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9] 디 임팩트 17권 9화
도현의 낮은 목소리는 꼭 악마의 속삭임 같았다. 말하면 정말 그렇게 해 줄 것 같았다.
롤란드는 피가 엉겨 붙은 입술로 말했다.
“어떤 의식을 재현하는 데 필요한 주문이 고서에 들어 있다고 했소. 그걸 4백만 파운드에 사려는 사람이 있으니까 고서를 빼앗자고 필립이 날 꼬드겼지. 그래서 세 명을 더 끌어들여 고미술 상인을 위협하고 한국인으로부터 고서를 빼앗았던 거요.”
“구체적으로 말해 봐, 어떤 의식인지.”
“그 이상은 나도 모르오.”
“주문을 사겠다는 사람도?”
“그렇소.”
4백만 파운드라면 한화로 70억이 넘는 거액이다. 대체 누가 그런 큰돈을 주고 의식을 재현하는 데 필요한 주문이라며 사겠는가?
“어떤 의식인지도 모르고 누가 사려는지도 모르는데, 그의 말을 믿고 움직였다는 건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데.”
“좀 이상하긴 했지만 그가 내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소. 원래 고서를 연구하던 인간이었으니까. 더군다나 그는 오래된 내 친구이기도 했고. 이런 식으로 날 이용하고 버릴 줄은 몰랐소. 정말이오.”
롤란드는 분해하며 손가락까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필립이 갈 만한 곳은 아나?”
“모르겠소.”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눈 도현은 궁금한 표정으로 서 있는 용주에게 귓속말로 롤란드가 해 준 말을 설명했다.
“바보야, 아니면 순진한 거야? 아니, 어떤 미친놈이 그런 거액을 주고 주문을 구하겠어? 뭐, 마법 주문이야? 이계도 아니고.”
“만약 사실이라면?”
“설마. 내가 보기엔 필립이란 놈이 고서를 갖고 싶어서 이 녀석들을 이용한 것 같은데.”
“그러니까 왜 그랬겠어, 왜 이런 큰일을 벌이면서까지 그 고서를 가지려고 했겠냐고.”
도현의 반문에 용주는 생각 깊은 표정으로 바닥에 엎어져 있는 사내들을 둘러봤다.
“글쎄…… 그러고 보니 아니라고 하는 것도 좀 이상하긴 하네.”
“저자 말에 의하면, 보름이 넘도록 필립은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고서를 해석했어. 뭔가를 찾고 있었던 건 분명해 보여. 그게 주문일지 아니면 또 다른 것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 자식을 잡으면 모든 게 확실해질 텐데. 친구 배신하고 도망친 이놈을 어떻게 추적하지? 이놈을 잡아야 유물도 회수할 수 있잖아.”
“생각 좀 해 보자.”
도현은 뒤에서 지켜보던 조지에게 다가갔다. 그는 도현이 롤란드와 대화하는 걸 뒤에서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4백만 파운드짜리 주문이라. 웃음이 나오는군. 차라리 보물이 숨겨진 비밀 장소가 그 고서에 기록되어 있다고 하면 내가 믿겠는데 말이야. 안 그런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죠. 보물이 숨겨진 장소.”
“왜 웃나? 충분히 가능성 있지 않나? 나도 갑자기 관심이 생기는군.”
총상을 입어 다리가 불편해진 조지는 지팡이에 몸을 기대며 도현을 지그시 응시했다.
“내 인맥을 동원해 필립을 찾아보겠네. 경찰 쪽에도 친분이 있는 사람이 있어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야. 단, 보물과 관련된 거라면 내 몫도 보장해 주게.”
“그렇게 하죠.”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보물이었다. 도현에게 중요한 건 그런 것보다는 필립을 찾아 오웬 브라운의 연구 기록을 하루빨리 되찾는 것이다.
조 박사 말대로 혹시 그 안에 스톤과 관련된 정보가 있다면 그것은 돈으로 측정할 수 없는 큰 가치를 가진다.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도현이 롤란드와 세 명의 사내들을 가리켰다.
“저들을 이대로 경찰에 보내면 난 더 이상 이 일에 개입할 수가 없네. 분명히 저 녀석들 입에서 내 이야기가 나올 테니까.”
“그럼 어쩌실 겁니까?”
“흠.”
조지는 차가운 눈빛으로 바닥에 엎드려 있는 사내들을 둘러봤다.
