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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임팩트-411화 (411/575)

[411] 디 임팩트 17권 11화

비가 내리는 깜깜한 숲에서 홀로 담배를 피우던 용주는 깊은 감정의 계곡에 빠져 외로움을 만끽하다 현실로 돌아왔다.

“후우.”

마지막 담배 연기를 뱉어 낸 그는 숲을 조사하기 위해 다시 움직이려다 발밑에서 난 바스락 소리에 멈칫했다.

‘이건…….’

용주는 몸을 숙여 발에 밟힌 구겨진 빈 담뱃갑을 손에 들었다.

킁킁대며 담뱃갑 안쪽 냄새를 맡은 그는 주위를 날카롭게 살폈다.

버려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담뱃갑 같았다. 한밤중에 비가 내리는 이 숲에 누군가 들어온 것이다.

용주는 도현에게 배운 신법을 발휘해 낮은 산처럼 보이는 구릉지 방향으로 바람처럼 이동했다.

플래시를 끈 채 어둠 속에서 사방을 둘러보던 용주는 경사진 구릉지를 빠르게 내려가다 수풀 사이에 방치된 곡괭이와 삽을 발견했다. 그 앞엔 작은 구멍이 존재했다.

플래시로 그 구멍을 살피던 용주는 비를 맞으며 도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현아, 여기 숲 왼쪽 구릉지 쪽인데, 수상한 작은 동굴 입구를 발견했어! 근데 누가 들어간 것 같다. 주변엔 방금 사용한 것 같은 곡괭이와 삽이 있고! 뭔가 느낌이 오는데!”

-알았어, 그쪽으로 바로 갈게.

“수풀이 많아서 바로 발견하기 어려울지도 몰라. 주위 큰 바위가 있으니까 그걸 찾아서 오면 될 거야. 나 먼저 들어갈게. 뒤따라와.”

-기다려.

“걱정 마. 내가 누구냐? 조 사범 아니냐. 늦으면 이 안에 들어간 놈을 놓칠 수도 있으니까, 먼저 들어간다.”

전화를 끊은 용주는 좁은 입구로 들어가기 전 플래시로 다시 한 번 내부를 살펴봤다. 누군가 기어서 안으로 들어간 흔적이 이곳저곳에 보였다.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빗속에 여길 들어갔는지 용주는 그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

“필립 그 녀석이었으면 좋겠어. 그래야 더 이상 고생 않고 물건을 회수할 테니까.”

혼잣말을 중얼거린 용주는 낮은 포복 자세로 좁은 구멍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금방 끝날 것 같았던 좁은 통로는 한참이나 이어졌다.

‘대체 얼마나 긴 거야?’

폐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견디지 못하고 중도에 비명을 지를 것 같았다.

통로 바닥은 차가웠지만 불편한 자세로 기어서 이동하는 용주의 몸은 열기로 무척 뜨거웠다.

통로를 따라 이리저리 방향을 꺾어 이동하던 용주는 급속도로 기울어진 경사로를 따라 눈썰매를 타듯 아래로 미끄러져 갔다.

“어어!”

저도 모르게 입에서 소리를 낸 용주는 잠시 후 커다란 물웅덩이에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물웅덩이는 상당히 깊어서 발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였다.

“푸후!”

입에 들어온 물을 밖으로 뿜어내며 수면 위로 떠오른 용주는 손에 든 플래시로 물웅덩이 주변을 살폈다.

또 다른 동굴이 보였다.

헤엄을 쳐 얼음처럼 차가운 물웅덩이를 빠져나온 용주는 그 동굴로 들어갔다.

“여긴 널찍하네.”

동굴의 폭과 높이는 사람이 걸어 다니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였다. 좁은 통로를 지나쳐 온 용주에게는 더욱 넓게 느껴졌다.

“대체 여긴 뭐 하는 데야?”

통로 중간중간에서 해골을 발견한 용주는 미간을 찌푸리다가 허리를 숙여 검을 주워 들었다.

중세 시대 검처럼 보이는 그 검은 녹이 잔뜩 슬고 날도 망가졌지만 호신용으로 사용하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걸리기만 해 봐라.”

녹슨 검을 좌우로 휘두른 용주는 지하 동굴을 계속 걸어 들어갔다.

초자연적인 신비주의에 푹 빠져 있던 필립은 몇 년 전, 나무를 섬기는 자들의 흔적을 찾아 허버트리의 숲에 왔었다.

몇 달을 조사한 끝에 그는 우연히 허물어진 구릉지 경사면에서 작은 동굴 하나를 발견했다.

그는 짐승의 굴처럼 보이는 그곳을 따라 무작정 들어갔고, 물웅덩이와 또 다른 동굴을 지나친 끝에 믿을 수 없게도 중세에 파괴된 지하 제단을 발견하게 됐다.

그때의 감동을 필립은 잊을 수가 없었다.

“내가 다시 왔다!”

몇 년 만에 다시 방문한 지하 제단이 있는 석실에서 그는 사자가 포효하듯 우렁차게 외쳤다.

