔한 일에 분노하고 있었다.
“아직 배후가 누군지 확실치 않아. 차분히 접근해 보자.”
“그래야 되겠지만 정황상 그렇잖아. 삼촌이 중세 유물을 구입한 걸 어떻게 알고 찾아왔겠어? 그것도 구입한 지 몇 시간도 안 돼서 말이야.”
“너무 쉽잖아.”
“쉬워?”
“그래.”
도현은 택시 창밖으로 보이는 런던의 풍경을 보며 차분히 말을 이어 갔다.
“쉽게 의심받을 상황에서 정말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게 선뜻 이해가 안 돼서. 이면에 다른 일이 얽혀 있을 수도 있고.”
“도현아, 생각이 많아지면 핵심을 놓치게 된다고.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 이건 그냥 보이는 대로 믿으면 돼. 삼촌을 만만하게 여기고 수작을 부린 거라고.”
“과연 그런 걸까?”
도현은 생각 깊은 얼굴로 가까워지는 호베어 호텔을 응시했다. 이곳은 일전에 그가 숀을 만나기 위해 영국을 방문했을 때 머문 숙소였다.
작은 공원이 앞에 보이는 아담하고 고풍스러운 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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