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4] 디 임팩트 17권 4화
지금은 이곳에 조 박사가 머물고 있다. 며칠 전 통화를 할 때 이 호텔에 머물 것을 도현이 권했기 때문이다.
“박사님을 만나 자세한 얘기를 들어 보자. 아직 우린 중세 유물이 뭔지도 모르잖아.”
호텔에 들어선 도현과 용주는 예약한 그들의 방에 짐을 풀고 곧장 아래층에 머물고 있는 조 박사 객실을 찾아갔다.
“왔구나.”
문을 열어 준 조 박사는 자신 때문에 먼 길을 오게 한 게 미안했는지 헛기침을 몇 번 했다.
“몸은 어떠세요?”
“괜찮다.”
“어디 봐요.”
용주는 머리가 찢어지고 팔에 깁스를 한 삼촌의 모습에 속이 상했는지 툴툴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아니, 물건이 아무리 아까워도 그렇지, 그냥 먹고 떨어지라고 하고 몸만 피하셨어야죠. 왜 그걸 끝까지 가지고 도망치셨어요?”
“분위기가 그랬다. 꼭 날 죽일 것 같았어.”
“아오, 이 자식들을 그냥.”
분을 참지 못한 용주는 객실 냉장고를 열어 맥주를 들이켰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집안에 남은 어른이라고는 잔소리 심한 어머니와 눈앞에 삼촌이 전부였다.
“제가 아버지 제사는 지내도요, 삼촌 제사는 안 지낼 거거든요. 그러니까 조심 좀 하고 다니세요.”
“험, 알았으니까 그만해.”
조 박사는 방에 들어와 한마디도 않고 옆에 서 있는 도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네를 번거롭게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
“아닙니다, 박사님. 당연히 제가 도울 일입니다.”
“그리 말해 주니 고맙네. 앉지.”
“네.”
그들은 객실 탁자를 중심으로 둘러앉았다.
“삼촌, 중세 유물은 정확히 어떤 물건입니까?”
용주는 전화상으로 자세히 듣지 못한 중세 유물에 관해 먼저 물었다. 조 박사는 약을 복용한 후 천천히 입을 뗐다.
“중세에도 초고대 문명을 연구하던 사람이 있었다. 잉글랜드 출신의 학자인데, 지금의 독일 지역을 여행하던 중 누군가 그를 고발했다. 신을 부정하는 증거들을 모으고 있다고. 그는 붙잡혀 종교재판에 처해졌지. 그는 독실한 신자라고 주장하며 자신은 신을 부정하는 게 아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초고대 문명을 연구하는 것뿐이라고 호소했다.”
“삼촌도 그때 유럽에 있었으면 같은 이유로 고발당했겠네요.”
“아마 그랬을지도 모르지.”
조 박사는 깁스한 팔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이단으로 몰린 그는 종교재판 끝에 화형을 당했다. 당시 성직자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역사 너머에 또 다른 문명이 존재했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거든. 물론 지금도 소수 의견에 불과한 입장이지만 말이다. 내가 런던에 있는 고미술상에게 구입한 중세 유물은 바로 이 학자가 당시 소지한 연구 기록들이야. 두 권의 두툼한 책자지.”
“화형을 당했다면 학자가 소지한 물품들도 파괴당하거나 불살라졌을 것 같은데요.”
도현은 종교재판까지 간 그의 물품이 남아 있다는 게 좀 의아했다.
“운 좋게도 남아 있었네. 독일 시골 마을에서 새 건물을 짓다가 인부들이 지하에서 다른 물품들과 함께 발견했지.”
“그렇군요.”
“삼촌, 그러면 중세 학자의 연구 기록을 1억 넘게 주고 구입했다는 겁니까?”
“그래, 그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이니까. 중세 시대까지만 해도 존재했던 초고대 문명의 여러 흔적이 지금 시대로 오는 과정 중에 전쟁과 천재지변을 겪으며 수없이 파괴되고 사라져 갔다. 지금 이 시대에 남아 있는 건 아주 극소수야. 그걸 탐사해 내는 일도 보통 어려운 작업이 아니고.”
조 박사는 말을 하다가 머리가 약간 어지러운지 붕대가 감긴 옆머리를 손으로 살짝 받쳤다.
“괜찮으십니까, 박사님.”
도현이 걱정스레 묻자 조 박사는 별일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치며 말을 계속했다.
