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 임팩트-408화 (408/575)

[408] 디 임팩트 17권 8화

“돈 때문이야? 좀 기다려. 약속한 돈은 분명히 줄게.”

“타라고, 자식아!”

어딘지 화가 잔뜩 나 있는 것 같은 그의 모습에 롤란드는 긴말하지 않고 조수석에 올라탔다. 돈 때문에 그러는 것 같지는 않았다.

롤란드가 차에 타자 차창을 올린 해리는 사나운 사냥개처럼 소리를 쳤다.

“이 병신 같은 새끼! 일 처리를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꼬리를 잡히다니!”

“무슨 일인데 그래?”

“네 빌어먹을 문신 때문에 모든 게 들통나게 생겼다고!”

롤란드의 표정이 굳어졌다.

“내 문신 때문이라니?”

“네 팔뚝에 새겨진 장미와 뱀 문신 말이야. 조지의 부하들이 그 문신의 그림을 들고 다니면서 런던 전체를 샅샅이 뒤지고 있다고. 내가 일하는 클럽에도 다녀갔고. 그 문신의 주인이 너라는 걸 머지않아 조지의 부하들이 알아낼 거란 말이야.”

놀란 롤란드는 차 옆을 지나치는 자전거를 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찾는 것일 수도 있잖아.”

“그 우스꽝스러운 장미와 뱀 문신을 너 말고 누가 또 했겠어? 그 그림은 네가 직접 그린 거잖아!”

“좋아, 좋다고. 설사 그들이 날 찾는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서 그 일과 관련해서 날 찾는 거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

“조지의 부하들이 한국인이 뛰어내린 호텔 지역 패거리들에게 그날 새벽에 목격한 게 없냐고 조사하고 다니고 있어. 이래도 그 일과 관련해서 널 찾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

롤란드는 이마 주름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미간을 좁혔다.

“그들이 왜 이 일에 관심을 갖는 거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 빌어먹을! 고미술 상인과 가까운 사이인가 보지. 아니면 그 한국인과 관련이 있거나.”

해리는 롤란드가 마켓에서 산 맥주 뚜껑을 따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무튼 조지의 부하들이 이 일에 대해 조사하고 있고, 특히 넌 타깃이 될 가능성이 높아. 그 젠장맞을 타투 때문에. 조심해.”

“알았어, 오늘 밤 런던을 떠날게.”

롤란드는 마켓에서 산 음식들을 조수석에 내려놓고 몸만 내리려 했다.

“잠깐.”

해리가 내리려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 유물을 돌려주는 건 어때? 조지가 신사적인 면이 있으니까, 약속을 받고 돌려주면 우린 무사할 것 같기도 한데.”

“큰돈을 포기하자고? 이봐 해리, 클럽에서 술 취한 녀석들 뒤치다꺼리나 하면서 평생 살 거야?”

“후우, 젠장.”

해리는 운전석 시트에 뒷머리를 여러 번 부딪히며 갈등하는 모습을 보였다.

“4백만 파운드야, 무려 4백만 파운드라고. 우리 다섯 명이 나눠 가져도 1인당 80만 파운드고. 며칠만 더 기다리면 필립이 우리에게 돈 폭탄을 뿌려 줄 거니까, 날 믿고 기다려 봐.”

“알았어. 연락해.”

해리의 차에서 내린 롤란드는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며 소리쳤다.

“필립! 런던을 떠나야겠어! 골치 아픈 자가 날 쫓고 있다고!”

집 안이 조용했다.

“필립?”

거실 탁자에서 고서를 해석하던 필립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불현듯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필립! 필립!”

집 안을 다 찾아봐도 필립은 보이지 않았다.

거실로 돌아온 그는 탁자를 내려다봤다. 지금 보니 고서도 사라졌고, 그 자리엔 필립이 남긴 흰 종이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는 굳은 얼굴로 천천히 흰 종이를 읽었다.

-고마웠다. 또 보자.

“으아아아아!”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친 그는 얼마 전까지 필립이 앉아 있었던 낡은 목제 의자를 번쩍 들어 주방 쪽으로 집어 던졌다. 식기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죽여 버리겠어!”

눈에 실핏줄이 올라온 롤란드는 씩씩거리며 서랍 안에서 권총을 챙겼다.

“책을 가지고 도망을 쳐! 배신자 새끼!”

큰돈을 벌게 해 주겠다고 해서 고미술 상인을 위협하고 한국인에게서 중세 유물을 빼앗아 왔다. 그런데 뒤통수를 친 것이다.

