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2] 디 임팩트 17권 12화
용주는 손안에 검을 한동안 내려다보다가 손등에 핏줄이 보일 만큼 힘껏 움켜잡았다.
“엿 같은 새끼, 왜 의식을 치러서 내 손에 죽은 거야.”
“네가 죽이지 않았다면 내 손에 죽었을 거야.”
도현은 담담히 말하며 용주가 싸우다 떨어트린 가방 안을 살폈다.
오웬 브라운의 연구 기록 두 권이 손상되지 않고 들어 있었다.
가방을 멘 도현은 석실을 천천히 돌아봤다. 원로 학자 월터가 말해 준 중세 사건의 한복판에 서 있다는 게 약간은 믿기지 않았다.
‘이계가 아닌 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세상은 역시 알 수 없는 곳이야.’
“도현아, 가자!”
석실 입구에서 용주가 그를 불렀다. 검의 무게를 견딘 용주는 앞으로 급속도로 성장할 것이다.
석실 밖으로 나가려던 도현은 걸음을 멈췄다. 밤낮에 구애받지 않는 엄청난 시력을 갖춘 그는 촛불이 꺼진 어두운 석벽을 매의 눈으로 응시했다.
‘저건…….’
쉭 소리를 내며 공간을 순간적으로 단축한 도현이 갈라진 석벽 앞에 섰다.
“왜 그래?”
용주가 다가왔다.
“스톤이 있어.”
기쁜 얼굴로 도현이 소리치듯 말했다.
“뭐?”
깜짝 놀란 용주가 플래시로 갈라진 석벽 틈을 비췄다. 부서진 청동 상자 안에 야구공보다 약간 큰 스톤이 보관되어 있었다. 아마도 동굴에 석실을 만들면서 석벽 뒤에 숨겨 놓은 것 같았다.
“뭐야, 이게 왜 여기 있어?”
용주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스톤을 바라보던 도현은 고개를 돌려 파괴된 제단을 응시했다.
‘우연의 일치인가?’
스톤이 이곳에서 벌어지는 의식과 어떤 관련이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됐다.
‘차원 이동뿐만 아니라 다른 일에도 스톤의 에너지가 사용 될 수 있는 건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도현의 손에 용주가 스톤을 쥐여 줬다. 환한 빛이 나며 스톤의 에너지가 타투로 흡수됐다.
“용주야, 이번엔 박사님에게 드려야 하는데!”
생각지도 못한 용주의 행동에 도현은 당황하며 그를 쳐다봤다. 매번 스톤을 구할 때마다 도현 자신이 에너지를 흡수해서 조 박사에게 미안해하던 차였다.
“야, 우리가 고생해서 오웬의 책을 회수했으니까, 이 정도는 그냥 꿀꺽해도 돼. 삼촌도 이해하실 거야. 가자.”
이미 벌어진 일, 되돌릴 수는 없었다.
“용주야, 석실 밖에서 잠깐 기다려 봐.”
“왜?”
도현은 품에서 마법 주머니를 꺼내며 답했다.
“석벽 뒤에 스톤이 더 있을 수도 있잖아. 확인해 보려고.”
마법 주머니에서 세타이움 장검을 꺼낸 도현은 검에 내공을 주입했다. 강렬한 푸른 광채가 은색 검신에서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어두운 석실이 그 광채에 환해졌다.
“멋있네, 멋있어.”
용주의 말이 끝나자마자 석실 안에 검광이 회오리쳤다.
쿠쿠쿠쿵쿵쿵. 쿠쿵쿵.
돌이 잘리고 부서지는 격렬한 소리가 연이어 났다.
얼마 뒤 도현이 먼지를 뒤집어쓴 얼굴로 폐허로 변한 석실 안에서 걸어 나왔다.
“있어?”
“아니, 아까 그게 전부인가 봐.”
아쉽지만 더 이상의 스톤은 없었다.
석실과 조금 떨어진 통로에 앉아 있던 용주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얼른 나가자. 석실 무너지려 한다.”
“그래.”
원래 위태위태했던 오래된 석실이 도현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붕괴되려 했다.
동굴 통로를 따라 달리던 도현은 옆을 힐끔 쳐다봤다.
지상과 연결된 것 같은 돌계단이 보였다. 하지만 그 계단은 흙과 바위로 단단히 막혀 있었다.
오래전 토벌대는 저 계단을 통해 이곳으로 내려왔다가 조사를 한 후 봉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예상치 못한 좁은 출입구가 한 군데 더 있었다.
‘이곳만 막으면 다시 찾아오긴 힘들겠지?’