“지금은 사라진 초고대 문명의 흔적을 조사하고 연구한 중세인의 기록은 그런 의미에서 상당히 중요해. 어쩌면 차원 이동 장치를 가동시킬 수 있는 유일한 에너지원인 스톤에 관해서도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 몰라. 그건 자네에게도 중요하지 않나?”
조 박사의 시선은 도현의 왼팔로 가 있었다. 옷에 가려져있지만 차원 게이트를 열 수 있는 타투가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스톤에 관해 언급이 되어 있었습니까?”
도현이 살짝 놀라며 물었다.
“그렇진 않네. 가능성을 열어 두자는 것이지.”
“네에…….”
“삼촌, 괴한들에게 빼앗기기 전에 중세인이 남긴 기록을 얼마나 읽으셨어요?”
“몇 페이지 되지 않아.”
삼촌의 대답에 용주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겨우요? 괴한들에게 빼앗기기 전에 몇 시간은 읽어 보셨을 거 아니에요.”
“중세 영어와 라틴어 그리고 암호 같은 언어 체계로 기록되어 있어서 한눈에 알아보기 어려웠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해독하면서 읽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책이야.”
“와아, 어려운 책인가 보네.”
“박사님, 죄송하지만 그 책이 중세인의 기록이라는 건 확실합니까?”
조 박사를 무시하는 질문은 아니었다. 도현으로서는 꼭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기 때문이다.
“겉모습은 속여도 내용까지 조작할 수는 없네. 비록 몇 페이지밖에 읽어 보지 않았지만 결코 가짜가 아니야. 초고대 문명을 연구하는 나를 속일 수는 없지.”
확신하는 그의 말투에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박사님. 그럼 박사님이 어떻게 그 책을 구입하게 됐는지 그 과정과 판매한 런던 고미술상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도현과 용주는 클래식한 분위기를 풍기는 골목 상점 거리로 들어갔다. 조 박사가 말한 런던 고미술상은 이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고풍스러운 작은 간판을 하나씩 확인하던 그들은 ‘도로시’라는 간판이 붙은 가게 앞에 섰다.
원목으로 만들어진 타원형의 출입문은 감옥의 입구처럼 무겁고 음산해서 관광객이나 시민들은 일부러 피해 가려 할 것 같았다.
도로시라는 간판 밑에 ‘희귀한 옛 물건들을 팜’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지 않았다면 이 가게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조차도 짐작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야, 분위기 죽인다. 입구부터 아주 범죄 소굴처럼 느껴지네.”
“아직 드러난 게 없어. 확실해질 때까지는 일 만들면 안 돼.”
“알았어. 어차피 난 말도 안 통할 테니까 뒤에서 조용히 듣기만 할게.”
용주의 다짐을 받은 도현은 가게 문을 열기 전 다시 한 번 간판을 올려다봤다.
‘오즈의 마법사 주인공 소녀가 도로시였지. 가게 이름이 독특하군.’
도현은 문을 밀고 들어갔다.
은은한 조명 아래 작은 앤티크 가구와 소품 들이 그리 넓지 않은 가게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한쪽에 놓인 유리 진열대 안에는 수백 년은 되어 보이는 회중시계와 도자기, 서적 등이 따로 전시되어 있기도 했다.
가게 밖에서 느껴지던 것과 달리 아늑한 분위기였다.
“어서 오세요.”
책을 읽고 있던 젊은 여성이 책을 덮으며 도현과 용주에게 인사를 건넸다.
코와 입술에 서너 개의 피어싱을 한 그녀는 가게 내부를 가리켰다.
“구경하시고, 가격이 궁금하면 말씀하세요.”
그녀는 자신의 의무를 다 한 듯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책에 시선을 던졌다. 손님을 귀찮아하는 것이 도현의 눈에 보였다.
상품으로 진열된 고풍스러운 의자에 앉아 책을 읽던 그녀는 도현이 말없이 서 있자 고개를 들어 눈을 찡그렸다.
“물건 사러 온 거 아니에요?”
“이 가게의 주인인 루이스를 만나러 왔습니다.”
“아버지를요?”
“부친이십니까?”
“네.”
책을 접어 한쪽에 올려 둔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도현 앞에 섰다. 이제 막 성인이 된 듯 보이는 그녀는 진한 화장과 피어싱이 어우러져서 상당히 거칠고 반항적으로 느껴졌다.
“무슨 일로 아버지를 찾아온 거죠?”
“직접 만나 할 얘기라서…….”
“어디서 왔는데요?”
“한국에서 왔습니다.”
“한국?”
그녀는 도현의 위아래를 살피다가 몸을 돌려 위층으로 올라가는 나무 계단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계단을 오르지 않고 위를 향해 외쳤다.
