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7] 디 임팩트 17권 7화
#오웬
커피 잔을 든 도현은 호텔 객실의 커튼을 젖혀 길 건너편 공원을 응시했다. 팔에 깁스를 한 조 박사와 용주가 산책하는 모습이 멀리 보였다.
런던에 온 지 오늘로 6일.
루이스와 그의 딸 도로시가 용기를 내어 런던 경찰에게 조 박사 사건과 관련된 새로운 진술을 했지만 여러 날이 흘러도 수사는 진척이 없었다.
공원에서 산책 중인 용주와 조 박사를 지켜보던 도현은 몸을 돌려 탁자 위에 놓인 종이를 내려다봤다.
‘장미꽃 세 송이를 입에 문 뱀이라…….’
루이스를 위협해 조 박사의 정보를 캐내던 복면인은 당시 루이스가 기르던 개에게 공격당해 팔소매가 길게 찢어졌다고 했다. 이 그림은 그때 드러난 복면인의 팔에 새겨진 타투다.
루이스는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그의 딸 도로시는 숨어 있는 그녀 앞을 복면인이 스쳐 지나갈 때 그 타투를 똑똑히 목격했다고 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워낙 긴장된 상황이어서 그녀는 사진처럼 그 장면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경찰에게도 이 정보가 전달된 상태지만 과연 이것이 사건을 풀 실마리가 될지 아직은 장담할 수가 없었다.
‘흔한 타투는 아닌 것 같아. 어떤 상징물인 것 같기도 하고.’
그림을 보던 도현은 옆에 사진으로 시선을 옮겼다. 루이스의 가게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에 찍힌 이 사진 속 남성은 마스크에 안경, 거기에 모자까지 깊숙이 눌러써서 사진만으로는 신원을 파악하는 게 불가능했다.
이 남성은 조 박사가 유물을 구입해 간 직후 찾아온 사람이다. 중세인이 남긴 연구 기록 유물을 사고자 했지만 10분 차이로 놓친 운이 없는 사람으로, 루이스에게 그 유물을 사 간 사람이 누군지 물어보기까지 했다.
루이스는 알려 주기를 거부했고 그로부터 몇 시간 뒤 그의 집에 괴한이 들어와 강제로 조 박사 정보를 캐내 갔다.
도현은 영상을 캡처한 사진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사진 속 남자 그리고 루이스의 집에 찾아온 불청객, 조 박사의 호텔을 찾아온 자들.
범인들은 여러 명이고 다 한통속이다.
도현은 커피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런던 경찰에게만 이 일을 맡겨 둘 수는 없었다.
어디론가 전화를 건 도현은 타투 그림을 챙겨 객실을 나섰다.
“어디 가?”
호텔 복도에서 도현과 마주친 용주가 물었다.
“조지와 만나기로 했어.”
“조지?”
조지는 런던에서 조직을 운영하는 보스다. 도현이 올봄에 숀을 만나기 위해 런던에 왔다가 인연을 맺은 사람이다.
지금 도현이 가지고 있는 타투의 에너지는 바로 그의 친구 마크가 소유한 스톤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다.
“조지는 암흑가 사람이니까 이번 사건에 대해 알아봐 줄 수도 있지 않겠어?”
“그야 그렇지만 그자가 순순히 해 줄까? 또 너보고 로마 격투장인지 뭔지에서 한 번 더 뛰어 달라고 하는 거 아니야?”
“필요하다면 그렇게라도 해서 조 박사님이 빼앗긴 중세 유물을 되찾아야지.”
“같이 갈까?”
“아니, 혼자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다녀올게.”
택시에서 내린 도현은 빅토리아풍의 3층 석조 건물 앞에 섰다. 조지의 집이다.
현관문 앞에서 도현을 기다리던 조지의 부하가 알은척을 했다. 그는 로마 격투장에 ‘조지’라는 가명으로 출전한 도현에게 돈을 걸어 적지 않은 이득을 보았다.
“오랜만이오. 이번에도 로마 격투장에서 시원하게 한번 싸워 주시오. 용돈 좀 벌게.”
결혼을 해 아이가 여럿인 조지의 부하가 잇몸을 보이며 씨익 웃어 보였다.
“자, 안으로 들어갑시다. 보스께서 기다리고 계시오.”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간 도현은 3층 침실에서 조지를 만났다.
50대 후반인 조지는 잠옷 차림으로 침대에 앉아서 그의 취미인 그림 퍼즐을 맞추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팔뚝엔 링거가 연결되어 있었다.
“미안하네. 옷을 제대로 갖추고 자네를 맞아야 하는데 말이야.”
“아닙니다. 어디 편찮으십니까?”
침대로 다가가며 도현이 물었다.
“다리에 총상을 입었네.”
“어쩌다가요?”
“내가 소유한 클럽에서 마약을 취급하는 놈들이 있어서 혼을 좀 내 줬더니 날 죽이려 하더군.”
조지는 침실을 지키는 부하에게 그림 퍼즐을 건넸다.