숨구멍처럼 만들어진 물웅덩이 위의 좁은 통로를 통해 외부로 빠져나온 도현은 통로 중간을 무너트렸다.
구릉지 전체를 포클레인으로 파내지 않는 한, 나무를 섬기는 자들의 지하 제단 흔적은 영영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비 봐라. 살벌하게 내린다.”
필립이 놔둔 곡괭이와 삽을 챙긴 용주는 도현을 돌아봤다.
“이제 이계에서 얼마나 지낼 수 있어?”
도현은 옷을 걷어 올려 황금빛으로 물든 타투를 내려다봤다. 타투에 수치화된 계기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경험상 추측은 해 볼 수 있었다.
“글쎄, 확실한 건 아니지만 짧으면 8개월, 길면 9개월 정도?”
원래 있던 타투의 에너지에 오늘 스톤에서 흡수한 에너지를 더했다.
“나쁘지 않네. 그 정도면 새 영지를 구하는 딘을 돕고 남는 시간에 검도 수련하고 금화까지 꽤 벌어 올 수 있겠어.”
어깨에 곡괭이와 삽을 걸친 용주는 구릉지를 내려가며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도현은 피식 웃다가 거센 비가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날도 이렇게 큰비가 왔지, 태선군.’
숲에서 비를 맞자, 몇 달 전 비 오는 밤 옥룡산에서 태선군과 혈투를 벌였던 일이 떠올랐다.
‘그는 어디서 폐관 수련을 하고 있을까?’
씨드를 통해 환골탈태한 것처럼 신체적인 모든 능력이 급상승하고 내공도 바다처럼 깊어진 도현은 검술까지 그때보다 발전해 있었다.
모든 면에서 몇 달 전 태선군의 능력치를 상회하고도 남았다. 그를 당혹케 했던 태선군의 패도적인 무공을 지금은 거뜬히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만나면 끝을 내 주겠어.’
조 박사는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빼앗겼던 오웬의 고서를 도현과 용주가 회수해 온 것이다.
“수고했네. 이게 다시 내 손에 들어올 거라고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말이야.”
“아닙니다. 이번 일은 용주가 해결한 거나 다름없습니다.”
조 박사는 거드름을 피우며 앉아 있는 조카를 쳐다봤다.
“이 녀석은 방해만 됐을 텐데.”
“삼촌, 섭섭하네요. 제가 그 책 때문에 목숨을 걸고 싸웠다니까요.”
“넌 과장이 심해.”
“삼촌을 위해 검에 피를 묻혔어요. 그 마음을 삼촌이 이해하실까 모르겠어요.”
용주는 입이 한 자나 나온 얼굴로 투덜댔다. 조 박사는 깁스를 하지 않은 오른손으로 조카의 귀를 잡아당겼다.
“농담이다, 이 녀석아. 내가 왜 모르겠어, 네 마음을.”
“아, 아파요.”
“고생했다.”
조카의 귓불을 놔준 조 박사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이 책들을 되찾은 건 기쁘지만, 그로 인해 네가 잘못됐다면 난 견딜 수 없었을 거다. 허버트리 숲의 지하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다니.”
조 박사는 중세 신비주의자들의 의식이 재현된 사실에 크게 놀란 상태였다. 자칫했으면 조카를 그 안에서 잃을 뻔했다.
“이깟 책은 네 목숨보다 중요하지 않아.”
“진심이세요? 아닌 것 같은데.”
용주가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자 조 박사는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걸리가 있는데, 한 잔씩 할까?”
“그건 또 어디서 사 오셨어요?”
“런던에 내가 잘 아는 한식 식당이 있다. 그쪽 사장에게 몇 병 보내 달라고 부탁했지.”
“그럼 그쪽에 가서 마셔요. 칼칼한 김치찌개도 간만에 먹고.”
“오늘은 휴업하는 날이다.”
삼촌의 말에 용주는 입맛을 다시며 냉장고에서 꺼낸 막걸리 병뚜껑을 열었다.
“에이, 하필 오늘이야.”
막걸리 두 병을 순식간에 비운 그들은 기분 좋게 웃고 떠들었다.
유리컵에 담긴 막걸리를 반쯤 비운 도현은 조 박사를 봤다. 팔에 깁스를 한 조 박사가 오래간만에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저어, 박사님.”
“응?”
“석실에 있던 스톤과 중세 의식이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까요?”
“왜, 자네에게는 그렇게 보였나?”
도현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스톤이니까요. 관심이 생기네요.”
“흠, 내일이나 얘기할까 싶었는데, 자네가 스톤 얘기를 먼저 꺼내니 이참에 얘기하는 게 좋겠지. 내 대답은 예스야.”