어쩌면 4백만 파운드짜리 주문을 벌써부터 찾아내고는 시간을 끌었는지 모른다. 그 혼자 돈을 독식하기 위해서.

아니, 어쩌면 그 책에 주문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후환이 두려워 도망갔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용서 못 해! 친구인 나를 이런 식으로 배신하다니, 역겨운 새끼.”

짐 가방을 대충 챙긴 그는 뒤돌아서다 몸이 뻣뻣해졌다. 검은 정장을 입은 다섯 명의 사내들이 권총을 들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롤란드 맞지?”

“…….”

“우리와 같이 가 줘야 되겠어.”

롤란드는 들고 있던 짐 가방을 사내들에게 내던지며 창문으로 뛰어내리려 했다. 하지만 밑에도 건장한 사내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뛰어내리는 걸 포기한 그는 뒤를 돌아봤다.

그의 머리에 권총 총구가 두 개나 다가와 있었다.

“얌전히 따라와, 죽기 싫으면.”

단서가 없는 상황에서는 천하의 도현이라도 제 능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조지로부터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어떤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며 그는 초고대 문명을 연구했다는 잉글랜드 출신 중세인 오웬에 대해 공부를 시작했다. 이번 사건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조 박사에게 오웬에 대해 대충 듣기는 했지만 그는 조금 더 깊이 파고 들어갔다.

“어디 보자. 오웬이라…….”

허리가 구부정한 백발의 노인이 돋보기안경을 곧추세우며 손때 묻은 자료철을 뒤적였다.

노인은 아흔이 넘은 재야의 학자로 중세 시대에 알려지지 않은 사건과 인물 들을 연구해 온 사람이다. 권위 있는 학계의 학자는 아니지만 야사로 치부될 수 있는 중세의 많은 사건과 그 중심인물에 대해 훤히 꿰뚫고 있었다.

고미술상 루이스의 소개로 노인을 찾아온 도현은 용주와 함께 노인의 서재에서 차를 마시며 그가 오웬에 대해 말해 주기를 기다렸다.

“여기 있군. 오웬 브라운. 14세기 잉글랜드의 작은 마을에서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군.”

원로 학자는 오웬과 관련된 자료철을 들고 느릿느릿 이동해 의자에 천천히 앉았다.

“역사에 그리 깊게 족적을 남긴 인물은 아니지만 흥미로운  사건에 관련되어 있지. 읽어 보게.”

“감사합니다.”

도현은 몸이 불편한데도 자신을 만나 준 원로 학자에게 정중하게 고마움을 표시하며 오웬의 자료철을 받았다.

서재엔 방대한 양의 자료철이 존재했다.

역사에 제대로 기록이 안 된 수많은 중세 인물들에 관한 깊이 있는 자료였다.

‘이것들을 모으기 위해 얼마나 긴 시간과 노력이 들었을까?’

도현은 원로 학자의 집념에 감탄하며 오웬 브라운의 자료철을 막 읽어 보려 했다.

그때 조지로부터 전화가 왔다.

받지 않을 수 없는 전화라 도현은 원로 학자에게 양해를 구한 후 서재를 나왔다.

“알겠습니다. 지금 그쪽으로 가죠.”

조지와 통화를 끝낸 도현은 서재로 돌아와 원로 학자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생겨서 가 봐야겠습니다. 괜찮으시면 이 자료는 나중에 와서 봐도 되겠습니까?”

“음, 그렇게 하시게. 하지만 늦게 오면 내가 죽을 수도 있으니, 빨리 오는 게 좋을 거네.”

노인의 농담 섞인 말에 도현은 밝은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사정이 허락하면 내일이라도 오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영어를 잘 못 해 차만 홀짝거렸던 용주는 인사를 힘차게 하고 도현과 밖으로 나왔다.

“야,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 급히 나온 거야?”

“조지에게서 연락이 왔어. 범인들 중 일부를 잡았다고.”

도현의 대답에 용주는 깜짝 놀라며 조수석에 올라탔다.

“정말? 유물도 찾았대?”

범인을 잡는 것 못지않게 유물을 회수하는 것도 중요했다.

“아니, 그들에겐 없었다던데.”

“젠장, 어떤 놈들이래?”

“자세한 건 아직 못 들었어. 가 보면 알겠지.”

런던 교외에 사는 원로 학자를 만나기 위해 차를 렌트해서 온 도현은 조지가 기다리는 곳으로 직접 운전을 해 갔다.

사방이 깜깜해질 무렵 도현은 수목에 둘러싸인 2층 저택에 도착했다.