원래 소심한 성격이었지만 몇 년 전 이곳을 발견한 이후 그는 굉장히 대범해졌다. 자신이 나무를 섬기는 자들의 마지막 후예라는 자부심에 도취된 것이다.

“주문을 가지고 왔어! 다시 의식이 시작되는 거야!”

필립은 몇 년 전에 가져다 놓은 수십 개의 촛불에 일일이 불을 붙였다. 어두웠던 석실이 은은하게 밝아졌다.

석실에 그려져 있던 그림과 주문은 중세 토벌대의 의해 남김없이 훼손됐고 중앙에 있는 커다란 제단 역시 수십 개의 돌 조각으로 변한 모습이었다.

심지어 해골도 여러 구가 존재했다.

발에 거치적거리는 해골을 걷어찬 그는 파괴된 제단 앞에 우뚝 섰다.

“세상은 아주 혼탁해졌어. 나무와 숲의 아름다움을 없앤 저들을 응징하기 위해서라도 내게 힘을 줘.”

필립은 신비로운 힘을 믿었다.

가방에서 염소의 피를 담은 팩을 꺼낸 그는 자신의 머리에 그 피를 부었다.

비릿한 피가 그의 머리를 적시고 발끝까지 흘러내렸다.

피투성이가 된 그는 오웬의 책을 꺼내 펼쳤다.

책 속엔 파괴되기 전 제단에 새겨져 있던 의식에 필요한 주문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었다.

흥분된 눈빛으로 심호흡을 몇 번 한 필립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지하의 나무는 세상으로 올라오라! 당신을 기다리는 종이 있나니! 짐승의 피와 나의 주문이 당신을 자유롭게 하리라! 어둠의 공간 속에 있는 포악한 성질의 나무여! 나의 부름에 응답한다면 당신의 힘을 나를 통해 드러내소서! 드러내소서! 베세다 리아마 포라스데 쿠툼바! 베세다 리아마 포라스데 쿠툼바!”

목이 터져라 주문을 외우며 의식을 치르던 필립은 석실로 누군가 들어오자 깜짝 놀라며 주문을 멈추고 그를 쳐다봤다.

웬 사내가 검을 들고 석실 입구에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 자식, 뭐 하는 거야 여기서! 미쳤냐? 왜 피를 뒤집어쓰고 있어.”

“거기 서! 다가오지 마!”

필립은 한 손에 오웬의 책을 들고 뒤로 주춤 물러났다.

“내 말 이해 못 하지? 한국말이니까. 어디 보자, 그래, 맞네. 너 필립이지? 이 망할 놈의 새끼.”

조지가 보내 준 필립의 사진이 있었다. 몇 번 봤기 때문에 피를 뒤집어쓰고 있어도 알 수 있었다.

용주는 촛불이 밝히고 있는 석실을 빠르게 훑었다.

“여기가 그곳인가 보네. 지하 제단 말이야.”

“누구냐!”

간단한 영어는 용주도 이해했다.

“내가 누구냐고? 너 때문에 비싼 항공료 내고 영국까지 온 사람이야. 어서 책 내놔, 미친 짓거리 하지 말고.”

용주가 검을 들고 저벅저벅 걸어오자 필립은 석실 구석진 곳까지 물러났다.

“한 권은 여기 있네.”

용주는 바닥에 놓여 있던 필립의 가방을 어깨에 멨다. 가방 안에는 삼촌이 빼앗겼던 두 권의 고서 중 한 권이 들어 있었다.

남은 한 권은 필립의 손에 있었다.

“피 묻은 손으로 자꾸 남의 책 만지지 말고 어서 내놔.”

“의식을 방해하지 마라!”

석실 벽까지 밀려난 필립은 용주에게 고함을 친 후 마지막 주문을 외우며 의식을 완성시켰다.

그러나 어떤 변화도 없었다. 석실은 고요했고 정체불명의 사내는 한심하다는 듯이 검을 들고 쳐다보고 있었다.

“할 것 다 했으면 어서 책 줘.”

“이, 이럴 리가 없는데. 나무를 섬기는 자들의 의식을 정확히 재현했는데.”

필립은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신비로운 힘이 그를 강하게 만들어 줄 줄 알았다.

당황하는 그의 복부를 용주가 발끝으로 찌르듯이 찼다. 가볍게 찬 듯했지만 맞은 필립은 쇠몽둥이로 맞은 것 같았다.

“커헉!”

침을 흘리며 쓰러진 그의 손에서 용주는 오웬의 고서를 낚아채듯 회수했다.

“아, 피 묻었네. 너 말이야, 이런 의식이 그렇게 좋으면 이계로 가. 거기 아주 판타스틱하거든.”

“채, 책 내놔. 다시 의식을 치러야겠어!”

실망감에 눈이 돌아간 필립이 벌떡 일어나 용주에게 달려들었다.

“까분다.”

번개 같은 용주의 주먹질에 얼굴이 획 돌아간 필립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의, 의식을 다시 치러야 해! 의식을 다시!”