조 박사는 탁자 위에 있는 스톤을 집어 들었다. 도현이 지하 제단에서 챙겨 온 것이다.
“스톤이 어떻게 만들어졌을지 상상력을 부여해 보게. 자네는 이게 초고대 문명의 과학적 결실이라 보이는가?”
도현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틀렸네. 이건 초고대 문명의 과학적 결실이 아니야.”
“네? 하지만 차원 이동 장치를 가동시키는 에너지원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맞아요, 삼촌. 말이 이상하잖아요.”
용주는 새 막걸리병을 열면서 조 박사를 쳐다봤다.
“나도 처음엔 스톤이 초고대 문명의 고도로 진보된 기술이 창조해 낸 과학의 결정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며칠 전부터 그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어. 바로 도현이 해 준 말 때문에 말이다.”
“도현이가요?”
용주는 탁자 맞은편에 앉아 있는 도현을 응시했다.
“야, 너 무슨 말했냐?”
“아무것도……. 박사님, 전 스톤에 관해 어떤 말씀도 드린 게 없는데요.”
“아니, 틀림없이 했네. 자넨 내게 이계의 마법사들에 관해 얘기해 주지 않았나? 며칠 전에는 더욱 자세히 말해 줬지. 물론 내가 궁금해서 물어보긴 했지만 말이야.”
“그렇긴 하지만 그것과 스톤이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며칠 전 도현은 조 박사에게 그가 이계에서 경험한 마법사들과 그들의 마법에 관해 자세히 설명해 줬다.
얼음탑주부터 시작해 율리비어스, 리타, 심지어 자수정 속에 영혼이 갇혀 있는 락제프에 이르기까지.
“관련이 있지. 이 스톤은 과학이 아닌 마법의 힘이 작용한 물건이니까. 그런 생각을 확고히 하는 데 자네가 이계에서 보고 온 마법사들 이야기가 상당히 도움이 됐네. 그들이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지 간접적으로 알게 됐으니까.”
“삼촌, 무슨 황당한 말씀이세요. 차원 이동 장치는 기계인데 거기에 왜 마법이 들어가요. 안 맞잖아요?”
“시끄럽다. 네가 뭘 알아?”
조 박사의 핀잔에 용주가 볼멘소리를 냈다.
“상식이잖아요, 상식. 첨단 기계와 마법. 이 조합이 말이나 돼요?”
“그러니까 그동안 초고대 문명을 정확히 밝혀낼 수 없었던 거야. 과학과 마법을 분리시켜 접근했으니까.”
언성을 높인 조 박사는 도현과 용주를 둘러보며 한 자 한 자 끊어서 강조했다.
“초고대 문명은 기계와 마법이 공존하던 시대다. 여기 이 스톤은 초고대 시대의 뛰어난 마법사들이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기계장치를 위해 고안해 낸 마법석인 거야.”
용주는 삼촌을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니까 초고대 시대에는 마법사들이 막 활동하고 그랬다는 겁니까? 우리 지구에서요?”
“존재했던 건 분명해. 초고대 문명이 막을 내리기 전까지는. 그 증거가 여기 이 스톤이다. 이제는 마법석이라고 해야겠지.”
“이게 어떻게 증거가 됩니까?”
조 박사는 스톤을 흔들며 열정적으로 말을 이었다.
“이 돌은 평범한 돌이다. 성분 분석을 해도 지구상에서 발견되는 일반적인 돌과 다를 바가 없어. 특이한 광물이 아냐. 단 하나, 여기 표면에 도현의 타투와 똑같은 것이 새겨져 있을 뿐. 나는 이것이 초고대 시대의 마법사들이 창안한 마법진의 일종이라고 생각한다.”
“도현아, 아무래도 삼촌이 네 얘기에 너무 영향을 받으신 것 같다. 기계와 마법이라니.”
“이 녀석이!”
조 박사는 깁스한 팔을 움직여 용주의 뒤통수를 살짝 쳤다.
“그 어떤 과학적인 기술로도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낼 수는 없다. 마법이 아닌 이상. 난 율리비어스라는 마법사가 거대한 석조 건축물을 이용해 가공할 만한 에너지를 만든 이야기를 들었다. 거인의 섬을 침몰시킬 정도로 강력한 에너지를 말이다.”
도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 박사가 어떤 의미로 얘기하는지 이해가 된 것이다.
‘박사님은 율리비어스 얘기에 결정적으로 흔들리셨군.’
유리컵에 든 막걸리를 비운 도현은 조 박사의 손에 들린 스톤을 응시했다.
그도 사실 문양이 새겨진 스톤이 어떻게 해서 신비로운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건지 여러 생각을 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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