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 디 임팩트 17권 10화
월터가 마치 손자에게 옛날이야기를 해 주듯 목소리를 낮추며 한껏 분위기를 잡았다.
“그들은 숲의 나무를 밧줄처럼 이용해 병사들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죽였다네. 그들의 손짓에 숲의 나무는 방패를 부수고 칼을 두 동강 냈지. 겁에 질린 병사들은 겨우 서너 명만이 살아남아서 그 지옥 같은 숲을 빠져나왔네.”
“죄송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던 겁니까, 아니면 절 재밌게 해 주시려고 과장을 하시는 겁니까?”
“과장이 아니야. 썩어 가는 옛 문헌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었으니까. 나무를 섬기는 자들 이야기는 너무 충격적이어서 당시 토벌이 끝난 뒤 모든 기록을 없애려 하기까지 했네. 그것을 추종하는 자들이 또다시 나타날까 봐서 말이네.”
이계를 다녀온 도현에게 사실 나무를 섬기는 자들 이야기는 그리 충격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월터에게는 놀랍다는 표정을 보여 줬다. 어쩌면 이런 반응을 기대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기이한 일이로군요. 숲의 나무들을 그렇게 마음대로 조종하다니요.”
도현의 놀라는 모습이 흡족했는지 월터는 낮게 웃었다.
“세상은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귀족은 전전긍긍했지. 사실 그는 큰 성을 가진 영주도 아니고 겨우 위세나 부릴 정도였으니까.”
“마치 그 귀족을 옆에서 보신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도현이 웃으며 묻자 월터는 흔들의자를 앞뒤로 움직였다.
“그래야 얘기가 재밌지 않나. 아무튼 그 귀족은 고민 끝에 숲을 파괴하기로 했네. 나무를 섬기는 자들이 그 숲에서 힘을 발휘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지.”
“파괴라면…… 혹시 불을 지른 겁니까?”
도현의 말에 월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흔들의자를 세웠다.
“숲에는 거대하고 오래된 나무들이 많았네. 귀족에게는 귀중한 자산이었지. 그것을 포기하는 건 그에게도 힘든 일이었을 거라고 보네. 하지만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기에 자신의 땅에서 사교도들이 활개 치고 다니는 걸 참을 수가 없었겠지. 3일간 숲이 불탔고, 인근에서 지원받은 병력까지 더해진 천 명이 넘는 토벌대가 숲 외곽에서 버티고 있다가 숲을 빠져나오는 자들을 남김없이 처단했네.”
“숲이 불타면서 그들이 가진 힘도 사라졌나 보군요.”
“그런 줄 알았네.”
“또 다른 일이 벌어졌습니까?”
도현은 오웬이 이 전투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 물어 보려다가 멈칫하며 월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숲 외곽에서 나무를 섬기는 자들을 없앤 토벌대는 불이 사그라지기를 기다렸다가 다음 날 숲을 수색했네. 혹시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사교도들을 끝까지 찾아내 없애 버리기 위해서 말일세. 그러던 중 숲 한가운데 기괴하게 비틀려 반쯤 타다 만 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네. 토벌대를 이끌던 귀족은 나무를 섬기는 자들이 우상숭배 하던 그 나무라 여기며 수십 명을 동원해 나무를 자르게 하고, 그것도 모자라 뿌리까지 뽑아 버렸네. 그 순간 뿌리가 수천마리의 뱀으로 변해 토벌대를 공격했지.”
들으면 들을수록 도현은 중세 시대가 아닌 이계가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마법과 몬스터가 존재하는 그쪽 세상에서나 일어날 법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놀랐나? 그래, 놀랄 수밖에 없겠지. 믿기지도 않고. 나 역시 나무를 섬기는 자들 사건을 조사하면서 여러 번 놀랐으니까.”
아흔 살이 넘은 원로 학자 월터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흔들의자를 움직였다.
흔들의자가 앞뒤로 움직이며 거실 나무 바닥과 부딪혔다. 수십 년간 같은 위치에서 흔들의자가 바닥을 자극했는지, 거실 바닥은 길게 색이 바래 있었다.
“나무의 뿌리가 뽑힌 곳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존재했네. 깊고 어두운 계단이 말이야. 수천 마리의 뱀을 간신히 죽인 토벌대는 그곳을 수색하다 나무를 섬기는 자들이 의식을 치렀던 지하 제단을 발견했다네. 그리고 그곳을 파괴했지.”
월터는 고개를 돌려 자신처럼 흔들의자를 앞뒤로 움직이며 말없이 듣고 있는 도현을 봤다.
“나무를 섬기는 자들과 관련된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났네. 긴 이야기가 지루하지 않았나 모르겠군.”
“전혀요. 흥미로웠습니다. 얘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오웬은 이 토벌 전투에서 어떤 역할을 했습니까?”