폐가처럼 보이는 이 집은 도현이 숀과 조지를 처음 만난 장소다.

첫 만남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도현이 참을성이 없었다면 그날 밤 이 집에 있던 조지와 그의 수하들은 아마 큰일을 당했을 것이다.

도현은 예전 생각을 하며 용주와 함께 밴과 승용차가 주차된 공간을 지나쳐 집 가까이 접근했다.

‘이 집은 여전하군.’

2층 창문은 부서져 덜렁거리고 현관문의 조명등은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집을 둘러싼 수목 사이로 찬 바람이 들어와 요상한 소리까지 내서 집의 분위기가 한층 음산했다.

집 근처에 서 있던 조지의 부하들은 도현과 용주가 다가오자 말없이 길을 비켜 주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비명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우리를 위해 고문이라도 하나 보다.”

비명 소리에 위축되지 않은 용주는 가볍게 말하며 집 안을 살폈다.

거실에 뒤로 손발이 묶인 네 명의 사내들이 누워 있었는데, 와이셔츠 차림의 조지 부하들에게 사정없이 두들겨 맞고 있었다.

때리던 나무가 부러지자 조지의 부하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길쭉한 나무를 들어 다시 손발이 묶인 사내들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그 모습을 의자에 앉아 지켜보던 조지는 도현이 가까이 다가오자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생각보다 일찍 왔군. 찾아오는 게 힘들지 않던가?”

“그리 어렵진 않더군요.”

도현은 옆에 선 용주를 소개했다.

“제 친구입니다. 이번 일을 당한 조 박사님의 조카이기도 하죠.”

용주를 조지에게 소개한 도현은 매질을 당하는 사내들을 쳐다봤다. 뒤로 손발이 묶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안대로 눈이 가려져 있었다.

“저들이 범인입니까?”

“맞아. 저놈들이 자네가 찾는 자들일세. 처음엔 그 일과 관련이 없다고 발뺌을 하다가 손을 좀 보니까 그때서야 인정을 하더군.”

조지는 고풍스러운 파이프 담배에 불을 붙여 몇 모금 빨아 들였다.

“물어볼 게 있으면 가서 물어보게.”

“감사합니다.”

도현이 사내들에게 걸어가려는 순간, 롤란드가 고함을 질렀다.

“그만 때려, 이 개자식들아! 변호사를 불러 줘!”

“내가 변호사다!”

변호사를 찾는 롤란드의 복부를 조지의 부하가 세차게 걷어찼다.

“커헉!”

숨넘어가는 소리를 흘리며 롤란드는 걸쭉한 침을 바닥에 흘렸다. 피투성이 얼굴로 헉헉거리는 그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도현이 고개를 돌려 조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조지의 부하들이 휘두르는 몽둥이나 발길질에 감정이 크게 섞여 있었다. 그냥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게 아니었다.

“사실 저놈들을 잡다가 세 명이 크게 다쳤다네.”

조지는 칼에 찔리고 차에 부딪쳐 중상을 입은 세 명의 부하들에 대해 짤막하게 설명했다.

“운이 없었으면 목숨을 잃을 뻔했어. 그래서 내 부하들이 그 분풀이를 하고 있는 것이지.”

“그랬었군요.”

도현은 자신의 부탁 때문에 애꿎은 조지의 부하들이 다친 것 같아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원한 건 범인들이 누군지 알아내는 것이었다. 조지가 이렇게 직접 사건에 뛰어들어 범인들을 잡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이유야 어찌 됐든 조지가 손을 써서 범인들을 잡아 왔고, 그의 부하들은 다치기까지 했다.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신경 쓸 필요 없네. 어서 자네 일 보게.”

도현이 가까이 오자 땀을 흘리며 매질을 하던 조지의 부하들이 뒤로 멀찍이 물러났다.

파김치가 된 범인들은 바닥에서 헐떡거렸다.

도현은 상체가 벗겨진 롤란드의 팔을 살폈다. 도로시가 목격한 괴한의 문신과 일치했다.

“당신이었군, 루이스의 집에 침입한 사람이.”

도현의 싸늘한 말투에 롤란드는 소름이 돋았다.

“허억, 허억, 그만 괴롭혀. 나도 이용만 당한 사람이야. 모든 건 필립, 그 자식 때문에 벌어진 거라고! 유물도 그놈이 가지고 있고!”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조지에게 붙잡혀 죽도록 매질당한 것이 억울했는지 롤란드는 입을 크게 벌리며 소리쳤다.

“억울하면 모든 걸 털어놔, 내가 필립을 잡아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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