“선택을 하게 해야지. 조용히 숨죽이고 있든가, 아니면 내 부하들을 다치게 한 대가를 치르든가. 저들은 현명한 선택을 할 것이네.”
“현명한 선택을 하는 데 아마도 내 친구가 도움을 줄 것 같군요. 용주야.”
도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용주는 조지의 부하가 들고 있던 길쭉한 몽둥이를 넘겨받아서 한숨 돌리고 있는 범인들에게 다가갔다.
“약해. 진짜 매질이 뭔지 제대로 보여 주지.”
삼촌이 호텔에서 죽을 뻔했기 때문에 용주는 이들이 죽지 않을 만큼 딱 수위를 조절해 아픈 곳만 골라서 때렸다.
너무 아프면 입이 벌어지고 비명도 나오지 않는다. 헉헉거리는 거친 숨소리만 여기저기서 흘러나왔고 누군가는 오물을 배출하며 고통에 괴로워했다.
힘으로 매질을 했던 조지의 부하들은 미친 듯이 웃으며 매질을 가하는 용주의 광기에 놀라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기절을 해도 매로 깨워서 또 때리는 지독한 근성을 보여 준 용주는 들고 있던 몽둥이로 바닥을 힘껏 때렸다.
굉음이 나며 거실 바닥에 구멍이 났다.
매를 맞던 사내들은 몸을 부르르 떨었고, 조지와 그의 부하들도 깜짝 놀라서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거실 바닥은 망치로 내려쳐도 끄떡없는 두꺼운 목재로 되어 있었는데, 그것을 몽둥이로 박살을 내 버린 것이다.
“착하게 살자. 응?”
부러진 몽둥이를 바닥에 툭 던진 용주는 조지의 부하에게 걸어갔다.
“담배 하나 있으면 줘 봐.”
#기계와 마법
원로 학자 월터는 건물이 부서지고 화염이 솟구치는 도시의 재앙에 괴로워했다.
아이들이 불타는 건물에 깔리고 있었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신음을 흘리던 그는 초인종 소리에 간신히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놈의 꿈. 내가 죽어야지 끝이 날 것 같군.”
제2차세계대전 때 영국군 전폭기 조종사로 활약을 했던 그는 자신이 투하한 수많은 폭탄에 희생된 무고한 사람을 위해 기도를 해 왔지만 아흔이 넘도록 이 지독한 악몽은 그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멍하니 빈 허공을 바라보던 그는 흔들의자에서 일어났다. 책을 읽다가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든 것이다.
현관문으로 향하는 사이 초인종 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렸다.
“당신이로군.”
“안녕하십니까.”
도현은 낮잠을 잔 흔적이 엿보이는 원로 학자의 얼굴을 보며 인사를 했다.
“내가 죽기 전에 왔어.”
“네?”
“아니네, 아무것도. 들어오게.”
허리가 구부정한 월터는 도현에게 안으로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어제 같이 온 친구는 안 보이는군. 혼자 온 건가?”
“예.”
용주는 병원 진료를 받으려는 조 박사와 함께 병원에 갔다.
앞서 걸어가던 월터는 서재를 가리켰다.
“먼저 가 있게, 차라도 한잔 타 가지고 갈 테니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선생님이 타 주시는 차는 어제 맛봤으니까요.”
연로한 그를 이런저런 일로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제 내 차가 맛이 없었나?”
구부정한 모습으로 쳐다보는 그의 눈빛은 마치 ‘날 무시하는 거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도현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향이 좋았습니다. 그럼 서재에서 기다리죠.”
작은 도서관처럼 꾸며진 서재는 2층까지 책이 빽빽했다. 그곳 한편에 수천 개의 자료철이 존재했다.
어제 월터가 보여 주려 한 오웬 브라운의 자료철도 저것들 중 하나다.
성격이 약간 괴팍해 외부 사람을 잘 만나 주지 않는다고 했는데, 다행히 어제와 오늘은 쉽게 만나 주고 있었다. 아무래도 고미술상 루이스와 약간의 친분이 있는 사이라고 하니 그 때문에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책 좋아하나?”
쟁반을 받쳐 든 월터가 서재에 들어오며 물었다. 서재의 책들을 구경하던 도현이 미소를 머금었다.
“싫어하진 않지만, 사실 책과 가까운 편은 아닙니다. 어려서부터 운동을 좋아해서요. 그러다 보니 읽은 책도 주로 운동과 관련된 쪽입니다.”