비틀거리며 일어선 필립은 광기에 젖은 눈빛으로 재차 달려들었다. 마치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려는 사람 같았다.

“날 죽여!”

“정말 미쳤네.”

발로 필립의 머리를 걷어찬 용주는 석실 바닥에 굴러다니던 해골의 정강이뼈를 주워 들었다.

“여기서 희생당한 사람의 뼈 같은데, 이걸로 네놈을 아작 내 줄게. 이리 와!”

돌아서며 외치던 용주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녹색 안개가 필립의 전신을 휘감고 있었던 것이다.

“으하하하! 보았느냐! 나무의 신께서 내게 힘을 주고 있다! 크하하하!”

필립의 두 눈동자는 점점 짙은 녹색으로 변해 갔다.

‘설마 진짜 의식이 통한 거야?’

용주는 정강이뼈를 버리고 바닥에 내려놨던 중세 검을 집어 들었다.

“좋아하지 마, 자식아. 그런 잡스러운 기운보다 형이 수련한 기운이 훨씬 세니까.”

“이제 세상의 혼탁함을 내가 징벌해 주마! 나무를 섬기는 자의 이름으로 말이야.”

순식간에 녹색 안개는 사라졌고, 그 안에서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모한 필립이 나타났다.

“징벌은 공포를 의미한다, 흐흐흐.”

눈빛이 완전한 녹색으로 변한 필립이 손을 휘젓자 석실의 해골들이 일어나 용주를 공격했다.

“와, 놀랍네, 해골들.”

용주의 검이 풍차처럼 회전하자 달려들던 해골들이 박살이 나 사방팔방으로 뼛조각이 날아갔다.

“…….”

필립은 양손을 다시 휘저었다. 석실 벽에 지워졌던 그림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더니 그 안에 있던 온갖 꽃들이 용주를 향해 암기처럼 날아갔다.

팅팅팅팅팅.

용주는 피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고 마치 수련을 하듯 향기 나는 꽃 암기들을 일일이 검으로 쳐 냈다.

필립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떻게 네놈이!”

“계속해 봐. 뒤에 도현이 오면 너 그냥 죽는다. 걔는 무식한 녀석이라 단칼에 죽여 버리거든.”

필립은 기분이 아주 안 좋았다. 나무의 신에게 힘을 받았는데 검을 든 인간 하나를 죽이지 못하다니. 중세의 전설이 너무 과장된 건가 싶었다.

“이놈!”

양손으로 하늘을 떠받치는 시늉을 하자 석실 벽이 펑펑 소리를 내며 갈라지더니 그 속에서 거대한 나무뿌리들이 꾸역꾸역 밀려들어 왔다.

석실을 가득 메운 나무뿌리들이 해일처럼 용주를 덮쳤다.

이때만큼은 용주도 긴장이 됐다.

사실 태연한 척했지만 이런 초자연적인 현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검에 내공을 가득 주입한 그는 허리통만 한 두께를 가진 거대한 나무뿌리들을 검으로 베고 잘라 냈다.

퍽!

등을 가격당한 용주는 이를 악물고 검을 빗살처럼 뿌렸다. 호검술이 호랑이 형상을 만들며 주위를 포위한 나무뿌리들을 단번에 찢어발겼다.

생명력이 다한 나무뿌리들은 허깨비처럼 부서지며 공기 중으로 사라져 갔다.

허공으로 붕 떠오른 용주는 꿈틀거리는 또 다른 나무뿌리들을 다리처럼 밟으며 필립에게 접근했다.

“넌 죽었어! 이 새끼야!”

노한 호랑이처럼 달려드는 용주의 무시무시한 박력에 필립은 기가 꺾였다.

“왜 안 죽는 거야!”

필립은 괴성을 지르며 양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손가락이 뾰족한 나뭇가지로 변해 용주의 몸에 구멍을 내려 했다.

“에라잇!”

용주는 필립의 손가락 공격을 피한 뒤 눈을 질끈 감고 횡으로 검을 그었다. 목이 잘린 필립이 기괴한 표정으로 천천히 쓰러졌다.

쿠웅.

그 순간, 용주의 뒤를 쫓아오던 거대한 나무뿌리들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용주는 진지한 얼굴로 시체가 된 필립을 내려다봤다. 필립은 몸이 급속도로 말라 가더니 종국엔 모래처럼 부서져 버렸다. 고운 가루가 돼 버린 필립의 유해를 보며 용주는 손에 든 검을 바닥에 던졌다.

사람의 목숨을 취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검 끝에 진짜 사람 피를 묻혀 보니 검의 무게가 견딜 수 없이 무겁게 다가왔다.

“진짜 검이 이런 무게였구나.”

용주는 고개를 돌려 석실 입구를 바라봤다. 도현이 서 있었다.

말없이 다가온 도현은 용주가 버린 검을 집어 다시 용주의 손에 쥐여 줬다.

“다시 느껴 봐. 지금 이 감각을 잃으면 평생 후회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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