“그는 지하 제단을 조사했네.”
“지하 제단을요?”
흔들의자를 멈춘 도현은 월터를 응시했다.
오웬 브라운의 행적을 기록한 그의 자료철에는 그저 간단히 ‘귀족과 함께 참전했다.’라고만 쓰여 있었다. 다른 행적들과 비교해 다소 두루뭉술한 문구였는데, 알고 보니 상당한 역할을 한 것 같았다.
“토벌대를 지휘했던 귀족은 지하 제단을 조사해 그가 행한 일에 대한 정당성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싶었나 보더군. 그래서 지하 제단을 파괴하기 전, 그가 데리고 있는 사람들 중에 가장 믿을 만하고 학식이 뛰어난 오웬을 시켜 그곳을 조사하게 한 것 같아.”
“그렇군요.”
“말을 많이 했더니 목이 아프군. 하지만 즐거웠어.”
허리를 두드리며 흔들의자에서 일어난 월터는 서재 방향으로 느릿느릿 걸어갔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도현은 벌떡 일어나 월터의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
“선생님, 지하 제단에 나무를 섬기는 자들의 주술이나 주문 같은 게 남겨져 있었을까요?”
“아쉽게도 그것까지는 나도 모르겠네. 내가 자네에게 나무를 섬기는 자들 이야기를 그나마 이만큼이나 할 수 있었던 건, 귀족이 숲을 태우고 토벌을 하기 전 다른 귀족에게 도움을 청하는 서신을 보내서야. 그 서신에 귀족이 처한 상황이 고스란히 나와 있었거든.”
어쩐지 당시 상황을 너무도 생생히 알고 있었다.
“토벌전과 오웬이 지하 제단을 조사하게 된 이야기도 당시 토벌전에 참가한 또 다른 중세인의 일기장을 통해 일부 알게 된 것이고. 그러니 지하 제단이 어떻게 생겼는지 혹은 자네가 궁금해하는 주술이나 주문 같은 게 남겨져 있는지는 나도 알 도리가 없지. 어디 보자, 이쯤에 있을 텐데……. 여기 있군.”
월터는 ‘나무를 섬기는 자들의 전투 이야기’라는 자료철을 꺼내 도현에게 내밀었다.
“내가 기억력이 요즘 가물가물하다고 했지? 내가 빠트린 이야기들이 있을지 모르니 이것을 참고하게. 이럴 거면 내가 괜히 자네를 붙잡고 길게 이야기했나? 허허.”
“별말씀을요.”
자료를 받은 도현은 서재 한쪽에 걸려 있는 영국 전역이 그려진 지도를 응시했다.
“선생님, 나무를 섬기는 자들이 존재했던 그 숲, 제가 한번 가 보고 싶은데요. 혹시 그곳이 어딘지 아십니까?”
“내 이야기가 인상 깊었나 보군.”
월터는 도현이 바라보고 있는 지도로 다가갔다.
“예전에 나도 호기심이 생겨 그 숲을 직접 가 봤지. 숲은 많이 줄어들었고, 나무를 섬기는 자들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지만 말이야.”
도현이 옆으로 다가오자 지도를 보던 월터는 손가락으로 지도의 어딘가를 짚었다.
“이곳이네. 허버트리.”
허버트리로 찾아가는 방법을 간략하게 설명해 준 월터는 마른기침을 하며 비틀거렸다.
“선생님.”
도현은 급히 그를 부축했다. 깡마른 월터는 솜털처럼 가벼웠다.
월터는 도현에게 의지해 서재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가쁜 숨을 몰아쉰 그는 한참이 지나서야 숨소리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인생이란 게 끝이 보이면 지나온 시간이 참 아쉬워져.”
도현은 아흔 살이 넘은 원로 학자의 쓸쓸함이 묻어나는 말에 한동안 조용히 서 있다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그래도 서재에 가득한 선생님의 자료는 누군가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자네처럼 말인가?”
“네, 저처럼요.”
월터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오웬 브라운은 왜 조사하는 건가? 자네를 소개해 준 루이스는 머뭇거리면서 내 질문을 회피하던데.”
도현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얼마 전 제 친구의 삼촌이 오웬 브라운이 남긴 고서를 구입했다가 런던에서 도둑맞았습니다.”
“저런.”
“그 고서를 찾다 보니 자연히 오웬 브라운에 대해 관심이 생기더군요. 그래서 루이스의 소개로 선생님을 찾아온 것이고요.”
“그랬었군.”
월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서를 하루빨리 찾기를 바라네.”
“감사합니다.”
“바쁘지 않으면 저녁이나 먹고 갈 텐가? 몇 년 동안 혼자 먹었더니 적적하군.”
월터는 저녁을 준비하겠다며 불편한 몸을 이끌고 서재를 나갔다. 마음 같아서는 도현이 주방에 들어가 저녁을 만들고 싶었지만, 월터는 자신의 일에 남이 간섭하는 걸 싫어하는 것 같았다.