“아빠! 아빠!”
“왜 그러냐!”
위층에서 나이 든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려와 보세요!”
“아직 네가 일할 시간이 남아 있을 텐데.”
“그게 아니라 아빠를 찾는 사람들이 왔어요.”
“날?”
잠시 후 말쑥한 정장 차림의 남성이 계단을 통해 밑으로 내려왔다.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는 배가 조금 나왔고 키는 작은 편이었다. 눈매가 제법 날카로운 그가 딸의 옆에 섰다.
“날 찾아왔다고요?”
“네.”
“무슨 일로?”
“얼마 전 이분과 거래를 하셨죠?”
도현은 조 박사의 사진을 보여 줬다. 사진을 본 루이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 누구요?”
“이분의 부탁을 받고 한국에서 온 사람입니다. 이곳에서 구입한 고가의 물건을 강도당했다고 해서요.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는 중입니다.”
“날 의심해서 찾아왔군.”
루이스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일이라면 경찰이 찾아와서 벌써 조사하고 돌아갔소. 난 그 강도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소. 제일 먼저 의심받을 사람이 나인데, 미쳤다고 내가 그런 짓을 벌이겠소?”
“물론, 그러시겠죠. 제가 여길 찾아온 건 당신을 의심해서가 아니라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입니다.”
“뭘 말이오?”
“밤늦게 이곳에서 거래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시간 뒤에 괴한들이 조 박사님을 찾아와 물건을 빼앗아 갔죠. 이 거래를 알고 있는 사람의 소행이라고밖에 추정이 안 됩니다.”
“이봐요, 지금 우리 아버지를 의심하는 거 맞잖아요!”
루이스의 딸이 벌컥 화를 내며 도현을 노려봤다.
“그렇게 들렸다면 미안합니다. 제가 알고 싶은 건 사전에 이 거래를 알았던 또 다른 사람이 있느냐입니다.”
도현은 루이스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떠올려 보십시오, 이 거래를 당신 말고 누가 또 알고 있었는지.”
“음…… 그날 거래는 내가 직접 했고, 아는 사람도 나밖에 없었소.”
“직원분은요?”
“직원이 임신을 해서 한 달 전부터는 나 혼자 이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소.”
“여기 따님도 그날 거래를 몰랐습니까?”
도현의 지적에 루이스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내 딸을 의심하는 거요?”
“그냥 물어보는 것뿐입니다.”
루이스는 도현을 노려보다가 딸에게 고개를 돌렸다. 딸의 이름을 따 도로시라는 골동품 가게를 연 그는 무뚝뚝하게 답했다.
“내 딸도 그날 거래가 있는 줄은 몰랐소.”
“그렇군요. 괴한들이 조 박사님의 다른 소지품은 건들지 않은 걸 보면 목표는 그 중세 유물이 분명해 보이는데, 왜 그랬을까요?”
“뭘 말이오?”
도현은 가게 안을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중세 유물은 이곳에서 6만 파운드에 거래됐다고 들었습니다. 큰 금액이긴 하지만 여러 명의 강도들이 먹잇감으로 삼기에는 어딘지 부족해 보여서요. 당장 현금화할 수 있는 물건도 아닐 텐데요.”
“글쎄,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소. 뭔가 이유가 있겠지.”
“그렇죠, 이유가 있겠죠.”
담담히 미소를 지은 도현은 루이스와 그의 딸 도로시를 둘러보며 말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 박사에게 내 말을 전해 주시오.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져 나도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씀 전해 드리죠.”
도현은 인상만 잔뜩 쓰고 뒤에 서 있던 용주를 데리고 도로시 고미술품상을 나왔다.
“도현아, 뭐 수상한 점 느낀 거 없냐?”
“넌?”
어두워진 골목길을 걸으며 도현이 되물었다.
“영어가 달려서 대화 내용은 정확히 모르겠는데, 그 딸내미가 수상해.”
“어째서?”
“너하고 루이스가 대화를 나눌 때 옆에서 왠지 불안해하는 것 같았거든.”
“아버지 일이니까 신경이 쓰였나 보지.”
“넌 못 봤겠지만 허리 뒤로 감춘 손가락이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고. 이 일과 관련해 뭔가 알고 있는 게 분명해.”
도현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루이스의 딸이 보였다. 어둠을 뚫고 한 줄기 빛처럼 쏘아 오는 도현의 시선에 깜짝 놀란 도로시는 유령을 본 듯한 표정을 지으며 황급히 가게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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