“어떤 운동을 했나?”
어제에 이어 오늘 두 번째 만남을 가져서인지 월터는 질문을 하는 걸 크게 꺼리지 않았다.
“검술입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검을 가르치는 도장을 운영하셨거든요.”
“검술이라……. 총과 폭탄을 넘어 우주를 개척하는 시대라 검술은 참 로맨틱한 말이 돼 버렸지.”
쟁반에 받쳐 온 차 주전자를 기울여 찻잔에 찻물을 따른 월터는 탁자 앞에 앉은 도현에게 그것을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누굴 찾는다고 했지?”
“잉글랜드 출신 학자 오웬 브라운입니다.”
“맞아, 그 사람이었지. 내가 요즘 정신이 깜빡깜빡한다네. 이해하게.”
허리를 두드리며 느릿느릿 움직인 그는 중세 인물을 정리해 둔 자료철에서 오웬 브라운의 기록을 찾아 돌아왔다.
“천천히 읽게, 돈은 받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감사합니다.”
월터가 서재를 나가자 도현은 차를 한 모금 한 뒤 자료철 안의 내용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오웬 브라운은 14세기 인물로, 잉글랜드 북부의 작은 마을 멜러든에서 하급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지금은 사라진 모테로 수도원에서 신학과 고대 라틴어를 공부하기도 했던 그는 그 지역을 다스리던 귀족의 밑에서 잠시 일을 하다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로 다투던 14세기 중반 무렵 잉글랜드를 떠난다.
고대 문명에 심취한 그는 유럽과 북아프리카 일대를 돌아다니던 끝에 1362년 독일에서 종교재판에 회부돼 최후를 맞는다.
오웬 브라운, 그는 학자이자 모험가이자 고대 문명의 진실을 추적하다 비참하게 독일에서 죽은 불운한 사람이다.
‘월터는 이 사람에 대해 연민을 가지고 있군.’
도현은 오웬 브라운에 대한 짤막한 약력과 두 줄짜리 인물평을 넘어 본격적으로 이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월터가 기록한 그의 행적들을 읽어 내려갔다.
자료의 양은 많지 않았다, 10분이면 다 읽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도현은 몇 차례 반복해서 정독을 했다. 필립이 고서에서 찾는 게 뭔지 이 자료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유추해 보려 한 것이다.
‘중세인의 행적을 어떻게 이렇게 세세하게 조사했는지 놀라울 정도야.’
도현은 여러 번 읽으면서 감탄을 했다.
탁.
오웬의 자료철을 덮은 도현은 의자에서 일어나 서재 밖으로 나갔다. 월터는 거실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훌륭한 자료로 인해 오웬에 대해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랬다니 다행이로군.”
“그런데 궁금한 게 생겼습니다. 오웬의 행적을 기록하신 것 중에 말입니다.”
흔들의자에 앉아 있던 월터는 책을 덮고 도현을 올려다봤다.
“어떤 점이 말인가?”
“오웬이 잉글랜드를 떠나기 전에 그가 섬기는 귀족과 함께 ‘나무를 섬기는 자들’ 토벌 전투에 참전했다고 했는데, 그건 어떤 전투입니까? 나무를 섬기는 자들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고요?”
월터는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나무를 섬기는 자들을 자네가 알고 있기는 어렵겠지. 역사에 제대로 기록된 전투도 아니고 말이야. 서재에 ‘나무를 섬기는 자들 전투 이야기’라고 내가 따로 자료를 모아 놨네. 그것을 보면 되지만, 일단 내가 간단히 얘기해 줌세. 그쪽에 앉게.”
도현은 또 다른 흔들의자에 몸을 실었다.
“먼저 나무를 섬기는 자들이란 특정 나무를 신앙의 대상으로 믿으며 그 나무가 있는 숲을 보호하려는 자들을 말하네. 이들은 벌목을 하러 들어오는 마을 사람을 해치기도 했고, 사냥꾼들을 잡아 의식의 제물로 바치기도 했어. 숲을 공포의 장소로 바꿔 놓았지.”
“그렇군요.”
“당시 잉글랜드는 가톨릭 사회였네. 나무를 우상숭배 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행위였지. 숲의 소유자이자 그 지역을 다스리던 귀족은 수십 명의 병사들을 토벌대로 보냈네. 사실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할 줄 알았던 거야. 하지만 나무를 섬기는 자들은 평범한 인간들이 아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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