“나머지는 네가 다 맞춰.”
“예? 제가 말입니까?”
조지의 부하는 울상을 지었다.
“복도에 있는 녀석들하고 같이 머리 맞대고 완성해. 10분 준다.”
조지의 부하는 복잡해 보이는 그림 퍼즐을 양손으로 받쳐 들고 허겁지겁 침실을 나갔다.
방엔 도현과 조지 단둘만이 남게 됐다.
“평생 지팡이 신세를 져야 한다는군.”
“그렇군요.”
“그래도 팔은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랬다면 퍼즐을 맞추는 즐거움을 잃어버렸을 테니 말일세. 그래, 자넨 그동안 잘 지냈는가?”
“네.”
도현은 대답을 하며 시기가 안 좋다고 생각했다. 총격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그에게 뭔가를 부탁하는 게 괜찮을지 모르겠다.
“자네가 찾고 있는 스톤을 알아보고는 있는데, 아직 별다른 소득이 없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정도 가지고 감사할 건 없고. 무슨 일인가? 표정을 보니 내게 뭔가 부탁을 하러 온 사람 같은데.”
“제 얼굴에 그런 게 쓰여 있습니까?”
조지는 웃으며 의자를 가리켰다.
“여기 와서 앉게. 미안하지만 술도 좀 가져다주고.”
스카치위스키를 유리잔에 따라 조지에게 건네준 도현은 의자를 들고 와 침대 옆에 앉았다.
“숀, 그 녀석에게 내가 준 5만 파운드를 줬더군.”
“사막에서 지하 유적을 꼭 찾아보겠다고 해서요. 스톤과 관련된 일이라서 지원을 해 줬습니다.”
“그 녀석은 여자와 술, 도박에 미쳤었네.”
“그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조지는 술을 한 모금 한 후 답했다.
“문제라면 문제지. 여자와 술, 도박에 미친 녀석이 지금은 사막에 미쳐서 헤매고 다니니까. 자넨 그의 증조부가 목격한 게 진짜라고 믿나? 사막에서 온갖 환상을 경험한 이들이 많아. 그의 증조부도 그중 한 명일 뿐이라네. 사막 지하에 고대 도시 유적이 있다니, 터무니없는 소리지.”
도현에게 돈을 지원받은 숀은 이집트와 리비아 사이의 사막을 탐사하고 다녔다. 5만 파운드가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풍족하게 탐사를 할 만큼 큰돈도 아니어서 그는 돈을 아끼며 사막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내가 돌아오라고 사람을 한번 보낸 적이 있는데, 절대 안 돌아온다고 하더군. 찾을 때까지 말이야. 정신 나간 녀석.”
숀을 걱정하는 듯한 조지의 말투에 도현은 조용히 물었다.
“숀이 어찌 되든 상관하시지 않는 것 같았는데, 제가 잘못 본 겁니까?”
“우리 집안은 그놈 할아버지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네. 그 은혜를 잊을 순 없지. 하지만 그 녀석은 나를 믿고 술집과 도박장에서 제멋대로 생활했어. 내가 준 돈을 빚으로 여기지 않고 마음껏 사용했고. 정신이 들게 만들어 줄 필요가 있었는데, 그때 자네가 나타난 거야.”
“그랬었군요.”
“사막에서 죽고 싶다면 그렇게 내버려 둬야지. 미련한 놈.”
도현은 숀의 얼굴을 떠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술이 생각났다.
“저도 한잔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네. 마음껏 마시게. 자넨 또 다른 내가 아니던가? 조지 말일세.”
로마 격투장에 조지라는 이름으로 출전했던 도현은 피식 웃으며 술잔에 술을 따랐다.
“내게 부탁할 게 있으면 말해 보게. 부담 갖지 말고.”
“괜찮으시다면 말하겠습니다.”
도현은 조 박사 사건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조 박사가 호텔에서 겪은 일과 런던 고미술상인 루이스가 위협받은 이야기까지.
“흠, 흥미로운 일이군. 겨우 6만 파운드짜리 중세 유물을 두고 그런 일이 벌어지다니. 자네 이야기만 들으면 수십만, 아니 수백만 파운드짜리 사건 같지 않나. 범인들이 고미술상의 집에 찾아가 권총으로 위협하고 얼마 뒤 자네 지인이 머물고 있는 숙소에까지 쫓아가 그 유물을 빼앗아 가다니 말이야.”
조지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날카로워졌다.
“좀도둑이나 집에 침입한 강도들도 아니고, 그들은 분명한 목적하에 움직이고 있네. 그 물건이 자네가 알고 있는 것 이상의 가치를 지니지 않으면 벌어질 수 없는 일들이야. 이 바닥 특성상 확실해.”
도현의 머릿속에 홍콩에서 주성하와 싸웠던 때가 떠올랐다. 그 발단은 기예잡술서 때문이었다.