나무를 섬기는 자들의 전투 이야기를 다 읽은 도현은 서재에 있는 타원형의 커다란 창가로 걸어갔다.
어느새 날이 저물려고 했다.
‘필립이 노리는 게 나무를 섬기는 자들과 관련이 있을까?’
조지에게 붙잡힌 롤란드는 어떤 의식을 재현하는 데 필요한 주문을 찾기 위해 고서를 빼앗았다고 했다.
4백만 파운드짜리 가치를 지닌 그 주문.
반신반의했던 도현은 월터로부터 나무를 섬기는 자들 이야기를 들은 후, 실제로 필립이 찾는 게 그 주문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지하 제단을 조사한 게 오웬 브라운이니, 그가 자신의 책에 그것과 관련된 기록을 남겨 놨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다면 그런 의식을 왜 재현하려는 걸까?’
도현은 숲의 나무들을 조종했다는 나무를 섬기는 자들의 능력을 떠올리며 턱을 매만졌다.
‘초자연적인 힘이 그 의식과 연관된 걸까?’
여러 생각을 해 봤지만 확실한 건 없었다.
‘숲에 가 보자. 의식을 재현하려면 그 장소도 중요한 법이니, 어쩌면 필립이나 주문을 사려 한 재력가가 그곳에 나타날지도 몰라.’
쏴아아아.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퉤!”
입에 들어온 흙탕물을 뱉어 낸 필립은 자신의 몸만큼이나 큰 곡괭이를 휘둘러 몇 년 전 막아 놨던 구멍을 뚫으려 애썼다.
숲의 일부를 구성하는 구릉지의 경사면을 한참 파던 그는 숨이 찼는지 곡괭이를 던져 놓고 땅에 등을 기댔다.
우의를 입었지만 빗물이 그의 몸 곳곳을 적셨다.
얼굴이 흠뻑 젖은 그는 입을 벌려 빗물을 마신 후 다시 일어나 곡괭이를 들었다.
얼마나 튼튼히 막아 놨는지 파도 파도 끝이 없었다.
“내가 해 놨지만 참 잘해 놨네.”
하긴 이 정도 했으니 다른 사람들이 우연이라도 이곳을 찾지 못한 것이다.
“내가 이곳을 찾아낸 건 운이 좋았던 거야, 크크크.”
비를 맞으며 혼자 웃던 그는 곡괭이에 튄 돌 조각에 이마를 맞고서 휘청거렸다.
빗물과 다른 뭔가가 이마에서 흘러내려 입으로 스며들었다.
피였다.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한번 훑은 그는 곡괭이를 있는 힘껏 내리꽂았다.
퍽 소리와 함께 단단하게 막혀 있던 좁은 동굴의 입구가 일부 드러났다.
비를 맞으며 곡괭이질과 삽질을 한 필립은 가방을 등에 메고 좁은 동굴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동굴은 절대 서서는 통과할 수 없을 정도로 비좁고 낮았다. 이 통로로 한참을 기어 들어가야 파괴된 지하 제단이 나온다.
오웬 브라운의 고서가 든 가방을 등에 멘 그는 팔뚝으로 벌레를 짓이기며 엉금엉금 기어서 답답한 동굴을 계속 들어갔다.
플래시를 비추며 비가 내리는 어두운 숲을 조사하던 용주는 근처 바위 뒤에서 뭔가 튀어나오자 재빨리 플래시를 비췄다. 다람쥐로 보이는 동물이 저만치 도망가고 있었다.
“이거 아주 으스스하네…… 기분 나쁠 정도로.”
밤늦게 잉글랜드 북부에 위치한 허버트리라는 마을에 도착한 도현과 용주는 서로 갈라져서 마을에서 꽤 떨어진 울창한 숲을 조사하고 있었다.
월터가 말한 나무를 섬기는 자들의 숲이 바로 이곳이었다. 과거에 비해 숲이 작아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상당히 넓은 편이었다.
다람쥐 때문에 걸음을 멈춘 용주는 다시 플래시로 나무와 땅을 비추며 이동을 했다.
투투투투둑. 투드툭.
오는 길에 구입한 우의 위로 콩알처럼 두꺼운 빗방울이 쉴 새 없이 때렸다. 서늘한 한기가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그 자식이 이곳에 있을까? 잡히면 가만 안 둬야지. 쌍놈의 새끼.’
한국에 있는 관원들이 생각난 용주는 커다란 나무에 기대 주머니를 뒤적였다.
담배를 피우려면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적당히 막아 줄 공간이 필요했고, 이 나무는 그 역할을 해 줄 정도로 나뭇가지와 잎이 충분히 무성했다.
‘도현이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낯선 곳에서 느끼는 단절감과 외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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