당시 한석호는 홍콩의 암시장에서 기예잡술서를 구입했다가 주성하에게 곤욕을 치렀었다. 그 안에 담기량의 은거지가 표시된 지도가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중세인이 남긴 두 권의 책자는 조 박사가 생각하는 것처럼 초고대 문명의 연구 기록만 담긴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물건을 판 고미술상인 루이스도 복잡한 언어 체계를 가진 그 책자를 완독하지 못했고 진품의 여부만 감별했다고 하니, 그 유물의 본모습을 정확히 안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범인들은 그 유물의 어떤 면을 보고 그런 짓을 벌인 걸까?’
도현은 품에서 도로시가 그려 준 그림을 꺼내 조지에게 보여 줬다.
“이게 고미술상을 위협했던 복면인의 팔에 그려진 타투입니다.”
“뱀이 장미꽃을 물고 있군. 그것도 세 송이나.”
“이게 현재 가진 유일한 단서입니다.”
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내가 한번 알아보지, 어떤 녀석들이 이런 짓을 벌였는지 말이야.”
“감사합니다,”
조지는 몸을 움직여 침대 머리맡에 있는 전화기를 들었다.
“차 대기해, 외출할 거니까.”
전화를 끊은 조지는 링거를 뽑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지팡이에 의지한 그의 몸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자네가 부탁을 했으니, 나도 미안하지만 부탁을 하나 해도 되겠나?”
“말씀하십시오.”
“이번 일이 해결되면 나와 함께 스코틀랜드에 있는 마크를 보러 가세. 마크를 기억하지?”
“잊을 수가 없죠, 두 분이 비가 오는 숲에서 그렇게 치고받고 싸웠는데요.”
도현의 농담에 조지는 낮게 웃으며 잠옷을 벗어 던졌다.
“얼마 전 연락 와서 자네에 대해 묻더군. 자신의 검술 실력이 상승했으니 다시 한 번 붙고 싶다고 말이야. 자네 상대가 아니겠지만 날 봐서 마크를 만나 주게.”
“부탁할 일이라는 게 그거였습니까?”
도현은 내심 로마 격투장에 다시 한 번 출전해 달라는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다. 심지어 조금 더 거친 일까지 상상을 했다. 그런 쪽 일과 관련된 게 조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부족하면 다른 부탁을 더 해도 되나?”
조지는 방에 들어온 부하들의 도움을 받아 옷을 완전히 갈아입었다.
“그거면 난 충분하네.”
“아직 멀었어?”
“기다려 봐.”
“언제까지 그 말만 반복할 거야? 벌써 2주가 넘었잖아!”
맥주 캔을 우그러트린 30대 사내는 그것을 벽에 집어 던졌다. 벽 밑엔 그가 먹고 버린 빈 맥주 캔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 고서를 해석하느라 고생하는 건 난데, 왜 네가 성질내는 거야? 빈둥빈둥 놀고 있는 자식이.”
낡은 고서를 해석하던 필립은 퉁명스럽게 말하며 종이를 넘겼다. 중세 영어와 라틴어가 혼합된 고서는 작가가 암호처럼 글을 배치해 놔서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대학에서 언어학을 전공하고 유럽의 옛 문헌을 오랫동안 연구해 온 경력이 없었다면 지금보다도 훨씬 책 해석에 곤란을 겪었을 것이다.
“빈둥빈둥 놀고 있다니. 그 책을 구해 온 게 누군데 그딴 말을 지껄이는 거야?”
“알았으니까 좀 작작하라구.”
신경질적으로 생긴 고서 연구가 필립은 물을 따라 마신 후 다시 책에 집중했다.
격투기 선수처럼 길쭉하고 탄탄한 몸을 자랑하는 롤란드는 소파에서 일어나 필립에게 얼굴을 들이댔다.
“이번 일을 도와준 녀석들이 약속한 돈을 언제 줄 거냐고 성화야. 그 돈 못 주면 너나 나나 곤란해진다고.”
“글쎄 기다려 보라니까. 이 책에 틀림없이 그 주문이 있어. 그 주문만 찾아내면 4백만 파운드는 우리 거라니까.”
필립의 장담에 롤란드는 한발 뒤로 물러났다.
“아니면 넌 내 손에 죽는다. 아무리 친구라 해도 정말 널 죽일 거야. 너 때문에 시작한 일이니까. 알겠어?”
“걱정 마. 책이 예상보다 어려워서 그래.”
“맥주하고 먹을 것 좀 사 가지고 올게.”
집을 나선 롤란드는 주변을 살피며 거리를 걸었다.
마켓에서 술과 음식 재료를 산 그는 집으로 돌아오다 길거리에 서 있는 해리의 차를 발견했다.
해리는 10여 년 전 이라크에서 롤란드와 함께 복무한 전우로, 전역 후 이런저런 일을 해 오다 최근에는 클럽의 가드로 일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여기까지 오고?”
롤란드는 주변을 살피며 차 안에 앉아 있는 해리에게 작게 말했다.
“차에 타. 할 말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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